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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도 무대에서도 ‘미운 남자’ 최일화

“제 얘기죠. 미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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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5년간 한국 TV와 영화 전반에서 조연급으로 최다출연 1위에 꼽힌 사람이 바로 배우 최일화다. 얼굴은 그래서 익숙하지만 여전히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그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방송이나 영화는 경제적 수단에 불과하니까. 다만 무명이었던 자신처럼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도 때를 만나지 못한 수많은 연극인들을 위해 그의 실험은 계속될 것이다. 인생을 걸고.




지난해 배우 최일화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극단 하나를 창단했다. 하지만 공연을 올릴 여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공연을 작년에 올리려고 하다가 돈이 여의치 않아 못 올렸어요. 제가 25년 동안 무명배우였어요. TV나 영화한지 6년 밖에 안됐죠. 연극에서 ‘삼류배우’, ‘서안화차’, ‘추적’ 말고는 대사도 별로 없었어요. 그 오랜 세월, 왜 내가 유명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봤는데 무대에 많이 못 서니까 연기 실력을 닦을 기회가 없고, 공간이 없으니까 연습할 곳도 없고, 그러다 생계수단도 막막해졌죠. 저는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을 위해서 연습실을 만들고 공연을 올리는 게 꿈이었어요.”

선택받지 못한 수많은 무명배우들을 위해 그는 자비를 들여 지금의 연습실을 장기 대관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이 무대에 서십시오.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서 이걸 발판으로 다른 연극이나 TV, 영화에서 컨택받지 못하면 연극하지 마십시오’ 그랬죠. 죽기 살기로 하자는 얘기예요. 평생 살면서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는 게 쉽지 않거든요. 이렇게 한 번 무대에 서고 나면 1, 2년은 그 힘으로 살 수 있어요.”

무대에 서는 것이 배우에게 어떤 것인지 잘 아는 25년간 무명배우로 살았던 그는 그래서 과감히 온 집안 살림을 거덜 내고 빚을 지면서 극단을 만들고 배우와 제작진에게 급여를 주고 있다. 그가 요즘 TV 출연이 잦은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이 담백해요. 무진장 재미있거나 감동이 있는 게 아니라 연극적이면서 담담한, 6개월은 잔상이 남는 연극이죠.”

우여곡절 끝에 극단 ‘혜화’라는 이름으로 올리는 첫 연극은 바로 <미운 남자>. 연습 현장에서 만난 배우 최일화의 눈에는 여타 자주 연기하던 독기나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었다. 허름한 트레이닝복에 심술이거나 허세가 어려 있는 대사는 푸근하리만치 평범한 아버지 같았다.

“중년의 실업자 남편과 중학교 교사인 아내가 집안에서 다투다가 불국사로 여행을 가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예요. 11월 9일에 이 공연을 올리면서 남편과 아내가, 기간이 길든 짧든 결혼한 부부가 올해 연말까지 이 공연을 본다면 두 손 맞잡고 다른 곳만 응시하던 시선을 서로 마주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배우 최일화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나니 평소에는 어떤 남편일까 궁금했다. 그는 단박에 <미운 남자>에서만 미운 남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제 얘기죠. 미운 남자...백수로 집안 일만 하는 남자,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 집에만 있으면서 아내를 타박하고 고집이 세서 자기 입장만 내세우는 남자, 실제로 제가 그래요. 그래서 미운 남자인 거죠.”


그는 스스로 재능이 있다곤 생각 않는다. 하지만 연극만을 고집했다. 25년간 그는 무명이었고, 6년간 그는 TV와 영화에서 종횡무진,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무명으로라도 한 길만 걸었던 건 연극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고집을 부렸던 거죠. 운이 좋아서 동아연극상도 받고 TV도 하게 된 것이고요. 그야말로 하늘의 별을 딴 거죠. 재능이 없다는 걸 알면 빨리 접고 다른 일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가정이 편했을 텐데… 제 고집만 부린 제 자신이 좀 밉죠. 같이 사는 사람도 불편하게 만들었으니까 제가 미운 남자죠.”




극단 ‘혜화’는 능력이 없다기보다 때를 못 만난 배우들의 무대를 올린다는 의미에서 ‘연극 힐링캠프 프로젝트’를 표방한다. 젊은 시절 포스터를 붙이느라 하루 종일 스무 번 넘게 대학로를 돌아다니던 그의 괴로운 기억도 한몫했다. 그래서 극단 이름이 ‘혜화’다. ‘혜화’는 수많은 무명 배우들의 이름이다.

“자꾸 무명이라고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제 청춘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45살까지 대학로에서 포스터를 붙였어요. 배우보다는 소품 만들고 조명, 음향을 하고, 그런 일들을 해왔기 때문에 젊은 얼굴로 무대에 오른 적이 거의 없어요.”

기자 역시 어떤 무대에서도 그의 젊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자꾸 그의 주름에 시선이 앉는다.
까놓고 얘기해 돈이 되는 일이 아니지만, 오히려 1년에 30편씩 번안 연극 작품의 주인공역 제의가 들어오고 있지만 그는 아직도 창작만을 고집한다.


“저희가 내년까지 100명을 무대에 세울 건데 여러 각도로 재미있게 만들 겁니다. 제작자가 나서지 않고도 연극을 한다는 걸 보여줘야죠. 작가도 살리고, 배우도 살리고, 연출도 살리자는 의미로 창작극 위주로 할 겁니다.”

앞으로 배우 조성하, 권용운, 임대호, 차인표 등이 그의 뜻에 함께 해 잠깐이라도 출연하기로 했다.





연기를 시작할 무렵 김갑수, 이혜영, 이창훈 등이 주인공이었던 무대를 보며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고만 생각했던 최일화, 그 생각은 머리에만 머물렀다. 25년 동안.

“아내가 어느 날 제 공연을 보고 그러더라고요. ‘당신은 말을 참 편하게 하네. 무대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편하게 해. 배우는 무대에서는 좀 달라져야 하는 거 아냐?’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저는 망치로 두드려 맞은 것 같았어요. 20년이 지나서 그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피나는 노력이란 게 뭔지 알만큼 노력했다. 그러니까 그의 주름 하나하나에는 그의 집념이 들어가 있는 거다.

그는 가족에게 눈물나게 미안하다. 지금도 7개월째 집에 생활비를 갖다 주지 못하고, 한 달에 두어 번 집에 가서 하루 종일 막내아들과 축구를 해줄 뿐이어서 미안하다. 미안하지만, 그는 여전히 할 일이 있다.


“하지만 제가 아직 챙겨야 할 사람들은 무명의 연극인들이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별을 따야죠, 계속. 3년 정도는 더 해서 좀 나아지면 다른 후배가 나서서 극단을 꾸리고 저는 그 때 TV나 영화하면서 경제적으로 보충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는 258% <미운 남자>다.




최근 5년간 한국 TV와 영화 전반에서 조연급으로 최다출연 1위에 꼽힌 사람이 바로 배우 최일화다. 얼굴은 그래서 익숙하지만 여전히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그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방송이나 영화는 경제적 수단에 불과하니까. 다만 무명이었던 자신처럼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도 때를 만나지 못한 수많은 연극인들을 위해 그의 실험은 계속될 것이다. 인생을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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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예진

일로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쏘다닌 지 벌써 15년.
취미는 일탈, 특기는 일탈을 일로 승화하기.
어떻게하면 인디밴드들과 친해질까 궁리하던 중 만난 < 이예진의 Stage Story >
그래서 오늘도 수다 떨러 간다. 꽃무늬 원피스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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