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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지 못하고 오직 걸 수만 있는 핸드폰 ‘씨티폰’

납골당에 USB를? 90년대부터 당신을 파일로 기억하다 “추억의 삐삐, 연인 사이에는 ‘1004’ 붙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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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으론 주변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1996년부터 핸드폰을 썼어. 시커멓고 경찰 무전기만한 크기였어. 길거리에서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사람들을 익숙하게 본 건 1998년부터야. 나도 그 해 여름께 핸드폰을 샀지. 이동통신 사업자로 허가를 받은 KT, LG, SK가 단말기 구입비용을 이용자들에게 지원해주면서 너도 나도 공짜에 가까운 가격으로 구입할 때야. 마치 포탄 공습처럼 이 땅에 핸드폰이 상륙했어. 그게 다 족쇄인데 말이야.



첫번째 기억. 데스크톱, 디스켓, 씨티폰, 인터넷까지…
고경태 편집장이 추억하는 90년대 풍경


80년대 없었던 것들이 생겼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것들이 머물던 그때, 90년대는 독특한 시기였습니다. 첫사랑처럼 간직되어 있는 우리들의 잊혀진 시간을 떠올려보면, 격한 변화의 틈새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던 즐거움이나 추억, 꿈도 함께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소설가, 시인, 철학가, 기자 등 지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저자들의 90년대를 노크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그들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까요? 애틋했던 추억, 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90년대는 누군가에겐 그리운 시간이었고, 누군가에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공통점도 있었어요. 10년 전 붙들고 있던 그 고민 혹은 기억이, 그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겁니다. 기억의 첫 번째 열쇠는 통신 수단을 둘러싼 90년대 추억입니다.


내 생에 첫 컴퓨터, 368DX 데스크톱

질문

왜 이렇게 글을 쓰다말다 하십니까.

답변

쓰다 보니 이게 뭔 이야긴가 싶어. 몇 줄 쓰다 다 지워버렸네. 90년대 이야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질문

꼭 심오하고 의미가 있어야 하나요? 그냥 그때를 기억해보자는 거지.

답변

생각해 보니 한심하게 살았어. 회사 일한 거 빼놓고는 별로 없더라고. 혼자 여행 다닌 적도 없고 파격적인 일탈도 해보지 못했어.

질문

통신과 정보화 수단을 둘러싼 풍경을 중심으로 90년대의 잔영을 돌이켜보겠다고 했다면서요.

답변

말은 그렇게 해놓고 주절주절 써봤는데. 그래서 어쨌다는 건지 나도 모르겠어. 같잖은 회고담 밖에 더돼? 한심해, 한심해.

질문

그 시대를 한 번 복기해보는 것도 재밌죠.

답변

그걸 꼭 내가 해야 해? 그 분야에서 얼리어답터도 아닌데 말이야. 또 요즘 젊은 친구들 성에 차기나 하겠어.

질문

그럼 왜 글을 쓰신다고 했어요.

답변

어쩌다보니 덜컥 약속을 해버렸지 뭐.

질문

그럼 해야죠. 제 물음에 대답만 하세요. 컴퓨터는 언제 처음 사셨어요?

답변

1993년 5월1일.

질문

날짜까지 기억해요?

답변

특별한 날이었으니까. 내 생애 첫 컴퓨터, 386DX 데스크톱. 93년 5월1일이라, 부팅할 때 사용하는 비밀번호를 ‘9351’로 정해놓았거든.

질문

386DX가 무슨 뜻이죠?

답변

나도 잘 몰라. 까먹었어. 중앙처리장치(CPU) 속도가 80386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거야. 386엔 SX와 DX 두 종류가 있었는데, DX가 두 배로 빨랐어. 지금으로 치면 아이폰3G와 4G의 차이라고 할까. 그보다 한 급 아래는 286AT와 XT가 있었지. 386컴퓨터는 386세대라는 신조어까지 낳았지.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 나도 90년대 후반엔 386세대였지.

질문

컴퓨터는 어디서 샀어요.

답변

용산 전자상가에서 중국산 조립제품을 샀지. 1백50만원쯤 했을 거야. 기능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였지. 삼성전자나 현대전자, 삼보컴퓨터 제품은 3백만원쯤 하기도 했어. 이번 글 쓰려고 옛날 잡지를 뒤지다보니 현대전자 컴퓨터 ‘멀티캡’ 광고에 30대 초반의 안철수가 모델로 나오더라고.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질문

컴퓨터로는 주로 뭘 했어요.

답변

간단한 게임도 하고, 하이텔이나 천리안 같은 PC통신 공간에 들어가 신문기사 텍스트를 보거나 자유게시판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한글문서 작성이 가장 많았지. 컴퓨터의 여러 기능을 꿰뚫는 편은 아니었어.


“기사를 디스켓에 담아왔습니다.”하던 앞서 나간(?) 기자들

질문

컴퓨터로 한글문서를 작성했으면, 원고지는 안 썼겠네요.

답변

그랬지. 사실 나는 80년대 후반부터 4벌식, 2벌식 타자기나 전동타자기를 섭렵했어. 80년대 후반부터 원고지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거든. 물론 1993년에 내가 다니던 작은 신문사에선 95%의 기자들이 원고지를 사용했어. 첫 장 맨 위에서부터 다섯 칸은 비우고 여섯째 칸부터 볼펜으로 기사를 써내려가던 선배들의 모습이 생각나네.

질문

여섯째 칸부터요?

답변

그 자리엔 편집기자들이 제목을 뽑아야 하니까 여백으로 남겨뒀지. 기사를 다 작성해 원고지째 넘기면, 부장이나 국장이 사인펜으로 데스킹을 봤지. 줄 찍찍 그어 지우고 고치고 덧붙이고. 기사와 제목 모두 오케이가 나면 편집부에서 원고들을 면별로 묶어 전산팀에 보냈어. 그럼 전산팀 여직원들이 컴퓨터 자판으로 쳐 프린트했고, 그 다음에 교열을 보고 판을 짰지.

질문

그럼 컴퓨터로 쳐오는 기자들은요?

답변

아주 소수였는데, 플로피 디스크에 담아와 변환을 했지. 데스크에 검사를 맡을 땐 프린트를 해서 보여줬고. 플로피 디스크를 ‘디스켓’이라고 불렀는데 “기사를 디스켓에 담아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기자들은 되게 있어 보였어.

질문

디스켓이요? 몇 가지 종류가 있었잖아요.

답변

그렇지. 큰 건 5.25인치 디스켓. 가로세로 13.3cm라 좀 둔하지. 너무 얇아 잘 구부러지기도 하고. 파일이 손상된 적도 많아. 휴대성과 안전성 면에서 꽝이었지. 작은 건 3.5인치 디스켓인데 가로세로 8.89cm. 작기도 하고 단단했어. 세련미에서도 앞섰지. 3.5인치 디스켓을 들고 다니면 뭔가 앞서 가는 기분이었다니까.

질문

한마디로 이동식 저장장치라고 할 수 있네요.

답변

요즘으로 치면 USB인 셈이지. 그런데 어느 순간 싹 사라져버렸어. 옛날엔 디스켓을 10개들이 한 묶음으로 살 정도였어. 한 개당 용량이 얼마 안돼서 많이 사야 했지. 근데 내가 99년쯤이던가 386 컴퓨터를 내다버리려고 하는데, 일기 파일이 생각나는 거야. 93~94년 아래아한글 문서로 일기를 썼거든. 하루치를 50장(200자 원고지 기준) 이상 쓴 적도 있어.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그 파일을 다운받아놔야 되겠다 싶더라고. 근데 방법이 없는 거야. 3.5인치나 5.25인치 디스켓이 있어야 하는데, 집에 하나도 안 남았더라고.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어쩔 수 없이 그냥 컴퓨터를 버렸지. 그게 아직도 마음에 걸려. 추억을 파묻어버린 상실감이랄까.


인터넷 첨부문서를 여는 고난도의 테크닉을 구사하다

질문

왜 그렇게 디스켓이 멸종했을까요?

답변

글쎄, 잘 기억이 안 나. 아마도 인터넷 전용선이 많이 깔리고 개인 이메일이 생기면서가 아닐까 싶어. 내가 처음 이메일 계정을 만든 건 1998년이거든. 신문이나 잡지 보면 기사를 쓴 기자 이름이 나오고 그 뒤에 메일주소가 나오잖아. 기자 이름 뒤에 본격적으로 메일주소가 붙기 시작한 것도, 내 기억으론 1998년이야. 대용량이건 소용량이건 문서를 주고받는 편지기능이 넘 쉬워진 거지. ‘보내기’ 단추 하나만 틱 누르면 되잖아.

질문

디스켓에서 바로 이메일로 이동한 건가요?

답변

아니지. PC통신 전자우편으로 편지를 보내던 때가 있었지.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등. 디테일한 방법은 가물가물해. 되게 복잡했었지. 내가 만들었던 <한겨레21> 1994년치를 뒤져봤더니 독자투고란에 의견 보낼 주소가 이렇게 나오더라고. “<전자우편> 천리안 vvhan1, 하이텔 han6, 나우누리 han6.”

질문

아이디가 되게 간단하네요.

답변

처음엔 문서 첨부를 할 수 없었을 거야. 그냥 의견만 써서 보내는 거지. 내가 나우누리를 통해 외부필자의 첨부문서를 여는 ‘고난도의 테크닉’을 구사한 게 1996년이야. 다른 부서 후배한테 여러 번 묻고 또 물어 마침내 파일을 다운받은 기억이 나. “내가 해냈구나”하면서 나름 감동적이었지. 웃기지만, 우리 부서에서 그걸 할 줄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어. 하이텔이나 천리안 토론방에 가서 요즘 무엇이 이슈인지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도 당시엔 나를 포함해 두세 명 밖에 안됐어. 그때 내가 제일 어렸거든.

질문

손 글씨 원고가 사라진 건 정확히 언제쯤이에요?

답변

내 기억으론 2000년이야. 1998년 개인 이메일이 대중화되었지만, 그럼에도 인터넷을 익히지 못해 기사가 적힌 원고지를 우편으로 보내거나 A4용지 상태에서 팩스로 보내는 사람들이 꽤 됐어. 1998년만 해도 인터넷 환경이 안 되는 외국도 많았고. 그때 내가 <한겨레21>에서 해외 통신원 기고를 담당했는데 인도와 베트남 등에선 A4용지에 글을 써 팩스로 보내왔지. 글자가 흐릿해 안 보이거나 팩스가 잘려 여러 차례 국제전화를 걸어 글씨 해독을 해야 했어. 물론 소설가 김훈처럼 끝까지 컴퓨터 자판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101023435는 열렬히 사모합니다” 무선호출기에서 씨티폰까지

질문

다시 1993년으로 되돌아가죠. 그땐 당연히 핸드폰이 없었죠?

답변

핸드폰은 무슨. 집에 전화 한 대밖에 없을 때였지. 하나의 회선을 여러 전화에 연결해 각 방에서 쓰는 게 유행이었어. 그걸 ‘프락지’라고 했지. 어원이 뭔지도 모르겠네. 집에서 쓰는 무선전화 하나 있으면 우쭐했을 때야. 회사에서도 나 혼자만 쓸 수 있는 유선전화가 있으면 감격했고.

질문

그렇게 앞서가신 편도 아니군요.

답변

보통이었지 뭐. 내가 직장에서 막내 축에 낄 때라 선배들보다 좀 앞선 편이었을 뿐. 국가적으로도 느렸어. 내가 기억하는 한 일본제 워드프로세서를 1989년에 어떤 사무실에서 처음으로 보았거든. 1988년에 본 전동타자기 이후로 가장 선진적인 문서작성기가 워드프로세서였어. 한데 언젠가 일본 추리소설을 읽는데, 그 나라에선 워드프로세서가 70년대 초반 풍경으로 묘사되는 거야. 지금이야 한국이 세계에서 1등 수준이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이 후진국이었지.

질문

1993년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해주세요.

답변

군인 출신 대통령 시대가 끝나고, 형식적으로나마 문민정부가 들어섰지. 1993년도에 금융실명제가 발표됐을 거야. 92년 12월이 대통령선거였으니까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 드라이브가 한창이었지. 김영삼 정부의 화두 중 하나는 세계화였어. “당신의 경쟁상대는 누구입니까”라는 정부 공익광고 카피가 생각나. 가령 한국농부의 경쟁상대는 미국 농부나 칠레 농부라는 거였는데, 이제는 세계와 경쟁할 때라는 논법이었어. 당시 삼성그룹은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내보냈어. 닐 암스트롱에 이어 두 번째로 달 표면에 내려선 사람이 누구냐고 물은 뒤, 하지만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어. 1등주의와 세계화의 폭풍이 몰아칠 때야. 내가 그때 다니던 직장엔 직원이 50여명이었는데, 100% 정규직이었어. 한데 주변 친구들이 비정규직 이야기를 조금씩 하더라고. 난 ‘비정규직’이 무슨 뜻인 줄도 몰랐어. 그때부터 고용의 유연성 개념이 떠돌기 시작하고 신자유주의가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나 싶어. 1997년의 IMF는 신자유주의로 가는 결정적 분수령이었고.


씨티폰(좌)과 무선호출기 삐삐(우)

질문

그랬구나.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죠. 삐삐는 있었나요?

답변

긴급한 연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일부가 썼지. 난 없었는데, 1994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서 받았지. 왼쪽 허리띠에 차고 다녔어. 당시 번호도 기억나. 015-310-1898. 015 말고 012도 삐삐 전용번호였지. 정확한 이름은 ‘무선호출기’야. 1994년 012삐삐 신문광고를 보니 “전국어디에서나 호출이 가능하다”는 문구가 써 있대. 전국광역서비스를 개시한다는 내용이더군.

질문

거리에서 삐삐 소리가 울리면 공중전화를 찾았나요?

답변

핸드폰이 없는 한 그렇지. 발신번호가 뜨고 ‘8282’가 붙으면 급하다는 뜻이야. ‘82828282’라고 붙으면 정말 급하다는 뜻이고. 한데 바로 전화를 못하면 성질 급한 회사 상사들은 ‘1818’이라고 했지. 욕이잖아. 연인 사이에선 발신번호 뒤에 ‘1004’를 붙이기도 했대. ‘101023535’는 “열렬히 사모한다”는 뜻이래나 뭐래나.

질문

다른 통신수단은 전혀 없었나요?

답변

지방 출장 갈 때 회사차에 카폰이 있긴 했어. 한데 잘 터지지 않더라고.

질문

그럼 핸드폰이 대중화된 건 언젠가요?

답변

내 기억으론 주변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1996년부터 핸드폰을 썼어. 시커멓고 경찰 무전기만한 크기였어. 길거리에서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사람들을 익숙하게 본 건 1998년부터야. 나도 그 해 여름께 핸드폰을 샀지. 이동통신 사업자로 허가를 받은 KT, LG, SK가 단말기 구입비용을 이용자들에게 지원해주면서 너도 나도 공짜에 가까운 가격으로 구입할 때야. 마치 포탄 공습처럼 이 땅에 핸드폰이 상륙했어. 그게 다 족쇄인데 말이야. 생각해보니 그때가 인터넷 이메일 계정이 대중화되던 시기와 일치하네. 나는 처음에 KT의 016을 썼지. 아, 그전엔 씨티폰을 쓰기도 했다.

질문

씨티폰이요?

답변

발신 전용 핸드폰이라고 할 수 있지. 받지는 못하고 걸기만 하는 핸드폰이라는 말이야. 난 1997년 봄에 가지고 다녔거든. KT에서 나름 야심작으로 내놓은 제품이었어. 개그맨 이경규와 김국진을 CF모델로 쓰기도 했지. 지금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동영상을 볼 수 있어. 함 봐봐. 돌이켜보면 완전 웃기는 장난감이었답니다.

질문

장난감이라뇨?

답변

그게 공중전화 부스 옆에 설치된 기지국 100~200미터 안에 있어야만 터지거든. 그래야 신호가 가. 내 경험으론 절반 밖에 전화가 걸리지 않았어. “삐삐를 받고 시티폰으로 건다, 요금이 핸드폰 요금의 절반도 안된다”는 취지로 통신사에서 마케팅을 했는데, 문제는 절반이 안 터진다는 거였지. 조금 쓰다가 몇 개월 안돼 열불이 나서 내다버렸어. 가입자들이 곧 다 떨어져나갔지. 그래도 아직까지 시티폰 쓴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어.


“인터네트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질문

90년대에 종이신문과 잡지를 만들었잖아요. 인터넷에 막 밀리기 시작하던 시절 아니었나요?

답변

그렇게 말하긴 힘들 거야. 인터넷이 싹을 틔우며 미디어 시장에 막 진입하던 때였지. 생소했지. ‘인터넷’이라는 단어의 표기를 놓고 교열부 선배들과 ‘인터넷’으로 할 거냐 ‘인터네트’로 할 거냐 논쟁도 하고 그랬지. 옛날 <한겨레21> 광고를 보니 “인터네트 서비스를 시작합니다”라는 카피가 있어. 기분이 묘하더라고.

질문

그러니까 90년대는 종이매체의 시대였다는 거죠.

답변

아무래도 그랬지. <한겨레21>은 1994년 창간했는데, 종이매체의 거의 마지막 성시를 누렸다고 생각해. 제호공모에 참여한 독자들이 보낸 팩스가 하루종일, 정말 하루종일 뚝뚝 떨어지는 풍경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우편으로 온 편지나 독자엽서도 그야말로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왔고. 종이매체가 설렘을 주던 끝물이었어. 그 뒤로 <씨네21><시사인>등 몇 가지 매체를 제외하면 오프라인시장에서 그만큼이나 달콤한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경우는 없을 거야.

질문

정보화를 부르짖던 시절인데, 거기에 부응하는 작업은 없었나요?

답변

나름 멀티미디어의 첨단을 달렸지. 그게 뭔지 알아?

질문

글쎄요. 천리안이나 하이텔 같은 PC통신 서비스?

답변

그건 뭐 기본이었지. 씨디롬이라고 들어봤나?

질문

알죠? 음악용 CD를 이용한 데이터 저장기구?

답변

씨디롬, 정말 희미해진 옛 사랑의 그림자다. 요샌 써본 기억이 없다. 하여간 1995년 11월에 <한겨레21>에선 씨디롬을 냈어. 1~2년치 기사를 모으고 사진자료와 동영상도 넣었지. 당시로선 대단히 센세이셔널했다니까. 그 씨디롬 가격은 당시에 물경 2만9천원이었지. 인터넷 서비스도 꽤 빨리 했는데, 한국언론 중에선 <중앙일보>가 가장 먼저였고, <한겨레21>이 두 번째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때 관련기사가 1995년 8월3일치 잡지에 있던데, 내용이 이렇더라고. “인터넷 월드와이드웹(WWW)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486 이상의 컴퓨터, 14,400bps 이상의 모뎀이 필요하다. 혹시 28,800bps 이상의 모뎀이 상품으로 나오길 기다리며 저속 모뎀을 사용하고 있는 이용자가 있으면 미련 없이 28,800bps모뎀을 구입하기를 권하고 싶다.” 뭔 이야긴지 하나도 모르겠지? 전화선을 연결해 인터넷을 이용할 때만 적용되는 이야기래. PC통신 가입자를 위한 안내는 따로 있는데 이 설명도 무지 복잡해. 관두자.

질문

별로 새로워보이지 않는대요?

답변

그건 지금 기준이지. 그땐 무지 신선했어. <씨네21>에선 무엇을 했는지 알아? 음성정보 서비스를 했어. 안내한 번호로 전화를 걸면 영화평론가가 목소리 낮게 깔고 영화를 해설해줬어. 지금 보면 무지 촌스럽지만, 그때는 꽤 각광받는 멀티미디어였다니까.

질문

인터넷 서비스는 잘 됐어요?

답변

내가 어떻게 알아. 솔직히 별 관심은 없었어. 그냥 인터넷팀에서 잡지 기사를 퍼올리는 수준이었지. 1990년대는 그래도 종이매체가 중심이 되었던 시대야. 인터넷 포털이 미디어시장의 강자가 된 것은 대략 2000년부터라 할 수 있지. 참고로 딴지일보는 1997년, 오마이뉴스는 2000년에 첫 선을 보였어. 2000년을 기점으로 종이잡지의 매출이 정체를 보였다는 통계는 시사하는 바가 커. 그때부터 독자들은 인터넷으로 뉴스를 소비하기 시작했지.

질문

근데 정리가 잘 안되네요.

답변

누가 정리하래? 그냥 그렇다는 거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질문

90년대부터 핸드폰과 인터넷 덕분에 편리해졌다지만, 행복해졌다고 할 수 있나요?

답변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그럼 80년대처럼 공중전화 줄 서서 기다리고, 여자친구 집에 전화는 해야 하는데 부모님이 받을까봐 무서워 지나가는 여자 아무나 붙잡고 “죄송한데 전화 좀 대신 걸어주시면 안되나요” 사정이나 하고, 친구랑 빵집 앞에서 약속 잡았는데 1시간 지각하는 놈 기약 없이 무작정 기다리다 바람 맞고 돌아서는 건 행복하니?

질문

귀댁의 꼬마는 초등학생인데도 스마트폰 사달라고 해서 미치겠다면서요. 끝까지 안 사주고 있다면서요.

답변

그건 과한 거지. 스마트폰이 무슨 껌이냐? 요금이 얼만 줄 알아? 초등학생이 핸드폰 쓰는 것도 감지덕지해야지.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고루해?


90년대를 한 마디로? 파일 강림의 시대

질문

원고지도 그립지 않으세요?

답변

원고지에 볼펜 똥 묻혀가며 꼭 지저분하게 기사를 써야겠니? 어떤 자들은 글씨가 괴발개발이라 알아먹지도 못해. 게다가 문장수정한다고 원고지에다 돼지꼬리 붙이면서 마구 뜯어고치면 편집자들이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진대. 원고를 쓰고 나서도 그래. 마감을 끝내면 쓴 사람한텐 남는 게 없잖아. 원고받은 놈이 버리면 끝이야. 그렇다고 원고지에 똑같은 걸 두 번 쓸 수는 없잖아. 아하, 복사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번거롭잖아. 오래 보관하기도 힘들지.

질문

낭만이 있잖아요?

답변

낭만은 개뿔. 과거를 돌아보지 마. 촌스런 감상 떨고 있네.

질문

통신과 정보화 수단으로 볼 때, 90년대는 한마디로 뭔가요?

답변

음... 파일강림의 시대? 내가 1994년 한겨레신문사에 들어갈 땐 전보를 받았어. “축 합격. O월O일 O시까지 출근.” 90년대 후반이라면 떼 문자로 받았겠지. 1990년 초반엔 월급도 오프라인으로 받았지. 월급봉투 앞에 월급내역이 붙어있고 전액 현금이었어. 액수도 기억나. 1991년 5월에 받은 내 생애 첫 월급이 55만원이었거든. 90년대 후반으로 가면 편지도 돈도 다 파일로 받게 되지. 전자적으로 기억되고 저장되고 재생되는 전자파일. 이 파일이 종이 대신에 정보교류의 수단으로서 확실한 주도권을 쥐게 되지. hwp, jpg, mp3 등등의 확장자로. 90년대만큼 그 변화가 극단적이었던 시기가 없을 거야.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어쩌구 하는 속담을 수정해도 될 거 같다. “사람은 죽어서 파일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나는 죽어도 말이지. 생전에 노트북과 핸드폰에 남긴 수많은 전자적인 기록들이 또 다른 ‘나’를 구성해서 세상에 남을 거야. 아, 납골당에다 고인의 전자적 흔적을 편집한 USB나 외장 하드를 전시해도 의미있겠다.

질문

이야기하기 싫대더니, 말씀이 많으시네요.

답변

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 사실 내 이야기들은 너무 소박하고 1차원적이야. 신문사에서도 내가 경험 못한 세계가 무궁무진하거든. 현장 취재기자나 사진기자들도 할 말이 많을 거야. 오늘 점심에 사진기자 선배랑 식사를 하면서 사진현상과 인화, 전송 시스템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들었어. 정말 지금의 시스템은 90년대 초반에 비하면 개벽천지더라구. 디자인 툴이나 화상제작 시스템도 그렇고.

질문

시시하긴 했지만,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아참, 근데 저는 누구죠?

답변

당신은 아무것도 아냐. 글은 쓰기 싫고, 마감 약속은 지켜야 하겠고 해서 꼼수를 좀 써봤어. 그냥 가상의 인터뷰어야. 사람은 아니고 그냥 파일에 묻은 얼룩일 뿐이지. 미안해.




<이 글을 쓴 고경태 편집장은…>


아빠. 기자. 편집자. 「한겨레21」, 「씨네21」 편집장, 「한겨레」esc섹션 팀장을 지냈다. 「한겨레」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문화스포츠 에디터를 거쳤고, 요즘에는 ‘한겨레 토요판’ 편집장으로 재미있게 기발하게 신문을 만들고 있다. 지은 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지난 해 준서와 은서와 함께 ‘채널예스’에 연재한 글쓰기 칼럼을 묶은 『글쓰기 홈스쿨』이 있다.

최근에는 채널예스에서 <고경태의 아버지의 스크랩>을 연재하고 있다.(칼럼 보러가기 ☞ <고경태의 아버지의 스크랩>) 90년대 추억을 회고해 달라고 요청하자 ‘일한 기억 밖에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 글은 기자였던 그가 노동의 도구(!)로 살펴본 90년대의 추억인 셈이다. 2012년, 스마트폰으로 컴퓨터로 신문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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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니클의 소년들』로 퓰리처상을 두 번 수상한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의 장편소설. 『할렘 셔플』은 뉴욕 할렘을 배경으로, 평범한 가구 판매상이 강도 사건에 휘말리면서 범죄의 세계에 빠지는 과정을 그린다. 할렘에 거주했던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써낸 강력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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