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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으슥한 뒷골목에 보름달이 떴다?

난 구산동 슈퍼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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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끈하게 생긴 보름달은 재미없었다. 달 표면에 울퉁불퉁하게 운석 구덩이들을 그리고 우주 안테나도 그려 넣었다. 달 하니 토끼가 떠올라 달 앞쪽에 우주복을 입은 토끼를 그렸다. 토끼를 그리니 거북이도 생각났다. 거북이를 타고 토끼가 지구로 돌아오는 모습에다 달 토끼와 우주 거북이 몇 마리를 더 그렸다.

레몬색 자전거를 타고 홍대까지 달렸다. 감싸롱에서 간단하게 미팅을 마치고 한강 자전거 도로를 따라 달리다, 응암동 실개천 길로 빠져 구산동 아파트로 돌아왔다.

오후 5시가 되면 아파트는 아이들 웃음소리로 시끄러웠다. 학교를 마치고 온 동네 아이들은 어김없이 벽화 밑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축구공을 찼다. “장밥 아저씨, 장밥 아저씨” 하며 반갑게 아는 척을 해주었다. 그러고는 여자친구는 언제 만나느냐, 수입은 괜찮으냐며 엉뚱한 질문만 골라 던졌다.

꿀밤 대신 사람 좋게 보이게끔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집에 돌아와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로 마룻바닥을 밀었다. 방에는 아크릴로 칠한 커다란 패널이 놓여 있었다. 썩 좋다고 할 수 없는 패널 냄새, 초콜릿 향이 희미한 아크릴 물감 냄새, 끈적끈적한 오일 스틱 냄새, 거기다 갓 지은 밥 냄새와 커피 냄새까지 겹치면서 여느 가정집에서는 쉽게 맡을 수 없는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졌다. 패널을 기댄 벽과 옆에 붙은 스위치에 아크릴 물감이 살짝 묻어 있었다. 오랜만에 작업실 같았다. 왠지 모를 존재감마저 느껴졌다.

살짝 우수에 젖어들려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모니터를 보니 아이들이 한가득이었다.

“장밥 아저씨, 문 열어주세요!”
“거기 있는 거 다 알아요!”



문을 열었더니 마치 냉장고에서 바나나 맛 우유가 쏟아지듯 열댓 명의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이 방 저 방을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천장에 달린 조명에 까치발을 하고 손을 대보기도 하고 침실에 꽂혀 있는 만화책도 뒤적거리고 의자에 털썩 앉기도 했다. 어느새 노트북을 열어 네이버 주니어에도 접속했다. 한 녀석은 목이 말랐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카오스에도 규칙이 있듯 아이들은 정신없었지만 나름대로 예의는 갖췄다. 뭘 만지거나 꺼내보기 전에는 잠깐이지만 꼭 먼저 물어보았다.

“아저씨, 소파 위에서 놀아도 돼요?”
“만화책 꺼내 봐도 돼요?”
“컴퓨터 잠깐 해도 돼요?”
“연필로 그림 그려도 돼요?”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홍보하라고 출판사에서 만들어준 그림엽서를 한 장씩 나눠주며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흥분한 아이들을 주저앉혔다. 쿨하기로 따지면 아이들이 최고다. 재미있겠다 싶으면 방금 전까지 목숨 걸고 하던 일도 미련 없이 내팽개친다. 그래서 하지 마라, 만지지 마라, 가지 마라 소리치는 것보다 놀잇거리를 던져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어, 이거 재미나겠다 싶었는지 아이들은 금방 자리를 잡았다. 아무 데고 걸터앉아 연필로 슥슥 그리기 시작했다.


“다 그리면 아저씨한테 줘. 이름이랑 몇 동 몇 호에 사는지도 적고. 그러면 아저씨가 잘 다듬어서 편지함에 넣어줄게.”

제 꾀에 제가 넘어갔다고 해야 할까.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아이들은 진담으로 받아들였다. 클라이언트가 하나 더 늘었다. 꼬마 클라이언트들은 생각보다 잘 그렸다. 괜히 어설프게 손댔다가 양산에서처럼 또 애 하나 울리는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한바탕 소동을 치른 뒤 아이들은 배꼽 인사를 하며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게 폴터가이스트란 말인가. 꼬마 유령 캐스퍼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부산스럽긴 했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파트에 벽화를 그린 뒤 난 동네 스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게 유명세란 말인가.


아파트 뒷골목에는 달 토끼와 송편 친구들이 산다

아파트에는 으슥한 곳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아파트도 그렇다. 103동 입구는 아파트 뒤쪽으로 한쪽은 아파트 뒷면이고 한쪽은 높은 축대다. 낮에는 괜찮지만 밤이 되면 무척 어두워진다. 폐쇄회로 카메라도 달았지만 썩 내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 벽화를 그리기로 하였다. 아무래도 그림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주민들이 관심을 가질수록 위험한 일도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빈 건물에 유리창 하나 깨진 걸 그대로 두면 더욱 더러워지고 위험해지는 법이다.

마침 다음 날이 추석이었다. 올해는 비가 와서 보름달 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달을 그리기로 했다. 매끈하게 생긴 보름달은 재미없었다. 달 표면에 울퉁불퉁하게 운석 구덩이들을 그리고 우주 안테나도 그려 넣었다. 달 하니 토끼가 떠올라 달 앞쪽에 우주복을 입은 토끼를 그렸다. 토끼를 그리니 거북이도 생각났다. 거북이를 타고 토끼가 지구로 돌아오는 모습에다 달 토끼와 우주 거북이 몇 마리를 더 그렸다.


귀성전쟁을 치르는 고속도로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림 제목을 <달토끼들의 귀성전쟁>으로 정했다. 페인트 마커로 그린 달과 토끼, 거북이 위로 송편을 그렸다. 아크릴 물감으로 하얀 송편과 쑥 송편을 그리고 날개를 달아주었다. 송편 친구 캐릭터 하나가 더 늘었다. 새로 온 아파트 소장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더니 아파트에 방송을 하였다.

“주민 여러분, 103동 입구에 보름달이 떴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나와서 구경하세요.”

비가 와서 잠잠했던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103동 앞으로 튀어 나왔다. 이제 동네 스타가 유명세를 치를 차례였다. 구경 온 아이들 손바닥에다 그림을 그려주었다. 오른손에 왕관 그림을 받은 친구는 맨 뒤로 가더니 다시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되자 왼손을 슬쩍 내밀었다. 그러면 누가 모를 줄 알고. 모른 척하고 왼손에다 송편 친구를 그려주었다.


다음 목표는 구산동 주민자치센터

“얼굴이 너무 까매서 조금 환하게 했어요.”

내 이야기를 취재한 신문 기자는 함께 실린 사진에 대해 한마디 던졌다. 어머니도 기사를 읽고 기자가 글 참 깔끔하게 쓴다며 연신 감탄했다. 다 읽고 나서는 기사가 실린 면을 곱게 접어 챙겼다.

“그거 뭐하시게요?”
“기사도 나왔으니 이제 구산동 작은도서관 추진해야지.”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도 적극적인 사람이 되었다. 본디 어머니는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부딪쳐서 해결하기보다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런데 보여주고 표현하는 게 직업인 아들이랑 살아서 그런지 싹 바뀌었다. 할 말 다하고 짚고 넘어갈 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무척 쿨해졌다.

어머니는 아파트 회장 임기가 끝나자마자 젊은 어머니들을 모아 구산동 주민자치센터에 작은도서관을 만들어달라고 청원할 거라 하였다. 우리 동네에 작은도서관이 생긴다면 당연히 벽화를 그릴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아이와 어머니가 함께 그림을 그리는 시간도 가져볼 것이다.

키스를 하려고 인터넷을 뒤진다고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녀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 대야 한다. 도서관도 마찬가지다. 작은 모래알이 모여 사막이 되듯이 작은 시작이 모여 큰일이 이루어진다. 10년 뒤 구산동을 둘러보면 오늘 이야기가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해주겠지.

내 방에서 보면 구산동 주민자치센터가 한눈에 보인다. 3층짜리 건물에 왼쪽은 노출 콘크리트로 편편하게 되어 있다. 저기에 커다란 뜬구름 친구들이 둥둥 떠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며 입맛을 다신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브로콜리 친구들이 선물상자를 들고 하늘로 날아오를 그날을 기다리면서, 낭창낭창하게 서오릉으로 가는 골목을 자전거로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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