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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이여, 때가 오면 한 점 미련 없이 떠나라!

무턱대고 자유로워질 용기 “떠나는 시점은 떠나는 마음보다 드라마틱하다” 예고 없이 찾아온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낚아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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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말처럼 떠나는 건 쉽다. 한 발을 떼고 나머지 한 발을 마저 떼면 된다. 그것이 허공인지 탄탄한 땅 위인지는 본인만 안다. 막상 뗄 때는 허공이 불안하지만 떼고 나면 허공처럼 자유로울 수 없으리. 당장 뗄 때는 지상이 안정적이지만 두 발을 땅 위에서 떼어보라. 주저앉아 무릎이 까지거나 앞으로 자빠져 코가 깨진다. 일탈의 묘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상식적으로, 이론적으로는 계산되지 않는 마력. 아마도, 자유.

후배의 자유를 질투하고 있는 나

거실문을 열어놓고 TV를 보는데 바람 한 자락이 휘이잉 들어왔다. 그러자 곧 어깨가 선뜩해지는 것이 서늘한 기운이 휘돈다. 며칠 전까지 조금만 움직여도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더니 계절이 연락도 없이 제 갈 길을 오가고 있다. 서랍을 뒤져 카디건을 꺼냈다. 어깨에 걸치자 마음부터 발등, 무릎, 등과 배, 어깨가 차례로 데워졌다. 계절의 순환은 바람 한 자락으로도 힌트가 된다.

지난해 이맘때 동네에 사는 후배가 어른 손가락 굵기의 사샤모 한 팩을 달랑달랑 들고 집에 찾아왔다. 기름 살짝 둘러 프라이팬에 구운 뒤 저녁을 겸해 두부 한 모를 데치고 열무김치와 구운 김, 들기름 한 종지로 술상을 봤다. 와인 안주로 신 김치를 먹는 건 내 식습관이고, 맥주에 말린 생선과 들기름을 곁들이는 건 후배의 취향이다.

후배는 맥주를, 나는 싸구려 와인을 각자 알아서 마시는 코스. 이렇게 차려진 한 상만 있으면 우리는 새벽까지 끼룩끼룩 즐거워하며 갈매기처럼 수다의 바다를 날았다. 쓰고 보니 내가 대단한 술꾼 같지만 정작 술이 약해 기분만 내다가 슬쩍 꽁무니를 빼는 스타일이고, 후배는 시간과 물량만 허락한다면 최선을 다해 달리는 소위 ‘주당’이다.

미혼인 후배는 백수 된 지 어언 일 년째였다. 사표를 던질 때 ‘다시’ 일자리를 갖게 될 것 같지 않다고 하더니 정말이지 일을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술을 빚을까 다도를 배울까 같은 생각으로 계절을 났다. 암만 숨만 쉬는 백수라도 돈이 필요할 터였다. 생활에 필요한 최저생계비는 아르바이트로 해결했다. 심적ㆍ물리적 공간이 좁아지는 것에 대해 나라면 옴치고 팔짝 뛰며 조바심을 냈을 텐데 그녀는 달랐다. 후배의 팽팽해진 피부와 목젖이 드러나도록 웃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가 후배의 자유를 질투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가 일 년 전이었다. 아직 내가 회사생활 17년 차 직딩이던 시절.


얼굴이 하얘지고 식은 땀이 나지만

‘어떤’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회사를 그만두는 순간은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무용담을 양산하는 것 중 하나다. 김영주는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순간이 돼서야 잡지계에 몸담아온 이십 년을 정리한다. ‘일중독’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전력 질주했으니 미련이고 아쉬움이고 할 게 없었다. 가장 트렌디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그는 낡은 운동화를 꺼내 신고 튼튼한 배낭을 부려 떠났다. 그렇게 나온 첫 책이 『캘리포니아』다(이후 다섯 권이 더 나왔다). 타고난 글솜씨와 표현력, 허세를 찾아볼 수 없는 여정까지 어떤 목적으로 읽어도 책은 또박또박 머릿속에 박힌다.

잡지기자로 시작해 편집장과 잡지본부장을 거치며 패션과 문화를 아우르는 트렌드세터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그는 한눈에 봐도 시선이 멈추는 멋쟁이였다.

잘나간다는 것, 먹어준다는 것 앞에 생략된 수식어가 있다. ‘지금 당장은’이다. ‘대세’, ‘올킬’ 등 요즘 쓰이는 신조어 앞에도 생략된 단어가 있는데, 바로 ‘늬들끼리’다. 지금 당장 늬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다는 얘기다. 보라,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등 돌리면 아무 의미 없이 휘발되는 말들이다. 우리끼리 잘나가고 먹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김영주는 직장생활 이십 년 만에 통렬한 심경으로 무릎을 친다. 배낭을 싸고 운동화를 꺼냈다. 소위 잘나가던 시절 겉으로만 핥던 곳을 깊숙이 건드려보겠노라 다짐한다. 절반은 우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완벽주의자에, 누구도 속여먹지 못하는 범생이 기질이 화려하고 멋스러운 외양에 가려진 그녀의 본모습이었으니. 조직생활에 찌든 생활인의 모습을 버리고 가장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나’를 찾아가는 여행에 앞서 어찌 울컥하지 않았겠나. 숨길 것도 없고, 숨겨야 할 이유도 없으니 이제 나를 까발리는 것밖에 남지 않았을 때. 여행은 비로소 시작된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은, 설렘이다. 외롭지만 두근거리고 두렵지만 솔깃한 길이다.(중략) 말리부를 지나면서 자동차가 줄어들었다. 이제 이 길에도, 인생이 그러하듯, 다른 모습이 오고 있다. 30분쯤 지났을까. 산의 형태는 어느새 절벽으로 변했다. 절벽은 그 끝을 볼 수 없는 높이까지 치닫고 있고 바다의 물결은 거칠게 춤을 추고 있다. ‘자연을 만났을 때 우리는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무디게 할 수 있다’고 시를 쓴 워즈워드처럼, 작아지는 느낌을 갖기 위해 사막으로 향한 알랭 드 보통처럼, 더 넓은 세상을 보려고 모토 사이클 하나로 안데스 산맥을 넘어간 체 게바라처럼, 자연과 만났던 그들의 가슴 벅참이 이제 내 혈액 속으로 서서히 퍼져오고 있다. 시작일 뿐인데, 이 긴 길과 잠깐 만났을 뿐인데.
캘리포니아 남쪽과 북쪽을 잇는 1번 하이웨이인 태평양 해안도로 PCH를 건널 때, 김영주는 서쪽으로 넓은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 해안도로를 걷다가 느닷없이 절벽을 만난다. 그때 그 당황스러움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자의건 타의건 최종선택은 내 몫인, 설레고 두근거리는 새 출발. 초반엔 잠깐 황홀하다. 그러다가 알게 된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그런데 어쩌랴. 직딩이라면 두 손 들어 ‘기브 업(Give Up)’할 텐데, 나 홀로 가는 길이다 보니 떠맡길 사람이 없다. 얼굴이 하얘지고 식은땀이 나지만 일단 하고 본다. 그러다 보면 피식, 웃음이 난다. 나 자신이 애틋한 거다.

그래, 와보니 어때? 홀로 떠나도 견딜 만해? 조금 더 힘을 내볼 테야?


예고 없이 찾아온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낚아채라

비틀즈, 밥 딜런, 닐 영, 엘튼 존, 유투, 폴 메카트니와 루 리드 등 주로 1970,80년대 팝스타들이 그녀의 귀에 시종일관 꽂혀 있다. 그것도 좋았다. 어릴 적 오빠 언니로부터 사사한 팝 넘버들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 책은 모호하다. 여행을 하면서 쓴 책이니 여행책인데, 요즘 독자들이 좋아하는 구체적인 여행정보나 싸고 맛있는 음식점, 깨끗한 숙박시설 같은 상세정보에 인색하다.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정말 맛있는 집 음식은 접시를 싹싹 긁어가며, 손가락 쪽쪽 빨며 먹었다고 소개하지만 그뿐이다. 더 이상의 소개는 없다. 대신 여행하면서 느낀 단상들을 아주 세밀하고 친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게 바로 안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숫자와 간판이 아닌, 아찔한 절벽을 지나 꽃이 만발한 국도를 따라가면 맛있는 커피를 파는 노부부가 산다, 는 식의 담백한 안내서. 우리가 여행에서 바라는 것은 바로 이런 온기 아닐까.

그는 내 사수였기도 한데, 사석에서 “떠나는 시점은 떠나는 마음보다 드라마틱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떠날 때는 누구나 가슴이 설렌다. 드디어 떠나게 됐다는 드라마틱한 감상이 찾아온다. 그러나 선배의 말은 달랐다. 실은 마음보다 그렇게 떠나게 됐을 때의 시점이 더 운명적이라는 뜻일 거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흥분으로 몸이 살짝 떨렸다. 언젠가 내게도 그런 순간이 올 것을 알았나 보다. 일탈은, 실은 예정된 것이기에 떠나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몸과 마음을 다해 알게 된다는 뜻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때가 오면 가는 거다. 한 점 미련도 남기지 말고!

술 석 잔에 불콰해져서 거실문을 열었다. 휘이잉, 하고 바람 한 자락이 들어왔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든다. 후배가 옆에 오더니 팔짱을 와락 낀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와인이 출렁하고 글라스 안에서 4분의 2박자로 춤을 췄다.

열렬히 느껴지면, 떠나는 거예요. 이러나저러나 내 책임이다 생각하면 또 이러나저러나 내 인생이니까 내 맘대로, 한 번쯤 해도…… 그래도 되는 거 아니에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떠나는 건 쉽다. 한 발을 떼고 나머지 한 발을 마저 떼면 된다. 그것이 허공인지 탄탄한 땅 위인지는 본인만 안다. 막상 뗄 때는 허공이 불안하지만 떼고 나면 허공처럼 자유로울 수 없으리. 당장 뗄 때는 지상이 안정적이지만 두 발을 땅 위에서 떼어보라. 주저앉아 무릎이 까지거나 앞으로 자빠져 코가 깨진다. 일탈의 묘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상식적으로, 이론적으로는 계산되지 않는 마력. 아마도, 자유.

넘실넘실 궁핍한 자유를 즐기고 있는 내 후배의 자신만만함은 가을밤 함께 기울인 술잔만큼, 딱 그만큼의 여운을 남겼다. 오늘 하루의 사연만으로도 어깨가 무거운 당신, 마음의 향방에 귀를 박고 때를 기다릴 일이다. 어떤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낚아채라.

서점에 가면 많은 책들이, TV를 켜면 많은 인생 선배들이 떠나라고 부추긴다. 실제로 떠나보면 머물러 있을 때보다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한뼘은 성숙해져 돌아온다. 중요한 것은 떠나는 행위가 아니라 떠나야 하는 마음이다. 다른 말로, 용기다. 떠났다가 돌아온다고 해서 세상이 크게 바뀌진 않는다. 돌아오는 시간이 예정보다 늦는다고 해서 남아있는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안심하고 당신이 왜 떠나고 싶은지의 이유를 물어보라. 한 가지 답이 선명하게 나오면 때가 온 것이다.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은 몇 가지 tip_

해외 나갈 때 몇 분만에 짐 싸세요? 난 정말 짐을 잘 싼답니다. 다녀와선 후다닥 풀어서 제 자리에 갖다놓죠. 여행의 설렘과 여운을 음미할 새도 없이 서둘러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내 성격, 나도 피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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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인생 충전기 안은영 저 | 해냄
베스트셀러 『여자생활백서』를 통해 40만 독자들에게 일과 사랑에 관한 멘토로 활동해온 안은영 작가가 신작 『여자 인생 충전기』를 내놓는다. 18년이라는 오랜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작가 스스로도 충전의 시간을 보내며 써내려간 이 책 속에는 "뭘 하기보다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성장과 치유의 시간을 통해 '나 자신 찾기'를 해볼 것을 제안한다.

 




안은영 작가의 여자 이야기

[ 여자 생활 백서 ]
[ 사랑하기 전에 알아야 할… ]
[ 여자공감 ]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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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안은영

여성들의 사랑과 연애, 직장생활과 인간관계에 대한 상큼발랄한 조언서 『여자생활백서』로 40만 독자를 사로잡으며 2030 여성들의 멘토로 자리잡았다. 남자와 연애에 관한 지침서 『여자생활백서2』, 연애와 결혼의 갈림길에서 좌충우돌하는 이 시대 여성들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충고와 따듯한 위로를 담은『여자공감』이 있으며, 소설로는 『이지연과 이지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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