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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

“딸아, 엄마가 그 동안 너한테 숨겼던 출생의 비밀이 있어. 사실 넌 입양한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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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판타지를 갖는다. 남편 말고 다른 남자와 살았더라면, 얘보다 더 똑똑한 애가 내 아이였더라면, 내 부모가 재벌이라 내 직업이 재벌 2세라면. 드라마를 보고 소설을 읽는 것은 잠시나마 판타지에 젖어 들어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드가 정리한 자아 방어기제 중에는 판타지가 포함되어 있다.

중학생이 되더니 아이가 눈을 부릅뜨고 덤벼드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점점 콧구멍이 커지면서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열기를 뿜고, 여기서 한마디만 더하면 “알았다고!!”하면서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들어간다. 처음에는 쫒아 들어가 2차전을 벌이기도 하고, 다시 끌어내 이게 무슨 짓이냐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곧 아무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지금 엄마가 말하는데 고개 딴데로 돌리고 뭐해? 제대로 쳐다보지 못해?”
아이가 엄마를 쳐다본다.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 봐! 뭘 잘했다고.”

“엄마가 물어보는데 왜 대답을 안 해? 너 반항하는 거야?”
“하려고 했는데……”
“왜 말대꾸야? 엄마 말이 말 같지 않아?”


저렇게 말도 안 되는 대화가 반복될 뿐이었다. 심지어 이런 말을 반복하는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결국 아이가 죽을죄를 지은 게 아니라면 어른인 내가 좀 더 참아야 이 시기를 무탈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몽땅 때려 엎고 싶은 걸 참고 있노라면 내가 왜 자식을 낳았을까, 도대체 언제 양육이라는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지글지글 끓는 것 같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한동안 유행하던 무서운 이야기 시리즈의 만화가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엄마!”하고 부르며 간식 달라, TV보게 해 달라 산 같은 요구를 할 때 발이 없는 엄마가 스르르 나타나 한 마디 한다.

“너는 내가 아직도 네 친엄마로 보이니?”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친하고, 가장 만만한 상대인 엄마가 사실은 귀신이었다는 그 반전이 우스워 아이와 함께 보며 깔깔댔던 기억이 있다.

아이가 눈을 부릅뜨고 대들던 그 어느 날, 갑자기 그 만화의 대사가 떠올랐다. “넌 내가 친 엄마로 보이니? 그래서 네 맘대로 하는 거니?” 물론 난 아이의 친엄마다. 그런데 정말 그 순간만은 내가 친엄마가 아니라도 이렇게까지 할까하는 생각과 동시에 내 친딸이 아니면 나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심리적 거리”가 우리를 너무 감정적이고 서로에게 함부로 하게끔 만들고 있다는 자각이 든 것이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쟤와 내가 하나인 것 같고, 그래서 내 뜻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불같이 화가 나고, 어떻게 해서든 그걸 꺾으려 했던 것 같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에게는 그게 침입이고 무조건적인 통제로 느껴졌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아이가 화를 내는 건 당연하다는 기특한 생각까지도 들었다. 거리 유지가 중요했다. 이젠 더 이상 나와 아이를 동일시하면 관계가 상할 것 같았다.

어느 날 둘이 기분 좋게 뒹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나는 제법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희원아, 엄마가 그 동안 너한테 숨겼던 출생의 비밀이 있어.”
“뭔데?”
“사실은 너 입양한 아이야.”


잠깐 내 얼굴을 살피던 아이는 장난기어린 내 표정에 금방 콧방귀를 뀌었다.

“엄마, 뭐하는 거야?”
“아빠랑 똑같이 생긴 애 고르느라고 고생 많이 했어. 그래서 네가 몰랐던 거야.”


사실 딸아이는 놀랄 만큼 아빠와 닮았다.

“그래? 그 동안 키워줘서 고마워. 근데 다 클 때까지 나 안 버릴 거지?”
아이가 장난스럽게 내 말을 받아친다.
“그렇지? 친엄마도 아닌데 진짜 많이 사랑해주고, 많이 참아주고. 넌 참 복이 많은 애야.”
“맞아. 내 친구는 친엄마인데도 잘 못해준대. 엄마는 참 좋은 사람이야.”
“너는 괜찮은 애야. 네 친엄마는 안됐다. 너 같은 애를 잃어버려서. 아마 부자가 돼서 네가 어른이 됐을 때 나타날 거야.”
“그럼 내가 엄마한테 돈 많이 갖다 줄게.”


우리는 온갖 예의를 갖춰서 서로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잠깐의 장난이었지만 심리적 거리가 유지될 때 얼마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판타지를 갖는다. 남편 말고 다른 남자와 살았더라면, 얘보다 더 똑똑한 애가 내 아이였더라면, 내 부모가 재벌이라 내 직업이 재벌 2세라면. 드라마를 보고 소설을 읽는 것은 잠시나마 판타지에 젖어 들어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드가 정리한 자아 방어기제 중에는 판타지가 포함되어 있다. 현실과 판타지를 구별하지 못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사랑을 속삭이기도 하고, 아이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 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하라고 강요하면서 아이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그래서 판타지는 적절히 충족되어야 한다. 아이와 했던 입양놀이는 격동의 사춘기에 접어든 저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면 좀 더 편하게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나의 판타지가 만들어낸 것이다.

다른 남자, 다른 여자를 꿈꾸는 판타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을 두고 지속되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다른 여자를 경험하게 해주기로 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나는 그의 불륜녀가 되었다.

“당신, 오늘 집에 꼭 가야 해? 하루만 같이 있어주면 안 돼?”

남편이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나를 본다.

“오늘 못 들어간다고 부인한테 전화해. 안 그럼 내가 다 말해버린다.”
“괜찮아. 하루쯤 안 가도 될 거야. 오늘은 같이 있어줄게.”


드디어 눈치를 챈 남편이 내 말을 받아준다.

장난을 좋아하는 나는 결혼 후 모텔 앞을 지나갈 일이 있으면 3m쯤 떨어져 걷자고 해서 남편을 당황스럽게 만들곤 했다.

“불륜커플처럼 보이면 재미있잖아.”
“뭐가 재미있어? 당신이 그러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거 아니야?”
“어차피 당신은 평생 나하고만 살 거고, 나는 당신하고만 살 거잖아. 지루할 때도 있고 지겨울 때도 있을 텐데 잠깐 딴 사람하고 산다고 생각해 보는 게 그렇게 나빠?”


우리는 그렇게 불륜커플이 되었고, 간혹 주고받는 불륜커플의 대화는 긴 결혼생활에 깨알 같은 재미가 되었다.

단, 주의할 점!
사춘기가 되기 이전의 아이에게 하면 진짜 입양된 줄 알고 친엄마를 찾아 나설 수 있음.
유머감각이 부족한 남편이라면 아내의 불륜을 의심해 의처증에 걸릴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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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선미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임상심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한국 임상심리학회 전문가 수련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으며, 임상심리학과 관련된 저서와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94년부터 아주대학교 병원에 재직하고 있으며, 아동을 대상으로 심리평가와 치료프로그램, 부모교육을 해왔다. 부모와 전문가를 대상으로 아동 이상심리, 부모교육훈련, 행동수정을 주제로 다수의 강의를 하였다. 현재 EBS TV ‘생방송 60분 부모’에 고정출연하고 있다. 저서로, 『부모 마음 아프지 않게, 아이 마음 다치지 않게』『조선미 박사의 자녀교육특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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