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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카는 이제 그만! 스케치북 들고 떠나는 여행

카메라 대신 연필을 쓰다 보면 진짜 여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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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없이는 하루가 불안하다는 사람이 있다. 또, 여행을 떠날 때 카메라가 없으면 초조하다는 사람이 있다. 남는 건 사진 밖에 없다고?! 글쎄, 과연 그럴까? 정작 사진 찍기 바빠서 제대로 본 여행 풍경은 집에 돌아와 사진으로 복습한 기억은 없나? 당신에게 묻고 싶다.

언젠가 남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들의 행동 중 하나가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음식 사진을 남기는 모습이라고 했다. 지금은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음식이 나오면 젓가락 대신 카메라 셔터가 먼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전 국민이 포토그래퍼가 되는 날까지 이런 상황들은 지속될 것인가? 음식은 식으면 제 맛이 아니거늘, 왜 젓가락을 먼저 들면 안 되는 것인 가! 그럴 거면 아예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다른 한 손에는 포크를 잡는 게 낫지 않을까. 여행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사람들, 우선 찍고 본다. 눈으로 보고 찍는 게 아니라, 렌즈로 찍고 화면으로 풍경을 감상한다. 내 마음에 와 닿는 풍광을 담기보다 사진이 잘 나올 것 같은 곳에 포커스를 맞추기 급급하다. 그래도 남는 건, 사진이라고? 여행을 안 했으니 남는 게 사진 뿐인 거겠지.




첫째, 아바타를 만들어라

그럼 여기서 질문이 하나 나올 테지. 카메라 없이 여행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과연 있냐고? 카메라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처음부터 카메라 없이 여행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정말 없을까? 동화도 쓰고 그래픽 노블도 쓰는 작가 김한민은 여행을 떠나면 언제나 가방이 가벼운데, 카메라 대신 연필과 스케치북만 들고 떠나기 때문이다. “미술을 전공한 작가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김 작가가 조금 서운할 지 모른다.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시각적 기억력이 감퇴한다. 그래서 찍으면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는 김한민 작가. 그는 아예 대놓고 『그림 여행을 권함』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림을 그리며 즐기는 여행이 무엇이 그리 다르다고, ‘그림 여행’을 권할까. 김한민 작가는 우선 자신의 어머니부터 설득에 들어갔다.

“나에게 그림 여행이란, 대가들의 명화를 찾아 다니는 미술관 투어가 아니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낙서라도 직접 끼적이며 다니는 여행, 그림을 그리면서 긴장을 풀고 숨을 고르는 여행, 여행 중 어느 날엔가는 과감히 사진기를 숙소에 팽개치고 포켓용 스케치북과 연필만 주머니에 찔러 넣고 홀연히 문을 나서는 여행.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림 여행이라 부른다.” (『그림 여행을 권함』 p.10)
김한민 작가의 어머니는 그림과 관계된 전공도 직업도 가져 본 적 없는, 그림과 무관하게 오십 평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아들을 믿고 권유를 받아들여 마침내 스케치북과 연필을 챙겨 여행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못한다고, 귀찮다며 주저했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뒤 ‘이렇게 그림으로 남기기를 정말 잘했다.”며 아들에게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김한민 작가가 어머니에게 한 조언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좋아하는 동물을 가지고 최대한 단순한 자신의 아바타를 만들 것.’ 어머니는 아들이 그려준 ‘양과 개의 중간쯤 되는 얼굴에 파마 머리를 얹은’ 아바타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동창들과 함께 떠난 이집트 여행에서 틈틈이 연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트렁크를 끌고 있는 자신의 아바타를 그리며 이렇게 메모를 남겼다. “갈 때보다 올 때는 시간도 짧았지만 가족과 만나는 기쁨에 더욱 짧았는지 모르겠다. 여행은 미지의 세계의 새로운 발견인 동시에 자신과 주위의 새로운 발견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면 이런 메모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 전의 기분을 기록하고, 아바타를 그려 보고, 공항에서 누군가의 뒷모습도 그려보고, 카페에 앉아 커피잔을 또는 건너편 건물을 그려 봤다면, 일단 그림 여행은 성공이다. 더 안 그려도 된다. 물론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누가 권하지 않아도 더 그리고 싶어지리라 믿는다.” (『그림 여행을 권함』 p.78)

둘째, 글을 곁들어라

여행에서 한참 고생 중일 때는 그림 그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김한민 작가에게 힌트를 물으니, “주로 숙소에서 자기 전에, 카페나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기다리는 동안에 그림을 그리는 게 좋다”고 말했다. 모두 기억에 의존에 그리는 것이다. 사진을 찍고 그것을 따라 그리는 건, 감흥이 없다. 그런 건 집에서나 그리자. 그림 솜씨가 부족하다고 해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간혹 일기 한 페이지를 쓰더라도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데, 답답한 노릇이다. 그림을 그리다 형편 없는 실력에 한숨이 나온다면 여백에 글을 곁들여도 좋다. 김한민 작가는 “글은 휑해 보이는 공간에 재미를 주는 효과도 있지만 그림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당시의 감정을 기록할 수 잇기 때문에 곧잘 그림 위에 글을 쓰곤 한다”고 말한다.


잘 그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때는 현존하는 최고의 드로잉 작가 중 한 명인 ‘슈리글리’를 떠올린단다. 김한민 작가는 그의 그림은 “못 그려서 매력적”이란다. 관건은 잘 그리는 게 아니라, 멋대로, 생긴대로, 되는대로 그리는 것. 김 작가는 미술학원을 끊으려고 다짐하는 사람들에게 귓속말을 한다. “그림. 괜히 어설프게 ‘배우면’ 그리는 범 까먹는 게 더 어려워. 그냥 맘대로 그려. 닥치는 대로.”

“일상과 다른 속도로 진행되는 여행의 시간만큼 그림 그리기에 어울리는 시간도 없다. 그림 그리기는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더 자세히 보게 되고 자세히 보다 보니 그동안 놓치고 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셋째, 나를 위한 그림을 그려라

닥치는 대로 마음대로 그리고 싶은데, 그것조차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면 드로잉 작가 오은정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아도 좋다. ‘온정’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있는 오은정 작가는 미대 시절, 우연히 떠난 긴 여행에서 즐겁게 그리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동호회 ‘미술과 사람들’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지금 시작하는 드로잉』에 이어 최근 『지금 시작하는 여행 스케치』를 펴낸 오은정은 “일상도 여행이다. 사진보다 정확한 것은 그림이다”라며, ‘그리는 여행’의 즐거움에 말한다. 여행 스케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시작하는 여행 스케치』에 나오는 조언들을 참고해 보자. 연필을 꺼내지 않고서는 못 배길지도 모른다. 우선 스케치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또 실전에서 응용할 수 있는 채색, 미술도구 사용법 등이 소개돼 있어 친절한 가이드가 되어준다.


지난 5월, 출간을 기념해 독자들과 마주한 자리에서 오은정 작가는 “카메라는 툭툭 셔터만 누르면 되지만 그림은 아날로그다. 되게 귀찮을 수 있다. 뭐 하나 그리려면 자세히 봐야 하니까. 하지만 사진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기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여행 스케치’”라고 말했다. 오은정 작가는 홍콩 여행 중에 본 야자수나무 이야기를 꺼냈다. 너무 곧고 민둥민둥 털도 없는 모습이라 마치 시멘트 같았단다. 이틀 정도 야자수나무를 마주치다 나무를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스케치북 위에 야자수나무를 그리고 ‘이게 시멘트?’라고 말풍선을 그려 넣었다. 며칠 뒤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자연산 야자수나무’가 맞았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오은정 작가에게 홍콩의 야자수나무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오 작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심도 있게 생각을 해본 거다. 만약 나무를 그냥 카메라로 찍었으면 이런 생각까지는 안 했을 것이다. 어떤 장면을 열 장 찍을 시간에 하나를 그린 거다. 집에 와서 이런 그림들을 보면 웃음이 난다”며,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는 게 여행 스케치”라고 말했다.

또한 여행은 기록을 대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여행하다 보면 사진 촬영이 불가능할 때가 종종 있다. 이럴 때 종이를 펼쳐 그림을 그리면, 사진보다 훨씬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사진 촬영이 가능해도 사진은 내가 어떤 것을 인상 깊게 보았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여행 후 스케치들을 바라보면 그 당시 어떤 점이 인상 깊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여행에선 분명 익명성을 갖고 자유로움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낯설고 외로울 때 여행 스케치는 충실한 친구가 되어준다. 이 세상에 가치 있는 것들이 고통을 동반하듯 무엇을 했는가가 아닌 어떤 생각을 했는가에 중점을 두는 여행 스케치에는 그 이상의 보상이 반드시 따른다. 우선 여행 스케치는 낯선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연결해준다. 처음 보는 풍경과 사람들 틈에서 무섭기도 하고 소외된 기분이 들 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괜스레 친근한 마음이 들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 가서 길모퉁이에 앉아 드로잉 북을 꺼내 들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몰려오거나 호기심을 갖는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대화가 오고 간다. (『지금 시작하는 여행 스케치』, p.25)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듯이, 그림 역시 ‘기억하고 싶어서’ ‘나누고 싶어서’ 그리는 것이다. 오은정 작가는 “지극히 나를 위한 그림을 그려라. 완전히 나를 위한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필만으로는 단조롭다면 색연필로 색칠을 하면 훨씬 그럴듯한 그림이 나온다. 수채화는 도구가 많이 필요하니 색연필이나 마커 등을 활용하는 게 좋다.


꼭 그림을 그려야겠다거나 보이는 것을 옮겨야겠다는 강박관념은 버리자. 그 장소, 그 시간, 그 계절, 그 사람이 지금 주고 있는 느낌을 나름대로 낙서해보는 거다. 오 작가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종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드로잉에 활용할 만한 문구들이 있다”고 말한다. 완벽한 구상을 하지 말고 의식의 흐름을 따르듯 그냥 내키는 대로 낙서하고 찢고 오리고 붙여보면, 나만이 간직할 수 있는 여행 스케치를 할 수 있다. 또 나를 위한 그림이 때로는 남을 위한 그림이 되기도 한다. 여행 중 그린 드로잉을 여행지에서 인연이 된 사람에게 선물을 해보자. 이것보다 더 큰 소중한 선물이 있을까. 하는 이나 받는 이 모두에게 평생의 기억이 된다.


오은정 작가가 제안하는 ‘여행 스케치’ 즐기기



일상 풍경 낯설게 그리기

매일 보던 집, 사무실, 작업실 풍경을 그림으로 옮기면 자못 낯설게 느껴진다. 별것 아니게 여기던 주변 이미지를 종이 위에 새롭게 재탄생 시켜보자. 매일 걷던 동네를 색다르게 그려보는 것도 좋다. 글자나 이미지가 프린트되어 있는 종이 위에 스케치를 곁들이면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공항이나 터미널 가보기

바빠서 여행을 갈 수 없을 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 드로잉 북 한 권 들고 공항이나 터미널을 가보자. 공항과 터미널은 공간이다. 하지만 그 공간만 그려서는 안 되고 공기를 관찰해야 한다. 그 장소가 주는 공기, 즉 분위기 말이다. 운이 좋다면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얘깃거리도 발견할 수 있다. 비행기, 복잡한 공간, 빽빽한 사람들만 보인다면 당신은 아직 그곳의 공기를 느끼지 못한 거다. 공기 안에 숨겨져서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발견해보라. 돌아오는 길은 정말로 여행을 다녀온 것마냥 마음이 무언가로 그득하기 채워져 있을 것이다.

차표, 영수증, 전단지 활용하기

여행을 다니면 갖가지 흔적이 남는다. 예를 들어 차표, 선물 봉투, 영수증, 전단지, 과자 종이 등등. 영수증이나 차표는 날짜와 시간이 기입되어 있어서 기록하기에도 좋다. 여행 중에 또는 여행을 마친 뒤 그런 쪼가리를 버리지 말고 활용해보자. 오려서 붙여보고 영수증 위에 낙서도 해보자. 의외로 멋스러운 예술작품이 나올 수 있다.

사진과 메모로 새롭게 여행 스케치를 해보자

현장에서 직접 그리지 않아도 여행에서 돌아온 뒤 추억을 정리해볼 수 있다. 순간의 기록과 여행 후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도 비교해볼 수 있다. 사진 촬영한 것이나 글 쓴 것을 참고하여 새롭게 여행 스케치를 해보자. 정말 소중했던 여행인데 세월이 흐른 뒤,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깝지 않은가. 시간을 조금만 더 투자해서 그림으로 추억을 정리해보면 훗날 보물이 될 수 있다.

가장 가벼우면서도 가치 있는 선물하기

드로잉 북 한 권이면 수십 장의 선물을 넣고 다니는 거나 다름없다. 종이 한 장에 불과하던 것이 엄청난 선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필체와 감정과 느낌이 고스란히 담긴 드로잉을 여행 중 만난 친구로부터 받았다면 당신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이것이야말로 가장 가벼우면서도 가치 있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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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엄지혜


eumji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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