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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잉 넛, 한국 펑크의 산파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내말들어. 우리는 달려야해 거짓에 싸워야해 말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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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분노’와 ‘웃음’은 그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풍자였고 해학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항상 노발대발하기만 했다면, 늘 심각했다면, 다시 말해 펑크 원론에만 헌신했다면 결코 대중의 시선을 당기지 못했을 것이다. 꽤나 엄숙한 펑크 담론을 그들 식의 사소한 일상의 스토리로 바꾸면서 거둔 의미 있는 성과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말달리자」에 마구 고함을 질러대고 마냥 흔들어대며 흥겨움을 만끽할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펑크에 대한 어색함은 사라졌다.

1990년대 말,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인디 뮤지션들이 점차 더 많은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펑크 록 밴드 크라잉 넛은 그러한 흐름의 효시였다고도 할 수 있죠. 한국 펑크의 상징적인 곡으로 꼽히는 ‘말달리자’를 들고 나타난 이들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이번 주에 소개해드릴 명반은 크라잉 넛의 첫 번째 앨범, <말달리자>입니다.


크라잉 넛 <말달리자> 1998

지금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만 1990년대 중후반부터 국내 음악계에는 인디라는 이름의 비주류 흐름이 잉태되어, 새것을 갈망하는 음악 팬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서울의 홍대와 신촌을 중심으로 발아한 인디 신의 초기 음악 스타일은 펑크(punk)란 이름의 서구 록이었다. 그 무렵 한 인디관계자는 “마치 하루에 서너 개 펑크 밴드들이 결성되는 듯한 느낌”이라며 의아해했다. 크라잉 넛의 이 앨범에도 「펑크 걸」이란 제목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1976년생 동갑내기이자 초등학교 동창인 이상혁, 이상면, 한경록, 박윤식(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김인수는 아직 정식 멤버가 아니었다)으로 이뤄진 그룹 크라잉 넛은 ‘신종 수입품’인 펑크가 과연 어떤 음악인지, 또 어떻게 가공해야 국산화될 수 있는 건지를 일반에게 알려준 존재였다. 펑크의 메카가 된 홍대의 작은 클럽 <드럭>에서 1996년부터 내공을 다진 뒤 옴니버스 앨범인 <아워 네이션 1집>에 「말달리자」 「펑크 걸」로 참여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들은 마침내 1998년 첫 독집 앨범을 내고 거친 펑크폭풍을 주도하게 된다.

당시 미국 음악계에서 그린 데이(Green Day), 오프스프링(Offspring), 랜시드(Rancid) 등 펑크 록이 인기차트를 석권하자, 미국 음악흐름에 유달리 민감한 국내에서도 그 생소하고 괴상한 음악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종이 매체에서는 펑크에 대한 소개와 분석에 열을 올렸고 유행에 재빠른 여성지에선 벌써 펑크 패션이 특집으로 게재되고 있었다. 음악 쪽에서는 ‘어떤 밴드가’ ‘어떤 곡으로’ 펑크의 한국 상륙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가 물밑 관심사로 등장했다. 어찌되었든 시작자의 프리미엄이 대단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밴드는 ‘크라잉 넛’이었고 그리고 곡은 「말달리자」였다. 이 곡은, 그룹의 공식 1집인 이 앨범에 다시 녹음해 수록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파괴력이 증폭되었다. 1990년대 서구 록에서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가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처럼 크라잉 넛의 대표작이 아닌 ‘한국 펑크의 시그니처 송’으로 승격하게된 것이다. 훗날 우리의 대중음악역사를 정리하게 될 때, 한국의 인디를 논할 때 대중적 효시의 특전을 누리며, 자동적으로 언급될 음악은 「말달리자」로 결론 나게 되었다.

‘이러다가 늙는 거지 그땔 위해 일해야 돼. 모든 것은 막혀있어 우리에겐 힘이 없지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내말들어. 우리는 달려야해 거짓에 싸워야해 말달리자!’

20대 젊은이들만 이 곡에 괴성을 질러댄 게 아니었다. 나중에는 넥타이 부대들도 곡에 맞춰 악을 쓰며 ‘닥쳐! 닥쳐!’를 연발했다. 당연히 그들 라이브 무대의 넘버원 레퍼토리로 사랑받았다. 그것은 실로 몇 년 전만해도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펑크의 한국 땅 연착륙이었다. 서태지가 ‘우리나라에서 랩은 안돼!’라는 인식을 전복한 것처럼 크라잉 넛도 「말달리자」로 ‘한국에서 펑크가 될까?’라는 회의를 닥치게 했다. 이 곡은 심지어 CF에도 등장했다.

크라잉 넛은 생소하기만 했던 펑크를 제대로 해석했다. 수입품에 대한 ‘예의’를 발휘하듯 일단 펑크의 형식에 충실히 봉사하고 있으며, 펑크의 정신이라고 할 세상에 대한 조소와 독설을 양껏 뿌려댔다. ‘꺼져라 껍데기! 집어쳐라, 거짓말! 남아 있는 나의 묘비명아. 나를 한 번 더 일으켜줘. 우리들의 무덤엔 풀 한 포기 없겠지만, 걱정 따윈 필요 없지 상관치 않아…’하는 「묘비명」은 분노의 격발이었고, 펑크의 전설인 클래시의 ‘3코드’와 ‘미니말리즘’을 숨김없이 추종하고 있다.

이것뿐이었다면 크라잉 넛에게 갈채가 주어질 리 없다. 그들은 한 가지를 더했다. 고전 펑크의 내외적 강령을 준수하면서도 이들은 자발적으로 샛길을 택한 것이었다. 「갈매기」, 「검은 새」, 「싸나이」, 「성냥팔이 소녀」 등은 웃음을 짓게 만들 뿐 아니라 펑크의 몰아치는 속도감을 낮춘 미드 템포의 곡들이었다. 「묘비명」 바로 다음에 「갈매기」를 배치한 것에서 완급을 조절하고 있음을 즉각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스트레이트하게 화만 낸 것이 아니라 적당히 재미도 입힌 것이었다. 이 재미는 크라잉 넛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물론 그 재미는 말장난 개그가 아닌 블랙 코미디였다. 과거의 유랑 서커스단이 제공하는 페이소스에서 이미지를 개발했다고 할까. 이들의 2집 앨범 제목은 <서커스 매직 유랑단>이었다. 그들 말에 따르면 ‘음악을 듣고 있을 때는 화가 나는데, 곰곰이 가사를 생각해보면 웃기고 음악을 들을 때는 웃기는데, 곰곰이 생각하면 화가 나는 음악’이었다.

그들의 ‘분노’와 ‘웃음’은 그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풍자였고 해학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항상 노발대발하기만 했다면, 늘 심각했다면, 다시 말해 펑크 원론에만 헌신했다면 결코 대중의 시선을 당기지 못했을 것이다. 꽤나 엄숙한 펑크 담론을 그들 식의 사소한 일상의 스토리로 바꾸면서 거둔 의미 있는 성과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말달리자」에 마구 고함을 질러대고 마냥 흔들어대며 흥겨움을 만끽할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펑크에 대한 어색함은 사라졌다.

재미의 구현이 성공을 곁눈질한 것인지, 한국적 수용을 위한 방법적 선택이었는지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영리한 것만은 분명했다. 홍대 주변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저예산으로 후다닥 녹음해, 펑크 제작의 기본 방식인 ‘로우 파이’의 가능성을 터준 부분도 이 앨범의 공이다.

펑크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나아가 그것을 대중의 인기품목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앨범. 성공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사이비 인디 즉 주류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IMF로 사람들은 희망이 없는데 그것을 말하는 크라잉 넛은 성공을 거듭하고 있다’는 야유와 질시를 받았지만 그것은 불가피한 대가였다. 그렇다고 해서 ‘펑크의 산파’라는 그들의 업적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었다.

글/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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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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