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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자들이 천당에 가는 거야” - 엄마 노릇이 이런 거라는 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하느님! 나 아닌 가족을 위한 이 노력, 천국도 이 순서대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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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다 합쳐서 스무 개만 관리하면 되잖아. 근데 나는 내 것 스무 개랑 애들 것 사십 개, 육십 개의 손톱 발톱을 관리해야 돼. 게다가 스무 개는 내 몸에 붙어 있으니 수시로 체크가 가능하지만 애들 것은 잊어버리지 않게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하니까 들이는 노력은 세 배가 아니라 다섯 배, 열 배는 된다고.”

여섯 사람 몫의 저녁 식사가 배달되어 왔다. 짜장면과 탕수육, 짬뽕, 거기다가 서비스로 딸려온 군만두. 넓은 책상은 금방 음식으로 풍성해졌다. 바로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배달되어 온 그릇과 접시는 모두 여러 겹의 비닐 랩으로 씌워져 있었다. 음식이 식거나 국물이 쏟아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비닐 랩이 음식을 먹는 입장에서는 보통 귀찮은 게 아니다. 워낙 얇은 비닐이 뜨거운 그릇에 들러붙어 어디가 끝인지 찾기 어려울뿐더러 찾아낸다 해도 중간에 늘어지거나 끊어져 한 번에 벗겨내기는 쉽지 않다. 나무젓가락으로 그릇 가장자리를 문질러 벗기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수월하진 않다. 어떤 방법을 쓰던 비닐 랩으로 씌운 짜장면과 짬뽕은 복잡하고 어려운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병원에서 일이 늦어질 때 여러 사람들이 모여 만만하게 시켜먹는 것이 짜장면과 짬뽕이다. 그런데 나는 이 음식들을 먹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대접받으며 편하게 사는가 하는 감격과 고마움을 느낀다. 그 지난한 과정, 비닐을 벗기고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모든 노동을 면제받기 때문이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보다 어린 사람이 많아진 나이 탓이기는 하지만.

이 일이 왜 그렇게 감격스러운가? 집에서는 이 모든 과정을 나 혼자 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거들어줄 때도 있지만 남편 없이 아이들과만 먹는 식사도 잦으니 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뭘 먹을까를 결정하는 것에서부터 엄마의 리더쉽은 발휘되어야 한다. 이번엔 새우튀김을 먹고 싶다는 딸과 지난번에도 탕수육을 못 먹었는데 이번에도 안 시켜 주냐며 볼멘 소리를 하는 아들 사이에서 중재를 해야 한다. 세계적인 대기업의 인수합병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가장 나이가 어린 아래 직원이 각자의 주문을 받아 적어 주문해주는 병원과는 상황이 아주 다르다. 새우튀김으로 정하는 대신 아들이 좋아하는 짬뽕을 같이 시켜주는 조건으로 어렵게 협상을 끝내고 나면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내 일이다.

배달된 음식이 철가방에서 거실 바닥에 옮겨지면 식탁으로 나른 뒤(요건 애들이 크면서 같이 하니 조금 낫다), 문제의 비닐을 벗겨야 한다. 손 쓰는 일에 더딘 나에게 비닐을 벗기는 일은 몇 번을 해도 어렵고 힘들다. 다 먹고 나면 그릇들을 정리해서 비닐봉투에 그릇 담아서 내놓고, 설거지까지 다하고 나서야 비로소 한 끼 식사가 끝나게 된다.

똑같은 짜장면이지만 병원에서 먹을 때는 아주 다르다. 비닐을 벗겨주고, 물을 갖다 주는 것은 물론 심지어 나무 젓가락까지 짜개서 대령한다. 이 어찌 호사가 아닌가. 이런 사실을 깨달은 이후 나는 짜장면을 먹을 때마다 비닐을 벗겨주고 물을 떠다주는 누군가와 함께 짜장면을 먹는 건 너무나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들 치다꺼리에 정신없이 살면서 나는 내가 남편보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그에게 자주 불평을 했다. 배운 사람답게 무조건 불평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숫자로 증명하기도 했다.

“여보, 당신은 손톱 발톱 합쳐서 몇 개를 관리해?”
“무슨 말이야?”
“당신은 다 합쳐서 스무 개만 관리하면 되잖아. 근데 나는 내 것 스무 개랑 애들 것 사십 개, 육십 개의 손톱 발톱을 관리해야 돼. 게다가 스무 개는 내 몸에 붙어있으니 수시로 체크가 가능하지만 애들 것은 잊어버리지 않게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하니까 들이는 노력은 세 배가 아니라 다섯 배, 열 배는 된다고. 내가 얼마나 힘들겠어? 너무한 거 아니야?”
“뭐가 너무하다는 거야?”


정말 힘들었나 보다. 그 때는 모든 게 다 너무하게 느껴졌다. 애들 손톱 발톱이 하나도 모자람 없이 다 있다는 게 고맙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남편은 자기 옷도 잘 안 산다. 나는 내 옷과 아이들 옷, 때로는 남편 옷까지 신경 써야 한다. 일 년은 사 계절이니까 계절별로 입을 만한 게 있는지, 윗도리, 아랫도리, 양말 모두 충분한지, 속옷은 헤지거나 너무 작아지지 않았는지. 딸내미가 커가면서 생리대까지 이인분을 챙겨야 했다. 어쩌다 잊어버리면 아직은 생리대 사는 게 쑥스럽다는 딸을 대신해 한 밤중에 편의점에 뛰어갔다 오기도 했다. 군소리 없이 사오기는 하지만 ‘이걸 왜 내가?’라는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다. 요즘은 인터넷 쇼핑몰이 나에게 구세주이다. 때마다 챙겨야 하는 게 귀찮아 한 번에 큰 박스 가득 사놓으면 한 동안은 잊어버려도 되니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요즘도 나는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무수히 사다 나른다. 얼마 전에는 레깅스를 사다 달라는 딸아이 부탁에 마트에 갔다 기겁을 했다. 발 있는 것, 발목까지만 있는 것, 고리에 발뒷꿈치 끼우는 것 등 얼핏 봐서는 구별도 안 되는 여러 종류의 레깅스가 있었고, 비슷한 물건들이 스타킹, 스키니, 타이즈 등의 이름으로 붙어있기도 했다. 색깔도 둘둘 말아놓은 것을 얼핏 보면 다 검정색인데 검정색, 다크 그레이, 잿빛 등 조금씩 다른 색이라 결국 두 개의 레깅스를 사야 하는데 잘못 산 것까지 합쳐 다섯 개를 사는 멍청한 짓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한 번은 남편에게 아이들 목욕시키는 것만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남편은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한 그 날 남편은 아이를 씻겼고, 그 다음날은 늦게 들어왔다. 그 다음 날은 일찍 들어왔지만 피곤하다며 일찍 자 버렸고, 또 그 다음 날은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왔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애들 씻기는 것만 해달라고 했는데 그것도 못해 줘?”
“내가 언제 안 한다 그랬어? 언제 씻겨야 할지 말을 해. 그럼 할게.”
“나흘 전에 한 번 씻겨주고, 그 다음부터는 늦게 오고 일찍 와도 그냥 자고 그랬잖아.”
“그럼 일찍 온 날 말하지 그랬어? 당신이 아무 말도 안 해서 그 날은 안 씻겨도 되는 줄 알았잖아.”


아, 진짜 너무하다!

“그래서 여자들이 천당에 가는 거야. 당신 이렇게 고생하는데 나중에 분명히 천당에 갈 거야.”
“그럼 당신은 지옥에 가는 거지? 내가 나중에 죽어서 천당에 갔는데 거기에 당신이 있으면 너무 화날 거 같아. 당신 보면 나 거기서 난동부릴 거야!”


하느님! 요즘 세상에서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성과급을 줍니다. 기저귀 갈고 한밤중에 일어나 우유타기, 아이 목욕시키고 머리 감겨주기, 배달음식 그릇의 비닐 벗기기, 나 아닌 가족을 위해 물건 사다 나르기, 이게 성경에 나오는 이웃사랑 아닌가요? 천국도 이 순서대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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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선미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임상심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한국 임상심리학회 전문가 수련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으며, 임상심리학과 관련된 저서와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94년부터 아주대학교 병원에 재직하고 있으며, 아동을 대상으로 심리평가와 치료프로그램, 부모교육을 해왔다. 부모와 전문가를 대상으로 아동 이상심리, 부모교육훈련, 행동수정을 주제로 다수의 강의를 하였다. 현재 EBS TV ‘생방송 60분 부모’에 고정출연하고 있다. 저서로, 『부모 마음 아프지 않게, 아이 마음 다치지 않게』『조선미 박사의 자녀교육특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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