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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참혹하게 생을 마감한 비극의 조선 왕자, 영창대군

결코 왕이 될 수 없는 적장자 14년간 광해군이 세자로 있던 해에 태어나 분란의 불씨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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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은 탯줄에 묻은 피가 다 마르기도 전에 조정분란의 한가운데로 내몰리며 왕세자 광해군의 강력한 정적이 되어버렸다. 그는 조선왕조 제14대 국왕인 선조의 열네 번째 막둥이 아들로 태어났다. 이때 선조의 나이 쉰다섯 살,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왕후의 나이 스물세 살, 왕세자 광해군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단종과 더불어 조선왕조 사상 가장 참혹하게 생을 마감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손꼽히는 영창대군은 태어나기 전부터 불운에 찬 삶이 운명지워져 있었다.

준비된 비극의 주인공

후궁 소생인데다가 장남도 아닌 광해군이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어 있는 마당에 광해군보다 아홉 살 어린 계모 인목왕후仁穆王后로부터 적장자인 대군이 태어났다. 적장자의 왕위승계 여부가 국왕의 정통성에 커다란 흠집을 낼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상황을 고려하면 왕세자가 되지 못하는 적장자 대군이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파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광해군에게는 그간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갓난아기 대군 역시 언제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처럼 영창대군永昌大君은 탯줄에 묻은 피가 다 마르기도 전에 조정분란의 한가운데로 내몰리며 왕세자 광해군의 강력한 정적이 되어버렸다. 그는 조선왕조 제14대 국왕인 선조의 열네 번째 막둥이 아들로 태어났다. 이때 선조의 나이 쉰다섯 살,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왕후의 나이 스물세 살, 왕세자 광해군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단종과 더불어 조선왕조 사상 가장 참혹하게 생을 마감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손꼽히는 영창대군은 태어나기 전부터 불운에 찬 삶이 운명지워져 있었다.



영창대군 가계도(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더 상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폭풍 전야의 나날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광해군이 보좌에 올랐음에도 영창대군을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건강하게 커가는 영창대군이 광해군에게는 마치 폭발시점을 향해 가는 시한폭탄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공포감 그 자체였을 것이다.

광해군 못지않게 영창대군도 영창대군대로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했다. 태어나 만 두 살이 되기도 전에 아비를 잃은 영창대군은 자상한 아버지 같은, 그래서 품에 안겨 실컷 응석이라도 부리고 싶은 큰형님 광해군의 매몰찬 태도에 서글퍼 했고 또한 친누나 정명공주에게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절망해야 했다.

영창대군의 외가인 연암 김씨 집안 또한 언제 닥칠지 모를 멸문지화의 공포 속에 초조한 날들을 보내기는 마찬가지였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중압감이 도는 가운데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던 몸부림의 흔적이 민인백이 쓴 《태천집苔泉集》에 나온다. 선조의 후궁 인빈仁嬪 김씨金氏의 사위인 서경주徐景가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에게 보낸 편지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서경주가 영창대군이 창진瘡疹(천연두)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김제남에게 편지를 보내 당부하기를 ‘심하게 역병을 앓는 아이에게 어느 혈에다 침을 놓으면 죽지 않고 소경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반드시 그에 따라 침을 놓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김제남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기를 ‘나는 서경주를 지혜롭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죄도 없는 대군을 어찌 장님으로 만든다는 말인가?’라고 하면서 끝내 따르지 않았다.”
서경주가 이와 같은 극단적인 내용의 편지를 김제남에게 보내게 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인목왕후와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자 했던 후궁 인빈 김씨와, 영창대군을 위해 어떻게 해서든 지지세력을 확보해두고자 했던 인목왕후의 의중이 맞아떨어져 서경주의 여식과 인목왕후의 남동생과의 혼사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미 다른 혼담이 있다는 이유로 서경주가 거절하자 선조까지 직접 나서 혼사를 명령하고는 얼마 뒤 선조가 급서했다. 이번에는 광해군이 인빈 김씨를 통해 혼사를 파할 것을 종용했지만 선조가 명령한 혼사임을 내세워 결국 혼인시켰다. 국왕 광해군의 반대를 뿌리치고 김제남과 사돈관계를 맺게 된 서경주였으니 김제남 못지않게 영창대군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고 후환을 걱정하며 짜낸 궁여지책을 김제남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만약 서경주의 제안으로 영창대군이 장님이 되었더라면 성종 때의 제안대군처럼 더 이상 왕위승계와 관련된 시비에 휘말리는 일 없이 천수를 누렸으련만 김제남은 이를 무시했고 결국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모함으로 인해 생을 마감한 영창대군

광해군 5년(1613) 4월 좌변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이 문경새재에서 일어난 은상銀商 강도살해사건의 범인 박응서朴應犀를 체포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얼마 후 박치의朴治毅를 제외한 나머지 공범도 모두 잡혔는데 그 면면이 예사롭지 않았다. 심우영沈友英, 서양갑徐羊甲, 박치인朴致仁, 이경준李耕準, 김평손金平孫 등 하나같이 명문대가 집안의 서자들로 서얼에 대한 사회적 차별로 출셋길이 막힌 처지를 비관하다 의기투합해 자칭 강변칠우江邊七友라는 사생계를 조직해 어울려 다니다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보고를 접한 이이첨은 즉시 한희길과 심의관 정항鄭沆을 조용히 불러 일을 꾸밀 것을 사주했고 이에 한희길이 먼저 잡힌 박응서를 회유, “김제남의 주도하에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거짓고변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서양갑으로부터 거짓자백을 받아내 광해군의 친국까지 마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역모에 연루되었다고는 하나 이제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죄를 묻기에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은지라 세상 여론도 전은론으로 들끓었고 광해군 자신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거칠게 없었던 이이첨 등이 집요하게 광해군을 다그쳐 마침내 광해군 5년 5월 30일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궁궐 밖 어느 민가에 구금시키는 데 성공했다.

광해군이 일단 한 발 양보하자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영창대군이 역모사건과 무관한 것은 광해군도 잘 알지만 그 사건을 기화로 돌이킬 수 없는 악연을 맺게 되었으니 장차 영창대군이 세상 물정을 알게 될 때가 되면 앙심을 품고 무슨 일을 꾸밀지 장담할 수 없게 된 이상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해 8월 2일 임해군 때 그랬던 것처럼 영창대군을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고 그 다음해인 광해군 6년(1614) 2월 10일 영창대군은 증살蒸殺이라는 참혹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의 강화부사는 계축옥사 조작에 일조했던 정항이었고 위리안치된 영창대군의 감시책임자인 수직무장守直武將은 임해군 때 일개 수장으로 있다가 직접 임해군을 목 졸라 죽인 이정표李廷彪였다. 영창대군이 병사했다는 거짓보고를 받은 광해군은 무참하게 살해당했을 어린 막내 동생에 대한 연민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임해군 때와 마찬가지로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지시했다.

인목왕후 역시 고역을 치러야 했다. 그녀는 사실상 대비전에 감금된 채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영창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가슴을 쥐어뜯는 아픔에 몸부림치며 통곡했지만 이미 벌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제는 인목왕후와 철천지원수가 된 광해군은 인목왕후를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 자리에 계속 앉혀놓을 수가 없었고 여론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광해군 10년(1618) 1월 후궁격인 서궁西宮으로 강등시킨 뒤 유폐시켰다. 광해군 15년(1623) 3월 13일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다시 복위는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고 난 뒤였다. 피붙이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제주에 유배되어 간신히 연명하고 있던 친어머니 노씨 부인과, 죽었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리고서 절에 의탁한 덕분에 살아남았던 조카 한 명, 그리고 친딸 정명공주뿐이었다.

인조 10년(1632) 6월 28일 인목왕후가 그의 한 많은 삶을 되돌아보며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지 말아라”는 유언을 친정집에서신으로 보내고 눈을 감았는데 그 이후로 연안 김씨는 구한말 연안 김씨 집안의 김덕수金德修가 조선왕실의 마지막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의친왕義親王과 혼인할 때까지 왕실사람과는 혼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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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조선 프린스 이준호 저 | 위즈덤하우스
이 책은 흔히 부귀영화, 명예, 권력을 모두 지녔으리라 생각되는 조선 왕실의 제2권력, 세자들의 실제 삶은 어떠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무너지고 흔들렸는지, 그들의 희생이 가져다준 조선의 정치적 이익 등을 깊이 있게 살펴보는 데 집중했다. 조선왕조의 경우, 일찌감치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단명으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유난히 많았는데 여기에는 어려서부터 강요받았던 고달픈 생활이 끼친 영향도 분명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왕조 특유의 권력세습 형태인 ‘적서차별’과 ‘적장자계승’의 원칙이 어떻게 조선시대 왕자들의 삶을 무너뜨렸는지를 중심으로 그들의 비극적인 사연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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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준호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학생 때에는 기자를 지망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읽은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감명을 받아 고고학연구자로 지망을 변경했다. 1983년 서울 동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그 후 일본 도쿄대학교 고고학연구실로 유학, 석·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풍납토성 발굴조사단, (사)역사문화연구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재)호남문화재연구원 등, 고고학 관련 기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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