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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를 계획하고 남자들을 농락한 팜므마탈 여성 -『조화의 꿀』

돈을 요구하지도 않는, 이 기묘한 유괴 사건의 진실은? 조화에 벌이 달려든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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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발표하여 ‘2010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1위를 차지한 유괴 미스터리. 이혼 후, 친정으로 돌아와 아들 케이타와 함께 살고 있는 카나코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유치원에 있는 케이타가 벌에 쏘였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경영하는 인쇄소의 직원 카와타와 함께 유치원으로 간 카나코는 유치원 교사에게 엉뚱한 말을 듣게 된다. 할머니가 벌에 쏘여 위독하다면서, 케이타를 직접 데려가지 않았냐고. 당황하여 집으로 돌아간 카나코에게 유괴범의 전화가 걸려온다.

렌조 미키히코의 소설 중 처음 읽은 건, 나오키상을 수상한 『연문』이었다. 사랑 이야기. 너무나도 정갈하지만, 한없이 깊은 울림을 가진 이야기들. 『러브 레터』에서 쇼이치는, 가족을 버리고 한때 사랑했던 여인에게 돌아간다. 그녀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등진다. 가족도, 직장도, 미래도. 『피에로』의 남자는, 아내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다. 상처를 입어도 웃으면서, 짙은 화장 뒤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들의 인생은, 실수와 잘못 그리고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묵묵하게 살아간다. 인생이란 언제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것이니까. 아니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까.

렌조 미키히코는 작품마다 하나씩 수수께끼, 트릭을 숨겨놓았다. 차분하게 읽어 나가다 수수께끼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감동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신산한 삶의 무게와 온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지, 그러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기 때문이다. 결국 누구나, 살아야 할 이유는 절실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아직은 모른다 해도. 『재회』에서 다섯 장의 사진에 담긴 의미처럼,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연문』 이후 다이쇼 시대를 배경으로 ‘꽃’을 둘러싼 사건들을 들려주는 『회귀천 정사』『저녁싸리 정사』, ‘미녀’들의 사랑과 증오, 유혹 등을 그려낸 단편집 『미녀』, 일곱 명이 어린 소녀의 죽음에 대해 진술하는 내용으로 ‘서술 트릭’을 전개하는 『백광』 등 렌조 미키히코의 소설에 푹 빠져들었다. 『연문』과 『회귀천 정사』, 『저녁싸리 정사』를 보며 인간의 마음과 감정을 잘 읽어내는 작가라고 생각했고, 『미녀』『백광』을 읽으면서는 미스터리 작가로서도 탁월한 구성을 만들어내는 작가라고 감탄했다. 본격 미스터리의 즐거움을 전개하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예리하고 우아하게 드러내는 작가. 중후하고도 날카로웠다.



그리고 『조화의 꿀』을 읽었다. 5년 만에 발표하여 ‘2010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1위를 차지한 유괴 미스터리. 이혼 후, 친정으로 돌아와 아들 케이타와 함께 살고 있는 카나코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유치원에 있는 케이타가 벌에 쏘였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경영하는 인쇄소의 직원 카와타와 함께 유치원으로 간 카나코는 유치원 교사에게 엉뚱한 말을 듣게 된다. 할머니가 벌에 쏘여 위독하다면서, 케이타를 직접 데려가지 않았냐고. 당황하여 집으로 돌아간 카나코에게 유괴범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런데 그 남자는 자신이 케이타의 아빠이고 몸값 따위는 필요없다고 말한다. 현장에 온 형사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고, 치과의사인 카나코의 전 남편에게도 직접 연락을 한 이상한 범인. 돈을 요구하지도 않는, 기묘한 유괴극.

유괴를 소재로 한 추리소설의 일반적인 구도는 돈을 받기 위한 범인과 어떻게든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려는 경찰의 치밀한 머리싸움이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철저하게 숨기고, 돈을 받은 후에도 추적할 수 없게 하려는 범인들. 경찰들은 피해자 가족의 주변을 조사하며 용의자를 찾아내고, 돈을 건네주기로 한 장소를 철저하게 감시하는 것은 물론 돈을 가져간 후에도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조화의 꿀』에서도 범인과 형사의 밀고 당기기는 치열하지만, 범인의 속셈이 무엇인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다. 유괴 범죄의 달인이라고 할 형사들도 도저히 범인의 의중을 알 수가 없다. 돈을 가져 오라는 곳은, 번화한 도심 시부야의 스크램블 교차로 한복판이다. 게다가 아이를 먼저 건네받고, 돈을 놔두고 오라는 것. 보통의 유괴 사건들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사건은 진행된다.

렌조 미키히코는 『조화의 꿀』을 끊임없는 복선과 반전으로 끌고 나간다. 범인의 의도를 알아내는가 싶으면, 이전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이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기존의 인물이 전혀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면서 사건이 확 방향을 바꿔버리기도 한다. ‘조화의 꿀’이라는 제목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꽃에 발라진 꿀이라는 의미다. 조화에는 당연히 꿀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벌이 달려든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꿀을 발라 둔다면? 『조화의 꿀』이라는 제목은 렌조 미키히코가 선사하는 거대한 유괴 트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암시한다. 만들어진 인물, 무대에 꾸며진 범죄. 현실에 드러난 케이타의 유괴 사건, 그 무대의 뒤편에서는 화장을 지운 그들이 어떤 얼굴로 무슨 짓을 하고 있을까.

『조화의 꿀』을 읽고 나면 ‘대담무쌍한 작품’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책을 덮고 나서도 여전히 감탄하고 있다. 하나의 유괴사건에 중첩된 또 다른 범죄들. 게다가 그 모든 범죄들은 소위 ‘결백한 범죄’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범죄의 일부를 담당했던 사람들조차 자신이 거대한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사람, 사건들이 모여서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절묘한 트릭에 기꺼이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조화의 꿀』의 위대함은, 단지 독자를 완벽하게 속이는 트릭의 기발함 때문만이 아니다. 카나코의 이혼 이야기를 듣던 새언니는 무심코 말한다. 너도 ‘공범자’ 아니었냐고. 그렇다. 『조화의 꿀』은 절묘한 트릭이 숨겨진 유괴 범죄를 보여주면서, 사실은 그 사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좌우로 얽힌 수많은 사람들의 치명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이 진짜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샅샅이 공개한다. 그리고 너무나도 매력적인 여인 란이 등장한다. 여왕벌처럼 수많은 남자들을 끌어들여,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드는 진정한 팜므 파탈. 개인적으로는 『백야행』의 유키호가 가장 매력적인 팜므 파탈이었는데, 『조화의 꿀』을 읽고 나서 란으로 바뀌었다.

란은 모든 범죄를 계획하는 것만이 아니라, 남자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들을 움직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 진심인지 모르고, 진짜 그녀의 얼굴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 남자들은 치열하게 움직인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란의 진짜 얼굴은, 『조화의 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 모호함이 그녀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든다. 아마도 란은, 단지 욕망 때문에 움직이는 여자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움직이고, 행동해야 할 순간을 안다. 원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란은 남자들을 끌어들이고 완벽한 계획으로 완전한 무대를 만들어낸다.

『조화의 꿀』에 대해 글을 쓰면서도, 내용에 대해 상세하게 말해주고 싶지는 않다. 『조화의 꿀』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읽어야지만, 더욱 즐거우면서도 감탄할 수 있는 미스터리다. 덤으로, 아니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말해주는. 렌조 미키히코는 ‘인간’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작가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이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다. 팜므 파탈에 대해서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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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의 꿀 렌조 미키히코 저/김은모 역 | 북홀릭

2월 마지막 날. 남편과 이혼을 한 후, 어린 아들 케이타와 함께 친정살이를 하고 있는 카나코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유치원에 있던 아이가 벌에 쏘였다는 유치원 교사의 전화였다. 카나코는 친정아버지의 인쇄소에서 근무하는 직원 카와타와 함께 서둘러 유치원으로 향한다. 하지만 유치원 교사는 벌에 쏘인 할머니가 위급한 상황이라고 하면서 카나코가 카와타와 함께 와서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냐고 되묻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한 가족들은 경찰에 유괴 신고를 하고, 마침내 유괴범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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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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