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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존경하던 아버지가 나치군이었다니 - 『레드브레스트(Redbreast)』

노르웨이 역대 최고의 크라임 노블 “옳고 그름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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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브레스트』는 해리 홀레 전체 시리즈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1편인 『The Bat』와 2편인 『The Cockroaches』가 각각 호주와 태국을 배경으로 한 스탠드얼론에 가까운 작품이었다면, 『레드브레스트』에서부터 해리 홀레 시리즈의 기본적 얼개가 잡혀나가고 해리의 캐릭터도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또한 해리의 시선으로만 진행되었던 앞의 두 작품과 달리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동시에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처음으로 시도하는 그 기법이 어찌나 힘들었던지 네스뵈는 꼭 <지옥의 묵시록>을 찍을 때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된 심정이었다고 한다.

2011년 안데르스 브레이빅이 우토야 섬에서 잔인한 테러를 일으킨 뒤, 언론에 심심찮게 오르내린 책 한 권이 있었다. 2000년에 출간된 이 책 속에 등장하는 극우파 나치 동조자가 브레이빅과 놀랄 만큼 닮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터전 한복판에 적들이 모스크를 세우고, 노인들의 돈을 빼앗고, 우리 여인들과 피를 섞도록 허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종을 보호하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은 노르웨이인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입니다.”

 

마치 브레이빅이 작성한 성명서에서 나온 듯한 이 문장은 사실 책 속의 극우파 범죄자가 하는 말이다. 브레이빅의 사건을 예언했다고 해서 다시금 세간의 주목을 받은 책은 바로 해리 홀레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레드브레스트(Redbreast)』이다.


노르웨이의 테러가 충격적이었던 것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부유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끔찍한 테러 사건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법한 곳이 있다면 바로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아닐까? 그런데 과연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온순하고 평화롭기만 한 민족일까? 네스뵈는 이 책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나치에 동조했던 노르웨이 사회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폭로한다. 지금까지 제2차 세계대전 사(史)에서 노르웨이가 쌓아온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착한 편’이었다. 비록 독일에게 점령되었지만 비드쿤 크비슬링과 같은 소수의 지독한 매국노들만 나치에 동조했을 뿐, 대다수 국민과 왕실은 함께 힘을 합쳐 저항운동을 펼쳐온 정의로운 나라. 그러나 이 책에 의하면 대략 1만 5천 명의 젊은이들이 독일군에 자원입대했고, 독일군 제복을 입은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인기 만점이었으며, 많은 노르웨이인들이 히틀러를 새로운 구세주로 생각했다. 독일군에 저항해 싸운 레지스탕스는 극소수로, 그마저도 전세가 히틀러에게 기울었다는 것이 확실해진 전쟁 말기에서야 그 수치가 급증했다. 특히 네스뵈는 영국으로 피신해 라디오 방송으로 국민들의 항전의식을 고취했다고 알려진 노르웨이 왕실이 사실은 국민을 버리고 도망친 비겁한 지도자였을 뿐이라고 통렬하게 비난한다.

네스뵈가 당시 상황을 그토록 잘 아는 것은 부모님 덕분이다. 공교롭게도 그의 아버지는 제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 자원입대해 레닌그라드 외곽에서 싸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동부전선의 이야기와 묘사는 상당 부분 그의 아버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반면 그의 어머니와 외가쪽 친척들은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독일군에 대항했다. 네스뵈는 열다섯 살 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나치군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나치라 하면 무조건 악한 존재라고만 생각했는데,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는 아버지가 나치군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충격에 빠진 네스뵈에게 아버지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했고, 그는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점차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

당시 유럽은 민주주의가 붕괴된 상황이었고, 독일과 소련 사이에 끼어 있던 노르웨이는 어쩔 수 없이 두 나라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특히 스탈린은 호시탐탐 노르웨이를 노렸는데 공산주의에 반감을 가진 젊은이들은 스탈린보다는 차라리 히틀러가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조국을 지키겠다는 포부를 안고 자원입대했는데, 네스뵈의 아버지도 그런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당시로서는 그것이 올바른 판단이라 생각하고 소신껏 행동한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패전하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그들은 도리어 매국노로 낙인 찍히고, 전쟁 막판에 잠깐 레지스탕스로 활약했던 사람들은 영웅대접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오. 옳고 그름의 개념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다오”라는 이 책의 구절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네스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가 오로지 승자의 입장에서만 쓰인다는 것을 깨닫고, 당시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고 싶었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원래 그의 아버지가 쓰려고 했던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언젠가 자신이 겪은 경험을 소설로 쓰고 싶어 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그런 아버지를 보며 네스뵈는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꿈을 더 미루지 않고 바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레드브레스트』는 해리 홀레 전체 시리즈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1편인 『The Bat(Flaggermusmannen)』와 2편인 『The Cockroaches(The Kakerlakkene)』가 각각 호주와 태국을 배경으로 한 스탠드얼론에 가까운 작품이었다면, 『레드브레스트』에서부터 해리 홀레 시리즈의 기본적 얼개가 잡혀나가고 해리의 캐릭터도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또한 해리의 시선으로만 진행되었던 앞의 두 작품과 달리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동시에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처음으로 시도하는 그 기법이 어찌나 힘들었던지 네스뵈는 꼭 <지옥의 묵시록>을 찍을 때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된 심정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 크게 성장하고, 명실공히 노르웨이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또한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해마다 노르웨이 역대 최고의 크라임 노블로 선정되고 있다.

책의 제목인 레드브레스트는 개똥지빠귀를 의미하는 robin redbreast에서 비롯되었다.(이 작품에서는 redbreast가 직역의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정식 명칭이 아닌 진홍가슴새로 번역했다.) 네스뵈가 진홍가슴새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이 새와 관련된 신화 때문인 듯하다. 책의 맨 서두에도 짧게 인용된 바 있는 이 신화는 진홍가슴새가 어떻게 진홍빛 깃털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래 진홍가슴새는 잿빛으로 된 평범한 새였다고 한다. 하지만 신은 너희들이 참사랑을 베풀 수 있을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진홍가슴새들은 가슴을 붉게 물들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진홍가슴새의 둥지 근처에 십자가가 세워지고, 한 남자가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다. 십자가로 가까이 날아간 진홍가슴새는 가시 면류관을 쓴 남자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진홍가슴새는 남자가 너무 가여워서 부리로 그의 이마에 박힌 가시를 하나씩 빼내기 시작했는데, 그때 흘러내린 피가 새의 가슴에 떨어져 깃털을 붉게 물들였다. 그 후로 진홍가슴새는 대대로 진홍빛 깃털을 가지게 되었다는 신화이다.


이 책이 출판되던 2000년을 배경으로 한 현재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반이 교차되며 펼쳐지는 전반부는 전개가 다소 느리고 복잡해서 읽기 힘들다는 외국 독자들의 평이 많다. 하지만 절반 정도만 잘 넘긴다면 그 후로는 폭발하는 이야기의 힘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비교적 밝고 명랑하며 행복하기까지 한 해리의 낯선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시리즈는 ‘해리 홀레 해체하기’시리즈라 불릴 만큼 후반으로 갈수록 해리는 몸의 흉터가 늘어나고, 한두 군데씩 절단되고, 정신적으로는 점점 어둡고 피폐해져 그가 쫓는 범죄자들과 비슷해진다. 시리즈의 초반인 이 책에서 이렇게 신체적으로 온전하고 정신적으로 밝은 해리의 모습을 보노라니, 어쩐지 애잔하기까지 하다. 예전에 어느 인터뷰에서 갈수록 불행해지는 해리가 너무 가엾지 않느냐는 질문에 네스뵈는 인생이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500페이지의 비극 속에 행복한 순간은 잘해야 서너 페이지 존재하는 것. 완벽하고 행복했던 순간으로부터 점차 퇴보하는 과정. 앞으로 네스뵈가 어떤 논리로 그 장엄한 새드 엔딩을 이끌어낼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가 절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워낙 촉박한 기간에 이 두꺼운 책을 번역하느라 나 역시도 이번 작업은 <지옥의 묵시록>을 찍는 듯한 심정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예 지옥에 떨어진 심정이었지만.) 하지만 이 시리즈는 아무리 힘들어도 한 권의 번역이 끝나고 나면 어느새 슬그머니 다음 책을 뒤적거리게 된다. 네스뵈가 또 어떤 훌륭한 이야기로 나를 사로잡을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네스뵈가 어떤 작품보다도 첫 장면을 공들여 썼다는 『네메시스(Nemesis)』이다.

-노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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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브레스트 요 네스뵈 저/노진선 역 | 비채
북유럽의 서늘한 공포와 뜨거운 스릴을 전한 작가 요 네스뵈가 시리즈의 대표 걸작 『레드브레스트』와 함께 돌아왔다. 60년 전의 과거와 현재를 빠르게 오가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 속에서 독자들은 인간에게 죄와 벌이란 무엇인지 역사의 깊은 상처를 통해 되묻게 된다. 가시를 삼킨 새의 전설과 붉은 가슴을 숨긴 채 해리 앞에 나타난 노인들, 진홍가슴새로 불리던 한 남자…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노르웨이의 슬픈 역사가 한 데 모여 휘몰아치는 순간, 독자들은 요 네스뵈 문학의 심장부를 만난 감동에 마음이 벅차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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