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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의 밤] “인간관계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면…”

신경숙 『모르는 여인들』 : 관계의 네 가지 단상 세계인과 소통하는 한국문학의 살아있는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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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작가가 8년 만에 내놓은 단편집 『모르는 연인들』의 낭독회가 신 작가의 차분한 목소리로 문을 열었다. 신 작가는 7편의 단편 중 4편의 첫 단락을 읽었다.


차가운 바람이 살을 에는 겨울밤. 사람들이 하나둘씩 홍대의 산울림 소극장으로 모여들었다. 극장 안의 연극 무대 위에는 목재 테이블 만이 외롭게 놓여있었다. 조명이 비치는 무대. 저곳에서 배우들이 웃고 울고 고통받고 사랑했으리라. 하지만 오늘 밤, 무대 위에서 뜨겁게 살다간 이들의 자취는 공허한 정적으로 사라지고 무대를 비추는 조명에 흔들리는 수많은 먼지의 입자들만이 우주의 운하같이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하나의 입자에 우리의 삶이 놓여있었다. 쓸모없는 상념의 블랙홀에 빠져있는 사이, 우주의 중심에 신경숙 작가가 올라왔다. 고요함 속에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시작을 알리는 지휘자의 신호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책을 펼쳐 든 그이에게서 삶이 흘러나왔다.


제1악장. 관계의 시작 “타인의 신발을 신어본 적 있나요?”

“신발을 바꿔 신어. 열다섯 소년병이 말했다. 이걸 신고 달려- 열다섯 소년병은 부상으로 오른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있어 달릴 수가 없었다. 열다섯 소년병은 어둠 속에 엎드려 열여섯 소년병의 신발을 벗겨 바꿔 신었다. 온전한 신발이었다.” - 「세상 끝의 신발」 p.10

세계인과 소통하는 한국문학의 살아있는 감성. 신경숙 작가가 8년 만에 내놓은 단편집 『모르는 연인들』의 낭독회가 신 작가의 차분한 목소리로 문을 열었다. 신 작가는 7편의 단편 중 4편의 첫 단락을 읽었다. 한 해의 시작이 1월에서 시작하듯이 소설의 시작도 첫 문장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하며.


「세상 끝의 신발」은 『모르는 연인들』의 맨 앞에 수록되어있는 단편이다. 「세상 끝의 신발」은 신발에 관한 일화들로 중첩되어 있다.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이 아쉬워 신발을 감추기도 하고, 공감을 위해 상대의 신발에 자신의 발을 넣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인용문에서처럼 자신의 신발을 내어주어 타인을 살리기도 한다. 『모르는 연인들』에는 신발의 다양한 단상이 담겨있다.


“저는 누군가가 미울 때 그 사람의 신발을 물끄러미 봐요. 닳은 뒤축, 가죽의 구김, 본래의 형태가 무너지고 남은 허름함. 그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미움은 사그라지고 애잔함이 남아요. 저는 시골에서 자랐어요. 대문을 열면 마루 밑에 놓인 신발을 보고 집안에 누가 있는지를 알 수 있었죠.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의 신발이 놓여있으면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뛰어들어가기도 하고, 싫어하는 사람의 신발이 있으면 슬쩍 돌아서서 대문을 나가기도 했어요(웃음). 누구에게나 신발에 대한 추억이 한둘씩은 있을 거예요. 여러분은 어떤 추억을 가지고 계세요?”

신발에 대한 추억. 신발은 토슈즈와 군화의 차이만큼이나 개인의 다양한 삶을 반영한다. 어릴 적 아버지의 구두나 어머니의 하이힐에 발을 넣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우리는 신발을 통해서 타인의 삶을 배운다. 타인의 신발에 발을 넣는 소통의 시작. 하지만 그 소통은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처럼 우리에게 언제나 행복만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새 신발이 발뒤꿈치에 상처를 남기듯 새로운 관계에는 고통이 따른다.


제2악장. 상처 “어딘가에 홀로 버려진 기분을 느껴봤나요?”

“그는 한순간 눈을 번쩍 떴다. 눈꺼풀이 달라붙어 있어 뜨려다가 감기를 서너 번 반복한 다음이었다. 강렬한 빛이 눈을 찔러 그는 겨우 뜬 눈을 다시 감았다. 자꾸만 눈을 찔러대는 것이 태양만이 아니라 얼굴을 덮고 있는 가시 돋친 풀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덮고 있는 것을 걷어내려다 비명을 질렀다.” - 「그가 지금 풀숲에서」 p.83

위 인용구는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도입부다. 한 남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도로 근처 풀숲에 내동댕이쳐진다. 몸은 만신창이가 돼 움직일 수 없고 배고픔과 두려움이 시시각각 밀려온다. 그런 고립 가운데서 그는 처음으로 아내에 대한 깊은 생각에 잠긴다.


“현대인은 너무나 바빠서 생각할 시간이 없는 날을 보내고 있잖아요. 그런 가운데서 놓치고 사는 것들이 정말 많아요. 그리고 밀려오는 생활의 문제에 치여 가장 소중한 이들한테마저 소홀해지곤 하죠. 그런 오늘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언젠간 깊은 단절과 위기감을 경험하게 될 거예요. 그래서 이 남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그렇게 숲 속에 홀로 버려둔 거예요(웃음).”

남자의 아내는 ‘외계인 손 증후군’이라는 기이한 증상에 시달린다. 아내의 왼손은 마치 남의 것인 양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인다. 남의 물건을 허락 없이 집어오는가 하면 장을 볼 때 쓸모없는 물건들을 카트에 담는다. 그리고 급기야는 남편의 뺨을 때리고 목을 조르기까지 한다.

“외계인 손 증후군은 실제로 있는 병이에요. 제가 소설을 쓸 때만 해도 웹상에서는 검색이 안 됐었는데 지금은 엄연한 의학 정보로 등재되어있죠. 제 소설에는 그 외계인 손 증후군이 억압된 욕망을 표출하는 장치로 쓰였어요.”

아내의 오른손이 타인의 생일상을 차리고 있을 때, 왼손은 생일상의 맛있는 음식을 아내 쪽으로 옮겨놓았다. 아내의 오른손이 살림에 필요한 물건을 카트에 담고 있을 때, 왼손은 배드민턴 채와 농구공을 카트에 넣었다. 오른손이 무심한 남편의 옷을 다릴 때, 왼손은 남편의 뺨을 때렸다. 아내는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왼손을 나무랐다. 하지만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 고독을 감내하고 미소를 짓는 것이 정상인가. 아니면 사라져가는 존재감에 저항하는 것이 정상인가.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춰서 주변을 둘러봐야 한다. 삶은 얼마나 빨리 가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어디로 가고 있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삶이란 결국 누구와 가고 있느냐의 문제다. 이를 잊고 산다면, 가장 가까운 이의 왼손이 당신의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


제3악장. 회복 “당신의 처음을 말해줘요”

“혼자 달리는 것도 좋았으나 사람들과 함께 달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 괜찮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달리는 킬로 수까지 모두 합해져서 자기 것이 되는 것 같았다고 아주머니는 말했다.” - 「모르는 여인들」 p.224

단편집 『모르는 여인들』에 수록된 단편 「모르는 여인들」은 거미줄처럼 엇갈린 삶의 교차점이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가 애틋하게 드러나 있다.
화자인 그녀는 이십 년 전에 헤어진 첫사랑에게서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받는다. 이미 다른 배우자가 있는 두 사람의 만남. 독자의 상상력은 복잡한 삼각구도에 빠져들겠지만, 이야기는 예상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남자는 여자에게 아내의 것이라며 노트 한 권을 내민다. 노트에는 남자의 아내와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주고받은 메모들로 빼곡하다. 그리고 노트의 마지막 장에는 그의 아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우연히 발견한 그 노트를 통해서야 비로소 아내의 가출 이유를 알게 된다. 아내가 가족에게 부담되기 싫어 집을 나갔다는 것을. 그는 그런 아내를 이해할 수 없다며 이십 년 전에 그에게서 도망친 적이 있는 그녀에게 그때 왜 도망쳤느냐고 묻는다. 아내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듯.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사람조차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건 우리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가슴에 지니고 살게 되는 질문이 아닐까 해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결핍으로 이루어진 부분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잖아요. 저도 그 질문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소설에서 답을 찾아보려 하지만, 그 또한 답은 아니지요. 답이라는 것은 없고 한 가지의 방법을 제시할 뿐이에요. 여러분은 어떠한 방법을 가지고 계세요?”

신 작가는 타인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어긋난다고 생각될 때는 처음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라고 조언한다.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결핍의 부분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멀어진 관계를 회복해나갈 수는 있다. 그것이 결핍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완전함이다.

“저는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던 때와 제가 쓴 소설책을 처음으로 가졌을 때를 항상 기억하려고 해요. 처음을 기억하는 것은 관계성을 회복하는 제 방법이에요. 누군가와의 관계가 눅눅해지고 멀어지고, 그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도망치고 싶을 때 처음을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 그 사람과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함께 했을 때의 동질감. 그 사람이 만약 가족이라면, 내가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상처를 주었을 때. 또는 아버지에게 처음 존경한다고 느꼈을 때. 그런 순간들을 자꾸 반복해서 생각하다보면 나도 처음을 발생시키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우리는 가정과 학교를 거쳐 사회에 나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그 관계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환멸과 고통도 겪는다. 그런 고통 가운데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배려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던 순간을 떠올려보라. 내가 처음 입사한 직장에서 허둥대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나에게 처음으로 따듯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사람. 우리는 누구나 그런 처음을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은 타인을 이해하는 데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결핍된 존재지만,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이기에.


제4악장. 헌신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했어요”

“남자는 염치는 아예 접은 사람처럼 자신을 응시하는 여자에게 말했다. 내가 배도 몹시 고픈데 나중에 밥 좀 사주겠소? 여자는 남자를 오 초 정도 더 응시하더니 그러지요, 대답했다.” - 「어두워진 후에」 p.122

「어두워진 후에」에는 연쇄살인범에게 가족을 잃고 방황하는 한 남자가 나온다. 그 남자는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아무 곳이나 떠돌아다닌다. 그 남자는 가진 돈이 모두 떨어졌을 때 사찰의 입장권을 받는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는 남자의 사정을 따져 묻지도 않고 남자가 입장권 없이 절 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저녁 식사와 잠자리, 돌아갈 차비까지 내준다. 타인의 온기로 남자의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고 남자는 방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 글을 쓸 때는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보도로 사회 전체가 시끄러울 때였어요.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제 영혼에 구멍이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인간에 대한 절망이 쌓여갈 때, 그 절망의 반대편에 제 나름의 희망을 놓아두고 싶었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균형을 찾고 싶었어요. 우리가 넘어질 때 땅에 넘어지죠. 그리고 일어날 때도 땅을 짚고 일어나요. 그런 것처럼 사람에 의해서 갖게 되는 상처와 절망을 치유하고 회복시켜주는 것 역시 사람이에요. 「어두워진 후에」를 통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신 작가의 8년간의 사색과 깨달음이 담긴 단편집 『모르는 여인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 거울을 통해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도 모르는 채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신 작가는 ‘꿈을 이루세요!’라는 말을 좋아한다. 신 작가는 꿈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것이고, 끊임없이 돋아나는 새로운 꿈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한다. 신 작가는 서로의 내면에 숨겨진 빛을 발견하기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신 작가는 지금도 그이의 서재에서 원고지를 채워나가고 있다.


“처음에 소설을 쓸 때만 하더라도 제가 글을 잘 써서 소설을 쓰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요. 제가 쓰는 문장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저에게 준 선물이에요. 글을 쓰기 전에 공감할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서로의 숨겨진 가능성과 인간다움을 발견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당신의 내면에 숨겨진 아름다운 빛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또 고개를 돌려 주변의 빛을 발견해내세요.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값진 일 일 거예요.”





# 신경숙 대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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