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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을 관음하다

원룸인, 그들만의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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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경계벽 건설 기준을 찾아보니 아파트는 철근 콘크리트 두께 15cm 이상, 다가구와 단독주택은 10cm 이상. 고시원과 원룸은 기준이 없다. 관음하고 관음될 수밖에 없는 사이. 이토록 밀접한 우리는 단 한 번도 인사를 나누지 않고 헤어진다.


원룸에 사는 이들에게는 이런 규칙이 있다. 이웃과 마주치지 않게 유의 혹은 배려할 것. 가령 외출하려고 현관에 있으면 이웃도 외출 준비 중인 걸 어렴풋이 소리로 알 수 있다. 신발장 문 여는 소리, 신발을 바닥에 탁 내려놓는 소리, 신발 신고 콩콩 찧는 소리. 그러면 잠깐 멈칫하고 선택의 귀로에 선다. 여기서 문 여는 타이밍을 조절하지 않는다면 이웃과 문 앞이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칠 것이다. 그때 어색한 웃음을 띤 채 인사를 해야 할까? 아니면 모르는 체해야 할까? 아는 체한다고 불편할 건 없지만 선뜻 아는 체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소리,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난 후에야 현관을 나선다. 한 집에 1년 혹은 2년을 살면서 이웃과 대면한 적은 거의 없다. 대면한들 굳이 아는 체로 이어지지 않는다. 특히나 임시의 삶을 사는 미혼에게는 익명이 편하다.

하지만 익명이라는 이름으로 깊숙이 이웃의 삶에 개입되게 된다. 원룸이나 오피스텔이란 곳이 다른 건축보다 허술하다보니 방음이 잘 안 되고 그래서 옆집에서 들리는 소음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해에는 오피스텔 옆 호에 젊은 남녀가 동거했다. 혈기왕성한 청춘들은 내가 자는 시간이 되면 섹스를 했다. 추측하건대 그들 또한 내 집에서 들리는 생활소음을 통해 내가 출퇴근 하는 시간, TV 끄고 자는 시간을 알고 있으리라. 내 집의 소음이 그들에게 들리듯 그들의 소음 또한 내게 들릴 거라는 걸 알기에, 내 수면 시간에 맞춰 욕정을 해결하는. 하~ 2단 3단의 추측, 억측인 걸까? 어쨌든 나는 얼굴 한번 안 보고도 암묵적 합의가 이뤄졌다고 본다.

또 어느 해에는 딱 봐도 예쁜 여자가 옆집에 살았는데(예쁘다 추측하는 건 늘 또각또각 잘 관리된 구두 굽 소리로 추측한 것이다) 이곳엔 가끔 중년의 남자가 찾아 들었다(중년의 남자 목소리로 판단한 것이다). 남자가 방문할 때면 격한 신음소리가 들렸는데 나중으로 갈수록 살림 박살내는 소리와 욕설이 들렸다. 어떤 때에는 119에 신고해야 하나 안절부절할 정도로 심하게 싸웠다. 그러던 어느 날 휭~하니 이사가버렸고.

또 어느 해에는 그 좁은 오피스텔에 중년의 부부가 살았는데 거의 외출하는 일 없이 꼬박 방안에서만 지내는 듯 보였다. 삼시 세끼 밥도 꼬박 해먹는지 때 되면 씽크대 쪽에서 부산한 소리가 났다. 여름엔 주로 문을 열어놓고 지내는데 지나가다 슬쩍 보면 남자는 늘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여자는 청소를 했다. 나 혼자 소설 쓰기로는 남편의 사업이 망해 이곳으로 이사 온 게 아닐까. 아주 가끔 늦은 밤 여자의 곡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그들 또한 나에 대해 추측할지도 모른다. 평일에도 집에 있는 걸 보니 직장 다니는 건 아닌가 보다, 낮에 외출했다가 밤늦게 들어오니 뭘 하는 여자인가, 복장이나 외모로 봐서 밤업소는 아닌데 뭐 그런 상상을 하지 않았을까.

익명의 이웃과 나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나 끈끈하다. 싸우는 소리가 나면 걱정되고, 제때 끼니 차려 먹는 것에 안심한다. 자기 속 얘기 잘 안 하는 과묵한 친구보다 벽 하나 사이에 둔 그네들의 속사정에 더 밝게 되는 것이다.

문득 경계벽 건설 기준을 찾아보니 아파트는 철근 콘크리트 두께 15cm 이상, 다가구와 단독주택은 10cm 이상. 고시원과 원룸은 기준이 없다. 관음하고 관음될 수밖에 없는 사이. 이토록 밀접한 우리는 단 한 번도 인사를 나누지 않고 헤어진다. 어디선가 익명으로 부디 잘 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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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 서울 김지현 저 | 네시간
방송작가 특유의 객관성 있는 담담한 어조로 ‘도시, 서울 살이’의 다양한 모습을 현장성 있게 그리고 있다. 마치 나래이션을 듣는 듯한 느낌은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자신을 타인화하여 감정을 한 꺼풀 걷어낸 단조롭고 관조적인 감성도 매력적이다. 여행과 지리적 공간, 풍광이나 맛집 등을 찾아다니는 표피적인 도시 즐기기에만 국한하지 않고,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사소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서울의 지도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노선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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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현

1975년생, 14년차 방송작가, 2년 전세 계약이 만료될 때마다 서울을 뜰 생각을 하지만 19년째 유예하고 있는 중견 서울생활자다. 요리와 정리정돈을 잘하고 맥주, 씨네큐브, 수영장, 효자동을 좋아한다. 게스트하우스, 똠얌꿍 식당, 독신자 맨션처럼 실천 가능성 없는 사업을 자주 구상하며 그나마 가장 오래 하고 있는 일이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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