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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게릭,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한 남자가 있었다. 예의 바른 신사였다 누구나 놀랄 만한 2,130 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운 위대한 야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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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선수로서 활동한 기간의 3분의 2이상 동안 베이브 루스의 그늘 아래에서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루 게릭은 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타점 생산능력을 가진 타자들 중의 한 명인 것은 틀림없다. 1930년부터 32년까지 세 시즌 동안 509 타점을 기록했다. 풀타임 출장을 한 총 14번의 시즌 동안 게릭은 13 시즌 연속 100 타점 이상을 기록했다. 1931년 작성한 184 타점은 2008년 시즌이 종료된 지금까지도 아메리칸 리그 역대 타점 1위의 기록이며, 리그 전체를 통해서도 핵 윌슨이 1930년에 기록한 191 타점에 이은 역대 2위의 기록이다.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점을 기록한 6개의 시즌 기록 중 3개의 기록이 루 게릭의 것이다.

헨리 루이스 게릭(Henry Louis Gehrig)은 미국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한 전설적인 야구 선수이다. 1925년 팀 내 주전 1루수를 대신 해 경기에 출장한 이후 14년 동안 무려 2,130 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워 ‘철마’(The Iron Horse)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기록은 56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12년 연속 3할대 타율과 5번의 40홈런 시즌을 기록할 정도로 정교하고 힘있는 타격을 보여줬다. 하지만 선수 시절 후반기인 1939년에 근육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으로 은퇴하였다. 2년 뒤 서른 일곱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훗날 이 병은 그의 이름을 따서 ‘루 게릭 병’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1939년 7월 4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제목의 유명한 은퇴 연설을 남겼다. 이 날 양키스 구단은 그의 등번호 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였는데 이는 메이저리그 야구 최초의 영구 결번이다.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다

1903년 6월 19일, 루 게릭은 가난한 독일 이민자 가정인 하인리히 게릭과 크리스티나 팩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몸무게가 무려 6.4 kg에 달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게릭은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을 하면서도 운동만은 꾸준히 하였다. 축구, 미식축구, 농구, 체조, 야구 등 거의 모든 운동을 하였고 뛰어난 운동실력을 보여 주었다. 투타에서 고등학교 학생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보이자 뉴욕 양키스 스카우터 폴 크리첼은 그를 가리켜 “결코 놓칠 수 없는 선수”라고 말하고 뉴욕 양키스로 입단 시키는데 성공했다.

게릭은 처음 두 시즌 동안 주로 대타로 나서며 많은 출장기회를 얻지 못했다. 1925년이 되어서야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루 게릭의 잠재력은 1926년이 되자 드디어 폭발했다. 시즌 기록은 0.313의 타율, 47개의 2루타, 아메리칸 리그 1위의 기록인 20개의 3루타, 그리고 16홈런과 112개의 타점이었다.

1927년 루 게릭은 타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 중의 하나를 보내게 되었다. 그 해 218개의 안타를 치면서 0.373의 타율, 52개의 2루타, 18개의 3루타, 47개의 홈런과 175 타점을 기록했고, 장타율은 무려 0.765에 이르렀다. 117개의 장타는 베이브 루스가 1921년 기록한 119개에 이은 역대 2번째 기록이고, 447 총루타는 1921년 기록한 베이브 루스의 457루타와 1922년 로저스 혼스비가 기록한 450루타에 이은 역대 3번째 기록이다.

1927년 루 게릭의 엄청난 타격 행진에 힘입어 양키스는 110승 44패를 기록했다. 팀은 아메리칸 리그 및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였다.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에 뽑혔지만, 루 게릭의 1927년 시즌에 대해 베이브 루스의 60홈런과 그 당시 뉴욕 양키스의 타선이 리그 전체를 압도할 정도로 강력했던 (훗날 대부분의 선수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선수로 이루어진) ‘살인 타선’(Murderer's Row)인 이유를 들어 그 가치를 절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야구 선수로서 활동한 기간의 3분의 2이상 동안 베이브 루스의 그늘 아래에서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루 게릭은 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타점 생산능력을 가진 타자들 중의 한 명인 것은 틀림없다. 1930년부터 32년까지 세 시즌 동안 509 타점을 기록했다. 풀타임 출장을 한 총 14번의 시즌 동안 게릭은 13 시즌 연속 100 타점 이상을 기록했다. 1931년 작성한 184 타점은 2008년 시즌이 종료된 지금까지도 아메리칸 리그 역대 타점 1위의 기록이며, 리그 전체를 통해서도 핵 윌슨이 1930년에 기록한 191 타점에 이은 역대 2위의 기록이다.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점을 기록한 6개의 시즌 기록 중 3개의 기록이 루 게릭의 것이다.


2,130 경기 연속 출장

연속경기출장의 기록은 1925년 6월 1일, 루 게릭이 유격수 폴 ‘피 위’ 웨닝거를 대신해 대타로 경기에 나가면서 시작됐다. 다음날 6월 2일, 당시 양키스 감독이었던 밀러 허긴스는 주전 1루수 월리 핍 대신에 게릭을 선발 출장 명단에 넣었다. 이날 윌리 핍 대신 출장한 루 게릭은 2안타를 쳐 내면서 주전 1루수 자리를 따내는 계기가 되었다. 14년이 지나 게릭은 2,130 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다. 가끔 대타로 나오는 것으로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이어가긴 했더라도, 연속 경기 출장을 위해 종종 부상도 감내해야 했다. 게릭의 2,130 경기 연속 출장 기록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내야수 칼 립켄 주니어가 1995년 9월 6일 그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풀타임 14번째 시즌이었던 1938년 시즌 기록은 타율이 13년 만에 2할대(0.295)로 떨어졌다. 1939년 뉴욕 양키스 스프링캠프가 시작되었을 때, 이전까지 보여주었던 타격에서의 무시무시했던 힘은 현격히 줄어 들어든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주루 플레이에도 영향을 미쳐서 스프링캠프가 열린 세인트 피터스브루의 알 랭 필드에서 쓰러지기까지도 했다. 스프링캠프가 끝나갈 무렵까지도 게릭은 홈런은 고사하고 안타 하나 기록할 수 없었다.

1939년 시즌이 시작할 무렵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스피드 또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4월이 끝나갈 무렵, 그의 타격 기록은 역대 최악이었는데 0.143의 타율과 1 타점이었다. 게릭은 공을 열심히 때려냈다. 28타수에서 삼진은 겨우 1번 당했을 뿐이다. 감독 조 매카시는 게릭을 주전이 아닌 후보 선수로 돌리라고 지시하는 양키스 구단진과 싸우고 있었다. 게릭은 평범한 수비를 하나 하는 데도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4월 30일, 게릭은 약체 워싱턴 세너터스(지금의 미네소타 트윈스)에 출전하며 자신의 2,130번째 연속출장 경기에 나왔다. 이 날 게릭은 4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게릭은 송구를 받기 위해 1루 베이스로 몸을 거의 끌다시피 해서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투수 머피는 “루, 멋진 플레이였어” 라고 격려를 했다. 그러나 게릭은 평범한 플레이에 격려를 보내는 감독과 동료들의 모습을 보고 더 이상의 연속 출장은 무의미함을 느끼며 은퇴를 결심했다.

5월 2일, 타이거스와의 디트로이트 원정 경기 시작 전, 루 게릭은 매카시 감독에게 “감독님, 오늘은 벤치에 있을게요.”라고 말했다. 감독은 “그게 팀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면”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언제라도 다시 경기에 출장하고 싶으면 말해라, 1루는 항상 너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 눈물을 보이고 있던 루 게릭에게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팬들은 기립박수를 보내주었다. 게릭은 그로부터 몇 주 더 지나도록 팀의 주장으로 선수단에 머물렀지만 다시는 야구를 할 수 없었다.

루 게릭의 몸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자 메이요 클리닉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결국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라는 진단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루 게릭의 서른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병의 예후는 암담했다. 급격한 전신 마비의 증상이 늘어날 것이고 음식을 삼키거나 대화하는데 지장이 심하고 향후 3년을 못 넘길 것이라는 것이었다. 엘리너와 게릭은 ALS의 원인은 불명이며, 고통도 없고, 전염되는 병은 아니지만 생명에 위협적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중추신경계가 파손이 된 것이지만 정신만은 끝까지 남게 될 것이라는.

게릭은 종종 엘리너에게 편지를 쓰곤 했는데 진단 결과를 들은 후 곧바로 편지를 썼다.

“나쁜 소식이야, 쉽게 이야기해서 영구적 소아마비와 같은 측색 경화증이래. 고칠 방법이 없대… 이 경우는 거의 그렇다고 하네. 아마도 일종의 병원균때문이라지… 그게 주변사람들에게 전염된다고는 듣질 못했어… 지금과 같은 상태가 유지될 가능성은 반반이래. 10년이나 15년 목발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 야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뉴욕 양키스는 루 게릭의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워싱턴 세네터스와의 경기가 있는 미국 독립 기념일인 1939년 7월 4일, 경기장에서 은퇴식이 거행됐다. 고위 인사들이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참석했으며, 소위 ‘살인 타선’이라고 잘 알려진 1927년 월드 시리즈를 제패할 당시의 양키스 선수들도 행사장에 나왔다. 뉴욕 시장은 게릭을 가리켜 “가장 위대한 스포츠 선수 정신과 시민 정신을 가진 표상”이라고 칭했다.

양키스 감독인 조 매카시는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연신 참으면서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는 것처럼 루 게릭의 곁에 가까이 선 채 말을 시작했다. “이제껏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으며, 스포츠 선수며, 자랑스러운 시민의 모범 사례”라고 말을 마친 뒤 울음을 참지 못했다.

뉴욕 양키스는 루 게릭의 유니폼 등번호인 4번을 영구 결번 처리하였는데, 메이저리그 야구 역사상 최초로 영구 결번이 되는 영예였다. 팀은 게릭의 서명이 새겨진 은제 트로피를 증정했다. 트로피 앞 부분에는 뉴욕 타임스의 편집자 존 키어런이 쓴 헌정시가 적혀 있었다. 트로피의 값은 단지 5달러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트로피는 게릭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소장품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트로피는 지금 명예의 전당에 전시되어 있다.

루 게릭은 청중들에게 마지막으로 은퇴 소감을 말했다.

“팬 여러분, 지난 2주 동안 제가 앓고 있는 질병에 관해서 들으셨겠지요. 하지만 오늘, 저는 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운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야구장에서 17년이나 뛰었고 팬 여러분들로부터 친절과 격려만을 받았습니다. (중략) 당신을 가르치고 키우기 위해 평생을 바친 부모님이 계시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힘의 근원이 항상 되어주고 당신이 가능하다고 꿈꿨던 것보다 더 많은 용기가 생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내가 있다면 그것은 제가 아는 최고의 일입니다. 저는 고통스러운 질병을 앓고 있지만,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말씀드리면서 연설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중들은 거의 2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다. 게릭은 마이크에서 입이 떨어질 정도로 심하게 휘청거렸고, 손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냈다. 구장 내 밴드가 <I Love You Truly〉를 연주하고 청중들이 “루, 우리 모두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노래 가사를 바꿔서 따라 부르는 동안, 베이브 루스는 그에게 다가가 꼭 안아주었다. 뉴욕 타임스는 다음날 보도에서 “이제껏 야구장에서 보았던 광경들 중 가장 가슴뭉클 했던 장면들 중의 하나”라고 언급했다.

1939년 시즌이 종료된 12월, 명예의 전당 헌액자를 결정하는 전미야구기자협회는 루 게릭을 유예기간 없이 곧바로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이는 일반적으로 선수 은퇴 후 몇 년의 유예기간을 가진 뒤 헌액이 되는 기존과 다른 특별한 경우였다. 루 게릭은 이로써 36세라는 역대 최연소로 명예의 전당 헌액자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루 게릭은 은퇴 직후 다음과 같이 썼다.

절망하거나 내가 처한 현실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
점점 심각해져만 가는 몸상태와 싸워가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버텨낼 것이다. 차후에 죽음이 다가와도 묵묵히 받아들일 것이며 더 나은 상황이 올거라는 희망도 품을 것이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1939년 10월 뉴욕 시장인 라 과디아(La Guardia)로부터 10년 임기의 뉴욕 시 가석방 위원회 감독관 직책을 임명 받아 숨을 거두기 한달 전까지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다. 1941년 6월 2일 밤 10시, 루 게릭은 뉴욕 브롱크스 필드스턴지구 델라필드가 5204번지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 소식을 듣자 마자 베이브 루스는 곧장 게릭의 집으로 달려갔다. 뉴욕 시장은 뉴욕의 모든 관청에서 조기를 게양할 것을 명했으며, 전국의 모든 메이저리그 야구장에도 조기가 게양이 되었다. 리버데일에 위치한 성공회 교회에서 장례식을 마친 뒤, 6월 4일 게릭의 유해는 화장을 한 뒤 뉴욕 발할라에 있는 켄시코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부인 엘리너 게릭은 루 게릭이 죽은 다음, 남은 평생을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 연구를 지원하는 일에 바쳤다.

뉴욕 양키스는 1941년 7월 6일 양키 스타디움 외야 중앙쪽에 루 게릭을 기리는 헌정비를 세웠다.

한 남자가 있었다. 예의 바른 신사였다. 누구나 놀랄 만한 2,130 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운 이 위대한 야구 선수는 영원히 기록되리.
[출처: 위키백과,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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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경진

지구에 춤을 추러 온 화성인입니다. 여행과 영화 감상을 좋아하며, 책을 사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잘 읽지는 못하고 쌓아만 둡니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춤을 추는 게 삶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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