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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영화 <스타워즈>보다가 멘붕 빠진 까닭?

잊고 싶은 90년대, 왜 이야기 해야 할까? 90년대를 회상하는 사람들의 손에서 90년대가 완성될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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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90년대가 미완성이더라도, 90년대를 정신의 출발점이나 회귀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있다. 자신이 90년대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90년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IMF 경제 위기로 중단되어 버린 90년대의 상상이 노스텔지어의 대상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꽃필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하게 되었다. 90년대에 완결하지 못했던 90년대의 꿈, 그건 지금이라도 가능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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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좌파 유학생으로 살았던, 잊고 싶은 90년대

예스24에서 1990년대를 회상하는 글을 부탁받고, 사실 당황스러웠다. 아마도 영화 <건축학 개론>에 이은 첫사랑의 이미지를 아련하게 떠올리며, 90년대를 회상한다는, 그런 기획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에게 90년대는, 가슴 속에 지워놓고 있던 시간과도 같았다. 이건 악몽과도 조금은 다른 의미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90년대의 모든 것을 마음 속에서 지우면서 살았다. 정확히 말하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는 90년대를 가슴 속에 묻어두면서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 대인기피증이 생긴 시대가 바로 그 시기이다. 왜 그런 증상이 생겼는지, 아주 복합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90년대는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진다. 앞의 절반은 유학 시절, 파리에서 미테랑이 대통령이던 시절, 사회당의 집권 속에서 좌파들이 어떻게 지냈는지를 볼 수 있었다. 뒤의 절반은 직장 시절, 분에 넘치게 많은 월급과 많은 권한을 가지고 지냈던 시절이다. 그냥 90년대를 나에게 물으면, 가난한 좌파 유학생으로 살았던 시기와 현대 그룹에서 정부기구 사이에서, 수많은 우파 혹은 극우파들과 살을 섞으면 지냈던, 그런 두 개의 시기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아무 얘기도 아니다. 90년대는 10년이 내내 습작기였지만, 결국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했고, 번역책 한 권만을 남겼다.




[ 매트릭스 ]
[ 매트릭스 2 리로디드 ]
[ 매트릭스 3 레볼루션 ]



예스24에서 원고 부탁을 받고 제일 처음 한 일이 블루레이 버전으로 <매트릭스> 3부작을 주문한 일이었다. 물론 DVD로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영화를 보는 건 늘 즐거운 일이다. <매트릭스>의 원형은 일본 에니메이션 <공각 기동대>에 있고, 90년대에 내가 열심히 봤던 건 역시 <에반게리온>이었다. “나는 누구냐?”, 이 질문을 일본은 끊임없이 던져대고 있었고, 이 질문을 던지는 에바는 당시 나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실제로는 2199년에 벌어진 일이지만 매트릭스 안에서는 1999년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애니 메트릭스까지 포함해서 다시 한 번 보았다.

<매트릭스> 3편을 다시 본 다음에, <인디아나 존스> 3부작을 다시 보고, 메이킹 필름까지 전부 다시 보았다. 그리고는 벌써 100번은 넘게 보았을듯한 <스타워즈> 6편을 또 다시 보고, 중간에 소소한 메이킹 필름까지 전부 다시 보았다. <매트릭스>를 다시 한 번 보는 정도로 가볍게 시작한 이 일이, <스타워즈>를 몇 번은 다시 돌리고, 관련된 다큐 수 십편을 보는 것으로 이어졌다. 물론 90년대 추억을 곰곰 되씹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산만한 종류의 인간이다. 어디서 시작했는지, 뭘 하려고 했는지, 그건 벌써 까먹고 며칠 밤을 새면서 분석 작업이 이어졌다. 물론 실제로 이 작업을 계속한 것은 꼭 이 글을 쓰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지난 한 달 동안, 너무나 진지하고 신나게 새로운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이준익 감독의 제주도 신화인 자청비에 관한 작업이 그 사이에 엎어졌다. 게다가 나는 미루고 미루었던 소설 작업을 일단 시작하기로, 한 달 후로 일정을 잡아놓고 있었다. 나도 뭔가 시원과 기원에 대한 생각을 할 필요가 있었고.


과연 루카스가 쎈 놈이다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1편, 즉 영화에서 4편으로 설정된 그 영화가 나오게 된 과정은 진짜로 기이했다. 물론 전에도 이 메이킹 필름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영화사에 다니기 이전의 일이라서, 건성건성 보아서 그런지, 깊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실제로 영화 기획에 참여하게 되고, 시나리오 작업도 같이 하면서 조지 루카스가 처음으로 <스타워즈>를 제작하며서 부딪힌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을 다시 보는 게, 진짜로 남다른 느낌으로 왔다.

가끔 책에 사인을 해줄 때 종종 쓰는 문구 중에 “명랑이 함께 하기를...”, 요런 게 있다. 볼 것도 없이 마크 마이어스에게 가지고 온 ‘명랑’과 “포스가 함께 하기를”, <스타워즈>에서 가지고 온 문구를 합친 것이다. 난 이 문구를 노무현 중반기부터 사용을 했었다.

이제까지 나는 <스타워즈>라는 소설이 있고, 그걸 조지 루카스가 각색해서 영화로 만든 것인줄 알았다. 어린 시절 내가 읽었던 소설은 영화를 원작으로 쓰여진 것이었다! 와! 조지 루카스는 내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보다는 100배는 훌륭한 사람이잖아! 또 한 가지 놀란 건, 배우의 캐스팅 과정이었다. 루크 스카이워커나 레아 공주 혹은 한 솔로 같은, 스타워즈가 배출한 영웅들은 사실상 무명 배우들을 캐스팅했던 것이었다. 물론 조지 루카스가 늘 무명들만을 발굴해서 영화를 만드는 것만은 아니지만,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과정과 그들에게 필요한 연기를 주문하는 과정은 정말로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지금 우리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조지 루카스는 저예산 독립영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다만, 그 상상이 컸던 것 아닐까?

<스타워즈>는 영화 만드는 방식을 바꾸었고,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이해를 바꾸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마 세상을 바꾸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미국이 가장 풍요롭고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70년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갈브레이드의 ‘풍요로운 사회’라는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대가 미국의 70년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정점에 <스타워즈>가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90년대, 루카스의 70년대




자, 우리의 얘기로 돌아오자. 우리에게 그런 미국의 70년대에 해당하는 시기가 90년대 그리고 여기에서 이어지는 노무현까지의 2000년대 초반까지가 아닐까 한다. GDP 자체가 시대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해줄까? 별로 그렇지는 않다. 크게 보면, 90년대에 우리는 풍요로웠고,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모든 것들이 넘쳐났다. 사회에는 희망이 넘쳤고, 최소한 노무현 정부가 문을 내리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지금 우리의 미래는 당연히 더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 낙관주의가 넘쳐났었다. 그렇지 않은가? 청년들은 어지간하면 정규직의 일자리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사회는 완전고용에 가까웠다. 그리고 정말로, 그런 답답한 일자리나 공무원이 되기 보다는 영화를 만들거나, 문화 생산자가 되기 위한 일탈을 기꺼이 감내하던 시기가 바로 우리의 90년대 아닌가?

물론 우리의 90년대는 그렇게 즐겁게 꽃을 맺지는 못했다. 97년 12월 이후 IMF 경제위기가 터지면서, 한국의 풍요는 허리가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30대들, 한참 새로운 상상과 문화적 풍성함으로, 스스로 조지 루카스가 되든, 아니면 수많은 그의 조력자가 되든, 어쨌든 지금과 같은 찌질하게 대리에서 과장 사이 혹은 사무관에서 서기관 사이 어디쯤에서 기계적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과는 다르게 살아갈 수 있었던 그들... 그들의 한 가운데를 IMF가 끊어버린 셈이다. 오, 어쩔 거냐! 그건 그냥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되어버렸으니...

우리의 90년대를 돌아본다고 시작한 이 작업이, 대책 없어 커져서 조지 루카스의 70년대, 정확히 말하면 77년에 스타워즈를 개봉하기 위해서 그가 보냈던 75년에서 77년 사이의 일들을 다시 뒤돌아보는 일까지 오게 되었다. 이 영화는 7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 예정이었는데, 영화 촬영은 대책 없이 늘어졌고, 자금을 대던 21세기 폭스가 돈을 끊어버릴 위기가 몇 번이나 있었다. 감독은 심장마비 증상을 느끼면서 극도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겪었고, 실제 영화 촬영 현장에서 거의 웃지 않을 정도로 그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젊은 배우들이 촬영 현장에서 감독을 즐겁게 한다고, 끊임없이 개그발을 날리고 몸개그를 선사하던, 그런 상황.

돌이켜 보면,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를 기획하고 준비하던 그 시기가 경제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우리의 IMF와 그렇게 다르지는 않았다. 1973년 이후 석유파동이 벌어졌고, 1977년은 2차 석유파동이었다. 전후 계속되던 ‘영광의 30년’이 종료하면서 풍요의 시대가 문을 닫으려는 그런 시기였다. 과연 조지 루카스가, 쎈놈은 쎈놈이다.

한국의 90년대, 그 시기에 우리가 <스타워즈> 같은 걸 만들어내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IMF 기간을 경계로, 다른 건 몰라도 영화 산업만큼은 확실히 좋아졌고, 그 후에 2006~2007년의 거품 붕괴까지 눈부시게 발전을 했다. 다른 건? 프로야구는 분명히 좋아진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우리의 삶에 무슨 영향을 미쳤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고. 아. 사교육은 좋아졌다. 90년대에는 일부에서나 몰래 하던 사교육이 아예 주식회사를 차리면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할 정도로 좋아졌다. 물론, 그래서 우린 망했다.


우리의 90년대는 어떤 원형을 남겼을까?




영화 아니,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과 ‘트릴로지’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시리즈 영화의 원형은 <스타워즈>이다. 그걸 만들어낸 게 미국의 7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90년대는 어떤 원형을 남겼을까? 곰곰 생각해보면, 90년대 한국에서 나온 것 중에서 그 후에 원형으로 인식되는 건 드라마 <모래시계>인 것 같다. 사회성 강하면서도 시대를 외면하지 않는 드라마들을 속칭해서 요즘도 ‘모래시계류’라고 부른다.

이 표현은, 총선 전, 정권이 교체되는 걸 전제로, 새 정권에서 새로운 흐름의 드라마를 기획하려는 사람들에게서 다시 들었다. 성공한 드라마는 여전히 매년 몇 편씩 나오지만, 모래시계만큼 끊임없이 소환되며 동일시 혹은 극복의 대상이 된 드라마는 아직 못 본 것 같다. SBS라는 방송국 자체가 자리를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종편이 출범하면서 ‘킬러 콘텐츠’를 표방하던 드라마를 목표로 했던 게 바로 <모래시계> 아니었던가? 극단적 보수를 표방하던 종편들이 꼭 만들어보고 싶었던 드라마가 <모래시계>였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영화라는 눈으로만 본다면, 한국의 90년대는 스필버그의 70년대와 상당히 유사하지만, 여전히 미완성 혹은 진행형이다.

68이후 등장한 히피 문화와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 운동, 높아져가는 냉전의 위기, 사이키델릭을 거쳐 프로그레시브락으로 넘어가는 음악의 흐름, 이런 것들이 아말감처럼 쏟아져 나오던 시기가 스필버그의 70년대였다. 그리고 이 속에서 <스타워즈>가, 영원히 계속해서 반복될 신화적 원형으로 등장하였다. 어쨌든 20년대에 속한 사람들은 <스타워즈> 에피소드 4의 첫 장면, 우주전함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바로 그 장면을 보면서, “헉, 저건 뭐지?”, 이랬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상당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90년대는, 스필버그의 70년대와는 달리, 소환의 대상이며 노스탈지아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신화가 될 작품을 아직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진행형이다. 물론 이렇게 단정짓고 나면 약간 서글프기는 하다. 아니, 이미 지나버린 90년대로 돌아가서 다시 <스타워즈> 같은 원형이 될 무엇인가를 만들란 말이야? 아니, 도대체 누가 조지 루카스 같은 신화를 다시 만들어낼 수 있다고! 그건 미국도 다시 못한다. 게다가 다른 나라, 다른 어떤 세대가 그렇게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흐름을 또 만들어낸 경우가 있겠는가, 최소한 영화에서!


우리의 90년대, 다시 또 오기는 어려운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90년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게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고, 또 세상은 계속해서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시대가, 최소한 한국에서는 당분간 다시 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명박 시대와 함께 우리의 상상은 금제되었고, ‘풀 파워’로 향해가는 박근혜와 함께 미래에 대한 상상 자체가 고통이 되어버렸다.

만약 지금 우리가 새로 등장한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다스 베이더가 “내가 니 애비다”라고 하는 명대사를 남겼던 5편 혹은 한 솔로가 냉동에서 깨어나고, 드디어 루크가 황제의 찌짐이 앞에서 쓰러질 때 다스 베이더가 황제를 절벽으로 내던져버리는 5편이 아니라면? 만약 지금 우리가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마그마의 불에 쓰러지면서 다스 베이더로 환생하는 바로 그 3편 어디쯤엔가 있다면? 그래서 제국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복귀시키는 후반부 에피소드가 아니라 공화국이 제국으로 변해가는 그런 순간이라면?

이런 건 상상만으로도 우리의 일상을 순식간에 깨어날 수 없는 악몽으로 만드는 ‘모든 공포의 총합’과 같은 것이다. ‘멘붕’을 넘어, 이제 멘탈 소멸, ‘멘소’를 호소하는 지경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우리의 90년대가 미완성이더라도, 90년대를 정신의 출발점이나 회귀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있다. 자신이 90년대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90년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IMF 경제 위기로 중단되어 버린 90년대의 상상이 노스텔지어의 대상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꽃필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하게 되었다. 90년대에 완결하지 못했던 90년대의 꿈, 그건 지금이라도 가능한 것 아닌가?


90년대여, 다시 오라




90년대에 관한 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정말로 간만에 영화도 많이 봤고, 무엇보다도 조지 루카스에 대한 다큐들을 다시 자세하게 한 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90년대를 첫사랑으로 혹은 마음의 고향으로 회상하는 사람들의 손에서 90년대가 완성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작은 꿈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스타워즈>를 만들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우리의 90년대가 노스텔지어가 아니라 그렇게 마음껏 상상할 수 있었던 시대의 재림이 되면 좋겠다, 그런 작은 소망이 생겨날 때쯤 <매트릭스> 마지막 편이 끝났고, RATM의 익숙한 타이틀곡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90년대는 수많은 루크 스카이워커들의 시대이기도 했던 듯싶다. 제다이의 귀환, 그게 우리의 2012년 혹은 2013년이 되면 좋겠다는 야무진 희망과 함께, 90년대의 사람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좋든 싫든, 지금부터 한국의 10년은 90년대에 속했던 사람들의 시대가 아닌가?

우리에게 <스타워즈>가 없었으니, <매트릭스>도 없었다, 그렇게 말하지는 말자. 좋든 싫든, 한국이 가장 풍요로웠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시대가 90년대 아니냐? 그 안에서 이제 뭔가 튀어나와야 할 때가 되었다. 아니면? 공화국이 제국으로 바뀌고, 이번 대선이 마지막 대선이 될 수도 있다. 한국의 우파가 늘 꿈꾸던 것이 일본 자민당식 장기독재였으니, 헌법을 내각책임제로 바꾸어서 다시는 대선을 치르지 못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좋든 싫든, 금지되거나 눌렸던 90년대가 우리에게 다시 튀어나오는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쓴 우석훈님은…


우석훈 박사(45)는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이후 현대환경연구원, 에너지관리공단을 거쳐 유엔 기후변화협약의 정책분과의장과 기술이전분과 이사로 수년간 국제협상에 참가. 한국생태경제연구회, 초록정치연대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다 현재는 이준익 감독이 있는 영화사 타이거 픽처스 자문을 맡고 있다.

그뿐이랴.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꼽사리다>에서 ‘우띨’로 불리며 반려동물부터 대학생, 농민, 영화 문제 등 생활 영역에 깊이 관여되어 있는 경제 문제를 알기 쉽게 전달하는 중이다. 왕성한 필력으로 12권짜리 경제대장정 시리즈를 아홉 권 써냈고, 첫 에세이집 『1인분 인생』을 탈고하자마자, 『FTA 한스푼』을 펴냈다. 블로그와 트위터로 고양이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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