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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기 위해서다

내가 원하는 그 모습 그대로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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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태어난 것일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자 이토록 안간힘 쓰는 것일까? 확실한 건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세상을 기웃거리며 남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내가 원하는 그 모습 그대로 살기 위해서 라는 것. 좋은 대학과 좋은 직업과 좋은 집과 좋은 차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면서 “와” 하고 감탄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우리는 더럽고 역겹지만 자신이 발 디딘 땅을 결국 떠나지 못한다.
돈도 없고 먹고살 길도 없는 것이 그 원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우리가 이 역겨운 땅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그 역겨움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역겨움을 견디는 것이 저 황량한 세계에 홀로 던져지는 두려움을 견디는 것보다,
두려움의 크기만큼 넓고 깊게 번지는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다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김언수, 『설계자들』 중에서



하고 싶은 것만 하기에도 짧은 게 인생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가끔 언론에서 세속적 성공의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춘 사람을 본다. 적어도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부유한 집안 환경, 냉장고 CF에 등장할 법한 가족 구성원들, 이를테면 인자한 아버지와 따뜻한 어머니, 능력 있는 형제자매들 등등. 그들은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으며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은 이후 고소득 전문 직종에 종사하다가 역시 비슷한 수준의 배우자를 만나 그 부모 세대와 마찬가지로 강남 일대에 터를 내리며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유지한다. 쭈욱.

그런데 또 가끔 언론에서 모든 성공과 행복의 조건을 완벽히 갖춘 사람의 불행을 본다. 부와 권력과 인기와 명예를 갖추고 TV에 나와 정치적인 미소를 부풀리며 웃던 이들이 허무하게 스스로의 손으로 삶을 마감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잊혀질 틈 없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아, 이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인간은 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내재화시킨다. 나의 욕망, 행복과는 별개로 타인의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릴 적부터 모범생의 길만 직선으로 걸어온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자기 내면의 움직임과는 상관없이 죽을 때까지 정도(定道)만을 걸을 확률이 높다. 그 길로 걸어야만 타인에게 인정받고 부러움을 살 것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그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법은 배우지 못했기에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삶을 끔찍하게 두려워하거나 심지어 죄의식을 느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타인의 욕망만을 충족시키며 사는 삶의 허무함이다. 대개 사람들은 너무 늦게(주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야)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가를 깨닫는다. 그것은 마치 찬란하고 영롱한 색채로 유혹하는 이구아나를 손에 넣기 위해 화살을 당기는 순간 그것이 무디고 칙칙한 색깔로 바뀌는 것과 같다. 손에 넣을 수도 없으며, 살아 있는 한 채워지지 않는 영원한 결핍. 이것은 나만의 개똥철학이 아닌 세계적인 철학자 라캉의 주장이기도 하니 분명 허튼소리는 아닐 테다.

우리는 왜 태어난 것일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자 이토록 안간힘 쓰는 것일까? 확실한 건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세상을 기웃거리며 남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내가 원하는 그 모습 그대로 살기 위해서 라는 것. 좋은 대학과 좋은 직업과 좋은 집과 좋은 차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면서 “와” 하고 감탄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사람들은 다시 제 삶으로 돌아가 제 몫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와” 하는 외마디 탄성을 들은 대가로 제 삶을 몽땅 내어준 사람은 남은 평생 몸에 맞지 않은 분장을 하고 이국의 가면무도회에서 살아간다. 발목을 자르기 전에는 절대로, 절대로 벗겨지지 않는 빨간 구두를 신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춤을 추며.

비록 껍질을 벗긴 내 본모습이 조악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일지라도 내 본모습을 찾으려 온 마음을 기울이며 사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알다시피 ‘나’를 찾는 과정은 우아하고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온 발바닥에 물집이 박힐 정도로 고통스럽고, 일주일 전 돈을 빌린 친구에게 또다시 돈을 빌려야 하는 것처럼 구차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래도 끝까지 나를 찾는 일을 그만둬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혹시나 그렇게 힘들여 찾은 내 모습이 실망스럽고 울퉁불퉁 모난 조각돌 같아도 일단 따스하게 안아주면 어떨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엄청난 일을 이룬 거니까.


찰스 스트릭랜드. 나는 많은 시간을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 남자를 떠올리며 살았다. 잡지나 인터넷에서 우연히 타이티라는 단어를 봐도 그가 가장 먼저 떠올랐고, 고흐의 편지를 읽으면서도 그를 생각했다. 한 가지를 완벽히 포기하지 않는 한 절대 다른 한 가지를 주지 않는 세상의 잔혹한 룰에 몸을 맞추면서도 그를 떠올렸다. 하찮은 망설임과 머뭇거림을 훌훌 털어버리고 단 일 년만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만 마음껏 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용암처럼 들끓을 때마다 그를 떠올렸다. 그랬다. 언제부턴가 『달과 6펜스』 속 이 남자는 내게 자유나 열정, 용기의 실체 그 자체로 인식됐다.

알다시피 『달과 6펜스』의 찰스 스트릭랜드는 마흔의 나이에 모든 것(주식중개인이라는 안정된 직업, 아름다운 아내와 두 아이라는 가정의 울타리, 친척과 친구와 재산과 경력과 말 그대로 몸뚱이를 제외한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 떠난다. 그는 사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결코 ‘화가가 되고 싶어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림을 그리기 위해’라고 얘기한다. 화가라는 직업을 갖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일은 엄연히 다르다. 화가라는 직업 안에는 어떤 규율과 억압과 의무의 빛이 어쩔 수 없이 내포되어 있다. 화가라는 직업인이 되자면 그는 파리의 초라한 뒷골목 대신 정갈하고 화려한 캠퍼스를 먼저 찾아 학위부터 취득해야 했을지 모른다. 화풍이 비슷하거나 다른 동료 화가들과 교류하며 미술계의 동향을 살피고 정보도 주고받고 인맥도 형성해놓는 일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처음부터 오직 하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기에 그저 그림을 그릴 뿐이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그에게는 마흔의 나이에 시작한 그림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재능조차 검증되지 않은 실력으로 새로운 세계에 뛰어드는 것이 과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인가 따위의 고민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찰스 스트릭랜드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은 붓과 종이뿐이었다. 세계를 이해하거나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 타인을 염두하거나 뒤섞일 이유도 없었다. 오로지 예술만이 전부인 세계, 그는 그것만을 원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후 찰스 스트릭랜드는 현실 속의 고갱과 꼭 마찬가지로 세속을 완벽히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자신만의 파라다이스를 찾아 세계를 떠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종착점이 바로 그 유명한 타이티섬이다. 번뜩이는 야성의 자유와 원시의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신비의 땅. 그곳에 정착한 이 미치광이 예술가는 그림과 완벽히 혼연일체되어 예술만을 남긴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차단한 채 스스로가 가장 원하던 삶의 모습을 완성해 나간다. 예술, 즉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자신의 모든 시간을 채우는 삶, 그것만이 그가 원한 전부였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와 우스운 유명세를 타거나 친인척들의 손에 이끌려 정신병동에 갇혀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한다. 그의 삶, 불같은 열정으로 결국 스스로를 태워버린 삶, 세속의 모든 인연과 굴레를 저잣거리의 돌멩이보다 더 하찮게 여긴 삶(『달과 6펜스』의 ‘달’은 인간을 어떤 의미에서 광기로 이끄는 예술적인 창조에 대한 열정을, ‘6펜스’는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벗어던진 세속적 인연과 굴레를 뜻한다는 것이 정평이다), 모든 욕망을 차단한 채 붓만 휘갈기는 괴물 같은 시간으로 가득한 그의 삶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책을 덮고도 오랜 시간 이 질문과 씨름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그의 삶을 이렇게 결론 내렸다. 이것이야말로 ‘온전한 승리’라고.



정말 아브라함은 인생을 망쳐놓고 말았을까?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 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한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르다.
우주보다 깊고, 피보다 진하고, 천 만 송이 꽃보다 더 다채롭고 지긋한 우리네 삶에서 과연 무엇이 진짜 승리이고 성공일까? 열정과 신념만을 쫓아 원하는 모양 그대로의 삶을 살아낸 찰스 스트릭랜드야말로 진정한 성공을 이룬 것이 아닐까?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진짜 성공이란 바로 세상에 꼭 한 벌뿐인 나만의 옷을 만들어 입는 행위와 같다는 걸. 유행하는 옷도 아닌,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명품 옷도 아닌 내 몸에 꼭 맞는 편안하고 개성 있는 옷을 지어 입는 것. 우리 모두는 지금 그 과정 어디쯤에 서 있다.


더 쓰고 싶어 죽을 수도 없는 소설가의 고백
-마루야마 겐지
『산 자의 길』

독특한 제목이었다. ‘산 자의 길’이라니. 제목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전해져왔다. 그런 순간이 있다. 집 앞 도서관이나 낡은 서점 앞을 무심히 지나다 마치 운명처럼 맞닥뜨리게 되는 책 한 권을 만나는 순간. 그 순간의 신비함과 경이로움, 우연을 가장한 놀라운 숙명을 우주를 유영하는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 유독 ‘그’ 혹은 ‘그녀’를 만나 삶이 포개지는 순간과 비교한다면 지나친 확장일까.

『산 자의 길』을 만난 순간은 분명 우연이었으나 예견된 필연이었다. 당시 나는 강렬하게 내 머리를 때려줄 ‘무언가’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내가 오늘 아무렇게나 흘려보낸 하루는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고대하던 시간’임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며 시간을 낭비하는 나 자신을 호되게 질책해봤건만 몸을 빛의 속도로 굴리며 살아가야 하는 도시의 일상은 나의 체질에 안 맞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마루야마 겐지를 만났다. 마음이 태양 볕에 융해되는 치즈 덩어리처럼 풀어지는 순간,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탁발승처럼 푸른 머리통을 삐죽 내민 그가 내 삶에 걸어 들어온 것이다. 커다란 죽비 하나를 손에 쥔 채.




내가 바라마지 않았던 것은 생계의 염려가 없는 안정된 인생이 아니었다. 자극과 변화에 가득 찬,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함이 연속되는 듯한, 모험적인 운명의 전개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산 자의 길』은 마루야마 겐지의 자전적 에세이다. 청년 시절 문학을 선택하여 오로지 문학이라는 외길만 걸으며 살아온 고집스러운 한 소설가의 내면적 고백이다. 문학가로서 첫 발을 내디뎠을 때 편집자로부터 ‘여기는 당신과 같은 야만인이 들어올 세계가 아니다. 여기는 바늘과도 닮은 대단히 섬세한 신경의 소유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랑과 상냥함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다’라는 모욕적인 발언을 들은 그는 훗날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이 속한 세계를 온전히 떠나는 소설가로 거듭난다.



정신을 차리니 소설 외에는 하고 싶은 일이 사라지고 없었다.……(중략)……소설가라면 소설 그 자체로 승부를 거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는 근원적인 외침이 밤이고 낮이고 가슴속을 후벼 파기에 이르렀다. 그 이외의 절규는 모조리 가짜였다.
집단과 타협을 가장 기피한다는 이 괴짜 소설가는 스물두 살, 자신의 바람대로 생계를 책임질 직업이 아닌 모험과 도전의 연속인 운명 속으로 첫 발을 내딛는다. 자신의 말마따나 ‘한 글자, 한 구절에 수없이 고심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일’에 나머지 인생을 모조리 바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쓰고 써도 만족할 수는 없었다. 완성시킨 순간에, 내가 지향하는 소설은 이 정도가 아니라는 불만에 사로잡히고, 그 고통이 강력한 용수철이 되어 다음 소설로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재미가 있어서 그만두려야 그만둘 수 없는 도락과는 달랐다. 집념과도 달랐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초월한 곳에서, 내 소설은 잇달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속에서 뛰쳐나갔다. 밑바닥이 드러나지도 않았다. 종착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학의 광맥은 무한했으며, 문학의 내밀한 깊이는 가속도적인 팽창을 멈추지 않는 우주의 깊이에 필적한다는 사실이, 하나의 작품을 마무리 지을 때마다 강하게 느껴졌다.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수명이 갑절이나 열 배쯤 있었으면 싶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얼마만큼 광맥을 팔 수 있을지 몰랐으나, 가령 천 년을 산다고 치더라도 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마루야마 겐지는 일본 문단에서 기인으로 불린다. 오직 원고료 수입만으로 생활하고 쓰고 싶은 글만 쓴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으며, 작가 정신을 수호하기 위해 문단을 떠나 오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의 삭발한 머리는 쉰 살의 생일날 아침부터 시작되었는데, 삶과 글쓰기가 느슨해지는 것 같아 이를 경계하기 위해 깎은 것이라 한다. 매일 아침 일어나 의식을 행하듯 면도칼로 자신의 머리와 턱수염을 밀며 소설가의 각오를 다지는 경력 수십 년의 소설가(그는 1945년생이다). 그는 심지어 저녁도 먹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소설은 몸으로 쓰는 것인데 저녁을 먹으면 몸과 머리가 둔해져 글쓰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란다. 그는 오로지 소설을 쓰기 위해 매일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한다.

‘예술가의 유일한 재산은 고독’이라는 믿음으로 진정한 문학을 위해 세계와의 별거를 선택한 사람. 아무리 써도 만족감을 느낄 수 없으며 문학의 밑바닥도, 종착점도 찾을 수 없다는 사람. 그리하여 오로지 글을 쓰기 위해 천 년을 살 것을 고대하는 소설가(그는 그런 이유로 빨리 죽고 싶어 하는 예술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치열함에 진땀이 날 지경이다.

그는 과연 행복할까? 문학을 제외한 모든 삶을 자의로 지워버린 그는 과연 진심으로 행복할까? 행복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진정으로 자유롭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자신이 선택한 ‘실’만 가지고 무늬를 짜내는 그의 삶은 외롭고 고단할지언정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먼 훗날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만들기 위해 현재를 견디는 것’이라는 슬픈 자기합리화를 연장하다가 결국 마흔 중반 즈음에 ‘지금까지 삶에 떠밀려 살아왔음’을 아프게 인정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인생보다 훨씬 더 투명하게 빛나 보인다.



만약 지금껏 보지 못했던 인간을 발견하고,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인간이 보인다고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살아온 보람이 있는 셈이리라. 그리고 장년을 능가하는 노인이 되어, 폐로 빨아들인 최후의 공기를 토해내는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증거인 ‘언어’를 광기와 이성의 뜨개바늘을 구사하여 뜨겁게, 차게, 짜나갈 것이리라.
‘폐로 빨아들인 최후의 공기를 토해내는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증거인 언어를 광기와 이성이란 뜨개바늘을 구사하여 뜨겁게, 차게, 짜나갈’ 그는 진정 산 자의 길을 걷는 구도자이다. 그의 말처럼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산 자라고 말할 수 없다. 흔들리고 뒤척이며 심연과 암흑에 빠질지라도 스스로 정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자의 길이 바로 그가 말하는 ‘산 자의 길’이다.

살아 있는 나는 과연 ‘산 자의 길’을 걷고 있나? 아니 적어도 ‘산 자의 길’을 시늉이라도 내고 있는 걸까? 육체의 고통을 초월하며 자신을 바칠 만한 뭔가가 있는 사람들. 그 뭔가를 위해 불안 없이 걷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이다.

자유와 깨달음은 돌다리를 수십 번도 더 두드리며 머릿속 계산기를 누르는 나 같은 겁쟁이가 아니라 자신을 믿고 거침없이 덤불을 헤쳐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부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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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언제나 내 편이었어 김애리 저 | 퍼플카우
작가 김애리는 ‘책’을 ‘내 편’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마르케스, 카잔차키스에서 산도르 마라이……. 고전부터 근래의 베스트셀러까지 100여 권의 책들이 작가를 통해 방황의 터널을 먼저 지난 선배로, 나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로, 혹은 나보다 더 방황하고 있는 친구로 다시 태어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친구(책)를 소개받고, 잊고 지낸 친구(책)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김애리라는 청춘이 길어 올린 찬란한 ‘인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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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애리

천 권의 책에 인생의 길을 물었던 김애리. 그녀는 거창한 결심을 이루기 위해서라기보다, 견디기 위해 책을 읽었다. 우울증에 시달릴 만큼 예민하고,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서 안정된 생활을 쫓던 그녀에게,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이놈의 ‘삶’을 견디는 일은 다 커서 젓가락질을 다시 배우는 일마냥 멋쩍고 창피했다. 이토록 소심한 여자가 청춘을 견디고, 서른을 견디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 독서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며불며 책을 읽었고, 사랑 역시 책으로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른이 되기 전에 천 권의 책을 읽었다. 청춘이라는 악몽 같은 시간을 오직 책으로 버텨낸 그녀의 열정은 2009년 겨울 서정문학상에 단편소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이 당선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으며 이후 『책에 미친 청춘』, 『십대, 책에서 길을 묻다』, 『아까운 책 2012』(공저) 등을 펴냈다. 현재 언론진흥재단, 김영사 웹진 등에 칼럼을 연재하며 독서 에세이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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