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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개론>, 왜 첫사랑의 아련함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까?

변하지 않는 것들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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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은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카피처럼, 어느 정도는 짐작 가능한 ‘우리들의’ 첫사랑 이야기다. 90년대에 울려대는 삐삐를 붙들고 공중전화로 뛰어간 기억 있는 사람이라면, 가방에 넣은 씨디플레이어 속 씨디가 튈까봐 뛰지도 못하고 조심조심 걸어 다녀 본 기억이 있는 세대라면, 흠뻑 몰입하게 될 그때 그 시절. 처음 누군가를 좋아했던 기억이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건축학개론> 관람자들의 ‘아련아련’ 증상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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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멜로 영화가 20대 관객층에게 어필할 수 있겠느냐? <건축학개론>이라는 시나리오가, 이러한 의혹 속에 무려 10년이나 충무로를 돌았다는 얘기가 수긍도 간다. 네 남녀 배우가 다소곳이 앉아 묘하게 상기된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고 있는 포스터를 처음 보았을 때, “아. 부유하는 공기마저 담아낸 저 감수성이라니!” 감탄하면서도, “저런 잔잔한 영화가 지금 과연 흥행할 수 있을까?” 미심쩍었던 것도 사실이다.

애초에 순수 멜로는 본인의 취향이 아닌지라, 관람을 미뤄두고 있었는데, 영화가 개봉되고 나자 입소문이 뜨거웠다. 특히 관람자들의 일관된 ‘아련아련 증세 호소’가 인상적이었는데 “영화 음악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또 보고 싶다.” “기억의 습작을 매일 반복 청취한다” 등등의 소감을 듣고 호기심이 일어 뒤늦게 <건축학개론>을 보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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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은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카피처럼, 어느 정도는 짐작 가능한 ‘우리들의’ 첫사랑 이야기다. 90년대에 울려대는 삐삐를 붙들고 공중전화로 뛰어간 기억 있는 사람이라면, 가방에 넣은 씨디플레이어 속 씨디가 튈까봐 뛰지도 못하고 조심조심 걸어 다녀 본 기억이 있는 세대라면, 흠뻑 몰입하게 될 그때 그 시절. 처음 누군가를 좋아했던 기억이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누군가가 좋아서 모든 것이 좋아지는 경험이 새롭고 즐겁고 가슴 벅차면서도, 이 마음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숨겨야 하는 건지 머리만 쓰다가 급기야 벽에 머리를 쿵쿵 찧고, 이불 속에 들어가 한숨에 취해 잠들던 그 시절의 이야기다.


왜 어떤 것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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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난 음대생 그녀 서연(수지 분). 건축학도 승민(이제훈 분)은 같은 동네에 사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렇게 첫사랑에 젖어 든다. 처음이었기에 서툴렀고, 마음 같지 않은 행동과 말들로 어긋나버린 첫사랑의 기억. 그 봉인된 기억을 열고, 15년 만에 서연(한가인 분)이 승민(엄태웅 분)을 찾아온다. 건축가가 된 승민에게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는 서연. 두 사람은 집을 설계하고 지어가면서 예전의 아련한 기억과 감정이 다시금 찾아오는 걸 느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질문이 들었다. 왜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까? 첫사랑은 처음이기 때문에 아련한 걸까? 이뤄지지 않아서 아련한 걸까? 그렇다면 이뤄지지 않은 모든 사랑이 그렇게 아련한 걸까?

처음이라서 혹은 미완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영화를 보며 가장 아련했던 대사는 이런 것이었다. 서연의 생일날, 두 사람은 동네에서 먼 곳까지 나가서, 사진을 찍고 작은 생일파티를 하며 좋은 한때를 보낸다. 서연은 나중에 자기가 살고 싶은 집을 메모지에 그리며, 승민에게 나중에 공짜로 지어줘야 한다며 웃는다. 그때 나누던 대화들.

“우리 십 년 후엔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고 허공에 띄워본 질문이라던가, “나는 피아노 안 해. 아나운서 돼서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 거야.”라고 자기 스스로에게 약속하듯 읊조리는 장면. 10년이 지난 후, 서연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피아니스트도 아나운서도 되지 못한 걸 이미 알고 있어서 뭉클했던 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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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내 모습이 겹쳐 보인 장면이기도 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와 얼굴을 마주보고 “우리 십 년 후엔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라거나 “너는 과연 어떤 사람과 결혼하게 될까?”라거나 남자친구와 함께 “내년 이 맘 때 우리, 어른이 됐을 때 우리”를 상상했던 때, 내 앞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던 때가 떠올랐다.

불현듯, 그때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났다는 것도 깨달았다. 지금의 내가 10년 전 그토록 궁금했던 시간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당시로는 상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상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묘한 괴리감. 그때와 10년 멀어진 데에서 오는 묘한 쓸쓸함. 그 시간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농담처럼 “이런 게 정녕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인가.”라며 웃었지만, 마치 그 시간이, 그때의 나와 네가, 그때 나눈 말들이, 그때 상상했던 모든 것들이 첫사랑처럼 다가왔다.


그날로부터 나만 혼자 멀어진 듯한 쓸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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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 승민이 미국에 가기 전, 집에서 엄마가 차려준 순대국을 먹는다. “너 이제 미국가면 이런 거 먹지도 못할 텐데.” 승민은 혼자 한국에서 쓸쓸한 여생을 보낼 엄마가 안쓰럽고 신경이 쓰인다. 엄마가 아파트에 들어가 살면 승민의 맘이 편할 텐데, 엄마는 그저 낡은 집처럼, 거기에 머물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엄마들은 참 변치 않는다. 10년 전 승민이 입던 낡은 티셔츠까지 그대로 입고 있는 엄마는 냉장고를 정리하지 못하는 습관도 여전하다. 세월을 통과한 머리만 희끗해졌을 뿐.

고집 피우는 엄마와 괜히 다투고 마음이 상한 승민이 담배를 물고 대문 앞에 앉아있던 장면도 떠오른다. 예전에 엄마한테 반항하며 발로 내쳤던 철문이 여전히 구겨져 있다. 문득, 구겨진 철문을 펴고 싶어 승민은 낑낑거리며 힘을 쓰지만, 오래 전 구겨진 철문은 다시 펴지지 않는다. 그 장면이 와락 다가왔다. 아무리 구겨진 과거라고 해도, 이제와 그것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는 그때로부터 계속 성장하고 이렇게 달라져왔는데, 어떤 것들은 지독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변하지 않는다는 게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때 정릉 집 앞에 앉아있는 어른 승민은 마치 시간을 건너온 남자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그만 혼자 커버린 듯 했다. 몸도 머리도 그때보다 커졌지만, 과연 그때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기분이 여실히 느껴졌다. 두 사람의 감정이 여전히 아련아련한 것은, 그때의 사랑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 거다.

그때의 아련한 감정은 과거 그 자리에 여전한데, 그 기억을 가까운 자리에서 공유했던 두 사람은 서로 훌쩍 멀어진 거리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낯섦. 애틋함. 대학생이던 시절, 어서 빨리 자라고 싶어서, 높아지고 싶어서 열심히 달려왔는데 불현듯 뒤돌아보니 높아진 게 아니라 멀어만 진 것 같다고 느꼈을 때의 쓸쓸함 같은 것. 그런 감성을 잘 포착하고 있는 영화는, 당신이 첫사랑을 언제 앓아냈든 관계 없이 각자에게 애틋한 마음을 선사해준다.


변하지 않는 것들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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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민이 어른이 되었을 때, ‘납뜩이’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함께 미래를 꾸려갈 새 여자친구가 그의 곁에 있다. 시간이 흘러도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은 아련하다. 과거가 그렇고, 첫사랑의 그녀가 그렇고, 10년 전에 꾸었던 꿈들이 그렇고, 엄마 같은 존재가 그렇다. 그것은 단순히 아련함으로만 존재하는가? 변하지 않는 것들과 변하는 것들은 각각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 걸까? 결국 영화가 던진 질문은 이런 것이기에, 15년 만에 재회한 승민과 서연의 사랑이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아도 크게 상관이 없어졌다.

승민은 제주도에 지은 서연의 집에, 어렸을 때 키를 잰 흔적, 마당의 아이 발자국 흔적을 그대로 남겨둔다. 우리의 현재가 과거를 품고 있듯이, 새로 지은 집 역시 과거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서연의 아빠가 “이제서야 집 같네”라고 만족했던 집은 과거의 집의 형태에서 연장선상에 있던 구조였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든 하지 않든 기억은 무의식 속에 그렇게 축적되고, 그 축적이 우리의 삶을 앞으로 밀고 나간다.

그렇게 변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은 채로 나와 함께 가게 될 거라고 인정하는 순간이 있다. 그제서야 승민과 서연은 전람회의 음반, 집의 모형도 같은 것을 웃으면서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품어왔던 기억, 물건, 추억들은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화해하기도 하고, 승민과 서연처럼 사건을 통해 극적인 화해를 하기도 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이 흐를 때, 저마다 어떤 기억이 떠올랐을 테다. ‘왜 그 생각이 나지?’ 수면 아래 묻혀있던 기억이 떠올랐을지도, 혹은 화해하지 못한 기억이 떠올라 밤새 뒤척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 역시 피해가지 못한 ‘아련아련 증세 호소’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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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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