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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김창완 아저씨가 정말 가수였어요?” - 청년 스피릿 <산울림>

왜 산울림이 위대한가! “가사에 일정한 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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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로는 그렇게 폭발적이고 사이키델릭한 록 사운드가 없었다. 「아니 벌써」와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센세이션은 단지 곡의 승리가 아니라 대마초파동과 가요규제조치로 잔뜩 움츠린 한국 록의 부활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들의 노래는 ‘청춘 찬가’였다. 올해로 데뷔 35주년. 3형제의 막내 김창익의 사망과 함께 산울림은 역사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들의 전설은 지금도 꿈틀거리고 있다.

당시로는 그렇게 폭발적이고 사이키델릭한 록 사운드가 없었다. 「아니 벌써」와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센세이션은 단지 곡의 승리가 아니라 대마초파동과 가요규제조치로 잔뜩 움츠린 한국 록의 부활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들의 노래는 ‘청춘 찬가’였다. 올해로 데뷔 35주년. 3형제의 막내 김창익의 사망과 함께 산울림은 역사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들의 전설은 지금도 꿈틀거리고 있다.


1970년대 데뷔 전

삼형제의 맏형 김창완은 미8군 군속 설계사였던 아버지 고 김재혁씨와 장은성씨 사이에서 1954년 출생했고 동생들은 모두 2살 터울로 창훈은 1956년생, 창익은 1958년생이다. 여섯 살 때 김창완은 어느 날 일어나 보니 동네 친구들이 학교에 입학해서 싹 보이질 않아 친구 찾아 무작정 학교에 놀러간 게 자동 입학한 셈이 되어 1954년생인데도 1952년생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이 말은 1953년생인 송골매의 배철수보다 한 살 어리지만 학번은 도리어 하나가 위라는 얘기다.

어릴 적 가정환경은 좋지 못했다. 부모의 금실이 좋지 않아 늘 불안정했고 삼형제에게 아버지는 무섭기만 했다. 김창완은 그 시절을 “달아나고 싶었고 공상에 빠지곤 했고 늘 혼자 있고 싶어 했다. 커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산울림 시절 동요를 많이 쓴 것은 이런 환경의 산물이다. 다만 동요가 순수성의 발로라기보다는 마음을 다스리는 하나의 방식이었던 셈이다.


대학에서 음악으로 뭉치다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삼형제였지만 학업성적도 빼어났다. 김창완은 서울대 농대 잠사학과를 다녔고 창훈도 같은 대학 식품공학과를 입학했고 막내 창익은 고려대 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삼형제가 음악으로 뭉친 것은 1970년대 초반, 그러니까 김창완이 대학생이 되어서였고 셋은 이때부터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 드럼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곡은 대부분 김창완이 만들었지만 더러 김창훈도 썼다. 나중 거의 1년마다 산울림의 정규 앨범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무렵 워낙 많은 곡을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에는 집에서 연주하다가 악기와 앰프 소음 때문에 ‘시끄러워 못 살겠다’는 동네사람들의 진정이 끊이질 않았으며 어머니는 항의하는 주민들에게 사정사정하는 게 다반사였다고 한다.

1976년 군에서 전역한 뒤 김창완은 취직이냐 음악이냐의 갈등의 기로에 섰지만 결국 음악을 선택, 1977년에는 레코드사를 찾아다니며 앨범 발표의 기회를 타진한다. 대학생들의 관심이 쏠린 < MBC 제1회 대학가요제 >에 출전하고 싶었지만 김창완이 이미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서울대 캠퍼스 밴드였던 ‘샌드 페블스’에게 김창훈이 써준 「나 어떡해」가 이 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이들의 가능성은 커졌다. 마침내 서라벌레코드사와 음반계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산울림은 대중의 반응을 전혀 기대를 하지 않고 단지 음반을 내고 싶었다지만 1977년 12월에 발표한 앨범은 초대형 대박을 치게 된다.


초대형 대박 데뷔 앨범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훤하게 밝았네/ 가벼운 아침 발걸음 모두 함께 콧노래 부르며/ 밝은 날을 기다리는 부푼 마음 가슴에 가득/ 이리저리 지나치는 정다운 눈길 거리에 찼네/ 아니 벌써 밤이 깊었나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네/ 해 저문 거릴 비추는 가로등 하얗게 피었네...’

산울림의 첫 앨범은 말 그대로 돌풍을 일으켰다. 길 가던 사람들이 펄 시스터즈의 「님아」와 남진의 「님과 함께」의 주요 대목을 흥얼거렸듯이 너도나도 「아니 벌써」하며 목청을 높였다.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에게 그것은 청춘 찬가였다. 그들과 함께 대마초파동과 가요규제조치로 가라 앉아있던 록(Rock)이, 저 위대한 ‘록의 폭발성’이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종래에 들을 수 없었던 강타와 발열의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변화를 갈망해온 청춘들은 일제히 산울림의 노래로 쏠려 들어간 것은 당연했다. 앨범에 수록된 「문 좀 열어줘」, 「불꽃놀이」,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그 얼굴 그 모습」, 「소녀」 등 거의 전곡이 라디오 전파를 어지러이 수놓았다.

음악 팬들은 그들의 폭발적 사운드에도 경기(驚氣) 들렸지만 탁월한 감수성에 빛나는 언어들의 배열, 그 노랫말에도 이성을 잃었다. ‘꼭 그렇지 않았지만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어/ 나무 사이 그녀 눈동자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네..’(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와 같은 가사는 이전 대중가요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천재성의 발현이었다.

해를 넘겨 6개월 후인 1978년 5월에 발표한 2집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도 젊음에게는 못이길 중독의 유혹이었다. 긴 제목도 그랬거니와 전주 3분이 지나도 노래가 나오지 않는 파격에 젊은이들은 다시금 아연 실색했다. 기타 퍼즈 톤과 강렬한 솔로가 빚어내는 사이키델릭 터치는 거칠었지만 무한의 몽환 그리고 감동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처절한 분위기가 극점을 향하는 3집의 ‘내 마음(내 마음은 황무지)’ 또한 잊을 수 없다. ‘나의 마음은 황무지/ 차가운 바람만 불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런 황무지였어요/ 그대가 일궈 논 이 마음/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기름진 땅이 되었죠...’


록의 폭발에서 서정으로!

너무 짧은 시기에 앨범이 잇달아 출시된 탓인지 4집과 5집의 반응은 다소 미지근했다. 하지만 1980년에 출시한 6집부터 산울림은 새로운 면모를 보이면서 팬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도 애청되는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빨간 풍선」, 7집의 「청춘」, 8집의 「내게 사랑은 너무 써」, 10집의 「너의 의미」는 이전 청춘의 고함과는 차별화된 포크 성향의 차분한 기조였다.

물론 「가지 마오」 같은 강렬한 록이 없지 않았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은 곡들은 포근한 고백조의 노래들이었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지 않을 거예요/ 오늘처럼 비가 내리며는...’(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청춘)

마치 1980년대 신군부 정권에 의한 억압적 사회분위기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어루만져주듯 고요의 위안을 제공했다. 1970년대 말은 폭발성의 충격이었다면 이때는 서정성의 위로였다. 1983년에 발표한 김창완의 솔로 곡 「어머니와 고등어」는 이 시기의 소중한 수확이 아닐 수 없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있네/ 어머니 코고는 소리...’ 트로트 같은 창법 속에서도 김창완 노랫말의 비범함은 여전했다.

1991년에 나온 산울림 12집은 「꿈꾸는 공원」과 「불안한 행복」이 말해주듯 마치 사의 찬미를 방불하게 하는 허무의 극점을 파고들었다. 스스로도 “그때는 정말 죽음 근처까지 갔다”고 실토한다. 이때처럼 술은 퍼부어 마시던 때도 없었을 것이다. 김창완은 음반보다는 방송활동에 비중을 두긴 했지만 1995년 < Postscript >이란 제목의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그러나 반응은 저조했다.

음악계에 록이 다시 살아난 1997년 삼형제는 회심작으로 6년 동안 끊긴 산울림의 앨범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를 내놓았다. CF에도 등장했을 만큼 화제를 모았지만 흥행은 역시 실패였다. 김창완은 대중가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 앨범이지만 의도와 달리 놀이 감으로 끝나버렸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하지만 김창완은 이후 다른 쪽에서 존재감을 부각했고 김창완의 힘 덕분에 산울림도 망각의 늪에 빠지지 않았다.


산울림의 전설은 계속된다

김창완은 1990년대부터 ‘마음씨 좋은 이웃집아저씨’라는 고유의 캐릭터를 구축했다. 마침내 새천년 들어서 그는 TV의 정상급 조연연기자와 가장 잘 나가는 CF 모델로 전업(?)하는데 성공했다. < 아일랜드 >, <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 >, < 진짜 진짜 좋아해 >, < 하얀 거탑 >, < 커피 프린스 1호점 > 등 잇달아 출연한 드라마에서 어벙한 이미지의 연기로 시청자들의 호감을 불러 모았다.

오디오 스타에서 비디오 스타로 변신했다고 할까. 사실 드라마 연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5년이 시작이고 1990년대에도 드라마에 줄곧 얼굴을 내밀었지만 대중적 인기는 이때서야 불을 뿜었다. 그 인기는 CF출연 러시로 이어졌고 심지어 한때 ‘남자 이영애’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한 번도 매체활동을 쉬지 않은데서 오는 대중적인 친근감이 오래 누적된 결과로 본인을 풀이한다.

영상연기자로 젊은 세대에 익숙한 탓에 “아니, 김창완 아저씨가 정말 옛날에 노래했어요? 연기자 아니에요?”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해졌다. 현재진행형으로서 산울림도 끝났다. 2008년 캐나다에서 사업하던 막내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격을 추스르고 김창완은 연기하는 중에도 시간이 닿은 대로 공연과 음악현장을 누비고 있다. 김창완의 음악 현신(現身)은 ‘김창완밴드’로 2008년 첫 앨범을 냈고 올해도 이란 제목의 앨범을 발표해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그는 여전히 뮤지션이다.


왜 산울림이 위대한가

1975년의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으로 황폐화된 음악계에 한 줄기 서광을 비춰준 것은 「아니 벌써」의 산울림이었다. 김창완, 창훈, 창익 3형제는 1977년 맏형 김창완의 대학 졸업 기념으로 만든 데뷔 앨범 하나로 가요계를 전복시키며 청춘과 록의 부활을 견인했다. 3년 넘게 듣지 못했던 통쾌한 록이 마침내 그들과 함께 돌아온 것이었다.

오래간 다져진 3형제의 연주 하모니로 펼친 로큰롤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결코 탁월한 연주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잠시 움츠리고 있던 록의 본능, 그 폭발이 되살아난 것에 젊음은 환호했다. 송골매 출신의 배철수는 이렇게 회고한다. “3코드로 이뤄진 음악이라는 사실은 새로웠다. ‘이런 식으로도 음악을 할 수 있구나!’ 나는 산울림의 「아니 벌써」를 국내 최초의 펑크(Punk) 히트송으로 간주한다.”

영국의 펑크 밴드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역사적인 데뷔 음반과 동시대성을 획득한 이들의 데뷔 음반은 신중현이 열어 놓은 록의 세계를 아마추어의 경지에서 마음껏 조리한 역사적인 음반으로 평가받는다. 또 하나 이들의 절대 위업은 가사의 충격이었다. 이전까지 대중가요 가사에는 운율이 있어야 했지만 산울림은 산문적인 어법을 노랫말에 심어 당대의 사람들에게 도발과 파격의 정체를 알렸다.

김창완은 “가사에 어떤 일정한 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틀이 우리에게는 도리어 이상했다. 꼭 정형화된 언어로 운율을 맞춰 노랫말을 전개해야 하나? 물론 하다보면 기본적인 운율이 필요하지만 산울림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음악어법은 글 아닌 말로 하는 방식, 즉 구어체다!”라고 말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청춘」, 「독백」, 「내게 사랑은 너무 써」, 「너의 의미」와 같은 서정적인 노래들로 성공적 접근을 기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대중의 폭발적 정서와 포근한 정서를 순차적으로 정복한 음악가는 가요사상 산울림밖에 없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천진무구한 창작적 감수성을 전한 동요 작업도 빼놓을 수 없다. 산울림의 「개구쟁이」, 「산 할아버지」 등은 어떤 히트곡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아마추어리즘으로 규정되는 산울림의 음악이 왜 당대의 젊은이를 그토록 삽시간에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그 시절의 국내 대중가요는 청춘의 요구를 전혀 수용하지 못했다. 록은 트로트와 만나 청춘의 외침을 상실했고 자유분방한 노랫말도 없었다. 그래서 젊은 세대는 여전히 음악하면 팝송을 들었다. 김창완은 말한다. “그때 사람들이 팝송을 들었던 것도 실은 팝송이 대단한 음악이라기보다 우리 가요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울림이 성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울림이 등장하면서 우리 음악 수요자들은 비로소 팝과 함께 오랫동안 무시해오던 가요에 귀를 돌리기 시작했다. 산울림이 음악역사에 우뚝 서있는 것은 난공불락으로 여기던 팝에 가요가 음악적 도전의 깃발을 올렸다는데 있다. 우리 대중음악의 주권 확립이라고 할까. 1980년대의 조용필과 이문세에 와서 마침내 팝과 가요가 역전되는 상황에 길을 열어준 것이다.

세대의식 측면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산울림 이전의 기성가요가 위안에 기능이 있었다면 산울림 노래는 위안과는 다른 뉘앙스의 자기발견이었다. 산울림을 들은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중반의 학번들은 자기를 새롭게 찾고 또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특성을 보인다. ‘처음으로 자존심을 가진 세대’라고 할 그들과 산울림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나 자신부터 자신감이 없다가 산울림의 음악을 만들면서 수줍고 나약한 수동태에서 벗어났다”는 김창완의 말이 그 증명이다.

글 /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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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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