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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누나 -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봄비처럼 따스한 눈물, 모든 아픔과 희망을 위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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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흔들린다. 자전거를 타고 오는 한강변에서 바람이 세차게 부는 걸 보니 오늘은 마구 흔들려 보는 것도 꽤 괜찮지 않을까. 그의 시집을 곱씹으며 책장을 넘기다 보니 바람은 차갑게 불지만 왠지 마음은 더 따뜻하다. 조급해하지 않겠다. 흔들려도 괜찮다. 짜증내거나 불만스럽다면 참지 않아도 좋다. 좀더 솔직하게, 오늘을 대면하련다.

#1_삭막한 서울지하철에서 말랑말랑한 시인예찬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선다. 노량진에서 여의도까지, 멀지 않은 거리라 가벼운 산보 나가는 마음으로 회사를 향한다. 겨우내 귀를 앗아갈 듯한 동장군의 위엄 앞에 무릎을 꿇고 대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녔는데, 지하철 안 풍경은 갈수록 내 마음을 씁쓸하게 했다. 열 사람 중 아홉은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을 들여다 보고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모자란 잠을 청하고 있었기에. 마침 손에 쥐고 있던 함민복의 시집에는 이러한 서울 지하철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어서 새삼 흥미로웠다.

2
전철 안에 의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 귀에 청진기를 끼고 있었다
위장을 눌러보고 갈빗대를 두드려보고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옛 의술을 접고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손가락 두개로 스마트하게
전파 그물을 기우며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었다
수평의 깊이를 넓히고 있었다
(p.86, 「서울 지하철에 놀라다」 중에서)
이렇듯 그의 시는 평범한 일상의 현장에서 시작된다. ‘영혼의 무게 달아주며’ 달리는 영구차를 타고 가면서, 현금지급기 앞에서 본 열쇠를 주렁주렁 매단 아저씨를 보면서, 그리고 ‘죽은 시계를 손목에 차고 수은전지를 갈러 가는 길’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그의 시가 참 좋다. 대개 시를 보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의 시는 어렵지 않다. 보통 사람들에게 친숙한 일상에서 시작하여 평범한 단어로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를 펼쳐낸다. “빠름 빠름 빠름”을 외쳐대는 세상에서 빠르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서 좋다. 효율을 강조하는 딱딱하기만 한 세상에 말랑말랑한 힘을 노래해서 좋다. 무엇보다 과하지 않은, 소박하지만 진득하게 깊이가 있는 그의 생각과 표현이 참 좋다.

8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인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에도 그만의 시가 가득 담겨 있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표시하다 보니 시집 전체에 포스트잇이 가득하다. 시집이 덕지덕지 지저분해질수록 내 마음은 더 말랑말랑해진다.


#2_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는 이치

집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
참죽나무 균형살피며 가지 먼저 베어 내려오는
익선이형이 아슬아슬하다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
(pp.14-15, 「흔들린다」)
유독 곱씹게 되는 시다.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의지와 흔들리지 말라는 소중한 이들의 응원과 흔들림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뒤엉켜 있던 지난 날의 시간이 생각나지만, 시는 여전히 내게 말하고 있다. 흔들려도 좋다고,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노라고 위로한다. 중심을 잡고 서 있는 일도 중요하지만 가지를 뻗고 이파리를 틔우는 일 역시 흔들리지 않으려고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는 것임을. 나무는 흔들리는 것과 흔들리지 않은 것이 함께 있기에 중심을 잡고 있을진대, 내 삶 역시 그러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왜 그리 아둥바둥하면서 살았을까.

오늘도 흔들린다. 자전거를 타고 오는 한강변에서 바람이 세차게 부는 걸 보니 오늘은 마구 흔들려 보는 것도 꽤 괜찮지 않을까. 그의 시집을 곱씹으며 책장을 넘기다 보니 바람은 차갑게 불지만 왠지 마음은 더 따뜻하다. 조급해하지 않겠다. 흔들려도 괜찮다. 짜증내거나 불만스럽다면 참지 않아도 좋다. 좀더 솔직하게, 오늘을 대면하련다. 오늘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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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함민복 저 | 창비
생명은 물론 사물, 도구, 지구에 대해서도 겸손된 언어를 적는 시인 함민복의 시는, 그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인간과 세계를 번역”한다. 새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은 8년 만에 선보이는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찬찬한, 그의 느린 한 발 한 발에 담겨 있는 세월의 무게는 70편의 마디로 풀어 쓰여졌다. 선한 마음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언어는, 오랜만의 시집에서 한결 부드러운 서정의 힘을 발휘한다. 가난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여유로움을 느끼게하는 그의 시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삶을 노래해온 지난날의 연장 선상에 있지만 한결 따뜻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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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도훈(문학 MD)

고성방가를 즐기는 딴따라 인생. 모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며, 누구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함민복> 저9,900원(10% + 1%)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천성 그리움’의 힘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삶을 노래해온 함민복 시인의 신작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이 출간되었다. 2005년, 10년 만에 네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을 펴낸 데 이어 다시 8년 만에 선보이는 다섯번째 시집이다. 요즘 시단의 풍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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