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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어떻게 500년이나 존속했을까?

권력을 위해 역사를 비튼 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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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적서차별 의식은 조선시대 사회ㆍ정치관습으로, 조선왕실의 경우 왕위계승자 결정에 적장자계승을 기본으로 삼았다. 언뜻 보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왕조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조선왕조 특유의 왕위계승방식이다.

조선 건국의 명분을 위해 희생된 고려사

오늘날에도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적서차별 의식은 조선시대 사회ㆍ정치관습으로, 조선왕실의 경우 왕위계승자 결정에 적장자계승을 기본으로 삼았다. 언뜻 보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왕조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조선왕조 특유의 왕위계승방식이다.

적서차별 의식이 고려에도 만연했던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은 바로 〈훈요십조〉를 기록한 《고려사》에 있었다. 《고려사》는 세종의 교지를 받은 김종서金宗瑞ㆍ정인지鄭麟趾 등이 문종 1년(1451)에 완성한 고려역사서이지만 집필 자체는 태종 14년(1414)에 시작되었다. 이미 태조 4년(1395)에 정도전이 완성한 《고려국사高麗國史》라는 사서가 있었음에도, 1414년 태종 이방원李芳遠이 고려 말의 태조 이성계李成桂에 대한 기록 내용을 트집 잡아 전부 파기시키고는 하륜河崙, 남재南在, 이숙번李叔蕃, 변계량卞季良에게 새로이 고려역사를 정리하도록 명했다. 이들은 모두 제1차 왕자의 난(1398)으로 집권한 쿠데타 세력임을 보면 《고려국사》를 굳이 없애버리고 고려역사서를 다시 쓰려는 의도는 명확한 것이었다. 그들의 역모를 ‘우국충정’ ‘천우신조’ 등의 미사여구로 도배질을 해버렸던 주역이었던 만큼, ‘그들만을 위한, 그들만의 입장에 선 역사 세우기’ 작업이 벌어졌음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고려의 장자 왕위계승원칙을 조선의 적장자 왕위계승원칙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고려왕실이 실제로 장자에게 왕위를 계승해왔어야 한다. 그래야 조선왕실 특유의 적장자 왕위계승원칙이 이방원 자신이 급조해낸 변칙이 아니라 고려 태조 왕건 때부터 이어진 왕실법도로 포장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왕위계승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태조 왕건의 유훈을 충실히 지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왕에게 적정한 연령으로 성장한 장자가 있을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장자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다만 왕에게 자식이 없거나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하는 등 유훈에서 말하는 “장자가 착하지 못한” 경우가 발생했을 때 형제에 의한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다. 또한 형제간의 왕위계승이 연이어지는 시기에는, 먼저 왕위에 오른 왕의 재위기간이 매우 짧은 예도 많았다. 형제간에 왕위계승이 이루어지더라도 연장자 순으로 계승되었다. 예외적인 경우로 비록 왕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어미의 신분이 낮으면 계승 서열에서 밀려났는데 이는 적서차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귀족 사회에서의 엄격한 신분제한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왕실의 안정을 염두에 둔, 장자(여의치 않을 경우는 연장자)에 의한 왕위계승원칙이 충실히 지켜졌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를 확인한 태종 이방원 세력은 〈훈요십조〉의 내용 가운데 한 부분인 ‘장자長子’의 ‘장’ 자를 ‘적嫡’ 이나 ‘원元’ 자로 슬쩍 고치는 것으로 역사조작의 정점을 찍었던 것이다. 그렇게 태종 이방원 세력은 자신들의 역모를 고려왕조 이래로 시행되어왔던 왕위계승원칙을 지켜내고자 하는 충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치장하며 그들의 거사에 대한 정통성 부여작업을 완성했다.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정작자 계승원칙’ ‘적서차별’이라는 원칙을 세운 태종 이방원.


지키지 못한 적장자계승의 원칙

태종은 자기 후손들이 무난하게 왕위를 계승해갈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조선왕조 스물일곱 명의 왕 가운데 적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임금은 문종, 단종端宗, 연산군燕山君, 인종仁宗, 현종顯宗, 숙종肅宗, 순종純宗 등 일곱 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 명을 다할 때까지 정사를 제대로 펼칠 수 있었던 왕은 현종과 숙종뿐이었다. 다시 말해 적장자가 아니면서 즉위한 임금이 태조를 제외하고도 열아홉 명이나 된다. 세자로 책봉되고도 부왕보다 먼저 죽거나 폐세자가 된 여덟 명(태종의 양녕대군讓寧大君, 세조世祖의 의경세자懿敬世子, 명종明宗의 순회세자順懷世子, 광해군과 연산군의 세자, 인조仁祖의 소현세자昭顯世子, 영조의 사도세자思悼世子 순조純祖의 효명세자翼宗世子)을 감안하더라도 적장자계승의 원칙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13대 임금인 명종까지는 그럭저럭 적자에게 왕위계승이 이루어지지만 선조 이후로는 서자의 왕위계승이 주를 이루었다. 적장자계승원칙을 공공연하게 표방했건만 지키지 못한 채, 함량미달의 왕재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떠안고 왕위에 올라야 했던 서출왕들은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에 깊게 새겨진 상처를 곱씹으며 재위기간을 보내야만 했다. 태종 이방원이 지하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왕명 중에는 조선시대 왕의 이름을 외울 때 흔히 읊게 되는 ‘태-정-태-세-문-단-세……’에는 결코 나오지 않는 존호명이 적지 않게 보인다. 성종의 아버지인 덕종(의경세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정원군定遠君),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莊祖(사도세자), 헌종의 아버지인 익종翼宗(효명세자孝明世子) 등이 바로 그것이다. 만인지상의 존재인 왕위에 오른 그들이,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에게 존호명을 붙이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왕의 지극한 효성심의 발로로만 보려는 지극히 순진한 발상도 가능하겠지만 설득력 있는 설명은 되지 못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사정이라 한다면 바로 적장자계승이라는 왕위세습원칙, 왕권의 정통성에 직결되는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출인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이때부터 왕은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미묘한 열등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게 된다. 적장자 상속과, 서얼에 대한 차별이 엄격히 지켜지던 조선사회에서 정사를 펼치다보면 어떤 식으로든 적장자나 적서차별과 관련된 문제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조선사회 최고선의 권위자이자 그 구현자로서 군림해야 하는 왕이기에 이러한 판단까지 내려야 하는 왕의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면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럴수록 자신은 비록 서출이지만 적장자를 후계자로 삼아 온전한 정통성을 갖게 하고자 하는 욕망은 점점 커져가 결국은 적장자계승이 원칙의 차원을 넘어선 철칙으로 굳혀 갔을 것이다. 이는 거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다행히도 정실부인인 왕비가 아들을 낳아준다면 서출왕은 왕세자가 무난하게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주었을 것이다. 연산군과 숙종의 공통점은 둘 다 구중궁궐에서 태어난 몇 안 되는 적장자라는 점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왕들이었다는 점이다. 한쪽은 성격파탄에 전횡을 휘두른 왕으로, 또 한쪽은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한 정국운영으로 치세를 이룬 왕으로 평가가 엇갈리지만 이들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적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임금이었다는 정통성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과 숙종처럼 왕권의 정통성에 하등 문제가 없는 왕들이 계속 보위에 올랐다면 조선 왕조 500년은 불가능한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조선왕실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군림하기만 하는 왕정이었다면 언젠가는 왕실과 신하 가운데 어느 한쪽이 타도되어야 하는 결단의 시간이 찾아왔겠지만 서출국왕이 적지 않게 보위에 올랐던 조선왕조는 타협만으로도 충분히 신하 자신의 권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대상이었다. 조선왕조가 500년간 존속했던 이유를 어느 한 요소로만 설명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신하 사이의 중재자로서 왕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던 서출왕들이 연이어 보위에 올랐던 것이 이를 가능하게 한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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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조선 프린스 이준호 저 | 위즈덤하우스
이 책은 흔히 부귀영화, 명예, 권력을 모두 지녔으리라 생각되는 조선 왕실의 제2권력, 세자들의 실제 삶은 어떠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무너지고 흔들렸는지, 그들의 희생이 가져다준 조선의 정치적 이익 등을 깊이 있게 살펴보는 데 집중했다. 조선왕조의 경우, 일찌감치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단명으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유난히 많았는데 여기에는 어려서부터 강요받았던 고달픈 생활이 끼친 영향도 분명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왕조 특유의 권력세습 형태인 ‘적서차별’과 ‘적장자계승’의 원칙이 어떻게 조선시대 왕자들의 삶을 무너뜨렸는지를 중심으로 그들의 비극적인 사연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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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왕을 말하다 ]
[ 조선공주의 사생활 ]
[ 조선왕비실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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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준호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학생 때에는 기자를 지망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읽은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감명을 받아 고고학연구자로 지망을 변경했다. 1983년 서울 동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그 후 일본 도쿄대학교 고고학연구실로 유학, 석·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풍납토성 발굴조사단, (사)역사문화연구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재)호남문화재연구원 등, 고고학 관련 기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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