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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이 싫어서 내려왔는데 남쪽에서도 자유가 없더군요”

‘이중탈출자’ 이수근, 그대 알프스에 갔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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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탈북자 중 가장 비극적인 인물 - 새로운 ‘암’의 탄생이다. 위암, 간암, 폐암, 대장암, 유방암, 갑상선암만 있지 않다. ‘사상암’도 있다. 사상암은 뇌의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 조직에 기생하거나 가슴이 지나치게 뜨거워 생기는 종양의 일종이다.

새로운 ‘암’의 탄생이다.
위암, 간암, 폐암, 대장암, 유방암, 갑상선암만 있지 않다. ‘사상암’도 있다. 사상암은 뇌의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 조직에 기생하거나 가슴이 지나치게 뜨거워 생기는 종양의 일종이다. 아버지가 스크랩에서 이름 붙였다. 그 암에 걸렸다고 판정한 사람은 교수대에 올라 생을 마감했다.

위장귀순 2년 3개월만에
이수근 사형 집행
어제 교수형으로 서울구치소서


위장간첩 이수근(45?전 북괴 중앙통신부사장)의 사형이 3일 상오 11시55분 서울구치소에서 집행됐다. 간첩 이(李)는 판문점을 통해 위장귀순한 지 2년3개월, 그가 1심에서 사형이 확정된지 47일만인 이날 처형됐다.
이날 현장에는 서울지검공안부 김병하 검사, 서기석 서울구치소장, 교회사, 검사관, 유언녹취관등이 입회, 지난 1일 내려진 법무장관의 형 집행 명령에 따라 형을 집행했다. 이(李)는 67년 3월22일 하오5시20분께 판문점을 통해 위장귀순, 정부와 사회각계로부터 1천만 원 상당의 재산을 기증받고 이강월여사와 결혼까지 했었다. 이(李)는 지난 1월27일 처조카 배경옥과 함께 CPA편으로 ‘홍콩’을 거쳐 ‘캄보디아’로 탈출 하려다가 ‘사이공’에서 검거, 국가보안법 반공법 공문서 변조 및 동행사 등 혐의로 구속기소 되었다가 지난 5월10일 서울형사지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7일간의 항소기일을 넘겨 사형이 확정됐었다.

(1969년7월4일치 신문)

스크랩 7, 8권(1969년1월~1972년12월)을 세 차례나 울궈먹었다. 1973년이 열리는 제9권으로 건너뛰려다 멈추고 말았다. ‘위장간첩’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한 이수근을 남겨두고 넘어갈 수 없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해야 했다.

이수근의 사형기사 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있다. 지금까지 읽었던 시 중에 가장 오랫동안 시선을 잡아끌었다.


무상한 그릇 속에 담겨진
얼굴-
얼룩진 사형수의 독백
인생은 심판의 노예
너는 가짜 인생을 살았느냐.
그래도-
운명의 바람을 잡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무상한 잡초의
풀벌레가 조문을 왼다
아- 사상은 인생의
암이로다



“너는 가짜 인생을 살았느냐”라고 묻는다. “운명의 바람을 잡으려고 발버둥을 친다”고 연민한다. 이수근을 사상의 노예, 아니 사상의 암환자로 단정한다. 과연 그 판단은 옳았는가. 그 판단을 있게 한 신문기사는 옳았는가. 그 신문기사를 쓰게 한 중앙정보부의 발표는 정확했는가.

이수근은 역대 탈북자 중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다. 분단시대의 천형을 남들보다 두 배로 짊어졌던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1924년생인 그는 북한 언론계의 거물급 인사라 할 만한 조선중앙통신 부사장이었다. 1967년3월22일 오후5시25분쯤 판문점에서 열린 242차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 때 극적으로 탈출했다. 통신기사의 편집과정 실수로 인한 숙청의 위협과 김일성 독재에 염증을 느꼈다는 두 가지 이유를 댔다고 한다.

탈북 뒤 우석대 물리치료과 이강월 교수와 재혼하여 살던 그는 1969년1월27일5시30분 CPA기(캐세이패시픽 항공기)를 타고 일본 대만을 거쳐 홍콩으로 다시 탈출한다. 파월 기술자였던 재북 처조카 배경옥이 함께 했다. 위조여권을 구해 콧수염과 가발로 변장한 채였다. 의표를 찔린 중앙정보부는 CIA의 도움을 받아 9일 만에 이수근을 체포한다. 홍콩발 캄보디아행 비행기의 경유지인 사이공 기내에서였다. 중앙정보부는 곧 “이수근이 위장귀순자이자 위장간첩이었다”고 발표한다.


이수근은 위장간첩
이수근 사이곤서 체포압송
간첩사명 띠고 위장귀순
정보부 발표-본처이질 裵와 공모


지난 67년 3월22일 판문점에서 극적인 탈출로 월남, 귀순을 가장했던 북괴전중앙통신부사장 이수근(45)이 다시 한국을 탈출해서 북괴로 가는 도중 31일 사이곤공항에서 체포됐다.
李는 위조여권을 소지, 가발과 콧수염으로 변장해서 재북 본처의 이질인 배경옥(남?29)과 함께 지난 1월27일 CPA기편으로 김포공항을 탈출했으나 31일 해외 모지점에서 그를 추적한 중앙정보부원에게 체포되어 지난1일 한국공군군용기편 김포공항으로 압송돼왔다고 13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했다.
정보부는 이날 이와같은 사실을 공표하면서 (1)李는 북괴의 지령에 의해 위장귀순했고 (2)한국에서 합법적인 신분을 취득한 뒤 적화통일이 될 때까지 장기잠복하라는 지령을 받고 판문점을 통한 탈출을 실행했으며 (3)정체가 탄로될 우려가 있자 배경옥에게 대북괴보고서를 휴대시켜 북괴에 복귀하려했다고 설명했다. 정보부발표문 전문은 별항과 같다.

(1969년2월13일치 신문))

1969년2월14일치 신문의 제목은 “그놈이 설마 그럴 줄이야”다. 살벌하다.


사진설명마다 붙은 ‘아연실색’ ‘가면’ ‘이수근 가면벗긴 홍콩공항서의 격투’ 등의 제목도 ‘천인공노’의 분위기 일색이다. 재판은 속전속결이었다. 네 달 만인 5월10일 사형선고를 받고, 두 달 만인 7월3일에 사형이 집행되었으니.

“한번 더 살려달라-최후진술 이강월씨에 미안”

가발이 벗겨진 이수근은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위장간첩 이(李)는 이날 최후진술에서 자신의 범행은 시인하며 횡설수설 반항적인 태도도 보였다. 이날 상오 11시 이는 감방에서 2명의 건장한 교도관에 의해 형장으로 끌려왔다. 태연하려고 애쓴 듯 했으나 그의 얼굴은 더욱 파리해졌다.
사형집행절차는 11시25분부터 시작됐다. 집행관인 서구치소장의 인정신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회관 김병하 검사가 판결문을 낭독하자 그의 표정은 침통해졌다.
이(李)는 이어 약20분간 그가 판문점에서 위장 탈출한 경위와 국외로 탈출한 범행과정, 그리고 재판을 받은 경위 등을 진술했다. 그러나 자신이 아직 공산주의자임을 뚜렷이 비친 李는 “한번만 더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푸른 수의, 검은 고무신 차림의 이(李)는 북괴에 있는 가족과 서울에서 결혼했던 이강월 여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또 자신의 죄상에 대해서는 “북괴 같았으면 이미 몇 사람의 노동자들에게 ‘인민재판’을 받아 죽었을 것” 이라면서 “정당한 재판을 받게 해 준 대한민국은 역시 법치국가였다”고도 말했다. 신부의 설교를 받겠느냐는 집행관의 물음에 처음엔 거절했다가 정식절차라면 받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종율신부의 설교가 시작되자 2분도 채 못 되어 “내 정신이 아니니 그만두라”고 중단시켰다. 집행관은 상오11시55분 李를 교수대에 오르게 했고 약20분 뒤 형의 집행이 끝났음을 확인했다.

이수근은 이중간첩이 아니었다. 위장귀순도 아니었다.
이 사건의 진실을 처음으로 발로 뛰며 취재한 저널리스트는 조갑제 기자(전 <월간조선> 대표)다. 말년에 극우언론인으로 명성을 떨친 그가 한국의 반공집단이 조작한 간첩사건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조갑제 기자는 1989년 3월호 <월간조선>을 통해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제기한다. 처형당한 지 20년만이었다. 조갑제 기자는 이수근을 체포하거나 조사한 당시 이대용 주월(주 베트남) 사이공 대사관 공사와, 중앙정보부 홍필용 국장, 위 기사에도 나오는 김병하 검사 등을 차례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이수근의 서울탈출을 도운 조카 김세준도 취재했다. 감옥에서 20년형을 받고 살다가 출옥한 처조카 배경옥도 나중에 만났다. 이수근은 역시 간첩이 아니었다.

국가도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6년12월26일 결정통지서를 통해 이수근은 위장귀순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 사건을 비인도적?반민주적 인권유린사건으로 규정했다. 서울고등법원 제6형사부(재판장 박형남, 판사 박선준 김상규)도 2008년 12월29일 이 사건 관련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처조카 배경옥 등의 재심신청 결과였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이수근의 혐의를 확신했다. <김형욱 회고록>(나중에 <혁명과 우상>으로 이름 바꿔 개정판 재발간) 제2편엔 이런 대목들이 있다. “맨처음 이수근이가 귀순할 때부터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수근은 우선 김일성을 맞대놓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텔레비전과 라디오방송 및 각종 회견에서 지극히 오만불손하였고 허언(虛言)을 농하였다.” “우리는 그가 위장귀순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나 당장은 손을 쓰지 않고 두고 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수근의 동태에서 접선을 기도하는 다른 간첩망을 포착할 수도 있으며 또 이수근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신이 위장귀순한 것을 자백하고 진심으로 귀순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갑제 기자의 보도는 정반대였다.

“여기는 자유가 없다. 강연할 때 써준 원고대로 읽지 않았다고 불러서 때리곤 하는데, 지식인의 양심상 남이 시키는 대로 할 수도 없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제3국으로 가기로 했다.”(김세준이 증언한 이수근의 발언)

“북쪽이 싫어서 내려왔는데 남쪽에서도 자유가 없더군요. 방OO(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방준모-필자 주), 그 OO가 나를 일일이 감시하고 수시로 불러서 북쪽과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면서 때리고, 내 발을 향해 권총을 쏴 위협을 하지 않나. 울분을 술로 달랬는데, 다음날 아침에 속이 아파 물을 달라고 하면 아내도 냉대하고…(중략) 남쪽도 틀렸어요 자유도 없고, 독재고 해서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가서 살려고 했어요. 남쪽, 북쪽을 다 경험한 것을 책으로 쓰면 한 40만에서 1백만 달러는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이대용이 증언한 이수근의 발언)


“김일성이를 많이 욕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심을 산 모양인데 진짜 위장간첩이라면 김일성이 욕을 더 했을 것 아닙니까?”(홍필용의 증언)

조갑제 기자에 따르면 중앙정보부 수사내용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이수근이 정말 위장간첩이고 월북하려 했다면 홍콩에서 캄보디아행 비행기를 탈 것도 없이 바로 구룡반도를 통해 중공(중국) 남쪽 국경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모스크바로 보냈다는 암호문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증거였다. 신문에 보도된 이수근의 최후진술도 상당수가 가짜였다. 스크랩에 있는 위의 기사내용처럼 “북괴 같았으면 이미 몇 사람의 노동자들에게 ‘인민재판’을 받아 죽었을 것” 이라거나 “정당한 재판을 받게 해 준 대한민국은 역시 법치국가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실제로는 “남한에서 감시를 당하는 등 자유를 속박당한 데 불만이 많았다는 느낌”을 주는 발언을 남겼다고 한다.

조갑제 기자의 결론은 ‘망명’이다. 기자 출신으로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던 이수근은 남쪽 정보기관의 감시를 견딜 수 없었다. 남도 싫고, 북도 싫었다. 양쪽에 모두 환멸을 느꼈다. 그런 점에서 ‘이중간첩’이 아닌 ‘이중탈출자’라는 이름이 합당하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나오는 이명준처럼 제3국을 택하려 했다. 그는 홍콩에서 비교적 중립국이었던 캄보디아를 거쳐 스위스로 가려 했다. 설사 잡힌다 해도 고초는 겪을지언정 극형까지 당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중앙정보부로서는 이 사건에 절체절명의 이해관계가 있었다. 해외탈출을 막지 못한 자신들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만회해야 했다. 김형욱은 단순한 만회를 넘어 이를 ‘빛나는 공로’로 반전시키려 했다. 이수근은 위장간첩이 되어야했고, 입 다물고 얼른 죽어주어야 했다. 미국으로 망명해 박정희 시대의 일들에 관해 비판적 기록을 남긴 김형욱이 회고록에서 이수근을 명백한 ‘이중간첩’으로 몬 것은 아마도 이 사건이 자신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었기 때문이리라.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의 경우 민족주의비교연구회와 무리하게 연관 지은 점을 인정하며 관련자들에게 사과한 것과 비교된다)

아버지는 이수근을 ‘사상의 암환자’인 양 연민하고 조롱했지만, 그는 사실 멀쩡했다. ‘만들어진 암환자’였다. 중앙정보부는 그에게 거짓 진단서를 발급하고 ‘재기불능’의 극약처방을 내렸다.

<김형욱 회고록>에도 이수근을 ‘사상의 암환자’로 모는 대목이 있다. 이수근이 서울로 압송돼 오면서 태연하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공산주의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건 뭐 새로운 혈액형의 탄생인가? A형도 아니고 B형도 아닌 C형? Communist(코뮤니스트)의 피! 여태까지 밝혀진 진실을 놓고 볼 때 이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공식적 무죄 선고와 관계없이, 대다수 한국인들의 기억은 수정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위장간첩이다. 주변의 열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아홉 사람은 ‘이수근’이라는 이름 뒤에 ‘위장간첩’이라는 수식을 자동으로 붙인다. 이건 ‘주홍글씨’이자 ‘볼펜글씨’이다. 아무리 지우개로 지워도 낙인은 선명하다. 이수근과 같은 처지에서 교수대를 다녀간 이들을 살펴본다. 앞으로는 1961년 북쪽 밀사로 파견되었다가 63년 12월 간첩 혐의로 처형되었던 황태성이 있다. 뒤로는 각각 72년과 75년에 처형된 유럽간첩단 사건의 김규남 박노수, 인혁당 사건의 도예종 여정남 김용원 이수병 하재완 서도원 송상진 우홍선 등이 있다.

김규남과 박노수(박대인)에 관한 기사는 스크랩7권에서 발견된다.


김규남 의원등 16명 구속
정보부 발표 관련자 60여명 수사
정계침투 지하세력 구축
평양왕래?밀봉교육 봉기기도


중앙정보부는 14일 북괴의 지령에 따라 우리나라의 정계와 학계에 대한 침투를 획책해온 현직국회의원을 포함한 대규모의 ‘구라파및 일본을 통한 북괴대남간첩단’ 사건을 적발, 현직 국회의원 김규남(40?공화?전국구)과 박대인(영국케임브리지대?법학박사) 등 16명을 구속하고 관련자 60여명에 대한 국내외에 걸친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67년 7월에 검거된 동‘베를린’간첩사건에 이어 또다시 적발된 이번 ‘구라파 및 일본을 통한 북괴간첩단’ 사건은 공화당 소속의 재일교포출신 김규남(40?동대문구보문동6가198의4)과 재일교포로서 영국에 유학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가진 박대인(가명.37.서대문구 창천동53의92)등을 중심으로 61년부터 재일교포로 ‘런던’대학에 유학중이던 북괴간첩 현일수(46)에게 포섭되어 북괴의 해외공작책 이(李)모의 지시에 따라 동‘베를린’과 평양을 왕래하면서 영국을 비롯한 ‘유럽’ 5개국을 주 무대로 유학중인 한국인 학생을 포섭, 암약해 왔으며 지난 번 동‘베를린’ 간첩사건때 단서가 포착되어 계속 수사중 박대인의 귀국을 계기로 본격적인 검거에 이르렀다.

(1969년5월15일치 신문)

현역 공화당 의원이었던 김규남은 사건 발표 3년 뒤, 7.4공동성명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1972년7월13일에 형장의 이슬이 된다. 김규남은 과연 간첩이었을까? 역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9년10월13일 “박노수 김규남 김판수 등을 불법구금한 채, 가혹행위 허위자백 등을 통해서 과장되게 간첩죄를 적용하여 사형 등 유죄판결을 받게 한 사실을 확인”했다. 인혁당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법원의 재심 끝에 모두 무죄로 판명났다. 이제 그들의 억울함은 이제 0.0000001% 정도라도 풀어질까?

생각해보면, 아쉽고 또 아쉽다. 이수근의 ‘거사’는 대담했다. 뒤늦게나마 여권위조와 변장으로 반쯤 성공했던 탈출행각에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남한생활이 방탕했다는 증언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매도할 수는 없다. 탈출과 망명은 멋지게 성공했어야 했다. 스위스에 정착해 남과 북을 비교하는 글을 쓰려던 소원을 이뤄 박정희 정권의 애를 태웠어야 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찍소리 못하고 책임사퇴하는 계기를 만들어줬어야 했다. 알프스산정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는 이수근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결론삼아 말하자면, 이수근에 대한 아버지의 한탄은 적절하지 않다. 특히 ‘암’ 어쩌고 하는 대목은 예의가 아닌 듯하다. 아버지, 이건 아니잖아요.

“아- 사상은 인생의 암이로다”라는 독백은 사상에 대한 허무주의가 아닐까요? “젊어서 사회주의자가 돼보지 않은 자는 바보요, 성년이 돼서도 사회주의자로 남아있으면 더 바보”라는 말은 그 허무주의와 일맥상통합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모택동의 말도 반대편에 있지만 비슷한 맥락이지요. 사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자기 힘으로 해석하고 삶의 근거와 지침을 주는 가이드라인이잖아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건 좋습니까? 남에게 해를 끼치는 극단적 기준이 문제겠지요. 예를 들면 극우나 극좌, 또는 나치즘 같은 거 말입니다.

이해는 갑니다. 특정한 사상을 가졌다 하여 분단시대에 많은 이들이 고초를 겪었습니다. 수많은 공안사건에서 보듯 당사자 뿐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평생 불온한 낙인을 찍히고 피폐한 삶을 살았습니다. 권력자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사상과 이념을 암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툭하면 사람들에게 암 검진, 아니 검증을 강요했지요. 얼마나 어거지로 내시경을 집어넣었는지 모릅니다.



이수근에 관한 변호를 마치며 아버지의 시 마지막 문장을 바로잡아본다.
아- 포악한 권력은 사회의 암이로다!


◆ 참고한 책
『김형욱 회고록』 (김형욱?박사월 지음, 아침, 1985)
『이수근은 역시 간첩이 아니었다』 (조갑제 지음, 조갑제닷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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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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