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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을 다오. 아름답고 사랑스런 소녀여! - 슈베르트,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

스무 살의 슈베르트, 그에겐 과연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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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소녀>를 쓰고 난 직후에 친구 레오폴트 쿠펠바이저(슈베르트의 유명한 초상화를 그렸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당시의 슈베르트가 어떤 심정이었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이라네. 건강이 회복될 기미는 안 보이네. … 빛나던 희망도 없어지고 사랑과 우정으로 가득했던 행복이 고통으로 바뀌고 있다네.”

죽음과 소녀-(왼쪽부터) 한스 발둥 그린, 에드바르 뭉크, 에곤 실레 [출처: 위키피디아]

16세기 초엽에 독일에서 활약한 화가 한스 발둥 그린(Hans Baldung Grien)의 <죽음과 소녀>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얇은 천으로 아랫도리만 살짝 가린, 거의 알몸의 소녀를 해골 모양의 사신(死神)이 뒤에서 꽉 붙잡고 있습니다. 소녀는 완전히 공포에 질린 모습입니다. 너무나도 두려운 탓에 소녀의 얼굴은 거의 흙빛입니다. 소녀라기보다는 차라리 노인의 얼굴에 가깝습니다.

한데 이 ‘죽음과 소녀’라는 모티브가 세기말에 이르게 되면 완전히 반전된 형태로 나타나지요. 유명한 작품으로는 에드바르 뭉크(1863~1944)가 1893년에 그린 <죽음과 소녀>가 있습니다. 이 그림의 소녀는 아주 다른 태도를 보여줍니다. 벌거벗은 소녀가 ‘죽음’을 꼭 끌어안고 있습니다. 거의 필사적인 포옹이지요. 살짝 열린 소녀의 입술이 검은 나신(裸身)의 죽음에게 키스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생사(生死)에 대한 시니컬한 응시, 관능과 공포가 동시에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비슷한 풍의 그림은 20년 뒤쯤에 또 등장합니다. 에곤 실레(1890~1918)가 그린 동명의 작품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녀는 필사적으로 죽음을 포옹합니다.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
[출처: 위키피디아]
‘죽음’과 ‘소녀’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표상이지요. ‘죽음과 노인’은 일상적이지만 ‘죽음과 소녀’는 파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 파격적인 모티브를 각자의 방식으로 변주했습니다. 독일의 서정시인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1740~1815)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도 같은 제목의 시를 남겼지요. 그의 시는 소녀와 사신(死神)이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러나 시 속에 등장하는 소녀는 뭉크의 그림처럼 죽음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 소녀는 “가세요. 아, 지나가세요. 무서운 죽음이여! 제발 나를 만지지 마세요”라며 죽음의 유혹을 뿌리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죽음은 소녀를 내버려둘 태세가 아니지요. “네 손을 다오. 아름답고 사랑스런 소녀여! 편안해지거라. 내 품에서 편히 잠들거라”라며 소녀의 손목을 움켜쥐려고 달려듭니다.

슈베르트는 스무 살이 되던 1817년에 바로 그 시를 가사로 삼아 <죽음과 소녀>라는 가곡을 썼습니다. 그리고 7년의 세월이 흐른 1824년에 이 곡의 선율을 마치 자신의 운명처럼 다시금 떠올리게 되지요. 왜 그랬을까요? 당시의 슈베르트가 처한 상황과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계바늘을 좀더 과거로 되돌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56㎝의 작은 키에 통통한 몸매를 지닌 착하고 여린 슈베르트는 스무 살 무렵부터 가난과 병고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요즘 우리가 생각하듯이 크고 번듯한 학교가 아니라 아주 작은 학교였습니다)에서 4년간 보조교사로 일을 하다가 가곡 <죽음과 소녀>을 작곡했던 1817년에 아버지의 집을 나옵니다. 그것은 일종의 가출이었지요. 물론 보조교사 일도 때려치웠습니다. 그때부터 그야말로 동가식서가숙하면서 보헤미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떠돌이 신세에 처한 슈베르트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줬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프란츠 폰 쇼버였습니다. 시인이었지요. 슈베르트의 가곡 <음악에게>(An die Musik)의 작사가이기도 합니다. 한데 쇼버는 사창가 출입이 꽤나 잦았던 친구였습니다. 자, 그러면 같은 집에서 살게 된 스무 살 무렵의 청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맞습니다. 둘은 함께 사창가를 기웃거렸습니다. 훗날 슈베르트의 사망 원인이 됐던, 매독으로 인한 고통이 그렇게 시작됩니다. 슈베르트는 그 병의 악화 때문에 1823년에 병원 신세를 지게 됩니다. 항생제 치료를 세게 받는 바람에 머리카락은 왕창 빠져 버렸고, 심각한 두통에 시달리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사태가 그렇게 치닫자 슈베르트는 마침내 자신이 별로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합니다. 그렇게 죽음을 예감하면서, 다시금 떠올렸던 음악이 가곡 <죽음과 소녀>였던 것이지요.

그 가곡을 모티브 삼아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를 작곡한 것은 이듬해였습니다. 이 곡을 쓰고 난 직후에 친구 레오폴트 쿠펠바이저(슈베르트의 유명한 초상화를 그렸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당시의 슈베르트가 어떤 심정이었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이라네. 건강이 회복될 기미는 안 보이네. … 빛나던 희망도 없어지고 사랑과 우정으로 가득했던 행복이 고통으로 바뀌고 있다네.”


슈베르트는 현악4중주곡을 모두 15곡 남겼습니다. ‘죽음과 소녀’라는 부제를 가진 14번 d단조는, 죽음을 눈앞에 둔 슈베르트가 클라우디우스의 시에 등장하는 소녀처럼 발버둥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곡은 마치 베토벤의 ‘운명’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동기를 제시하면서 문을 열지요. ‘빠~암 빰빰바~’ 하는 이 동기는 전 악장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 혹은 대결’을 형상화합니다. 1악장의 마지막에서는 마치 삶을 체념한 것처럼 스르르 잦아듭니다.

느린 2악장은 장송곡을 연상케 합니다. 가곡 <죽음과 소녀>의 선율을 변주하는 악장입니다. 특히 첫번째 변주에서, 첼로의 피치카토 위에 얹힌 바이올린 선율이 애잔하기 그지없습니다. 두번째 변주에서는 바이올린과 첼로가 서로 위치를 바꿉니다. 바이올린이 뒤로 빠지고 첼로가 앞으로 나서면서 또 한번 슬픈 선율을 노래하지요. 세번째 변주에서는 리듬이 고조되면서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 다음 변주에서 다시 템포가 느려지면서 온화하고 낭만적인 선율이 흘러나오지요. 다섯번째 변주는 짧은 음형을 연주하면서 뭔가 불안하면서도 격렬한 느낌을 짙게 풍깁니다. 바로 이 2악장에서 가곡 ‘죽음과 소녀’의 선율을 사용하고 있어서, 이 현악4중주는 동명(同名)의 부제를 갖게 됐습니다.

짧은 3악장은 스케르초 악장답게 템포가 빠릅니다. 힘차게 시작합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에서 종종 보이는, 베토벤의 영향이 상당히 엿보이는 악장이지요. 그러다가 후반부에서 슈베르트적인 선율미로 되돌아옵니다. 4악장은 아예 타란텔라 풍의 춤곡입니다. 질주하는 느낌이 매우 강하지요. 격렬하게 몰아치는 리듬의 반복이 소녀와 죽음의 2인무를 자꾸 떠오르게 만드는 악장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악장은 2주 전에 함께 들었던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의 마지막과 흡사합니다. d단조로 툭 떨어지면서 막을 내립니다. 기억나시나요? 질주하다가 추락하는 느낌. ‘죽음과 소녀’의 마지막도 그렇습니다.



부슈 현악4중주단(Busch String Quartet)/1936년/EMI

고색창연한 녹음이다. 하지만 추천음반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이 역사적인 4중주단은 1919년 바이올리니스트 아돌프 부슈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죽음과 소녀’를 녹음했을 당시의 진용은 루돌프 부슈(1바이올린) 외에 괴스타 안드레아손(제2바이올린), 칼 독토르(비올라), 헤르만 부슈(첼로)로 이뤄졌다. ‘죽음과 소녀’에 담긴 ‘드라마’를 이만큼 이끌어내고 있는 연주는 아직까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80년 전 녹음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음질도 비교적 들을 만하다. 이 음반은 현재 국내에서 두 가지를 구할 수 있다. 하나는 수입반이고, 다른 하나는 안동림 선생의 ‘이 한장의 역사적 명반’ 시리즈로 발매된 국내 라이선스 음반이다. 어느 것으로 구입해도 좋다.


아마데우스 4중주단(Amadeus Quartet)/1958년/DG

앞의 추천음반에서 ‘드라마’에 방점을 찍은 것에 견주자면, 아마데우스 4중주단의 이 녹음에는 ‘빈의 향기’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오스트리아 빈의 작곡가였던 슈베르트의 음악을 빈을 대표하는 4중주단의 연주로 듣는 셈이다. 특징은 절제된 감정 표현, 정갈하고 서정적인 앙상블로 요약할 만하다. ‘세게 질러대는’ 최근의 연주 경향에 비춰 본다면 차분해서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음악적 흥취가 없는 연주는 결코 아니다. 녹음된지 60년이 지났음에도, 국내의 여러 음반매장에서 여전히 가장 많이 팔리는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로 기록되고 있다. 같은 음반에 커플링된 피아노오중주 ‘송어’도 좋은 연주다. 에밀 길렐스가 피아노를 맡았다.


알반 베르크 4중주단(Alban Berg Quartet)/1984년/EMI

강렬하고 짜릿한 사운드로 ‘죽음과 소녀’를 맛볼 수 있다. 1악장의 첫번째 동기부터 압도적인 에너지를 전해준다. 마지막 4악장까지 그 에너지는 변함 없이 탱탱하다. 오늘 추천하는 세 장의 음반 가운데 가장 현대적인 표현력을 보여주는 연주라고 할 수 있다. 강약과 완급의 대비를 선명하게 드러내면 드라마틱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앙상블이 거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매우 분명한 아티큘레이션을 구현하면서도 치밀한 앙상블로 정평을 얻고 있는 연주다. 이 음반에도 피아노5중주 ‘송어’가 커플링됐다. 피아노는 엘리자베스 레온스카야가 맡았다. 국내에서 제작한 라이선스 음반이어서 가격이 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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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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