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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이름으로! - 브람스, 독일 레퀴엠 op.45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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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브람스는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한(恨)이 깊었을 겁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빈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고 전해집니다. 짐작컨대 술도 많이 마셨을 겁니다. 그렇게 몇 주 동안 슬픔에 빠져 있던 브람스가 같은 해 4월에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악보 하나를 꺼냅니다. 그것이 바로 <독일 레퀴엠 op.45>의 출발점입니다.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66) [출처: 위키피디아]

브람스는 32살 때였던 1865년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때 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지내고 있었지요. 음악가로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모친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는 황급히 고향 함부르크로 달려갔지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다음이었습니다. 아마도 몹시 망연자실했을 겁니다.

2월 4일자 ‘내 인생의 클래식 101(//ch.yes24.com/Article/View/21413)’에서도 썼듯이, 브람스의 아버지인 요한 야코프 브람스는 가난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습니다. 어머니 크리스티아네 니센은 그 남편보다 17살 연상이었던, 역시나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게다가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래서 브람스의 어린 시절은 고달팠습니다. 천근만근처럼 삶을 옭죄어왔던 가난, 가장으로서의 능력이 젬병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나이가 많은데다 장애인이기까지 했던 어머니. 그것이 브람스가 보낸 유소년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브람스는 10대 초반부터 이 술집 저 술집을 떠돌며 아르바이트 연주를 전전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브람스의 성품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유소년기의 체험은 한 인간의 구조를 이루는 기초공사와도 같지요. 그것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끈질기게 힘을 발휘합니다. 브람스의 음악이 보여주는 우울함과 깊은 침잠의 이면에,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내면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유추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렇습니다. 클라라를 향한 연모 때문에 독신을 고집했다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보다는 해소될 길 없는 가난, 그로 인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불화(두 사람은 결국 별거했지요)를 목격해야 했던 브람스의 기질적 선택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브람스는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한(恨)이 깊었을 겁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빈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고 전해집니다. 짐작컨대 술도 많이 마셨을 겁니다. 그렇게 몇 주 동안 슬픔에 빠져 있던 브람스가 같은 해 4월에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악보 하나를 꺼냅니다. 그것이 바로 <독일 레퀴엠 op.45>의 출발점입니다.

브람스가 꺼내든 것은 스승이자 선배였던 슈만이 세상을 떠난 1856년 무렵부터 작곡을 시작했던 미완성 악보 <독일 레퀴엠>이었지요. 미완성이라고 해봤자 사실상 운만 띄워놓은 악보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독일 레퀴엠>은 모두 7곡(악장)입니다. 한데 당시에 브람스가 꺼냈던 악보는 제 2곡만 작곡된 상태였지요. 그래서 브람스가 슈만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독일 레퀴엠>을 썼다는 ‘설’은 설득력 있는 것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보다 분명한 사실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브람스가 이 곡의 작업을 재개했다는 점입니다. 브람스는 이듬해에 모두 6곡(악장)으로 이뤄진 <독일 레퀴엠>을 작곡해 1867년에 그중 세 곡을, 1868년에 여섯 곡을 모두 초연합니다.

한데 뭔가 허전했던 모양입니다. 브람스는 한 곡을 더 작곡합니다. 여섯 곡의 초연을 끝낸 다음에 첨가했던 곡이 바로 제 5곡입니다. 소프라노 독창이 전면에 나서고 합창이 은근하게 뒤를 받치는, <독일 레퀴엠> 전곡 중에서 가장 온화하고 아름다운 곡입니다. 적어도 이 곡에 대해서만큼은 “브람스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생각하며 썼다”는 설이 설득력을 갖습니다. 특히 이사야서 66장 7절을 가사로 삼고 있는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라는 대목에 이르면 더욱 그렇습니다.

음악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1825~1904)는 브람스와 만년에 가깝게 지냈던 친구였지요.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책세상)라는 유명한 저작이 국내에도 번역ㆍ출간돼 있습니다. 옮긴이 이미경은 이 책의 해제에서 한슬리크가 브람스를 어떻게 평했는지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슬리크는) 브람스의 작품이 갖고 있는 밀도 높은, 지적인 작품성을 인정했다. 무엇보다 브람스가 슈만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같은 책을 참조해 조금 더 설명을 이어가 보지요. 한슬리크는 브람스가 자신에게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 <왈츠 op.39>를 헌정하자 매우 기분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착실하고 과묵한 브람스, 순수한 슈만의 제자, 북독일풍의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 프로테스탄트, 슈만처럼 비세속적인 사나이.” 자, 한슬리크는 슈만과 브람스로 이어지는 “가장 내밀한 세계로 침잠하는 음악의 세계”를 옹호했던 비평가입니다. 반면에 독일 낭만주의의 또 하나의 흐름인 바그너풍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판을 퍼부었지요.

한슬리크가 브람스 음악의 요체로 평했던 ‘내면으로의 침잠’을 <독일 레퀴엠>만큼 잘 보여주는 음악도 드뭅니다. 애초에 ‘레퀴엠’은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에서 연주되는 교회용 음악이지요. 가사는 대개 라틴어입니다. 하지만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은 연주회용으로 작곡됐고 가사도 독일어로 이뤄졌습니다. 구상에서 완성까지 거의 10년이 걸렸고, 어머니의 죽음이 전곡을 완성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악은 소프라노와 바리톤의 독창, 혼성4부 합창, 그리고 관현악 반주로 이뤄져 있지요. 듣는 입장에서 보자면 관건은 역시 노랫말입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가사를 잘 음미하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좀 무모한 짓인지도 모르겠지만, 전곡 가사를 다 올려놓겠습니다. 이 곡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가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곡은 저음이 강조된 연주가 아주 느리게 흘러나오면서 시작합니다. ‘매우 천천히, 표정을 가지고’라는 지시어가 머리에 붙어 있지요. 관현악에 이어 합창이 천천히 울려 퍼집니다.

Selig sind, die da Leid tragen /denn sie sollen getrostet werden.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장 4절)

Die mit Tranen saen, /werden mit Freuden ernten. /Sie gehen hin und weinen /und tragen edlen Samen, /und kommen mit Freuden /und bringen ihre Garben.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귀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시편 126편 5~6절)
2곡에서도 합창과 관현악만 등장합니다. 독창자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습니다. ‘천천히, 행진곡풍으로’라는 지시어가 붙어 있지요. 말하자면 장송행진곡입니다. 서주에서부터 느릿한 장송의 발걸음이 느껴집니다. 비장하고 엄숙하지요. 약간 공포스러운 느낌의 악구들도 등장합니다. 그러다가 중반부에 이르러 환하게 분위기 반전이 이뤄집니다. 하지만 다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라는 가사로 돌아오면서 원래의 분위기를 재현하지요. 이어서 음악이 점점 강하게 고조되면서 단호하고 힘찬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Denn alles Fleisch, es ist wie Gras /und alle Herrlichkeit des Menschen /wie des Grases Blumen. /Das Gras ist verdorret /und die Blume abgefallen.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도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

So seid nun geduldig, liebe Bruder, /bis auf die Zukunft des Herrn. /Siehe, ein Ackermann wartet /auf die kostliche Frucht der Erde /und ist geduldig daruber, /bis er empfahe den Morgenregen und Abendregen. /So seid geduldig. 그러니 참으라, 형제들아, /주의 강림까지.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으라. (야고보서 5장 7절)

Denn alles Fleisch es ist wie Gras /und alle Herrlichkeit des Menschen /wie des Grases Blumen. /Das Gras ist verdorret /und die Blume abgefallen. /Aber des Herrn Wort bleibet in Ewigkeit.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도다. /그러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베드로전서 1장 24~25절)
3곡은 바리톤 독창으로 문을 엽니다. 매우 비통한 느낌을 풍기지요. 이어서 합창이 같은 가사를 이어 받습니다. 탄식과 체념, 아울러 신을 향한 귀의의 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는 가사와 함께 바리톤이 확신에 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올바른 사람의 영혼이 주님의 손에 있으니 /어떤 고통도 그들에게 닿지 않으리라”에서 그 신념이 절정을 이루지요. 환희의 느낌으로 충만한 합창과 팀파니의 연타가 어우러져 마지막 방점을 찍습니다.

Herr, lehre doch mich, /da( ) ein Ende mit haben muss, /und mein Leben ein Ziel hat, /und ich davon muss. /Siehe, meine Tage sind /einer Hand breit vor Dir, /und mein Leben ist wie nichts vor Dir.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하여금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보라,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Ach, wie gar nichts sind alle Menschen, /die doch so sicher leben. /Sie gehen daher wie ein Schemen, /und machen daher wie ein Schemen, /Unruhe; sie sammeln und wissen nicht, /wer es kriegen wird. /Nun Herr, wes soll ich mich trosten? /Ich hoffe auf Dich.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나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노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겠나이까?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39편 4~7절)

Der Gerechten Seelen sind in Gottes Hand /und keine Qual ruhret sie an. 올바른 사람의 영혼이 주님의 손에 있으니 /어떤 고통도 그들에게 닿지 않으리라. (잠언 3장 1절)
4곡은 환하게 문을 엽니다. 독창자 없이 합창만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연주시간이 6분이 채 되지 않는, <독일 레퀴엠>에서 가장 짧은 악장이지요. 전곡에서 율동감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악장이기도 합니다. 부드러운 관현악이, 특히 호른이 음향이 천국의 따사로움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Wie lieblich sind Deine Wohnungen, /Herr Zebaoth! /Meine Seele verlanget und sehnet sich /nach den Vorhofen des Herrn; /Mein Leib und Seele freuen sich /in dem lebendigen Gott. /Wohl denen, die in Deinem Hause wohnen, /die loben Dich immerdar.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전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에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84편 1~2절, 4절)
5곡은 앞서 말했듯이 가장 마지막에 작곡된, 소프라노 독창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악장입니다. 전편에 걸쳐 인간적인 위로의 감정이 가득합니다.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도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악장이 될 것 같습니다.

(소프라노 독창) Ihr habt nun Traurigkeit; /aber ich will euch wiedersehen, /und euer Herz soll sich freuen, /und eure Freude soll niemand von euch nehmen.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요한복음 16장 22절)

(합창) Ich will euch trosten, /wie einen seine Mutter trostet.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이사야 66장 13절)

(소프라노 독창) Ich habe eine kleine Zeit /Muhe und Arbeit gehabt /und habe gro( )en Trost gefunden. 내가 잠시 수고한 걸 /너희가 보았으나 /나는 큰 휴식을 얻었노라. (집회서 51장 35절)

(합창) Ich will euch trosten.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6곡은 음악적으로 가장 풍성한 악장입니다. 합창이 “이 땅에 영원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노래하면서 막을 올리는데, 화음이 풍요롭고 아름답습니다. 이어서 바리톤 독창이 예언자의 목소리로 울려 나오고, 합창이 그 뒤를 화음으로 떠받칩니다. 이어서 바리톤이 “마지막 나팔 소리”를 강조하면서 확신에 찬 노래를 부르는 순간, 음악은 강렬하게 고조됩니다. 위안과 불안, 온화함과 격렬함이 교차하고 템포의 완급도 선명하게 변화합니다. 신의 분노와 심판을 웅장하게 표출해내는, 가장 드라마틱한 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합창) Denn wir haben hie keine bleibende Statt, /sondern die zukunftige suchen wir. 이 땅에 영원한 도성이 없고/오직 장차 올 것을 우리가 찾나니. (히브리서 13장 14절)

(바리톤과 합창) Siehe, ich sage euch ein Geheimnis: /Wir werden nicht alle entschlafen, /wir werden aber alle verwandelt werden; /und dasselbige plotzlich in einem Augenblick, /zu der Zeit der letzten Posaune.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 소리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합창) Denn es wird die Posaune schallen /und die Toten werden auferstehen unverweslich; /und wir werden verwandelt werden. 나팔 소리가 남에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 살고 우리도 변하리라.
(바리톤) Dann wird erfullet werden das Wort, das geschrieben steht. 기록된 말씀에 응하리라.
(합창) Der Tod ist verschlungen in den Sieg, /Tod, wo ist dein Stachel! /Holle, wo ist dein Sieg!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 54~55절)

Herr, Du bist wurdig /zu nehmen Preis und Ehre und Kraft, /denn Du hast alle Dinge erschaffen, /und durch Deinen Willen haben sie das Wesen und sind geschaffen.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
7곡은 첼로의 낮은 선율로 문을 엽니다. 곧바로 소프라노 합창이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노래한 다음, 남성 합창이 따라 붙습니다. 6곡에서 드러났던 광포한 분위기와 달리, 차분하고 안정적인 악상들이 펼쳐지는 악장입니다. 합창과 관현악으로만 이뤄져 있는데, 장엄하면서도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돕니다.

Selig sind die Toten, /die in dem Herrn sterben, /von nun an. /Ja der Geist spricht, /das sie ruhen von ihrer Arbeit; /denn ihre Werke folgen ihnen nach.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가 행한 일이 따름이라. (요한계시록 14장 13절)
p.s. 독일어 가사에 우물라우트(umlaut)를 표기하지 못한 점,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브루노 발터(Bruno Walter)ㆍ뉴욕 필하모닉ㆍ웨스트민스터 합창단/1954년/Sony

모노 녹음이지만 지금 들어도 음질이 크게 불편하지 않다. 발터는 드라마를 극대화시키기는 쪽보다는 잔잔하고 편안한 방향으로 음악을 이끈다. 세상을 떠난 자의 영혼을 위무한다는 측면이 두드러지는 연주라고 할 수 있다. 1곡에서는 시적인 분위기마저 풍긴다. 3곡에서 바리톤 조지 런던의 가창은 조금 아쉽다. 예컨대 피셔 디스카우에 견준다면, 가사의 정확한 전달과 적절한 표현력이란 측면에서 한수 아래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5곡에 등장하는 소프라노 이름가르트 제프리트의 청아한 목소리로 보상받을 수 있다. 혹자는 이 녹음이 밋밋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과도하게 음향을 뽑아올리는 연주를 마다하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명연이다.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ㆍ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1961년/EMI

많은 이들이 클렘페러는 템포를 느리게 설정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독일 레퀴엠>에서의 클렘페러는 결코 느리지 않다. 앞서 언급한 발터와 달리, 음악 속의 드라마를 한껏 끌어올리는 연주다. 강약과 완급의 대비가 뚜렷하다. 특히 6곡에서 보여주는 분노와 심판의 형상화는 듣는 이를 두려움의 감정으로 몰아갈 만큼 광포하다. 소프라노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와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두 명의 걸출한 성악가들이 들려주는 독창도 빼어나다. 5곡에서 들려오는 슈바르츠코프의 목소리는 서정적이면서도 품위가 넘친다. 피셔 디스카우가 6곡에서 보여주는 감정의 상승적 고양, 점차 흥분으로 내달려가는 표현력도 두말할 필요가 없는 절창이다.


카라얀(Herbert von Karajan)ㆍ베를린 필하모닉ㆍ빈 악우협회 합창단/1964년/DG

카라얀은 생전에 <독일 레퀴엠>을 모두 7차례 녹음했다. 모두 들을 만한 연주다. 그중에서도 특히 호평을 받는 것은 두 종류다. 하나는 소프라노 바바라 헨드릭스와 바리톤 호세 반담이 포진한 1983년 녹음이다. 또 하나는 오늘 추천하는 1964년도 녹음, 소프라노 군둘라 야노비츠와 바리톤 에버하르트 베흐터가 포진한 레코딩이다. 템포는 약간 느리다. 종교적인 엄숙함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적인 서정미가 가득한, 음악적 정감을 빼어나게 연출하고 있는 수작이다. 특히 5곡에서 들려오는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짜릿하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인상적인 목소리가 불편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런 의구심이 들 법도 하다. 이것이 과연 ‘레퀴엠’에 어울리는 가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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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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