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으로 넘친 하수구 재앙, 핑크색 새틴 원피스를 구하라!
코시 판 투테(Coc pan tutte, 이것이 여자라는 것이다)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서울과 그 언저리를 헤매는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 있는 상태와 죽어 있는 상태 어딘가를 떠도는 중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단계의 ‘다’자만 들어도 이가 박박 갈린다. 이제는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아버지는 애처로울 만큼 투명하게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와 몇십 년 살았던 어머니도 별다를 것 없어서, 그 점을 놈들에게 꽁지털까지 매끈하게 뽑힐 정도로 이용당하는 바람에 부모님은 그나마 깔고 앉아 있던 전재산인 전세금 몇천만원을 날렸다. 남은 거라곤 열다섯 개 정도의 한방 자석요라나 뭐라나 하는 것밖에 없었는데, 완두콩 공주처럼 침소의 안락 유무를 감별할 것도 아니고, 예쁘지도 않은 이 한방 자석요를 잔뜩 깔고 앉아 뭘 한단 말인가. 한방 자석요건 양방 자석요건 그 흉물스러운 요는 거대하고 무거운 파멸의 깃발과도 같았고, 그 무시무시하고도 구차스러운 패전의 깃발이 조각조각나면서 우리 식구들까지도 폭격을 맞은 것처럼 사방으로 날아가게 되었다.
엄마는, 비행기 승무원 생활을 하느라 집을 비워 놓을 때가 많았던 사촌언니네 집으로 날아갔고, 아버지는 교회 연 지 10년이 넘어도 개척교회? 즉 가사상태? 인 예배실의 유아실에서 아무 담요나 덮고 잠을 청하게 되었고 나는 어디로 날아갔느냐 하면, 당시 친하게 지냈던 언니의 원룸으로 뻔뻔스럽게 불시착했다. 안 그래도 격렬한 우울증이 덮칠 때마다 아무 때나 그 언니에게 쳐들어가서 길고양이처럼 마구 폐를 끼치고 있던 차였다. 뻔뻔하기도 하지, 고양이는 귀엽기나 한데.
어쨌거나 그때 난 고작 스물 한두 살밖에 안 먹었는데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언덕마다 평지마다 꽉꽉 들어찬 불빛 하나하나가 참 얄밉게도 빛나서 툭하면 풀이 죽었다. 저토록 약 올리듯 반짝반짝 빛나는 불빛 하나 둘 중에 고작 내 몸 하나 눕힐 불 켜진 방 하나 없구나, 하고 한숨 쉬느라 땅이 꺼질 것 같은 상황이었으니 뻔뻔이고 철판이고 예절이고 뭐고 당장 체면 차릴 처지도 안 되었던 나는 무턱대고 언니에게 비비고 기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언니는 너그럽게 나를 받아주었지만, 주차장 옆을 터서 불법으로 개축한 좁은 원룸 안에서 언제까지 둘이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저렴한 임대료와 각각 방을 가질 수 있는 자유를 찾아 멀리 떠나기로 결정했고, 왕십리로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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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때 내 방은, |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를 증명이라도 하듯 '88만 원 세대'이자 비주류인 자신의 계급과 사회구조적 모순과의 관계를 '특유의 삐딱한 건강함'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평가받으며 이십 대에서 칠십 대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에세이스트. 스스로를 도시빈민이라 부르는 그녀는 대구 출생에 목회자인 부친의 모든 희망에 어긋나게 성장하였고 기어코 말 안 듣다가 고등학교를 두 달 만에 퇴학에 준하는 자퇴를 감행하였다.
냉소와 분노와 우울을 블랙 유머로 승화시키는 연금술을 몸 속에 장착한 그녀가 숨 막히는 고등학교를 용감히 박차고 나온 '불량소녀'로 세상에 알려진 지 이제 10년이 넘어간다. 그녀는 단편영화 <셧 앤 시 Shut And See>(97년) 감독, 웹진 <네가넷>(97년)의 최연소편집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최연소 합격 등의 화려한 타이틀을 가졌다. 그래서 한 시사주간지는 성공한 10대라는 제목으로 그를 표지인물로 내세웠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 자퇴생이라는 사실이 언론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 텔레비전의 관심도 남달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직시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꾸준히 살아왔다.
<김현진> 저11,700원(10% + 5%)
김현진은 88만원세대를 대표하는 글쟁이다. 사회와 세상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생각을 그녀처럼 솔직하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에세이스트는 흔치 않다. 처음 세상에 내놓은 책 『네 멋대로 해라』 이후 12년여 동안 여러 권의 책을 쓰고, 「한겨레」 「시사IN」 「프레시안」 「경향신문」 등의 매체에 꾸준히 기고해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