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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여성들과 미국인이 커피에 빠진 이유는…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에서 미국 커피와 독일 커피를 연관시켰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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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혀지지 않는 마음속 슬픔이나 분노는 휴화산이다. 잠잠하다가 기회를 노려 언젠가는 폭발한다. 그런데 이 대책 없고, 그래서 폭력적이기까지 한 폭발도 문제지만 정신을 차리고 복기해나가면서 그것이 향하는 지점을 발견하는 일은 또 하나의 슬픔, 분노가 된다. 무의식중에도 그런 거친 감정들은 주로 더 낮은 곳, 더 힘없는 사람을 향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마침표 대신 느낌표로 마무리된 이 한 문장 때문에 그 두꺼운 책, 카를 융(Carl Jung)의 자서전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삭혀지지 않는 마음속 슬픔이나 분노는 휴화산이다. 잠잠하다가 기회를 노려 언젠가는 폭발한다. 그런데 이 대책 없고, 그래서 폭력적이기까지 한 폭발도 문제지만 정신을 차리고 복기해나가면서 그것이 향하는 지점을 발견하는 일은 또 하나의 슬픔, 분노가 된다. 무의식중에도 그런 거친 감정들은 주로 더 낮은 곳, 더 힘없는 사람을 향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폭발조차도 안전선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발견은 끔찍하다. 상처 입은 자는 더 낮은 쪽에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자타가 더 위쪽에 머문다고 과신하는 누군가들이 함부로 버린, 난폭한 감정에 더 자주 노출된다. 그런데 카를 융은, 그런 슬픔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품어낼 수 있다고 느낌표까지 붙여서 강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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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민(물나무)


상처 입은 자들이 서로를 치유하는, 영화 <바그다드 카페>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 한다. 야스민은 이탈리아식 고전 건축물들이 즐비한 아름다운 도시, 로젠하임에 살던 평범한 독일 주부였다. 앞의 글에서도 말했듯이 그녀의 남편은 영화 초반에 부인을 사막 한가운데 버리고 혼자 떠난다. 물론 다시 자신이 버린 부인을 찾아 바그다드 카페로 오기는 한다. 하지만 야스민이 남편 몰래 숨듯, 남편도 건성으로 야스민을 찾는다. 상대에 대한 배려나 관심은 전혀 없는 단무지처럼 보이는 이 독일 남편은 자기 부인이 만든 커피인지도 모른 채 야스민의 커피포트에서 내린 커피 맛을 칭찬하고 사라진다. 그의 옆 자리, 바의 탁자 위에 자신이 사막에 버린 커피포트가 떡하니 놓여 있지만 그는 철저하게 무시한다. 그가 독일에서 가정과 아내를 어떻게 대했을지 상상해보게 하는 장면이다. 한번쯤 자기가 버린 저 물건이 왜 여기에 놓여 있나 쳐다볼 법도 한데 말이다.

독일인 남편의 이런 무신경함, 독일인 여자의 커피 사랑은 사실 역사가 깊다. 독일에 커피가 전해진 초기,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파리와 빈의 많은 지식인들이 커피하우스에 모여 수많은 커피를 소비하면서 토론과 비즈니스에 빠져 있을 때, 독일의 남자들은 동네 한가운데 자리 잡은 호프집에 모여 맥주를 소비하는 데 바빴다. (야스민의 남편은 미국 여행 중에도 생수를 마시듯 끊임없이 맥주 캔을 딴다. 야스민이 긴 여행길에 커피포트를 챙겨왔듯이 그들에겐 서로 포기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

호프집에 남자들을 빼앗긴 독일의 여성들은 케이크 가게에 모여서 커피를 즐기며 하루 종일 수다를 떨었다. 그러자니 다른 유럽과는 또 다른, 설탕이 듬뿍 들어간 보리차처럼 연한 커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독일 여인네들이 만든 커피 맛을 독일 남자들이 알 리 없고, 전투와 흥분에 빠지게 하는 알코올과는 달리 이성적으로 만드는 커피의 효과 역시 알 리 없었다. 나치의 그늘에서 헤매던, 강한 남자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독일 남자들에게는 곁의 독일 여인도, 그녀들의 오랜 친구인 케이크 가게의 커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역사를 갖고 있는 독일인 남편이 자기 부인이 만든 커피 맛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또 그런 남편에게 돌아가기보다는 자신의 커피를 나눠 마시는 이들과 함께 사막의 바그다드 카페에 머무는 그녀의 선택도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영화 <바그다드 카페>에서 미국의 커피와 독일의 커피를 연관시킨 건 왜일까? 미국의 커피 역사를 돌아보면 독일의 커피 역사와 절묘한 교차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영국을 떠난 사람들이다. 유럽 전역이 커피에 열광하고 있을 때 영국은 지구 저편의 식민지에서 공급되는 값싼 차를 소비하기에 바빴다. 그렇게 주로 차를 마시는 영국인들처럼, 미국인들 역시 커피보다는 차가 더 친밀했다.

그런데 영국은 차에 높은 세금을 징수하면서 미국을 압박했다.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고 싶었던 미국 이주민들은 영국의 차 대신 유럽의 커피를 선택했다. 하지만 차를 마시는 습관을 대체한 것이 커피였기 때문에 미국의 커피는 차처럼 연하게, 물같이 즐기는 음료가 되었다. 이렇게 독일 여인들과 미국 사람들은 처음엔 똑같은 커피 맛을 즐겼다. 그런데 그 후 독일과 미국의 커피는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된 독일에선 승리한 유럽식의 진한 커피가 대중화되었고, 바다 건너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습관을 미국식 커피로 정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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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민(물나무)


영화 속의 야스민은 유럽 사람들이 즐기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그랬던 그녀가 바그다드 카페에 적응하면서 곧장 커다란 커피 잔의 연한 미국식 커피에도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애초 그들의 커피 문화의 출발점이 같았기 때문은 아닐까?

두 나라는 커피의 맛보다는 커피를 앞에 놓아둔 그 순간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호프집으로 달려간 남편 때문에 외로웠던 독일 여인들이 모여 설탕을 듬뿍 타 마시던 커피,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인들이 차 대신 갈증을 달래려 마셨던 물 같은 커피. 카페 바그다드는 그처럼 맛에는 전혀 공을 들이지 않은 커피를 제공하는 카페였다. 그런데 그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전 세계 커피 문화의 발원지가 된 이슬람의 도시 이름을 떡하니 붙여놓았다. 맛이 엉망인 백반집에 ‘남도식당’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마치 전 세계로 퍼진 커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뿌리를 찾으려는 듯이, 내가 마시는 커피와 당신이 마시는 커피가 서로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같다는 듯이 말이다.

구불구불 샛길을 지나 다시 이 글의 시작 지점인 융에게로 돌아가 보자. 카를 융은 집단 무의식의 개념을 처음 발견한 분석 심리학자였다. 그는 사람마다 무의식 가장 밑바닥에 서로 공유하고 있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했다. 무의식 속에 우리의 깊은 역사가, 근원적 문화가 새겨져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영화가 자유로운 상상과 개성 있는 해석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의 무의식이 감독의 무의식에 반응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고 위로하는 능력 역시 내 무의식 저편에 감춰진 상처가 자극받는 데서 출발한다.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말은, 그래서 옳다.

남편 때문에 외로웠던 독일 여인들, 식민지인으로서 고난에 시달린 초기 미국인들은 그 해결책으로 연한 커피를 마셨다. 그들이 공유한 건 커피뿐만 아니라 외면받는 타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었다. 커피의 발원지이자 영화 속 카페의 이름이기도 한 ‘바그다드’ 는 경로는 달라도 뿌리는 같은, 무의식적인 기억의 공유를 상징한다. 야스민과 바그다드 카페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로, 세상의 주변부에 머무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외면받는 타자로서 살아야 했던 상처의 기억을 공유하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치유한다. 그들을 이어주는 건 커피 한잔, 바그다드로부터 출발한 기억할 수 없는 기억의 뿌리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동안 삶이 고단해 연락조차 못했던 친구에게 오랜만에 커피나 한잔 마시자는 전화를 걸고 싶어진다. 그리고 끝내는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을 치유할 만큼의 상처를 받은 행운을 누린 적이 있기나 한지를 고민하게 만들어버린다. 차마 그 고민에 선뜻 대답할 수 없을 때, 나는 영화 속 바그다드 카페의 사람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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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서 완벽한 장윤현 저 | 쌤앤파커스

'하고 싶은 이야기'와 '보여 주고 싶은 이야기'를 세련된 감수성, 섬세한 감정선, 디테일한 연출력으로 그려내는 영화감독 장윤현의 첫번째 산문집이다.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접속」, 「텔 미 썸딩」, 「썸」 등 그의 영화에는 늘 인간의 외로움과 폐쇄된 감정 그리고 상처와 슬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 묵직하게 담겨져 있다. 하지만 「황진이」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바리스타, 고종과 커피를 둘러싼 삶과 죽음을 그린 웰메이드 사극 영화 「가비」로 돌아오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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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장윤현(영화 감독)

1997년 영화 <접속>으로 데뷔해, 지금까지 영화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수수한 회사원에 가까운 모습이다. 외모나 옷 입는 취향, 일상의 습관 모두 평범하다. 한눈에 영화감독인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문화인다운 풍모도 없고, 촬영 현장에서의 카리스마가 풍문으로 나도는 사람도 아니다. 재기발랄함, 날렵하고 세련된 감각, 이런 것들하고도 거리가 멀다. 나는 그냥 단순 무식하게 꾸역꾸역 앞만 보고 가는 사람,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언제나 돌아가는 사람, 다만 오래 꾸준히 파고드는 사람이다. 그건 영화를 만들 때도 그렇고, 커피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커피에서 삶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사람을 발견했다. 내 주요 관심사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사람을 관찰하고,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커피에서 발견한 사람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생각하게 되었다. 그건 때로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일이었다.

가끔은 삶이 엇나간다는 생각에, 상처 받아 숨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날 위로한 건 한잔의 커피였다.

작품으로는 <접속>(1997), <텔 미 썸딩>(1999), <썸>(2004), <황진이>(2007)…… 그리고 <가비>(2012)가 있다.

외로워서 완벽한

<장윤현> 저12,600원(10% + 5%)

한편의 영화를 보듯 섬세한 관찰력으로 풀어낸 34가지 커피와 감정에 관한 이야기 헤아리다, 들여다보다, 응시하다, 바라보다, 귀 기울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와 '보여 주고 싶은 이야기'를 세련된 감수성, 섬세한 감정선, 디테일한 연출력으로 그려내는 영화감독 장윤현의 첫번째 산문집이다. 「오! 꿈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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