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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 박찬욱의 잔인하고 농염한 질문

납치되지 않은 딸의 성인식, 그 독한 매혹 난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에요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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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전반에 파고드는 죽음의 관능, 근친상간의 죄의식과 그 매혹, 18세 소녀와 삼촌, 그리고 어머니 사이에서 오가는 성적 긴장감과 불길하게 떠도는 강력한 비극의 전조가 영화 전반에 흐른다. 공간을 가장 효율적인 이야기의 틀로 쌓아올리는 박찬욱 감독의 장기는 <스토커>에서도 잘 살아나는데, 1920년대에 지은 고풍스러운 집은 다양한 색채와 음영, 인물의 심리를 담아내는 구도로 활용되며 세 가족 사이에서 떠도는 심리적 긴장감과 잘 어우러진다.


한글 제목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으나,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는 집착하여 쫓아다니는 사람의 ‘Stalker’가 아니라 ‘Stoker’, 즉 스토커 가문의 이야기이다. 복수 삼부작부터 2008년 <박쥐>에 이르기까지 박찬욱 감독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속죄와 구원, 악마의 쾌락과 그 사이를 떠도는 ‘가족’의 이야기가 전면에 드러난다. <스토커>는 니콜 키드먼과 매슈 구드, 미아 바시코프스카라는 매혹적인 배우들이 어우러진 할리우드 작품이면서도 박찬욱 감독 자신의 영화적 궤도와 가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안정적인 작품이다. 그는 전작 <박쥐>를 통해 저주받은 운명의 소동 속에 머문 주인공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스토커>는 정화될 수 없는 나쁜 피를 물려받은 이들의 원죄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 들인다.


교외, 웅장한 저택에 사는 소녀 인디아 스토커(미아 바시코프스카)가 18세가 되던 날 아버지가 사고로 죽는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식, 평소 존재조차 몰랐던 삼촌 찰리 스토커(매슈 구드)가 나타난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의문과 갑자기 나타난 삼촌의 존재 때문에 인디아는 불안해하고, 삼촌을 경계하지만 어머니 이블린(니콜 키드먼)은 시동생에게 묘한 호감을 보이며 자기 집에 체류할 것을 권한다. 찰리는 낯선 침입자이지만 이블린과 인디아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며 그들의 삶 속으로 스며든다. 인디아는 유령처럼 자신의 삶 속으로 파고든 삼촌을 경계하지만, 그에 대한 묘한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러던 중 삼촌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인디아의 주변에서 하나 둘 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어느 날, 아빠의 서재를 정리하던 중 의문의 사진과 편지 다발이 발견되는데, 여기서 아빠의 죽음과 삼촌의 정체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한다.



영화의 전반에 파고드는 죽음의 관능, 근친상간의 죄의식과 그 매혹, 18세 소녀와 삼촌, 그리고 어머니 사이에서 오가는 성적 긴장감과 불길하게 떠도는 강력한 비극의 전조가 영화 전반에 흐른다. 공간을 가장 효율적인 이야기의 틀로 쌓아올리는 박찬욱 감독의 장기는 <스토커>에서도 잘 살아나는데, 1920년대에 지은 고풍스러운 집은 다양한 색채와 음영, 인물의 심리를 담아내는 구도로 활용되며 세 가족 사이에서 떠도는 심리적 긴장감과 잘 어우러진다.


가족, 그 잔인하고 농염한 이야기



<공동경비구역 JSA>

1992년 가수 이승철이 주연을 맡은 <달은 해가 꾸는 꿈>이란 영화로 데뷔했을 때, 작품도 박찬욱 감독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97년 드물게 장르 영화를 표방한 <삼인조>는 처음으로 마니아층이 생기는 작품이 되었지만, 당시 서울 관객으로 흥행을 가늠하던 시기에 3만 6천 명가량을 동원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데뷔 후 8년 만에 만든 세 번째 작품인 <공동경비구역 JSA>는 달랐다.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이고,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비틀어낸 형식에 미스터리 스릴러의 특성을 잘 녹여낸 블록버스터급 영화로 매끈하게 잘 빠진 상업영화였다. 이 작품을 통해 흥행감독이 된 박찬욱은 이후 작품에 대한 부담감의 족쇄를 달면서 동시에 자기가 하고 싶은 영화를 할 수 있는 마스터키를 거머쥐게 된다. 그리고 이후의 작품들을 볼 수 있게 된 관객들에게 이것은 큰 행운이 되었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박찬욱 감독의 예술적 능력은 2001년 <복수는 나의 것>으로 증명되었다. 흥행대작 이후 의외의 선택이었다. <복수는 나의 것>은 인간의 독선과 이기심, 복수와 속죄의 상관관계를 파고드는 느와르였다. 선인과 악인의 구분을 지을 수 없는 이야기 구도와 심연을 파고드는 추악한 인간의 공간을 공을 들여 완성했다. 이후 칸 영화제를 통해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올드 보이>, 이영애의 변신으로 주목 받은 <친절한 금자씨> 등 복수 3부작을 통해 박찬욱 감독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가진 감독으로 성장했다.


<친절한 금자씨>

복수 3부작을 완성하는 <친절한 금자씨>는 태생적으로 많은 우성인자를 가진 출발이 좋은 영화였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 삼부작을 통해 복수(혹은 속죄)의 심리적인 행위를 신체상해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 화면 가득 피를 뿌려왔다. <복수는 나의 것>에는 복수하는 류가 장기밀매업자의 동맥을 잘라 피를 뿜어내게 하거나 복수하는 동진이 류의 아킬레스건을 끊어버리는 장면, 전기쇼크를 먹고 오줌을 싸는 영미, 정사의 교성처럼 들리는 류의 누나의 죽음 직전 신음소리 등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폭력적 장면들이 넘쳐 난다. 전작 <박쥐>는 그런 박찬욱의 취향을 극대화한 작품이었다. 감독의 고어적 취향과 뱀파이어라는 요소가 만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쥐>는 충분히 잔인하고 만족할 만큼 선정적인 영화가 되었다.


<박쥐>

하지만, <박쥐>가 박찬욱이라는 감독을 재평가하고, 추켜올릴만한 작품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수많은 표층의 텍스트들이 사람들의 말과 평가를 통해 살을 찌웠다. 어쩌면 <박쥐>는 세 치 혀에 따라 마치 던져버려야 할 쓰레기거나 아니면 두고두고 곱씹어서 읽고 또 읽어야 하는 다층적인 비만아로 포장되었다. 그리고 영화가 관객에게 모든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감독과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은 관객 사이의 괴리감은 끝없는 해석의 텍스트를 펼쳐놓았다. <박쥐>는 소문난 잔치였지만, 먹을 것이 충분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었다. 배우에 앞선 스타 감독 박찬욱의 저력에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의 무조건적인 믿음과 불황의 늪에 빠진 한국영화계를 살릴 기대감이 더해져 <박쥐>는 점점 더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거대 포장의 한 귀퉁이에 몸을 숨겼다.


<박쥐>에 이은 차기작이 할리우드 데뷔작 <스토커>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관객들은 <박쥐>의 연장선상에서 <스토커>를 바라보지만, 이 영화와 맥을 함께 하는 것은 <박쥐> 이전의 작품들이다. 최고의 복수를 위해 가공된 부녀 사이의 관계, <올드 보이>와 딸을 잃은 아버지의 복수 <복수는 나의 것>, 자신의 딸과 생명을 잃은 아이들을 위한 어머니의 복수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기 까지 온전치 못한 가족과 납치된, 혹은 조작된 ‘딸’과의 관계는 박찬욱 감독의 근작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소재였다. <스토커>는 더 이상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호를 받지 않는 소녀와 여자의 경계에 선 ‘딸’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성년이 되던 날 아버지를 잃은 인디아 스토커는 더 이상 어른들에게 납치당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폭력 묘사에 있어서 <박쥐>가 극한으로 치달았기에 할리우드 데뷔작 <스토커>에 대한 수위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박찬욱 감독의 고어적 취향을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스토커>의 표현수위는 매우 미온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스토커>는 극단적 취향에 휩쓸리거나, 비난을 받을만한 여지가 없게 매끄럽게 가공 되었다. 극적 반전이나 잔인한 묘사, 이상한 순간에 툭 튀어 나오는 블랙 유머의 감성은 매끄럽게 잘 빠진 <스토커>에 스며들 틈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치밀하게 축조되는 감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심리적 스릴과 공들여 만든 장면과 장면이 축조해 내는 이야기를 통해 박찬욱 감독은 자극적인 소재와 잔인한 장면대신 배경, 정서, 배우를 아우르는 섬세한 연출력을 선보인다. 그런 점에서 <스토커>는 그의 작품의 잔인함과 선정성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보기 힘들어 하는 관객들도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성장영화라는 이야기의 틀 안에서 숨겨진 비밀은 공포 영화의 반전처럼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농익어 무르익은 순간에 자연스럽게 새어 나온다. 전 세계 배급을 고려한 만큼 한국적인 정서와 장르 영화의 과장된 스타일에서 발생하는 묘한 기류 대신 <스토커>가 선택한 화두는 거대한 저택과 어우러지는 ‘가족’이다. 그리고 ‘가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개인적 욕망은 지극힌 내밀한 개인의 욕망이면서 동시에 제도권 안에서는 언제든 삐뚤어지거나 비난 받을 수 있는 욕망이라는 것을 말한다. <스토커>는 할리우드의 시스템과 만나 무척이나 정돈된 느낌이지만, ‘가족이라면 어디까지, 가족이라면 얼만큼 서로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박찬욱 식의 질문은 이전처럼 잔인하면서도 농염하다. 그래서 여전히 독하고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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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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