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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다 세계를 잃어가는 사람들” - 소설가 한강 『희랍어시간』

그 둘은 어떻게 서로 인식하고 서로에게 다가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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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희랍어 강사이고 말을 잃어버린 여자는 그의 수강생이다. 하나의 기관이 제 역할을 잃어가면, 다른 기관들이 그만큼 예민해진다. 두 사람의 관계가, 문장이 한껏 예민해져 있다. 그 둘은 어떻게 서로 인식하고 서로에게 다가갈까.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의 이야기


“전작 『바람이 분다, 가라』를 쓰는 동안 슬럼프가 있었어요. 지금까지 나에게 어떤 질문이 생겼을 때, 저는 그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으로 뚫고 나왔거든요. 나는 지금 글을 쓰기 어려운 상황인데, 좀 더 크게 생각해서, 말을 잃은 사람에 대해 쓰면 어떨까? 결국, 우리는 모두 다 세계를 잃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빛을 잃어가는 사람과 말을 잃어가는 사람. 두 사람의 이야기를 써보자. 그렇게 스케치를 시작했고요.”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희랍어시간』(2011)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희랍어 강사이고 말을 잃어버린 여자는 그의 수강생이다. 하나의 기관이 제 역할을 잃어가면, 다른 기관들이 그만큼 예민해진다. 두 사람의 관계가, 문장이 한껏 예민해져 있다. 그 둘은 어떻게 서로 인식하고 서로에게 다가갈까. 두 눈으로만 읽어내려 갈 문장이 아니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사람이기보다 어떤 물질이라고, 움직이는 고체이거나 액체라고 느낀다. 따뜻한 밥을 먹을 때 그녀는 자신이 밥이라고 느낀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할 때 그녀는 자신이 물이라고 느낀다. 동시에 자신이 결코 밥도 물도 아니라고, 그 어떤 존재와도 끝끝내 섞이지 않을 가혹하고 단단한 물질이라고 느낀다. 침묵의 얼음 속에서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건져내 들여다보는 것은 이주에 하룻밤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된 아이의 얼굴과, 연필을 쥐고 꾹꾹 눌러쓰는 죽은 희랍 단어들뿐이다. (p.59)


한 교실 안에 있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 속에 사는 두 사람 사이에는 희랍어가 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되고 단단한 문자. “8년 전쯤 희랍어 철학을 하는 분을 만났어요. 고대 희랍어를 알아야 할 수 있는 학문인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너무 함축적이다 보니 어순을 마음대로 쓴다는 거예요. 한 단어 안에 문법이 다 들어가 있어서 굳이 어순을 다 보여줄 필요가 없어서요.” 희랍어 문법은 규칙이 대단히 까다롭다. “동사들은 주어의 격과 성과 수에 따라, 여러 단계를 가진 시제에 따라, 세 가지 태에 따라 일일이 형태를 바꾼다. 놀랍도록 정교하고 면밀한 규칙 덕분에 오히려 문장들은 간명하다. (p.20)”

소설의 문장도 희랍어를 닮아있다.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다. “최대한 정확하게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하려고 하는 말, 쓰려고 하는 분위기를 정확하게 옮기려고 하다 보니 행간을 띄우기도 하고, 이탤릭체로 기울이기도 했어요. 정황과 감정을 최대한 전달하려는 실험적인 시도였어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소설


『희랍어 시간』은 깊은 바다 같았다. 검은 물속에서는 굉장한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지만, 표면은 멈춰 있는 듯 무심하게 수평선 근처를 찰랑거리는 바다. 각자 아픈 기억과 폐쇄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이 두 사람은 그저 고요할 뿐이다. 독자들은 문장을 통해 그들의 속내를 비밀스럽게 엿본다.

한강 작가는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음색이 문장의 결과 톤을 닮아있었다. 정확해서, 다시 한번 읽어보며 천천히 음미해야 하는 문장처럼, 은은하게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나도 모르게 바짝 상체를 그녀 쪽으로 당겨 귀를 기울여야 했다.

“아직 소설에서 못 빠져나온 상태에요. 『바람이 분다, 가라』는 오래 붙잡고 있어서, 그 책을 생각하면 아직도 그 소설이 살아 있는 것 같아요. 『희랍어시간』은 그것과 또 다르게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아요. 함축적으로 쓰고, 결말을 열어둬서 더 그런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을 아끼고, 꾹꾹 누르듯이 써서, 아직 마음에 남아 있는 상태에요.”

말과 빛을 잃어가는 사람을 그려내기 위해 그녀는, 인물들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써나갔다.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사람에 대해서 늘 생각했어요. 불투명한 비닐을 눈에 대고 있어보기도 하고요. 그분들이 읽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염려도 되고, 함부로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말 잃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인물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세세한 감각에 집중하려고 했어요.”


무언가 잃어가는, 잃어버린 인물들이지만, 삶은 계속된다. “생명은 소멸에 저항하잖아요. 손톱 자르다 살을 자르면, 잘린 살점은 금방 썩어버리지만, 피가 흐르는 손은 썩지 않잖아요. 그런 생명과 소멸의 관계. 침묵과 말의 관계. 아주 긴밀하면서도, 서로 싸우는 그런 관계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 안에서 어둠 속에 목소리만 남은 사람과 말을 잃었다가 찾는 사람의 이야기는 제 안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거죠.”

인터뷰 초입에서 한강 작가는 이 소설 역시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계속 살아야 하는 거라면, 그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혹시 소설을 끝낸 지금은 찾게 되었을까.

“인간의 연한 부분에 대한 신뢰를 확인했다고 할까요. 두 인물이 구원 없는 세상을 살았잖아요. 서로 마주치는 순간, 소통할 때 자신의 가장 연한 부분을 꺼내잖아요. 손바닥에 글씨를 써준다든지, 서로 침묵하는 순간. 그런 것들이 인간 안에 있는 것이었는데, 그 연한 부분에서 삶을 시작되어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소설에 기울여져 사는 삶이 좋아요


한강 작가의 아버지는 한승원 소설가. 오빠 한동원 씨 역시 소설가고, 남편인 홍용희 씨도 문학평론가로 활동한다. 그야말로 문학 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자랐고, 살아왔다. 뭔가 특별히 다른 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문학에 대해 남들보다 더 얘기하지 않는다”라며 웃는다. 하지만 책이 있는 집, 책을 읽는 가족 사이에서 자란 소녀는 남들보다 문학, 언어에 좀 더 예민하지 않았을까.

“집에 책이 많았어요. 책을 아무 데나 내버려두는 집이었고, 정리정돈이라는 게 없었거든요. 누가 뭘 하든 내버려두는 분위기여서, 그땐 아이 책이든 어른 책이든 상관없이 책을 읽었죠. 사춘기 때 접어들어 고민이 생겼고, 그 고민으로 진지하게 책을 읽기도 했죠. 인간이 뭘까. 사람은 다 죽는 걸까. 우리가 정말 다 죽어야 하는 걸까. 어떤 사람들은 왜 아플까. 나는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뜻도 모르고 책을 읽으면서, 그 속에 대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 답을 찾았을까? “답을 주는 책은 없구나, 생각했던 게 기억나요.(웃음) 다들 정말 훌륭하고, 나이 많은 분들이 쓰신 책이지만, 결론은 항상 이들도 나처럼 잘 모르고, 내가 고민하는 것들이 이들에게도 큰 고통이었단 거였어요. 우린 다 비슷하구나. 답은 없네.”


한강 작가에게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물었다. “숲”이란다. 소설에서도 ‘숲’이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 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p.14)”

글을 쓰다가 슬럼프도 겪고,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언어를 밀어내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연 이 작가에게 소설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언어에 대한 예민함을 안고 끊임없이 싸우는 과정일까. 이 소설만 해도 2년이 걸렸다고. 그 소설이 무엇을 주길래, 한강 작가는 끊임없이, 오랜 시간 붙들고 있는 것일까.

“2년여 동안은 이 소설하고 살면 되니까, 그런 상태가 좋아요. 오히려 이 소설에서 다음 소설로 넘어가는 사이가 힘든 것 같아요. (스스로 의지하기보다,) 제 모든 걸 소설에 기울여, 늘 생각하고 있는 그런 상태가 좋아요. 그게 균형 잡힌 상태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 삶에 소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나는 이렇게 기울어져 있는 그런 상태.”


문학지망생들, 조급해 하지 말길


한강 작가는 올해로 등단한 지 18년 째다. 반올림해서 20년 차로 묶이는 게 아쉬울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1993년에 등단해서 단편집 『내 여자의 열매』(2000) 장편소설 『검은 사슴』(2005) 『그대의 차가운 손』(2002) 『채식주의자』(2007) 『바람이 분다, 가라』(2010) 외 산문집과 동화를 발표했다.

등단 초기만 해도, 첫 창작집을 1년여 만에 써낼 정도로 부지런히 발표했으나, 퇴고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작품을 붙들고 있는 속도가 길어졌다. “썼던 것도 다시 보고, 늘 글을 붙들고 있지만, 결과물은 빨리 나오지 않는.(웃음) 창작집도 내야 하는데요. 2000년에 창작집을 냈는데, 내년에 새로 내면 12년 만에 내게 되는 셈이에요.(웃음) 문제는 그게 13년 되고, 14년 될까 걱정되는 거죠.(웃음)”

등단 초와 비교했을 때, 글을 쓰던 속도도 다르고 스타일도 달라졌다고 한강 작가는 회고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쓸 수 있는 최대치를 독자들 앞에 내보이고 있다. 서울예술대학에서 창작 강의를 할 때, 그녀가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조급해하지 마라”라는 것이다.

“좋은 욕심이긴 한데 조급하면 힘이 드니까요. 좋은 작품으로 바로 등단하기보다는, 그런 작품을 서너 편 갖고 있을 때 등단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보다 재미있게 쓰는 게 좋은 거라고 얘기해줘요. 아이들에게 최대한 부정적인 얘기는 하지 않으려고 해요. 영향을 미치니까요.”

2011년, 『희랍어 시간』 속에서 잘 보냈다는 한강 작가는 올 한 해를 좋게 기억할 것 같다며 웃었다. “늘 쓰고 싶은 이야기가 머릿속에 많아요. 빨리 쓰지 못하는 게 늘 아쉬운 점인데. 그런 이야기들이 어떤 이미지로 머릿속에 있어요. 거기에 최대한 근접하려고 노력해요. 거기에 도달하려는 열망이 소설을 쓰는 가장 큰 추동력이에요.”

『희랍어 시간』을 보낸 지금은 무엇을 생각하고 상상하며 보내고 있을까. “이 책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저의 가장 밝은 대답인데…… 더 밝은 대답을 써보고 싶어요!(웃음)”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 매일 밤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더듬더듬 커튼을 걷고, 유리창을 열고, 방충망 너머로 어두운 하늘을 봐야 하니까, 오직 상상 속에서 얇은 점퍼를 걸쳐입고 문 밖으로 걸어나갈 테니까. 캄캄한 보도블록들을 한 발 한 발 디디며 나아갈 테니까. 어둠의 피륙이 낱낱의 파르스름한 실이 되어 내 몸을, 이 도시를 휘감는 광경을 볼 테니까. 안경을 닦아 쓰고,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짧은 파란 빛에 얼굴을 담글 테니까. 믿을 수 있겠니. 그 생각만으로 나는 가슴이 떨려.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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