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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걸어오는 정물 -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를 통해 본 상징과 알레고리

정물화의 탄생과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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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풍속화와 정물화가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풍속화와 정물화가 탄생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덜란드에서 풍속화와 정물화가 발전한 것은 그들의 종교와 관련이 깊다.

정물화는 영어로는 ‘스틸 라이프still life’, 프랑스어로는 ‘나튀르 모르트nature morte’라고 한다. 움직이지 않는 생명 또는 죽은 자연이란 뜻을 담고 있는 정물화는 움직이지 않는 사물과 생명이 없는 사물만 모아놓고 그린 그림을 총칭한다. 정물화는 인물화나 풍경화에 비해 그 탄생이 매우 늦었다. 인간이나 역사가 아닌 꽃과 과일 같은 사소한 대상이 화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좀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물론 고대에 정물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의 폼페이 벽화나 로마의 모자이크에서도 나무, 꽃, 과실 등을 그린 경탄할 만한 수준의 것이 남아 있다. 그러나 중세에서는 거의 답보 상태였다. 정물이 화면을 가득 채운 그림이 나타났던 것은 불과 16~17세기의 네덜란드에서였다. 정물화라는 용어를 만든 것도 18세기 네덜란드의 미술사학자 후브라켄이었다.

왜 네덜란드였을까? 우리는 네덜란드 하면 보통 바다보다 낮은 땅을 일군 개척정신, 아름다운 튤립과 풍차를 떠올린다. 경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유니레버, 필립스, 하이네켄, 셸 등 네덜란드 태생의 다국적 기업을 떠올릴 것이다. 네덜란드 문화에 좀 더 깊은 관심이 있다면 매춘과 마약, 안락사와 동성애자들의 결혼이 공식적으로 허용된 극단적으로 진보적인 나라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미술애호가들에게 네덜란드는 반 고흐와 렘브란트 판 레인, 루벤스 그리고 몬드리안이 태어난 나라이며,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시대에 기묘하게 극사실 예술인 ‘네덜란드 회화’ 혹은 ‘플랑드르 회화’를 창조한 나라로 다가올 것이다.

네덜란드가 정물화를 비롯한 예술작품의 풍성한 보고가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15세기 중반 플랑드르 지방(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프랑스 북부에 걸친 지역으로 통상적으로 옛 네덜란드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겐 영어식 발음으로 익숙한 『플란다스의 개』라는 동화의 배경이기도 하다)의 기도서는 일일이 사람이 손으로 쓰고 그려 만든 필사본이었다. 그 필사본에는 성서의 내용을 그린 삽화가 들어갔고, 가장자리는 여러 가지 과일 문양 등으로 장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 모자나 성 가족과 같은 성화에 석류나 사과, 나이프 등이 거의 정물화에 가깝게 사실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디테일들이 정물화로 독립해가는 과정 중 일부로 파악한다. 이렇게 발전한 네덜란드 정물화는 크게 꽃 정물화, 과일 정물화, 음식(식사) 정물화, 바니타스 정물화, 오감 정물화 등으로 나뉜다. 물론 모든 정물화가 이렇게 명쾌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이 소재들은 서로 많은 부분이 끊임없이 중첩된다.


[얀 브뤼헐, 「보석, 동전, 조개껍질과 함께 있는 화병」, 구리에 유채, 65x45cm, 1606, 뮌헨 알테 피나코텍]

네덜란드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풍속화와 정물화가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풍속화와 정물화가 탄생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덜란드에서 풍속화와 정물화가 발전한 것은 그들의 종교와 관련이 깊다. 네덜란드의 종교는 개신교 중에서도 한층 엄격한 것으로 알려진 칼뱅교다.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제국(16세기에 네덜란드를 포함해 스페인, 오스트리아, 독일 지역을 통치한 제국)이 가톨릭만 강요하는 것에 반발, 17개 주 가운데 북부 7주가 독립선언을 해 형성된 국가다. 국교는 당연히 칼뱅교였다. 칼뱅교는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 칼뱅에게서 발단한 프로테스탄트 사상으로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 신이 인간을 의로운 존재로 인정한다는 뜻으로, 종교 개혁의 기본 원리 중 하나다), 신앙의 유일한 규준으로서의 성서를 중요시하고, 특히 루터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구원받는 자와 멸망에 이르는 자는 영원한 옛날부터 신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예정설, 빵과 포도주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성령의 힘이 영적으로 관여한다는 하는 성찬론, 그리하여 성찬식을 포함하는 가톨릭의 미사를 폐지하고 예배를 설교 중심으로 만들었으며, 목사와 장로로 이루어진 장로회의에 따라 교회가 운영되도록 했다.

칼뱅교는 종교원리주의, 예정설, 지옥의 공포를 강조하는 설교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자기규제, 청렴, 종교공동체, 종교 개혁을 부르짖으며, 이런 교리에 맞추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을 통제했다. 신정정치, 종교적 독재, 이 원칙에 어긋나면 누구를 막론하고 사형시킬 정도였다. 심지어 칼뱅의 청렴주의는 신의 뜻을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어린아이까지 사형시키기도 했다.

칼뱅교는 인간을 신의 용기로 보는 루터의 수동적인 경건에 대해, 인간을 신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보는 활동주의적 경향을 가졌으며, 적극적인 태도로 사회생활을 할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인지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는 유능하고 성실한 일꾼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단련된 확실한 경제관념과 노동에 대한 성실한 자세는 자린고비와 더치페이를 만들지 않았던가. 어쨌든 네덜란드 사람하면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가는 꾀바르고 의지가 강한 인상을 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칼뱅교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에서는 더 이상 이전처럼 교회나 수도원, 군주나 궁정사회에서 더 이상 그림을 주문할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개신교는 성상을 우상승배로 여겨 금지했고, 미사도 허례에 불과하다고 폐지해버렸으니, 교회를 위한 장인, 화가, 조각들의 작품들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교회나 수도원이나 군주가 작품을 주문하지 않으면 화가들은 어떻게 먹고살아야 했을까?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부르주아들과 일반 시민들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계층이 두텁고, 일반 시민들의 경제력도 좋아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개신교 신자라 해도, 신앙심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을 터. 이런 배경에서 네덜란드 특유의 정물화가 탄생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덜란드 정물화는 의인화된 알레고리다. 특히 정물화의 내용은 하나의 텍스트처럼 재구성하여 읽을 수 있다. 네덜란드 특유의 종교적인 배경 아래 제작된 정물화는 교훈과 훈계, 즐거움이 결합되어, 예술이란 즐거운 것이어야 함을 설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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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살롱 유경희 저 | 아트북스
책 속의 글들은 몇 년 전부터 저자가 대중강좌를 해오던 결혼, 패션, 카페, 여행, 요리 등의 테마들이다. 미술 이야기 뿐만 아니라 영화, 문학, 드라마, 인간관계, 온갖 사회문제 등 종횡무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한 화가, 한 그림의 에피소드만 얘기해도 우리의 삶은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모른다. 소소하지만 그 배경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는 알 수 없는 코드들을 하나하나 해석하며 첫걸음을 떼는 이 책은 2004년에 나온 『테마가 있는 미술여행』의 개정증보판으로, 책 내용 중 결혼, 아동, 요리, 살롱, 카페, 여행의 여섯 개 테마는 개정증보판에 새로이 추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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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유경희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시각예술과 정신분석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뉴욕 대학교에서 예술행정전문가 과정을 수료했다. 수년간 미술잡지 기자와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현재는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를 운영하며 예술과 인문학을 통한 상상력과 창의력, 힐링과 멘토링에 관한 글쓰기, 상담, 특강 등을 기획ㆍ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예술가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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