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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치욕적 역사지만 기억해야 하는 이유

‘을사오적’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라! 『교과서 밖으로 나온 한국사』 박광일과 함께하는 정동 역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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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3일, 『교과서 밖으로 나온 한국사』 출간 기념, 박광일 공저자와 함께 정동 답사를 떠났다. 시작은 덕수궁(경운궁) 앞의 ‘대한문’이었다. 저자는 이곳이 역사적인 장소이며 120~130년 전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였음을 환기시켰다.

‘정동’을 갔다. 서울의 중심에 있지만, 지금의 서울에서 벗어나 있는 장소다. 메트로폴리탄 서울과는 다른 풍광이 펼쳐져 있다. 근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 때문일 것이다. 『교과서 밖으로 나온 한국사』는 그런 정동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외국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요량으로 정동 한가운데 있는 경운궁(덕수궁)에 머물렀다. 실질적으로 정동이 나라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특히 외교관계를 통해 조선의 생존을 모색했던 고종이 여러 나라 외교관과 자주 만나면서 서양식 문화를 받아들인 흔적들이 궁궐 곳곳에 남아 있다.”(p.179)




원구단, 대한제국의 시작

과거 대한문은 지금보다 훨씬 앞에 있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태평로가 뚫리면서 대한문은 뒤로 밀렸다. 대한문은 정문이 아닌 동문이었고, 현재 위치보다 14m 앞에 있었다. 한 나라가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문도 밀리고 만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사적 사실이다.

20세기 초, 조선과 대한제국은 함께 쓰이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독립을 부르짖었을 때도, 3명 중 2명은 ‘조선독립만세’를, 3명 중 1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한’이라는 명칭은 대한문에서 명동을 바라보는 곳에서 시작됐다. 원구단(환구단)이었다.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그곳으로 향했다. 어쩔 수없이 맞닥뜨리는 재능교육 건물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지난 2월 27일부로 이전까지 가장 오랜 기간 농성 투쟁기록(1895일)을 깨고 계속 이를 갱신하고 있는 재능교육 조합원들의 모습이 밟힌다.

재능교육 건물 옆에는 엉뚱하게 자리 잡고 있는 원구단의 정문이 있다. 고종은 1897년, 왕권의 강대함을 알리고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나타내기 위해 왕을 황제라 부르고, ‘광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정해 사용하는 ‘건원칭제’(建元稱帝)를 단행했다.

“조선은 1882년 청나라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었다. 장정은 조약이 아니다. 조선은 청의 아래라는 것을 명문화한 것이다. 조선이 청과 같지 않음을 대내외에 공표한 셈이다. 우리가 자주국이자 독립국이라고 하는데 부족함이 있음을 가슴 아파한 고종은 1897년 이전의 조선과 단절하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원구단(원단, 환구단)에서 나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로써 나라 이름이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었고, 고종은 황제가 되었다. 백성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고 밤새도록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p.166)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기까지 나라 안팎으로 우여곡절도 많았다. 고종은 자신의 신변안전에 지극히 민감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1882년 구식군대가 일으킨 ‘임오군란’ 때도 죽을 고비를 넘긴 고종은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낭인(불량배)을 고용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크게 받았다. 을미사변 당시 일본은 독기를 품고 있는 상태였다.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 10여 년을 준비했는데,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가 끼어들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저지른 것이 을미사변이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를 자신의 배후로 택해 이듬해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조선을 공부하면서 이해가 안 간 것이 있다. 1894년까지 조선은 명나라 제사를 지낸다. 이것은 조선 사람의 머리를 이해하는 열쇠말이기도 하다. 자주나 독립을 위정자나 양반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해가 안 가긴 하는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건 왕이나 황제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었다. 제후는 종묘ㆍ사직만 지킬 뿐이었는데, 유교문화가 들어오면서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국의 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되기 위해 원구단을 만들었는데, 유교적인 발상이다. 그냥 황제라고 선포만 해도 됐다.”

재밌는 것은 1897년 고종의 황제 선포를 가장 기분 나쁘게 봤던 나라는 일본이 아니었다. 청나라였다. 청은 결국 조선에 항의를 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가 내부 사정으로 어려울 때였다. 조선은 청에게 장정의 개정을 요구했다. 물론 청은 거부했다. 2년 뒤 상황은 달라졌다. 청은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조선에 사는 청나라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1899년 한청통상조약이 맺어졌다. 이는 곧 대한제국의 완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고종은 기막히게 좋은 이런 상황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 인민(백성)의 힘을 토대로 더 확실한 개혁과 국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원구단 자리가 지금은 없어졌다. 고종이 장소를 물색하다가 자신이 머물던 덕수궁 건너편의 중국 사신의 숙소로 사용하던 ‘남별궁’을 봤다. 당시 덕수궁보다 높은 자리에 있던 남별궁 자리에 원구단을 쌓았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 사람들이 지금의 태평로를 냈다. 조선은 풍수 때문에 종각 쪽으로 길을 냈었는데, 일본인들이 길을 만들면서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호텔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 황궁우만 남아 있다. 이 일대는 여러 시가가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일제 강점기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원구단은 신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었다. 제사를 바로 밑에서 지냈으나 일본에 의해 철도호텔이 들어서면서 흔적을 지웠다. 황궁우 앞에 놓여 있는 석고는 1902년 돌을 깎아 만든 것이다.

“원구단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세웠다는 점에서 일제 정책의 교묘하고 잔인한 한 면을 볼 수 있다. 결국 남별궁에서 원구단으로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의 침략 정책을 지원하는 호텔이 되었다.”(p.168)




서울시청, 근대의 아픈 상처

원구단 건너의 서울시청. 역시 일제에 의한 상처가 있다. 강제병합 후 일제는 전국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한양을 경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경기도의 부속고을(경성부)로 편입시켰다. 이른바 ‘한양의 굴욕’이다. 그리고 경성부청사를 만들었다. 지금의 서울도서관(구청사)다. 해방 후 경성부청사를 없애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늘에서 보면 ‘本’ 모양을 하고 있다는 이유 등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총독부는 ‘日’ 모양을 하고 있다.

“총독부를 없앤 건 가장 잘한 일 중의 하나다. 그런데 다른 나라, 특히 유럽인들은 근대를 무척 사랑한다. 한국은 일제 강점기랑 겹쳐서 근대를 밀어버린다. 그러다보니, 갓 쓰고 도포를 입다가 갑자기 양복을 입는다. 일제 강점기에 구두 신고 검은 두루마리를 걸쳤다. 근대를 잃어버리니, 다음에 우리가 갈 길을 잃는다. 치욕적인 역사지만 우리가 그것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서울시가 굳이 구청사를 없애지 않고 도서관을 만든 것 아닐까.”




정동길, 거닐다

이어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면서 덕수궁을 품은 역사를 만난다. 저자에 의하면, 덕수궁은 조선 5대궁(창경궁, 창덕궁, 경복궁, 경희궁, 덕수궁) 가운데 궁 노릇을 가장 못한 곳이었다. 광해군 때 경운궁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까지 원래 이름은 ‘정릉동행궁’. 태조 이성계의 총애를 받던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 있었다. 원래 사대문 안에는 묘를 쓸 수 없다는 원칙이 있었으나 태조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능을 쓰게 했다. 정(貞)은 존경받는 부인에게 부쳐지는 이름으로, 정능은 정숙한 여인의 무덤이란 뜻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태조가 죽자 신덕왕후의 능을 지금의 정릉으로 옮겼다. 정동이란 이름은 ‘정릉동’의 줄임말이었다.

이후 선조가 임진왜란 후 한성에 돌아왔으나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머문 곳이 정릉동행궁이었고, 광해군이 창덕궁을 보수해 거처를 옮기면서 정릉동행궁은 경운궁이란 정식 궁호를 얻었다. 덕수궁은 20세기 와서나 붙여진 이름이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순종은 창덕궁에 머물고 경운궁은 고종이 머물렀다. 순종은 고종에게 오래 살라고 하면서 ‘덕수(德壽)’라는 이름을 올렸다. 덕수는 현 임금이 살아 있는 임금에게 올리는 것인데, ‘덕수궁 폐하’라고 고종을 불렀다. 덕수궁은 궁궐 이름이 됐다. 그러나 일제는 1919년 덕수궁을 다 쪼갰다. 덕수궁은 경희궁과 붙어 있을 정도로 컸으나 지금은 1/3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왜 덕수궁으로 왔을까. 그것에는 국제정치적 맥락이 있다. 덕수궁 근처에는 러시아, 영국, 미국 대사관이 있었다. 고종은 일본보다 이들이 더 믿을 수 있다고 봤고, 다른 궁궐을 놔두고 이곳에서 머물렀다.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이 있던 곳이라고 해서 정동貞洞이라 불린 이곳에는 중국 사신이 머물던 남별궁과 선조가 임진왜란을 피해 잠시 머물던 행궁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경복궁과 격이 다른 주변지의 하나로 남았을 정동을 역사의 중심으로 끌어온 것은 대한제국의 외교정책과 관련이 있다.”(p.178)

정동길을 걷다보면 만나는 교회가 있다. 정동제일교회. 유명한 대중가요(「광화문 연가」)에도 나오는 교회다.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베델예배당)’이 있는 곳. 교회 바로 길 건너엔 ‘이영훈 작곡가님의 5주기를 추모합니다. 2013. 2. 14-작곡가 이영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플랜카드가 걸려있다. 괜스레 노래를 흥얼거리며, 약간 늦었지만 이영훈 작곡가의 5주기를 추모했다. 참, 좋아했던 노래. 그리고 이곳을 지날 때마다 떠오르는 노래.

“정동제일교회는 유일한 19세기 교회로 근대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펜젤러 목사가 교회를 지으면서 학교를 지었다. 고종이 그 학교에 ‘배재’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후 이화학당의 이름은 명성왕후가 하사했다. 정동교회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학교가 등장한 것이다. 그 뜨거운 분위기가 정동의 분위기였다. 서재필이 또 불을 지폈는데, 그가 한국에 돌아와 기댄 곳이 교회였고, 협성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젊은 청년들의 대화모임으로 독립협회를 만들 때 중추세력이자 독립운동의 한 그룹을 형성했다. 서양 종교가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 되고 한국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원래 이곳에는 한옥으로 지은 교회가 있었는데 나중에 다시 지어 지금과 같은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하던 건물이 들어섰다. 정동교회는 아펜젤러 목사가 목회 활동을 하던 곳으로 우리나라 첫 손에 꼽히는 교회라고 할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정동교회는 이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특히 교육 부분에서 큰 성과를 냈다.”(p.180)




중명전, 역사의 치욕

길을 따라 정동극장 옆으로 난 골목길에 있는 중명전에 다다랐다. 덕수궁의 일부였으나 일제의 쪼개기에 의해 외떨어진 공간이다. 원래 이름은 ‘수옥헌’이었으나, 덕수궁에 불이 나고 고종황제가 머묾으로써 격이 가장 높은 ‘전(殿)’이 붙은 ‘중명전(重明殿)’으로 바뀌었다. 황실의 도서관이면서 ‘외교’를 정치 키워드로 삼은 고종의 주무대로 활용됐다.

“고종의 외교정책에 대해 알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은 독립협회 해산이다.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가 기본입장으로 그 안의 일부가 공화정을 주장했는데, 이를 이유로 해산시켰다. 고종은 1900년 전제군주정을 발표했는데, 10개 항목 모두가 황제 권한만 강화하는 내용일 뿐 국민은 없었다. 한편으로 개혁 진행 세력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생각했지만 고종은 전제군주정을 추구했다. 중추원 의원 선거가 있던 날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한 것만 봐도 정치에 대한 견해가 얼마나 달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종은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수립 이후 백성들이 보여 준 외국에 대한 시위가 자신에 대한 저항으로 바뀔 수 있다고 여긴 듯하다. 그러나 정작 국가를 지탱해주는 힘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 놓친 판단이었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더 이상 지킬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p.175)

중명전은 무엇보다 을사늑약(1905)이 체결된 치욕의 장소다. 즉, 통감정치가 시작된 곳이다. 을사늑약은 대한제국 외교를 담당하는 ‘통감’을 두는 것을 뼈대로 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에 맞춰 통감이 됐다. 통감을 둔다는 것은 곧 외교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다. 외교는 주권을 가진 나라 사이에서 하는 것이나 을사늑약을 통해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를 장악함으로써 그 마수를 본격적이고도 대놓고 드러냈다.

“고종은 ‘보호조약’ 체결을 완강하게 저항했다. 이토는 남산에 포병부대를 도열시키고, 덕수궁을 군인들이 둘러싸게 해서 고종이 회의를 할 때마다 대포를 쐈다. 결국 을사오적이 새벽 1시에 도장을 찍었다. 조약은 상호 개념인데, 고종이 사인을 하지 않아서 무효다. 이토의 강압으로 일부 대신들이 사인을 했고, 이들이 그 유명한 을사오적이다. 다 나쁘지만 중 이지용과 권중현이 가장 나쁘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셋(박제순, 이근택, 이완용)은 협박에 못 이겨 그리 했다. 우리말 중에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을사늑약을 빗대 ‘을사년스럽다’에서 비롯된 말이다.”


“을사오적의 이름은 정확히 알고 있으면 좋겠다. (중략) 그런 행위 자체를 통해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을사오적의 이름에 침을 뱉으라. 이 행위를 통해 우리 역시 현재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그 선택이 역사적으로 합당한 것인지에 대해 한 번 더 고민해보게 될 것이다. 나의 이름에 후손들이 침을 뱉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는지를 말이다.”(p.185)

일본은 덕수궁 일부를 뚝뚝 떼어내 민간에 팔았고, 중명전도 그러했다. 그러다 1963년 영친왕에게 기증됐고, 1976년 민간에 재매각됐다가 2006년 문화재청이 인수하면서 2010년 복원,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중명전은 을사늑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1시 을사늑약 강제. 일제는 군대를 동원해 중명전을 침범하고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 대한제국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늑약 : 강제로 체결한 조약) (18일 새벽 1시경 강제되었지만, 을사늑약문에는 11.17일자로 명기)

중명전 안에는 <을사늑약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조목조목 제시되어 있다.
첫째.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황궁을 침범하고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였다.
둘째. 대한제국의 주권자인 광무황제는 결코 늑약을 허락하지 않았다.
셋째. 필수적인 ‘위임, 조인, 비준’이라는 조약 체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넷째. 국제법적인 조약문의 형식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
다섯째. 한민족 전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들 중의 하나는 외교관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외교관 모두를 귀국하라고 지시했다. 대부분 들어왔으나 2명만이 남았다. 자신들은 대한제국 황제의 명령만 듣는다는 이유였다. 이범진 러시아공사와 이한응 유럽공사였다. 당시 서른둘의 이한응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라 없는 슬픔이었다. 대한제국 외교의 종말은 곧 대한제국의 멸망을 의미했다.

중명전은 외교의 부활, 즉 대한제국의 부활을 꾀한 공간이기도 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 파견(1907)을 결정한 곳이 중명전이었다. 이준, 이상설, 헐버트 그리고 이범진 러시아공사의 아들인 이위종도 가세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는 본래 목적이었던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거부당했다. 일본의 공작 때문이었다.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의 방해가 있었다. 이위종은 기자들을 만나 프랑스어로 왜 이곳에 왔고, 대한제국의 상황을 설명했다. 로이터 통신 등에 기사가 실렸으나 전세를 뒤집지 못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대한제국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동에서 읽을 수 있는 것들

이날 정동 역사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 구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르네상스풍의 건물인 이곳은 1895년 완성됐다. 당시 조선과 러시아는 친밀한 관계였으며, 고종은 니콜라이 2세를 후견인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이뤄질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다. 이 공사관은 6.25 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현재 볼 수 있는 종탑만 남아 있다.

고종은 러시아를 믿고자 했지만, 러시아라고 다른 나라와 다르지 않았다.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출발, 50일 만에 모스크바에 도착한 민영환 특사 일행은 초기 협상은 실패했다. 당시 일본 특사단 대표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러시아와 협상을 벌여 양국은 상호 협의 없이 조선의 군사ㆍ재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비밀협약을 체결한 것이다. 결국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몰아냈고 민영환은 을사늑약 체결이후 자결을 택했다.

기층 인민보다 외국 세력에 기대 근대화를 열어 젖히자했던 위정자들의 판단은 결과적으로도 틀렸다. 당시의 국제 정세나 정국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손 치더라도, 인민들과 함께 자주적인 근대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시로 외국 세력의 눈치를 봤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외국의 요구에 ‘NO’라고 대답하면서 정부의 의지를 관철시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런 근대의 아픔과 상처는 아직 아물지 못했다. 정동거리에서 다시 역사를 생각하는 이유다.

“대한제국 선포부터 국권을 빼앗기기까지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가 이끈 10년 남짓한 시간에 대한 평가는 분명 엄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과 현대를 연결하는 공간에 일제 강점기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도 역사의 모습을 제대로 반영했다고 보기 어렵다. 조선 후기, 그리고 대한제국으로 연결되는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를 자극으로 삼아 활동하던 우리 민족의 고민과 노력을 그 안에서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동길을 걸으며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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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밖으로 나온 한국사 박광일,최태성 공저 | 씨앤아이북스
한국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근현대사 사건들을 한 권에 담았다. 새로운 교과 과정에 맞추어 쓴 이 책은 실제 강의를 보고 듣는 것과 같은 생생한 문체, 파노라마 사진을 보는 듯한 다양한 이미지 자료를 통해 어렵고 지루할 것만 같은 한국사를 쉽고 재미있게 읽도록 돕는다. 이 책은 ‘황사영 백서 사건’을 시작으로, 근대와 현대를 가로지르는 의미 있는 22가지 주제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다. 각 주제별 사건들은 시대적 배경, 주변 인물, 외교 관계 등을 다각도로 설명해 이해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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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교과서 밖으로 나온 한국사 : 근현대

<박광일>,<최태성> 공저18,0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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