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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딩 고딩들의 지랄춤과 칼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힘이 안 나고 신명이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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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동갑’ 기념으로 스크랩에 실린 아버지의 글 전반에 걸쳐 시비를 걸어본다. 동갑이라서만은 아니다. 스크랩 속의 무대는 1970년대를 떠나 바야흐로 1980년대의 궤도로 진입했다. 특히 1980년은 문제적 해였다. 좀 더 엄밀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는 보수화의 징후가 뚜렷하다.

아버지와 나는 동갑이다.
나는 지금 만만한 친구의 얼굴을 째려보듯, 아버지의 글을 건방진 눈길로 훑어본다. 거칠게 휘갈긴 한 글자 한 글자를 혀에 담아 굴리고 튕겨내며 품평을 시도한다. “어이구 또 공자 말씀이네. 새로운 메시지 좀 적으시지!” 언제부턴가 아버지가 내뱉는 감상의 편린들이 예측가능해졌다. 이해는 된다. 아버지는 항상 혼자 글을 쓰고, 혼자만 봤다. 활자화될 일이 없었다. 당연히 지적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일기에 가까웠으니까.

아버지와 나는 정말로 동갑이다. 아버지의 스크랩 제13권을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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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페이지에 서시가 나온다. ‘고난의 역사’라는 제목의 글이다. 쓴 날짜는 1980년 1월20일. 둘째 아들이었던 내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던 시점이었다. 이 글을 쓰는 2012년 5월, 나의 첫째 아이는 중학교 3학년이다. 1980년 아버지의 나이는, 2012년 현재의 나와 정확히 같다.


고난의 역사

인간의 역사는 팔랑개비
좌우를 분명치 못하는 바람과 도박
인간의 역사는 연날리기 시합
풍향을 쫓아 아부하는 운명
인간의 역사는 축구경기
골키퍼 네 놈이 죽일 놈이다
폭풍이 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밤
고난에 슬픈 역사를
지도에 그린다
고독한 총부리도 한 떨기 백합화의 운명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지는 역사의 흐름에 고개를 끄덕인다

1980. 1. 20



‘아버지와 동갑’ 기념으로 스크랩에 실린 아버지의 글 전반에 걸쳐 시비를 걸어본다. 동갑이라서만은 아니다. 스크랩 속의 무대는 1970년대를 떠나 바야흐로 1980년대의 궤도로 진입했다. 특히 1980년은 문제적 해였다. 좀 더 엄밀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는 보수화의 징후가 뚜렷하다.

첫 시의 제목은 거시적이다.


다르게 말하면 추상적이다. 역사, 역사, 역사, 역사, 역사, 역사. 위 시에서만 여섯 번 등장한다. 하품이 나온다. 예전에도 스크랩에 단골로 출연해온 ‘역사’였다. 별다르게 의미심장한 내용은 없다. 바람과 도박, 폭풍, 폭우, 고난, 운명 등등의 단어들도 찡하지 않다. 세상을 보는 아버지의 시선이 자꾸만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해 안타깝다. 어떤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그 속에서 가랑잎처럼 나뒹구는 인간사의 허무를 노래하고 싶은 마음. 아버지, 고정하시옵소서. 심심한 가운데서도 “골키퍼 네 놈이 죽일 놈이다”라는 대목은 눈에 띈다. 역사를 판가름하는 한판의 축구경기 같은 승부에서 불행의 결정타를 막지 못한 자들의 책임을 묻는다는 뜻일까? 그 옆에는 또 다른 시가 적혀있다.


평화로운 풍경이 자장가를 부르고
꿈속에 아득히 보일 듯 말듯
고향에 옛정이 나래를 편다

저 산 너머에는 슬픈 참새들이 모여서 운다
잔인하고 기약 없는 정치 무정
권력 앞에 영과 욕이 엇갈리는 교대극

해는 누엿누엿 산마루에 목을 매는데
슬픈 듯 구름 가는 소리가 잠꼬대로 졸고
나뭇가지들은 바람소리에 춤을 추고 있구나

역사의 방향은 몰락하는 인간들의 현장
폭풍의 에너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야심의 사나이들이 탈춤을 추는구나



요건 앞의 시보다 반짝거린다. 상징과 서정이 살아있다. 아버지는 그림까지 곁들였다. 산촌의 목가적 풍경. 부드러움 속에 시대를 비추는 긴장이 숨어있다. 맨 뒤의 두 문장이 가장 좋다. “폭풍의 에너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야심의 사나이들이 탈춤을 추는구나.”

이번 회는 ‘야심의 사나이들이 탈춤을 추던’ 1980년 봄의 이야기다. 사람들은 이때를 가리켜 ‘80년 서울의 봄’이라고 불렀다. 박정희의 18년 철권통치가 지배하던 ‘겨울’의 터널을 막 빠져나온 ‘봄’이었다. 1979년 10월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총으로 쏴죽인뒤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조치가 전국으로 확대될 때까지 ‘봄’은 잠시 머물다 갔다. 만물이 생동했고, 대학 캠퍼스와 정치권의 화단엔 꽃이 피는 듯 했다.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의 마음은 기대와 희망으로 들떴다. 누구나 ‘야심’을 품고 ‘탈춤’을 추려고 했다. 신군부의 두목이었던 전두환도 마찬가지였다. 보안사령관이자 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그는 1979년 12.12쿠데타로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한 뒤 중앙정보부장 서리 자리까지 꿰차며(80년 4월14일) ‘야심의 각본’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강원도의 소도시, 그중에서도 변두리에 살던 나에게 그때가 ‘봄’이었다는 각인된 기억은 없다. 텔레비전에선 뭔가 서울의 시끄러운 장면들이 보도되기는 했지만 먼 나라 이야기였다. 우리 동네는 평화롭기만 했다. 피부를 스친 변화의 조짐은 딱 하나였다. 군대 신병처럼 빡빡 깎던 머리 길이에 융통성이 생겼다는 점이다. 중학교 2학년 언제부터인가 조금 긴 스포츠머리가 허용되었다. 이런 작은 시혜도 1980년 봄에 피었던 꽃이라 할 수 있을까? 덕분에 고등학생들의 난동에 관한 기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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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고교생들
폭력 쓰며 요구
자율 바람 타고 사회문제화
대부분 밤에 학교 기습
10일 새 10개교서 발생
머리 기르게 하라/ 단화 신게 해달라/ 소지품 검사 말라/ 교복을 없애달라/ 음주 처벌 말라
각목 휘두르고 돌 던져


학원자율화 바람을 타고 최근 일부 고고생들이 ‘머리를 기르게 해달라’ ‘단화를 신게 해달라’ ‘교복을 없애달라’ ‘소지품 검사를 하지 말라’ ‘술먹은 학생 처벌을 철회하라’는 등 갖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학교기물을 마구 때려부수는 집단폭력을 행사, 교육계와 학부모들의 우려를 낳고 있다. 29일까지 10일 사이에 고교생들이 보인 ‘난폭행동’의 사례는 서울에서 7개교, 지방에서 3개교가 발생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형편이다.

학생들은 주로 숙직교사 혼자 지키고 있는 밤중을 타 집단으로 학교에 몰려와 각목을 휘두르고 돌멩이를 던져 유리창, 흑판 등을 무더기로 깨뜨리는 등 야간기습 성향을 보이고 있는데 해당학교 당국은 대부분 자율적인 해결책을 강구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다. 교육전문가들은 학생들의 이같은 집단난폭화 현상은 대학의 자율화 운동에 잘못 영향 받은 것으로 분석하고 학생들이 요구조건 제시와 함께 우선 부수고 보는 사태는 자신들의 의사를 조리있고 계통적으로 전달하는 민주훈련을 오랫동안 방치해왔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지적, 학교ㆍ학부모ㆍ사회가 협동으로 해결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한편 폭력은 휘두르지 않았으나 머리기르기에 관련, 농성을 벌인 학교만도 그동안 부산에서 11개교, 경북에서 2개교, 서울에서 1개교나 된다.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B모 고등학교 야간부학생 50여명은 이날 낮 소풍에서 교사들이 소지품을 검사하고 소주병을 압수한 데 불만을 품고 밤중에 학교로 몰려와 각목을 휘둘러 학교유리창 2백50여장을 깨고 돌아갔다. 이날 밤 숙직을 하던 이 모 교사는 한 학생으로부터 “학생들이 학교를 부수러간다”는 연락을 받고 교문을 걸어잠갔으나 학생들은 담을 넘어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같은 날 강남구 Y고교에서도 음주 현장을 교사들에게 적발당한 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학교로 뛰어들어 학교유리창 40여장을 때려부수고 돌아갔다. 이 학교 학생들은 이튿날에도 대낮에 술에 취해 각목을 들고 학교담을 넘어들어오려다 교사들의 제지로 그냥 돌아갔다.

또 24일 하오8시께 서울 H고교 야간부학생 4백여명도 ‘머리를 기르게 하라’는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각목을 휘둘러 학교 유리창 1백여장을 깨뜨렸고 N고교 S고교생들도 ‘단화를 신게 하라’ ‘교복을 없애라’는 등을 요구하며 밤중에 학교로 몰려와 소란을 부렸다.
숙직을 하다가 혼자서 학생들을 막아내야 했던 H고교의 김 모 교사는 “10년 교직생활중 처음으로 슬픈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이 요구하는 자율화가 뭔지 모르겠다. 학생들이 실컷 두들겨 부수고 돌아간 뒤 숙직실에 돌아와 혼자서 울었다”고 말했다.

K전수학교(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학생 1천여 명은 29일 상오 8시부터 머리를 10cm까지 기르게 할 것과 신발을 단화로 바꿔 신게 해달라는 것 등을 요구하다가 일부학생들이 유리창을 부수는 등 소란을 피웠다.

또 지방에서는 부산 Y고교야간부 학생 1백20여명이 28일 ‘장발을 허용하라’‘음주행패로 처벌당한 학생을 구제하라’고 요구 수업을 마친 밤8시 이후 계속 학교에 남아있다가 각목 등을 휘둘러 학교 유리창 50여장을 깼다.

부산 K고교생 1천여 명도 28일 교내 운동장에 모여 ‘머리를 기르게 해달라’ ‘신발을 자유화하라’는 등 4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교실유리창 40여장을 부수며 농성을 벌였다. 머리기르기에 관련, 농성만 편 학교도 부산에서만 11개 학교다.

이런 행동을 취하는 학생들을 기물을 부수는 이유를 물으면 “그렇게 해야 학교에서 요구를 들어 준다”든가 “다른 아이들이 하자고 해서 따라 나선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뚜렷한 의식도 없다.)

(1980년4월30일치 <한국일보>)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치사하다. “…뚜렷한 의식도 없다.” 내가 볼 땐 이 기사를 쓴 기자 역시 ‘뚜렷한 의식’이 없다. 국가와 교육당국과 학교가 ‘청춘’을 조직적으로 억압하고 말살하던 때다. 한창 멋부릴 나이에 패션과 사생활의 자유는 없었다. 학교가 아니라 병영이었다. 유리창 몇 백 장 박살난 것은, 그 한풀이와 저항의 결과 치고는 귀엽다. 기사엔 숙직을 하다 학생들을 기습을 받은 김 모 교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학생들이 실컷 두들겨 부수고 돌아간 뒤 숙직실에 돌아와 혼자서 울었다”고 했다. 슬프고 섭섭할 수 있지만, 이 지경에 오기까지 누구 책임이 더 큰가는 냉철히 따져봐야 한다. 당시 이 기사를 읽었던 중고생들은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맛보았으리라.

그 시절을 돌아본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엔 학년 별로 11개 반이 있었다. 한 개 반은 70여명. 도합 800명에 가까웠다. 교감과 학생주임은 가끔 그 전체 학년 아이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책가방을 들고 나와 줄을 세운 뒤 다 꺼내놓게 했다. 교사들이 소지품 검사를 한다며 샅샅이 뒤졌다. 칼 또는 담배 또는 ‘빨간 책’(음란도서)같은 걸 적발한다는 명분이었다. 귀싸대기를 그냥 때리지 않고 반드시 금반지를 낀 손으로 때리던 선생님도 잊을 수 없다. 유도선수 출신인 체육선생님은 한 ‘문제학생’을 교실에서 한 시간이 다가도록 메다꽂기도 했다. 좋은 선생님도 적지 않았지만, 나쁜 선생님들의 활약이 너무 눈부셨다. 휴대폰 카메라 따위는 없었다. 동영상을 띄울 인터넷도 없었다. 한국의 30, 40대들이 영화 <말죽거리잔혹사>(2004년 개봉)의 명대사 “대한민국 학교 X까라 그래”에 감응했던 이유는 그만큼 제도화된 학교폭력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생각이 다르다.


부러진 자유

꺾어진 화살은 쏠 수 없다
표적 없는 화살은 방향이 없다
목적 없는 화살은 살인행위다
자율 바람이 폭풍처럼
집을 날리고 나무뿌리를 흔든다
각목 휘두르고 돌을 던지고
화살을 입에 물고 지랄춤을 춘다
그래도 관객은 모여드니 재미있구나



‘지랄춤’이다. ‘탈춤’에 이어지는 두 번째 춤이다. 아버지는 “화살을 물고 지랄춤을 춘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한다. “자율 바람이 폭풍처럼 집을 날리고 나무뿌리를 흔든다”고도 했다. ‘폭력이 나쁘다’는 아버지의 설교는 틀리지 않다. 중딩 고딩들의 지랄춤, 맞다. 다만 누가 더 거대한 지랄춤을 추었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학생인가, 학교인가. 다음엔 ‘학교 습격’ 보도 일주일 전에 벌어진 ‘탄광촌 습격사건’이다.

광부(동원탄좌) 3천명 난동
임금인상ㆍ노조 지부장 사임요구
지서습격 투석전, 경찰사망1ㆍ부상 40명


【사북현장=임시취재반】강원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소장 유환규ㆍ52)소속 광부 3천여명이 임금인상과 노조지부장 개선 등 6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연 4일째 집단난동, 경찰관 지서와 기차역 등 읍 전체를 점거한 채 24일 상오 현재 무장경찰관 1천여명과 대치중이다. 전국광산노조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지부 산하 노조원들인 이들 광부들은 탄광측이 노조지부장 이재기씨와 짜고 임금을 42.75% 인상해달라고 요구했던 것을 20% 선에서 결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항의농성을 벌이다가 집단난동을 벌였다.
이들은 임금인상과 노조지부장 개선등을 요구, 광산측과 대립하여 지난 16일부터 부분적으로 농성을 벌여왔었다.
경찰은 이들의 농성을 ‘불법집회’로 단정, 해산시켰는데 다시 광부들이 낸 집회허가가 ‘불허’가 되자 이를 따지기 위해 지난 21일 30여명이 노조지부사무실에 모여 농성을 벌이다 50여명의 무장경찰관과 충돌한 것이 화근이 돼 쌍방간의 충돌이 격화됐다.
이때부터 5백여명으로 불어난 광부들은 지서를 습격 때려부쉈고 출동했던 이웃장성 정선 영월 등 5개 경찰서 무장경찰관들과 투석전으로 맞섰다.
이 충돌로 영월경찰서 이덕수 순경(33)이 숨졌고 장성서장 홍응수 총경이 늑골이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고 권총을 빼앗겼으며 9명이 중상 31명이 경상을 입었다. 광부들의 피해상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하략)

(1980년4월24일치 <한국일보>)

언론에서는 ‘사북사태’라 불렀다. 노동자들이 1980년 신군부의 공권력과 처음으로 정면충돌한 사건이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지장산 자락에 위치한 사북광업소는 당시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이었다. 4000여명의 광부들이 연간 160만여 톤의 무연탄을 캤다. 사북에서의 공공건물 습격은, 학교를 습격해 유리창을 깨고 도망간 고딩들과 차원이 달랐다. 기사에서 보듯 탄광노동자들은 지서를 제1표적으로 삼았다. 1980년 4월21일의 일이었다.

그들도 유리창을 깼다. 지서의 전화기와 책상, 난로, 집기와 비품도 닥치는 대로 부쉈다. 경찰서장이 광업소장과 함께 광업소 객실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뒤엔 객실(일종의 외부손님 접대장소)을 습격했다. 때마침 암수술로 입원한 정선경찰서장 대신 와 있던 장성경찰서장을 주먹과 발길질로 짓밟았다.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때린 뒤엔 계단 밑으로 굴렸고 다시 집단폭행했다. 광업소 간부사택도 습격했다. 부녀자들은 연탄집게를, 광부들은 몽둥이를 든 채였다. 아무도 없자, 집안에 있던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 가전제품과 장롱, 부엌살림까지 모두 박살냈다. 광업소 사무실도 습격해 집기를 모조리 부쉈다.

다음날 1,000여명의 광부들은 시내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경찰이 진압을 시도하자, 거꾸로 경찰들을 진압해버렸다. 사택단지와 광업소로 통하는 이른바 ‘안경다리’에서의 투석전을 승리로 이끌어 경찰을 물리쳤다. 광부들의 돌에 맞아 1명의 경찰이 숨졌다. 시위대는 광업소의 통근버스와 트럭, 지프도 때려부쉈다. 사북은 해방구가 되었다. 공수부대가 투입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로 공수부대원들은 제1군사령부가 있는 원주에 대기 중이었다. 광부들은 광업소 무기고와 화약고를 습격했다. 다이너마이트와 소총으로 군 병력에 맞서려고 했다. 무장투쟁 직전이었다.

스크랩 속 사진에는 한 여인이 두 손이 묶인 채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 있다. 도망간 전국광산노동조합연맹(광산노련) 노조 지부장 이재기 대신에 붙잡힌 그의 부인 김순이다. 그녀는 4월22일 오전부터 흥분한 광부들에게 끌려가 47시간 감금당한 채 욕설을 듣고 얻어맞고 희롱당하며 끌려다녔다. 사형(私刑).


왜 저 여자를
사형(私刑)하며
강간했는가
일종의
사육(私肉)을 먹는
강간이 아니고 무엇인가

저 여자를 껴안고
포옹하는 자가
누군가
인간의 처절한
피비린내가 난다

포옹도 없고
키스도 없고
그래서 돈 없는
사람이 불쌍한 것이다



아버지는 광부들에게 연민을 보낸다. 따스한 연민이 아니다. 왜 “돈 없는 사람이 불쌍한 것”이라고 했을까. 돈이 없으니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지랄춤’은 필연적이라는 말로 들린다. 악의적인 해석일까?

지부장 부인 광부 옷 입혀
사북시내 시위


23일 하오 3시20분께는 광부 부인 50여명이 경찰측에 정보를 제공해왔다는 최홍헌씨(47ㆍ공화당 사북읍 관리장)에게 티킷을 들게 하고 노조지부장 이씨의 부인 김순이씨(43)에게 광부옷을 입혀 앞세우고 “이 지부장을 내놓으라”며 고한으로 향해가다 광업소로 되돌아갔다. 이들은 광업소를 나서 사북 지서 앞을 거쳐 3백여m 떨어진 사북주유소 앞까지 진출했다가 하오4시께 발길을 돌려 광업소로 돌아갔다.
일부 난동 광부들은 가게에서 술 특히 소주를 살수 없게 되자 주류도매상 등의 창고에서 빼앗아가기도 하며 읍내에 있는 경찰관 집과 광업소간부집을 계속 파괴하고 있다.
또 광부들은 경찰 등 대책본부에 정보를 제공,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한다고 사북 출장소도 점거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한편 대책본부에서는 헬리콥터 편으로 협의를 요구하는 전단을 뿌렸으나 광부들이 협의대상자를 정하지 못한 채 협의를 지연시키고 있다.
광부들은 지부장 부인 김순이에게 광부 옷을 입힌 뒤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경찰은 헬리콥터로 자제를 촉구하는 삐라를 뿌렸다. 통제불능의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혐오는 계속된다.


영광도 없고 수치도 없고 미련도 없는 절망이 꽉 찬 인생들
처절한 구렁텅이 속에서 백병전을 한다
백성도 없고 시민도 없고 이웃도 없고 형제도 없다
개들이 옷을 벗고 냇가에서 물싸움을 한다
미친년들이 머리를 깎고 큰절을 한다
우스운 작난
눈물없는 작난
항복없는 전쟁이 자꾸만 계속된다



“개들이 옷을 벗고 냇가에서 물싸움을 한다”고 썼다. 탄광노동자들은 정말 개같은 짓을 한 것일까. 그들은 개였다. “개같이 나쁜 짓”을 했다는 의미로 쓰면 동물비하가 된다. 여기서는 ‘개처럼 비참한 생활을 했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신문기사만 읽고서 모든 판단을 종결한 것처럼 보인다.

탄광노동자들이 지서를 습격한 것은 4월21일이었다. 신문에 이와 관련한 기사가 처음 실린 날은 4월24일이다. 이틀 동안 보도통제가 이뤄졌다. 계엄사의 허락이 떨어진 뒤에야 중앙일간지들은 이 사태를 보도했다. 신문이 탄광노동자들의 평소 처지를 헤아려줄 리는 없었다.

‘막장 드라마’라는 말을 쉽게 쓴다. 막장의 어원은 탄광에 있다. 갱도의 끝, 막장. 사북사태 1년 전인 1979년에만 전국의 갱도에서 247명의 광부가 죽었다. 5000명이 넘게 부상당했다. 가스폭발이나 화재, 갱도붕괴로 인한 것이었다. 전국의 광부숫자가 5만3000여명일 때였다.

막장 밖 생활도 막장이었다. 고지대에 위치한 고한 사북지역의 광부 사택지대는 급수난까지 심했다. 하루 식수공급이 1시간에 불과했고 목욕탕은 없었다. 공휴일은 한 달에 하루였다. 사택의 칸막이는 종이처럼 얇아 부부생활조차 하지 못했다. 전깃불만 들어올 뿐 문화적 혜택은 전혀 없는 원시적 삶이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위원장은 광업소의 하수인처럼 행동했다. 광부들에 따르면, 불법 논란 속에 재선에 성공한 노조 지부장 이재기는 재선거 요구를 묵살했다. 자기 멋대로 임금협상을 벌여 40%대 요구를 받던 임금인상 폭을 20%대로 깎아버렸다. 광부들이 노조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개입했다. 잠깐의 충돌이 있은 뒤 한 형사가 지프차를 타고 도망가다 3명의 광부들을 치어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경찰은 계속 여기에 기름을 끼얹는 식으로 대응했다. 사북사태의 첫 발화점이었다.

다행히도 광부들은 마지막 선을 지켰다. 끝내 다이너마이트와 소총으로 무장을 하지는 않았다. 강원도 지사의 중재로 노사간 협상을 진행해 사태를 평화적으로 수습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계엄사와 경찰은 ‘보복 사냥’을 시작했다. ‘지역개발대책회의’를 미끼로 핵심 주모자를 불러모아 체포했고, 뒤이어 시위에 참여한 광부들을 100여명 가까이 보안사와 경찰서로 끌고 가 끔찍한 매타작과 고문을 가했다. 광부의 부인들까지 성고문을 당했다. 28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돼 징역형을 살았다. 석방된 뒤에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한 이들도 있었다.

사북사태의 파장은 컸다. 서울의 일신제강, 인천제철, 동국제강, 원진레이온 등 수도권을 비롯한 전국에서 파업이 번졌다. 폭동에 가까운 투석전과 방화가 일어났다. 대학생들도 꿈틀거렸다.

학원쟁점 ‘교외’(校外)로 확산
서울대 천오백명 ‘시국성토’ 교내시위
충남대 가두시위 경찰충돌
경찰 페퍼포그…천여 학생 투석 벌여


대학생들의 시위가 학내문제를 벗어나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최근 있었던 일련의 정부발표에 이어 문교부가 학생군사교육 개선안을 확정, 발표한 1일 하오부터 일부 대학생들은 이제까지와는 성격이 다른 ‘계엄철폐’ ‘민주화투쟁’등 구호와 요구사항 등을 제시하며 학내문제를 떠난 시국성토시위를 벌였다. 또 학생군사교육개선안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렬해져 일부 대학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거리에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서울대 학생들은 이날 낮 12시30분께부터 민주화를 위한 시국성토대화를 열고 1시간40분 동안 교내에서 비상계엄해제, 정부주도형2원집정제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한 데 이어 2일부터 13일까지를 민주화투쟁기간으로 정해 평화적 방법으로 투쟁을 벌이기로 결정, 이제까지 각 대학에서 벌였던 시위ㆍ농성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시위를 폈다. 또 성균관대학생들도 집체훈련 불응학생들에게 발부된 징병검사통지서에 자극, 농성에 들어갔는데 하오에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계엄즉각해제’ ‘정치일정 명확히 하라’는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시국성토의 색채를 가미했다. 또 충남대 학생들은 학교밖으로 나와 대전역까지 오가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도 집체훈련철폐를 주장하면서 “민주발전이 아닌 독재적 유산을 다시 물려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계엄철폐ㆍ국회주도의 헌법개정을 통한 조속한 정권이양 등 정치투쟁적 성격의 구호도 외쳤다. (하략)

(1980년5월2일치 <한국일보>)
이날의 시위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1980년 봄의 대학시위가 학내문제와 군사교육 거부의 차원을 넘어 처음 시국성토 시위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캠퍼스를 떠나 거리로 나섰다. 그래도 고딩과 광부들에 비하면 얌전했다.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걱정할 만한 양상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예쁘게 봐주지 않았다. 대학생들의 가두시위 기사마다 비판적인 시가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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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꾸만 울자기에 나도 울었다
자꾸만 가자기에 나도 보았다
자꾸만 좋다기에 나도 박수를 쳤다
자꾸만 사람들이 이상해진다
한민족의 수난의 역사는
정치적인 빈곤 탓인가

2.

물결이 세차게 흘러내려온다
불길이 힘차게 치솟아 타오른다
젊은 피가 강물이 되여 흐르고
젊은 땀방울이 송이송이
피어오른다
그렇다고-
역사의 흐름이 바로 내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덮어놓고 슬퍼하지도 말고
방관하지도 말고
덮어놓고 혼자 웃지도 말라
역사의 흐름은
아무도 방향을 바라볼 수 없고
아무도 긍정할 수도 없다
거리의 횡포만이
슬기로운 자유가
아니다
그래도 민족의 자유만은 지키라

3.

마음의 흐름은 물과 같고 물의 흐름은 마음의 요동함과 같다
시대의 흐름은 역사의 울음소리요
역사의 고동소리다
마음의 흐름은 피의 끓는 불꽃과 같다
자중하라 남의 젯상에서 덩달아 절하는 놈은
촌놈이요 불쌍한 놈이다


“자꾸만 좋다기에 나도 박수를 쳤다/ 자꾸만 사람들이 이상해진다.” 1번 시는 군중심리를 야유한다. 2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의 흐름이 바로 내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거리의 횡포만이 슬기로운 자유가 아니다” 3번은 가장 노골적이다. “자중하라. 남의 젯상에서 덩달아 절하는 놈은 촌놈이요 불쌍한 놈이다.” 사북사태와 관련된 글에 이어 ‘불쌍한 놈’ 다시 등장이요~. 아, 아버지는 어찌 이리도 잘난 척을 하신 걸까.

데모하는 대학생들인 ‘촌놈, 불쌍한 놈’에겐 5월15일이 고비였다. 이날 학생들은 시위를 계속할지 말지를 놓고 격론을 벌이다, 저녁에 결국 ‘자제’ 쪽으로 돌아섰다.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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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두시위 ‘계속’ ‘자제’ 양론
서울대 등 교내외에서
“과격화 우려 비폭력 방법” 신중론
서울대ㆍ숙대 계속하기로
연세대는 일단 중지 결정


14일 학생가두시위에 참가했던 대학생들은 15일 상오 대학별로 각각 모임을 갖고 ‘학생시위에 대해 국민들이 냉담했던 결과’를 놓고 격렬한 토론을 벌이는 자체 진통을 겪었으며 이 진통 끝에 연세대 등 일부 대학은 ‘자제하기로 결정’, 가두시위를 일단 중단했다. 숙대도 낮12시 가두시위를 않기로 결정했다. 하오3시 재론, 다시 나오기로 번복하는 등 진통을 겪었으며 서울대는 ‘자제’를 주장하는 신중론과 ‘시위계속’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팽팽했으나 ‘비폭력시위를 계속한다’는 선으로 의견이 조정되는 과정을 겪었으며 다른 대학들도 시위 방법에 대한 이견 때문에 토론이 하오 늦게까지 계속됐다.)

(1980년 5월16일치 <한국일보>)


대학가 자제력 발휘...시위 중단
서울27개 대학회장단서 결의 시국 추이 등 관망
부분적 정상수업 재개
대학별 시위 자체 평가도
어제부터


캠퍼스가 오랜만에 자제력을 되찾은 하루였다. 연3일 동안 격렬한 가두시위를 계속했던 서울의 대학가는 16일 자체적으로 일체의 시위를 일단 중단, 대부분이 정상수업에 들어갔다. 서울시내 27개 대학총학생회장들은 16일 자정부터 상오7시까지 고려대 학생회관에서 철야회의를 열고, 일단 교내 및 가두시위를 중단하고, 정상수업에 들어가기로 결의했고, 이에 따라 이날 상오9시부터 등교하는 각 대학 학생들은 대부분 상오에는 정상수업에 참가한 후 하오에는 대학별로 그동안의 가두시위 결과를 평가하는 모임을 갖고, 앞으로의 정국을 관망하는 등 대책을 논의하는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

(1980년 5월17일치 <한국일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왜
모여서 자기를
구경하고 있을까
누구를 구제하기
위해서
누구를 교훈하기 위해서
누구를 동정해서
자꾸만 4.19가
생각이 난다
그렇다
맞았다
그런데 왜
그런지 4.19처럼
힘이 안 난다
신명이 나야
춤도 추겠는데
자꾸만 잠이 온다
눕고만 싶다



“힘이 안 나고 신명이 안 난다”고 했다. “4.19처럼 힘이 안 난다/자꾸만 잠이 온다/ 눕고만 싶다”고 했다. 스크랩 제13권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이다. 막장(!)까지 갈 시국의 운명을 예감한 것 같아서다. 학생들은 무리수를 두지 않고 결정적 순간에 순순히 물러났다.(그래서 여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분분하다) 그렇다면 군부도 착하게 마음을 먹는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틀 뒤 파국이 쳐들어왔다. 다음은 호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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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김종필씨 연행조사
의원ㆍ교수ㆍ목사 등
모두 26명 조사중
계엄사 발표


계엄사령부는 18시 0시를 기해 전국일원에 비상계엄령을 확대실시하면서 “국민의 지탄을 받아오던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와 그동안 사회불안 조성 및 학생ㆍ노조소요의 배후조종혐의자 26명과 지난 14,15일 학생소요 직접 가담자 및 주동자도 연행조사중”이라고 18일 하오 발표했다. 계엄사가 밝힌 연행 조사자 중 일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하략)

(5월18일치 <중앙일보> 호외)
5월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새벽 2시경 무장한 제33사단 병력은 국회를 점령했다. 검거대상 블랙리스트 8백여 명이 각 군과 경찰에 통보됐고, 이중 6백여 명이 체포됐다. 나중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주인공으로 엮이게 될 김대중, 예춘호, 문익환, 고은 등은 그 중 거물급에 해당했다.(명단에 김영삼은 포함되지 않았다.) 구색맞추기를 위해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등이 ‘권력형 부정축재자’라는 이름으로 포함됐다. 그리고 광주.

비극ㆍ처절한 광주시
거리엔 불탄 차 잔해ㆍ유리조각 즐비
도청ㆍ도경 비어, 공포 발사도


【광주=임시취재반】지난 18일 전남 광주 일원에서 시작된 시위는 과격한 충돌로 4일간 유혈사태를 빚었으나 21일 하오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철수하고 광주 시내의 각계인사들이 현지 계엄당국과 대화를 틈으로써 일단 최악의 고비를 넘겼다. 18일 전남대생 2백여명이 가두시위를 나서면서 시작된 시위는 ‘지역감정’을 자극시킨 소문 등이 기폭제가 돼 광주시 일원으로 확산됐으며 시위 시민에 끼어든 일부 과격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무기고를 습격, 총과 실탄을 탈취하고 계엄군과 맞서는 극한상황으로 향해 치달았다. 이 사태로 광주시는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일체 차단돼 고립됐고 시내의 치안과 행정은 완전 공백상태가 돼버렸다.
계엄군의 저지로 수많은 사상자가 났고 계엄군도 많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공공건물과 차량, 시설물들이 불질러지고 파괴되는 등 전쟁 양상을 방불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날 하오께 시민대표들이 당국과 대화를 시작하자 많은 시민들은 “유혈사태가 계속되는 것은 광주의 손해이며 나라의 손실이다. 자제하고 자중해 빨리 정상생활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큰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광주 일원의 소요는 인근지역에까지 산발적으로 퍼지기도 했으며 계엄당국과 협상을 하고 이 사실을 보고하는 등 숨가쁜 ‘평온 되찾기’움직임 속에서도 시민회관과 시민공원에는 버스와 트럭, 탈취한 장갑차 등 20여대의 차량을 세워놓고 M1소총과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수명이 지키고 있는 게 보였으며 광주역에도 무장한 50여명이 역사를 점거하고 있다.(하략)

(1980년5월23일치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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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가 도발한 5월광주의 비극. 그 출발은 18일 아침이었다. 광주시 북구 용봉로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구타와 살상이 시작되었다. 중앙일간지를 통해 첫 보도가 나간 것은 5일 뒤였다. 18일, 19일 미친 듯 광주 거리의 시민들을 향해 곤봉을 내리치고 대검으로 난자하고 군홧발로 짓밟은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은 언론에 일체 보도되지 않았다. 나중에 계엄사의 허락을 받고 광주사태를 보도한 신문들은 다 ‘일부 과격해진 시민들’ 탓만 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썼다.


정치부재의 비극

가슴 아픈 사람끼리 부둥켜안고 씨름을 한다
근심이 뭉쳐진 실타래를 끌어안고 길바닥에 뒹군다
총소리가 나고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비빔밥이 되었다
모두가 방관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방관하지 않는다.

송아지새끼가 장가를 간다고
옷을 입었다
끝없는 광야도 아닌데
어디서 서부극 흉내를 낸다
그래서 이 민족의 비극은 자꾸만 무서워진다

미친듯 소리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밤만 되면 더욱
처량하다
피를 흘리며 도망치는 솔개는 없다
병아리새끼들이 가면을 쓰고 칼춤을 추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노인들은 모른다



신문기사들 옆에 붙은 세 종류의 글이다. 송아지새끼는 누구고, 고양이는 누구고, 솔개는 누구고, 병아리새끼들은 누구인가. 난 모르겠다. 공수부대를 비난하는지, ‘폭도’들을 비난하는지 헷갈린다. ‘칼춤’이 누구를 향한 말인지도 알 수 없다. 아버지의 속마음이 무슨 암호처럼 다가온다.

5월21일 오후1시 광주 금남로에선 드디어 공수부대가 대치중인 시민들을 향해 M16 소총을 난사했다. 그날 저녁 군은 시민들에 밀려 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광주는 해방구가 되었다. 며칠 뒤 김재규가 처형됐다. 변호인단이 재심청구를 한 상태였지만 5월24일 사형집행이 강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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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7일 새벽4시 시민군이 점령했던 전남도청은 계엄군 장갑차에 의해 포위됐다. 계엄군은 항복을 권유하는 최후통첩을 방송한 뒤 도청을 공격했다. 시가전, 무차별 살육. 아래 신문기사에 따르면 “계엄군 투입과정에서 무장폭도 17명이 사망”했단다. 겨우 17명? 두 주일 지난 5월31일 계엄사령부는 “광주사태로 민간인 144명이 죽었다”고 공식발표했다. 그 말들을 믿을 광주시민은 없었다.

광주에 계엄군 진입
어제 새벽에 17명 사망
시내 일원 장악 출입을 제한


【광주=임시취재반】5.18 광주유혈사태는 발생 만 10일 만인 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진입해 들어감에 따라 일단 진정됐다. 이날 새벽 3시30분 계엄군은 시내에 투입되기 시작, 1시간40분만인 상오 5시10분 전남도청을 비롯한 주요건물과 전 시가지를 장악했으며 이어 경찰 등 관계 공무원과 함께 질서찾기에 나섰다. 전국민의 여망과 정부의 지원속에 광주 시민들도 차차 복구작업에 들어가고 있다.
이날 상오 계엄사는 “계엄군이 광주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왔으나 극력한 폭도들에 의해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는 조짐을 보여 시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군을 투입하게 됐다”고 밝혔다.
계엄사는 또 이날 하오 광주사태에 대한 2차발표에서 계엄군 투입과정에서 무장폭도 17명이 사망했고 2백95명을 검거, 보호 중이며 계엄군도 2명이 순직, 12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하략)

(1980년5월28일치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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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국보위) 설치가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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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은 최규하 대통령이었고, 상임위원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및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 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이 맡았다. 의장은 허수아비였고, 실세는 상임위원장이었다.

‘전두환의 봄’이 왔다. 1980년 8월16일, 얼굴마담에 불과했던 대통령 최규하가 취임 9개월 만에 하야했다. 6일 뒤인 8월22일엔 전두환 대장 전역식이 열렸다. 5일 뒤인 8월27일엔 박정희가 만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이 99.9%의 지지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10월27일엔 제5공화국헌법이 ‘투표율 사상 최고 95.5%와 90% 이상의 찬성률’로 발효됐다. 1981년 2월25일엔 제5공화국헌법에 따른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전두환 제12대 대통령이 당선했다. 득표율 90.23%.



빠를 수록 좋은 것이 있다
빠를 수록 더욱 좋은 것이 많이 있다
그런데 빨리 먹는 밥은 위장을 좀먹는다
그런데 빨리 뛰는 발은 부러지고 넘어지기 슆다
그런데 빨리 얻는 돈은 쉽게 얻는 돈-
쉽게 잃는 수도 있다


사상 최고로 수지 맞은 장사

어부가 그물을 던질 때 몇마리를
잡겠다는 계산을 하고 자신을
한다면- 그것도 웃읍다
물론 어항속에 고기는 자기 마음대로
잡을 수 있고 놓아줄 수 있다면
놓아줄 수도 있다
그런데 모르는 비밀이 꼭
하나 있다
그것은 눈먼 고기가 있기 때문이다
우울하게 잡힌 고기는 반듯이 찔리고 아프게 하는 가시가 있어
맛이 없는 법이다.



아버지는 주춤주춤한다. 고딩들과 사북 탄광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의 시위엔 냉소를 날리거나 비난을 했다. 광주의 비극엔 뭔가 울먹거리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명쾌하지는 않았다. 전권을 장악한 전두환에겐 긴가민가한 충고를 했다. “빨리 먹는 밥은 위장을 좀먹는다.” “우울하게 잡힌 고기는 반드시 찔리고 아프게 하는 가시가 있어 맛이 없는 법”이라고.

아버지의 글을 총정리하며 세 가지의 ‘춤’을 골라본다. 1. 탈춤(야심의 사나이들이 탈춤을 추는구나) 2. 지랄춤(화살을 입에 물고 지랄춤을 춘다) 3. 칼춤(병아리새끼들이 가면을 쓰고 칼춤을 추고). 이건 뭐 병신춤 시리즈 3부작이란 말인가. 춤바람 나기 좋은 계절이었던 1980년의 봄. 탈춤, 지랄춤까지는 봐줄만 했는데 칼춤 때문에 나라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나와 동갑인 아버지는? 친구에게 하듯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렇게 속삭여드리고 싶다. “에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스크랩 제13권은 부정확하고 허망한 언어의 춤판이다. 비겁한 언론의 춤판에 속은 측면이 있지만 말이다.



※ 참고한 책

『한국노동운동사2-해방 이후에서 1987년 대파업까지』(안재성 지음, 삶이 보이는 창, 2008)
『탄광촌공화국』(홍춘봉 지음, 노동일보, 2002)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1권』(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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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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