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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 어떻게 먹는 줄 아세요?

을지면옥에서 평양냉면을 제대로 즐기는 법 내 인생의 경험치는 백화점 명품관이 아니라 종로 뒷골목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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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소문난 평양냉면의 명가인데 더 이상 말을 보태 뭣하리. 슴슴한 냉면 맛도 보고, 불고기를 면으로 둘둘 말아 면과 고기의 조합도 시도해보고. 그렇게 냉면 한 그릇 싹 비우면 배가 찬다. 여기에 더 이상 뭘 보태리? 뭐든 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 하지 않던가.


겨울에는 종각역 뒤편 후미진 골목길에 있는 선술집 육미에 가야 한다. 겨울제철인 돌멍게를 시켜 그 껍데기에 맥주를 따라 마셔야 하고 여름 장마철에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도 나오는 고갈비 집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막걸리를 마셔야 한다. 종로 피맛골. 90년대 중반, 지금은 기억도 희미한 대학선배들을 따라 이곳에 왔었다. 그네들도 나처럼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왔겠지. 그리고 이런 곳에선 어떤 안주를 시켜야 하고, 어떤 술과 맞춰 먹어야 하는지, 1차를 마치고 나면 2차로 어디를 가야 하는지, 차가 끊기면 어디서 밤을 지새야 하는지 배웠겠지. 나에겐 종로, 을지로 일대에 이런 추억과 노하우가 담긴 선술집과 식당이 몇 군데 있다.

여행 동호회에서 알게 된 58년 개띠 멍후 아저씨는 을지면옥을 처음 알려준 분이다. 을지로에는 오래된 냉면집이 참 많구나. 조선옥, 우래옥, 평래옥처럼 ‘옥’자로 끝나는 식당이 참 많구나 생각했었다. 약간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물었다.

“너 평양냉면 어떻게 먹는 줄 아니?”
서른 넘도록 여태 냉면 안 먹어본 사람 있나?
“그냥 먹으면 안 되요?”

어디선가 쯧쯧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곧이어 나는 평양냉면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역사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요약하자면 프랑스 요리엔 그것만의 먹는 방법이 있듯 을지면옥에서도 나름의 평양냉면 즐기는 법이 있었던 것.

첫 번째 주문은 불고기와 수육, 소주로 한다. 수육과 소주는 서양식으로 따지자면 에피타이저와 식전 와인 같은 것. 수육 몇 점에 소주를 홀짝이다 보면 불판 위에서 익어가던 불고기가 달짝지근한 냄새를 풍긴다. 못 배길 만큼 달콤한 냄새지만 불고기는 맛만 본다는 심정으로 서너 점만 먹는 게 포인트. 불고기로 배를 채우면 당연히 냉면 맛을 못 느끼게 된다.

두 번째로 평양냉면을 주문한다. 이미 소문난 평양냉면의 명가인데 더 이상 말을 보태 뭣하리. 슴슴한 냉면 맛도 보고, 불고기를 면으로 둘둘 말아 면과 고기의 조합도 시도해보고. 그렇게 냉면 한 그릇 싹 비우면 배가 찬다. 여기에 더 이상 뭘 보태리? 뭐든 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 하지 않던가. 그러나 술자리에서 ‘한잔만 더’가 없다면 그게 제대로 된 술자리인가. 마침 소주도 남은 듯하니 마지막 주문에 들어가도록 한다.

“여기! 국밥 한 그릇이요.”

국밥을 주문하고 나니 아무래도 술이 부족한 것 같아 한 병 더 시킨다. 술이 남았으면 남았지 어디 부족해서야 되겠나. 그렇게 국밥과 소주로 새 판이 짜여진다. 차츰 얼큰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돈다. 취기란 게 등급이 있겠냐만은 굳이 매긴다면 A . 섭섭하지도 허전하지도 않게. 딱 기분 좋게 자리를 뜰 수 있는 취기. 이것이 을지면옥에서 제대로 코스를 즐기는 법이다.

영화 <쇼퍼홀릭>을 보면 남자주인공이 프라다 매장에서 능숙하게 옷과 신발을 고르는 장면이 있다. 그 모습에 반한 여자들의 대사.

“세상에나! 당신, 프라다를 제대로 쇼핑할 줄 아는군요.”

프라다에서 쇼핑을 할 줄 안다는 거, 매장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단순한 구매 행위가 아니다. 프라다의 트렌드를 읽을 줄 알고, 다른 명품에는 없는 프라다만의 특징을 짚어내며, 자신의 스타일과 매치할 줄 아는 능력을 말한다. 서너 개쯤 과시용 프라다 소유자가 아닌 꾸준한 생활자만이 가능한 일. 영화를 본 후 나는 명품 중에 과연 몇 개나 쇼핑할 줄 알까 떠올려 봤다. 당연히 없다. 대신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가사에 나오는 도라지 위스키가 뭔지 안다. 그리고 종로의 오래된 식당에서 제대로 된 코스를 즐길 줄 안다.

내 인생의 경험치는 백화점 명품관이 아니라 종로 뒷골목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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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 서울 김지현 저 | 네시간
방송작가 특유의 객관성 있는 담담한 어조로 ‘도시, 서울 살이’의 다양한 모습을 현장성 있게 그리고 있다. 마치 나래이션을 듣는 듯한 느낌은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자신을 타인화하여 감정을 한 꺼풀 걷어낸 단조롭고 관조적인 감성도 매력적이다. 여행과 지리적 공간, 풍광이나 맛집 등을 찾아다니는 표피적인 도시 즐기기에만 국한하지 않고,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사소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서울의 지도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노선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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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현

1975년생, 14년차 방송작가, 2년 전세 계약이 만료될 때마다 서울을 뜰 생각을 하지만 19년째 유예하고 있는 중견 서울생활자다. 요리와 정리정돈을 잘하고 맥주, 씨네큐브, 수영장, 효자동을 좋아한다. 게스트하우스, 똠얌꿍 식당, 독신자 맨션처럼 실천 가능성 없는 사업을 자주 구상하며 그나마 가장 오래 하고 있는 일이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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