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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각하 죄송합니다, 꼴보기 싫어요

박정희 대통령, 또다시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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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대통령 박정희 후보 당선”이라는 제목 밑으로 누군가 오른 손을 들고 있는데 얼굴은 안 보인다. 대신 조선일보 만평을 붙여놓았다. “죄송합니다. 꼴보기 싫어요”라는 뜻인가. “푸하하” 웃음이 나오려다가 멈칫 생각에 잠긴다. 아니, 아버지에게도 이런 짖궂은 구석이 있었나

“오늘은 스크랩을 하기 싫다. 가위를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신문을 보자마자 왈칵 짜증이 솟구쳤다. 그 분의 얼굴에 혐오감을 느꼈다. 굳이 매일 하던 대로 신문기사를 잘라 붙여야 하나. 하기 싫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아버지의 스크랩을 보며, 40년 전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다. 정확히 말하면 1971년4월28일 아침이다. 4.27 대통령선거 다음날이었다. 당선인의 얼굴이 담긴 신문기사에 감정의 변화를 느끼신 게 틀림없다. 그렇다고 기사 스크랩을 빼먹기는 싫으셨으리라. 궁리 끝에 묘안을 짜냈다. 아버지는 가위질을 시작했다. ‘풀 붙이기’까지 완료한 뒤 시 한 편을 적었다.

대통령 각하

죄송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당신을 전연 모릅니다.
나는 당신이 이번 선거에
대통령으로 출마하리라곤
전연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대통령이 되셨다구요
내 집에 온 손님을 내쫓을 수는 없지요
당신의 얼굴을 익힐 때까지
서로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제7대 대통령 박정희 후보 당선”이라는 제목 밑으로 누군가 오른 손을 들고 있는데 얼굴은 안 보인다. 대신 조선일보 만평을 붙여놓았다. “죄송합니다. 꼴보기 싫어요”라는 뜻인가. “푸하하” 웃음이 나오려다가 멈칫 생각에 잠긴다. 아니, 아버지에게도 이런 짖궂은 구석이 있었나? 요즘으로 치면 ‘가카에게 빅엿을 멕인’ 셈이다. 박정희를 꽤나 싫어하셨군요. 1963년 스크랩에서 군정연장에 대한 비판 글을 발견한 적이 있기에,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이런 ‘도발적 스크랩’은 처음이었다. 노골적이진 않다. 점잖다. “당신의 얼굴을 익힐 때까지 서로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라니.

아버지의 스크랩 제7권(1969년1월~1970년12월)과 8권(1971년1월~1972년12월)을 다시 편다. 여러 가지 사건들 중 ‘박정희의 정치행보’에 초점을 맞춰 뒤적인다. 아버지가 박정희의 얼굴을 덮어버리기 2년 전, 그는 3선개헌 공작에 성공했다. 1971년4월엔 이를 토대로 세 번째 대통령선거에 출마했고 김대중 후보를 눌렀다. 1년 뒤인 1972년엔 한술 더 떴다. 유신헌법을 공포하고 아예 ‘종신대통령’이 됐다. 박정희의 성공시대이자, 한국정치의 암흑시대였다. 스크랩 제7권과 8권을 통해 1969~72년 네 해에 걸친 그 성공과 암흑의 실상을 들여다본다.

개헌투표로 신임 묻겠다
부결되면 즉각 퇴진
조속발의촉구?7개항 제의
박대통령 특별담화 발표


박정희 대통령은 개헌문제를 통해 자신과 현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물어 개헌안이 통과되면 국민의 신임으로 간주하고, 부결되면 불신임으로 간주하여 즉각 물러서겠다고 선언했다.
박 대통령은 25일 상오10시 특별방송을 통해 이같이 말하고 이에 따라 여당은 빠른 시일 안에 개헌안을 발의하도록 촉구했다. 박 대통령은 여야정치인에의 7개항 제의에서 개헌찬반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것도 당부했다. 박 대통령은 14분 동안에 걸친 이 이례적인 방송에서 “야당의 개헌반대운동이 도를 넘어 반정부폭동의 양상을 띠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개헌논의가 연말이나 연초에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종전의 견해를 바꾸어야 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청와대 접견실에서의 이 담화방송에는 정 총리(정일권)를 비롯한 전 내각, 윤 당의장 서리(윤치영)를 비롯한 공화당당무위원, 김 중앙정보부장(김형욱), 이 실장(이후락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수석비서관들이 배석했다. (1969년7월26일치 신문, 괄호 안 이름은 필자가 덧붙임)

1969년 7월25일 기자회견 기사다.


3선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내용이다. “부결되면 즉각 퇴진”이라는 말은 박정희를 꽤 민주적인 대통령으로 포장시켜준다. 국민의 뜻에 순순히 따르겠다는 말로 들린다. “개헌할 의사가 없다”거나 “개헌을 하더라도 아직은 시기가 아니다”라고 하다가 말을 뒤집은 사실에 관해 정식으로 밝히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실제로는, 필요하지도 않은 안건을 ‘굳이’ 던져놓고 “부결하면 즉각 퇴진”이라고 배수진을 친 뒤 부결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3선개헌은 결국 공화당 의원총회(7월29일)를 거쳐 국회본회의(9월14일)를 통과했다.

공화당은 14일 새벽2시25분 국회제3별관특별위원회 회의실에서 개헌안제안에 찬성 서명한 공화당의원1백7명, 정우회소속 10명, 무소속1명과 서명하지 않은 정우회 소속 1명, 무소속의원3명 등 도합 1백22명의 의원들이 출석한 가운데 변칙본회의를 소집하고 개헌안에 대한개별기명 투표를 실시, 25분만인 새벽2시50분 출석의원전원의 찬성으로 이를 전격적으로 가결, 통과시켰다. 공화당은 개헌안 가결에 이어 국민투표 법안도 상정, 법사위에서 통과된 내무위대안대로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1969년9월16일치 신문)


‘변칙본회의’라 함은 ‘날치기’라는 뜻이다. 이날 새벽 국회의장 이효상은 주전자 뚜껑으로 탕탕탕 책상을 쳤다. 의사봉 대용이었다. 3선개헌에 대한 야당의 울분은 스크랩에 실린 단 한 장의 사진이 다 말해주는 것 같다. 변칙통과 현장에 한발 늦게 달려온 신민당 김상현 의원이 침통한 울음을 터뜨리면서 명패함을 들어 내던지는 모습이다.


한때 한국 정계에서 ‘마당발’로 통하며 마냥 사람 좋게 웃는 얼굴로 기억되는 그에게 이렇게 ‘비장하고 의분에 찬’ 순간이 있었다니. 의사당은 야당 의원들이 던진 의사봉과 재떨이, 드링크제 빈병들이 나뒹구는 폐허로 변했다. 그 옆 장에 아버지는 이런 시를 남겼다.


비정의 그늘

정치는 목발 없는 병신
꾀가 나면 굿을 하는 병신
도박사의 말로는 곡예의 운명
눈먼 귀신이 고고춤을 춘다

도박판의 사기는 인정하는 울
늙은이도 젊은이도 똥간의 휴지
배짱으로 먹물을 갈고
칼끝으로 혈서를 쓴다

나라의 장터-
이름하여 국회의사당
폐허의 우물 속에 감추인 비밀
인심을 매매하는 우시장이다

역사의 회전은 목마의 산보
생명을 걸고 창부(娼婦)와 씨름을 한다
너도 죽일 놈-
나도 죽일 놈이다

“눈먼 귀신이 고고춤을 춘다”는 퇴폐적인 표현이 좋다. 귀신들의 고고춤은 계속된다. 3선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는 1969년10월17일에 예정돼 있었다. 공화당의 반대 목소리를 잠재우고 신민당의 일부 의원들(성낙현, 연주흠, 조흥만)까지 포섭한 박정희는 유권자를 향한 다음 단계 작전에 들어간다. 대규모 선심공세와 협박이라는 양동작전이었다. 대량살포된 돈과 밀가루 한편으로 “부결됐을 경우 국민이 원치 않는 또 한 번 군의 정치 참여” 운운하는 괴담들이 유포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화당의 3선개헌안 국민투표 지지유세와 신민당의 반대유세가 시작되지만 무기력한 유권자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니들끼리 다해먹어라’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지지유세에 동원되었다가 뒤편에서 홀로 취해 잠을 청하는 유권자의 사진 밑에 이렇게 적었다.


누워서 잠자는 나그네
아무 뜻도 없고 아무 잡념도 없다
먹고 마시고 취하면 된다
그리고 되는 대로 산다
누가 무슨 짓을 하든
팔아먹든 도적질하든
오직 나그네에겐
주권(酒權)만 있으면 된다.


10월17일 국민투표 결과 총 투표자 1천160만4천38명중 찬성은 755만3655표였고, 반대는 363만6396표, 무효는 41만4014표였다. 투표율 77.1%, 찬성률은 65.1%였다. 아니다. 이 정도면 “그러거나 말거나”는 아니었다. 유권자들은 대충 물렁물렁하지 않았다. 3년 뒤 유신헌법안 국민투표 투표율과 찬성률에 비교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3선개헌안은 박정희에게 융단을 깔아주었다. 다음 무대는 1971년 4.27 대선.


박정희 후보의 맞수는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1970년9월29일)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김영삼 후보를 뒤엎은 김대중 후보였다. 이제 진정한 맞수가 등장했다. 63년과 67년 대선에서 박정희가 두 번이나 대결을 치른 윤보선을 ‘맞수’라 칭하기엔 어색하다. 63년 대선도 초박빙이었지만(득표율 박정희 46.6%, 윤보선 45.1%) ‘1897년생 할아버지’ 윤보선은 그저 ‘60년대 민정의 상징’이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당시 ‘40대 기수론’을 펼치던 김대중이야말로 대중적 인기와 정치능력, 패기와 추진력 면에서 박정희와 어깨를 겨룰 만 했다. 대선을 하루 앞둔 1971년4월26일치 신문은 “어제 부산?광주, 오늘 서울?대구서 대결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구름같이 운집한 유세현장 군중의 사진을 여야 대비로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는 ‘맞수’라는 시를 썼다.


맞수

역사의 대결이라면 우습다
권총도 없이 총알만 새알처럼 품고 있다

시대의 대결이라면 괴롭다
자각도 없이 군중만
모래알처럼 많이 모였구나

운명의 대결이라면 울고 싶다
총칼을 잡은 자가 누구냐
불발탄일망정-
공포탄을 쏘았을망정-
총을 들고 서 있으면
그래도 무섭다
그래도 두렵다
그래도 떨린다
우매한 군중은-
눈먼 새요
눈먼 양이요
날개 없는 비둘기다

“총칼을 잡은 자가 누구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양복을 입은 박정희의 모습 뒤에 숨은 군복과 총칼의 이미지를 쓰다듬는다. “무섭다” “두렵다” “떨린다”고 말한다. 그래도 김대중 후보 유세현장의 열광적 분위기는 그 두려움을 넘어설 희망을 품게 했다. 신문기사를 보자.


4시간 전부터 인파 몰려
장충단입구 통로 막혀


한봄 공휴일인 18일의 신민당유세는 서울의 선거열풍을 더욱 가열시켰다. 이날 유세장인 장충공원은 청중으로 꽉 찼고 ‘타워?호텔’, 장충체육관, 을지로6가등 입구 도로는 사람들로 인해 유세가 끝날 때까지 통행이 막힐 지경이었다. 신민당은 장충단공원 재향군인회관 밑쪽에 연단을 마련하고 1백 개의 고성능 ‘스피커’를 4개조로 묶어 1천2백 미터 일직선상에 골고루 달았다.

문 닫힌 영빈관 철조망 부수고 넘어

유세시작 4시간 전인 상오 10시부터 모이기 시작한 인파는 정오께부터 더욱 늘어나 하오 2시30분께 ‘피크’, 청중은 공원을 넘쳐 남산‘터널’ 입구, 영빈관 구내잔디밭, 재향군인회관앞, 동국대학 ‘캠퍼스’, 공무원교육연수원 쪽 골목길까지 메웠다.
하오1시30분께 청중들은 공원을 들어설 자리가 없자 연단이 잘 보이는 영빈관 언덕으로 가기 위해 50여 미터의 철조망을 부수고 넘어가 양지바른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
강연회 예정시간인 하오 2시가 지나도 김 후보 일행이 도착하지 않자 주최 측에서는 “김 후보가 당사를 출발했는데 도중에 연도의 인파에 밀려 좀 늦는다”고 알리고 6명의 여당원이 당가를 불렀다.
사회를 맡은 김수한 대변인이 “오늘 서울시내에는 각종 고궁의 무료입장권, 초대권 등이 무수히 뿌려졌다”고 말하면서 여러 장의 무료입장권을 붙인 ‘피키트’를 내보이자 청중들은 “와!”하고 박수를 쳤다.
하오 2시30분 김후보, 유진산 당수, 김상현 의원 등이 서울자 2-6637호 ‘오픈카’를 타고 공원 어귀에 나타나자 “필승 김대중”이라고 흰 글씨로 쓴 검은 우산과 김 후보의 사진과 기호2번을 적은 ‘피키트’를 든 50여명의 남녀당원들이 환성을 올렸다.
김 후보는 군중들에게 두 손을 높이 쳐들어 ‘V’자를 그리며 답례, 30분 걸려 연단까지 5백여 미터를 청중을 헤치며 갔다.
이날 유세는 예정보다 1시간 늦은 하오 3시7분부터 시작 김재광, 양일동, 박순천, 유진산 당수의 순서로 약 10분씩 진행 하오 4시5분 김 후보가 ‘마이크’앞에 섰다.
박수와 환호성 속에서 김 후보는 “나의 대결상대인 박 후보는 (기사 끊김)”면서 서두를 꺼냈고 “1백만 서울시민의 함성을 보고 이제야말로 정권교체의 시기가 온 줄 알았다” 고 말해 첫 박수를 받았다.
얼굴이 검게 탄 김 후보는 약간 상기된 모습으로 오른손을 자주 들어 올려 쉰 목소리로 외쳐 모두 22번의 박수와 환성을 받았다.
김 후보는 공화당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내가 집권하면…” 이란 말을 앞세워 대안을 제시했다. 김 후보는 “절대로 안한다던 3선개헌! 절대로 해부렀어…”라고 사투리로 ‘조크’를 던져 청중을 웃게 했다.

쓰레기 5트럭, 공원시설에도 피해
신민 서울유세의 날


경찰은 이날 유세장 정리를 위해 정사복 3백여 명의 경찰관을 동원했으나 너무 많은 인파 때문에 교통마비, 축대붕괴 등 혼란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날 장충공원 일대는 물론 을지로 입구, 금호동고갯길, 남산‘터널’입구 등까지 교통혼란의 여파가 미쳤고 장충공원 ‘타워?호텔’ 서울운동장까지 일대는 아예 꼼짝할 수도 없어 그 속에 들어섰던 10여대의 차량은 유세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묶여 버리고 말았다.
서울시 집계에 의하면 이날 장충공원과 남산의 5, 6년생 나무 2천4백76그루 잔디 2천평 사방사업지 2개소 난간 3백 75미터 조명시설 1개소 변소 지붕 1개 ‘벤치’ 4개 등이 망가져 3백만 원의 피해가 났다.
유세가 끝난 후 수거한 빈 병, 잡지, 신문 등 쓰레기는 5트럭이나 됐다.(1971년4월19일치 신문)

마지막 상자 기사가 이상하다. 나무와 잔디와, 화장실 지붕의 피해상황을 이토록 상세하게 보도하다니. 당시 정부의 집중적인 통제를 받았다는 언론의 단면인지도 모르겠다.
박정희가 승리했다. 634만2828표로 53.2%, 김대중은 539만5900표로 45.2%. (맨 위 박정희의 얼굴을 덮은 만평에 등장하는 3위 후보는 콧수염을 기른 정의당 진복기로 12만2914표에 1.0%였다) 색깔론에 지역감정을 불붙이는 흑색선전, 개표부정 등 부정선거가 판을 쳤다. 당시 국가예산이 5천2백42억 원이었는데, 박정희는 이 선거에서 국가예산의 10%가 넘는 600~700억 원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5월25일 총선거를 앞두고 대학생들은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총선 거부를 결의했다. 데모는 전국으로 번졌다.

5월25일 총선에서는 153개 지역구에서 공화당 86명, 신민당 65명, 국민당 1명, 민중당 1명이 당선했다. 전국구를 합치면 공화당 113석, 신민당 89석으로, 야당의 실질적 압승이었다. 공화당은 국회의원 2/3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이 숫자로는 공화당만의 헌법개정은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제 신민당이 기 좀 펼 것인가. 봄이 오는 듯 했다. 학생들은 거리로 나섰다. 4.27 대선무효투쟁에 이은 교련반대투쟁이 있었고 교수들은 대학자주선언 등을 발표했다. 1971년10월4일엔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도경비사(사령관 윤필용) 헌병대 병력 30여명이 고려대생들의 ‘부정부패 규탄’ 철야농성 현장에 난입해 학생들을 구타하고 5명을 불법 연행해간 것이다. 10월5일 가톨릭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와 1천여 명의 교인들은 이를 규탄하는 횃불데모에 돌입한다. 10월12일과 14일엔 1만여 명의 학생들이 거리에서 ‘학원자유수호투쟁’을 벌인다. “학원난입을 규탄한다! 부정부패자를 공개하라! 중앙정보부를 철폐하라!”

충격?침통의 대학가
“불행한 사태” 전달하자
교수?학생 눈물


대통령 특별명령, 위수령, 대학휴업령 등 잇단 충격이 15일 낮 대학가를 덮었고 충격은 온 서울거리로 번져갔다. 교수와 학생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거리의 표정도 경악일색. 각 대학은 총?학장을 비롯한 교수들이 사태수습책을 논의하다가 휴업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찰 3백10명 연행

김현옥 내무장관은 15일 하오 4시14분 위수령 발동 이후 서울시내에서 연행된 학생은 모두 3백10명이라고 발표했다. (1971년10월6일치 신문)

서울 위수령 발동 대학가에 군 주둔

박대통령은 이날 상오9시40분 김학열 부총리, 김현옥 내무, 신직수 법무, 유재흥 국방, 민관식 문교, 윤위영 문공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학원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주모학생을 학원에서 추방하는 등 9개항의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 (중략)

박대통령 특명사항

1. 학원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주모학생을 학원에서 추방하라
2. 앞으로 학생들이 여하한 불법적 ‘데모’, 성토, 농성, 등교거부 및 수강방해 등 난동행위는 일절 용납할 수 없다. 이러한 행동을 주도한 학생은 전원 학적에서 제적케 하라.
3. 제적된 자에 대하여는 즉일부터 학생신분상의 모든 특권을 인정해주지 말라.
4. 학술목적을 제외한 각 대학의 모든 ‘서클’은 곧 해산케 할 것이며 학술 ‘서클’이라 할지라도 주임교수가 그 지도와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하라.
5. 대학에서 정당히 인가한 이외의 여하한 신문 잡지 기타 간행물도 이를 발간할 수 없다.(6~9항은 생략)


초?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이런 시험문제를 내보면 어떨까. “위의 ‘박대통령 특명사항’을 읽어보고 느낌을 서술하시오.” 학생들한테서 어떤 답이 나올지 궁금하다.
박정희는 위수령1)을 내렸다. 서울 8개 대학에 무기휴업령도 내렸다. 서울대 등 주요 대학들엔 위수군이 진주하면서 1천8백89명의 학생들을 연행해갔다.
을 내렸다. 서울 8개 대학에 무기휴업령도 내렸다. 서울대 등 주요 대학들엔 위수군이 진주하면서 1천8백89명의 학생들을 연행해갔다. 이어 전국 23개 대학에서 177명의 학생이 제적당했고 그중 대부분이 강제징집됐다. 1971년12월6일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번엔 ‘국가비상사태2) 선언’이다.

국가비상사태선언
모든 정부시책 안보최우선
최악의 경우 자유 일부 유보
박대통령 특별담화
사회불안요소 용납 못해


박정희대통령은 6일 상오10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박대통령은 이 선언에서 “현재 대한민국은 안전보장상 중대한 차원의 시점에 처해있다고 단정한다”고 말하고 (1)국가안전시책의 최우선 (2)사회불안의 불용납 (3)언론의 자숙 (4)국민의 안보책무의 자진수행 (5)안보위주 가치관의 확립 (6)최악의 경우 자유 일부의 유보 결의 등 6개항을 선포했다.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및 국가안보회의합동회의의 결의를 거쳐 전 국무위원의 부서로 비상사태선언을 한 박대통령은 특별담화문을 통해 “대통령의 직책 중에 무엇보다도 우선 해야할 일이 곧 국가의 안전보장이며 따라서 국가안보상 위기도의 측정은 전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의무” 라고 말하고 “급박한 국내외 정세를 예의검토하고 심사숙고를 거듭한 끝에 우리의 국가안보와 우리의 생명인 민주주의의 영구보전을 위해 비상사태를 선언할 결심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태평 ‘무드’에 젖어있는 오늘의 우리사회의 단면을 눈여겨 볼 때 나는 6.25사변의 전야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박 대통령은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이 소중한 것을 강탈하거나 말살하려는 자가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마저도 스스로 유보하고 이에 대처해나가야겠다는 굳은 결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1. 정부의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조속히 만전의 안보태세를 확립한다.
2. 안보상 취약점이 될 일절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으며 또 불안요소를 배제한다.
3.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논의를 삼가야 한다.
4. 모든 국민은 안보상 책무수행에 자진 성실하여야 한다.
5. 모든 국민은 안보위주의 새 가치관을 확립하여야 한다.
6.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1971년12월7일치 신문)


‘위수령’이면 됐지 왜 또 ‘국가비상사태’인가. 그 사이 데모가 심해지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졌나? 그렇지는 않았다. 심심해서 장난삼아 ‘비상 사이렌’ 한 번 울려본 건가? 1년 뒤 유신의 예행연습이었을까. 1년 뒤로 테이프를 돌려보자.

문제의 1972년이 왔다. 1972년은 한마디로 ‘엽기 반전의 해’였다. 세계 냉전체제의 얼음이 녹던 시기에, 함께 발맞춰 얼음을 녹이며 하하호호 웃다가 갑자기 거대한 빙산을 들여와 나라를 꽁꽁 얼렸다면 정확한 비유일까.

1969년 7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 각국에 대한 정치?군사적 개입 회피”를 골자로 한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바야흐로 긴장완화의 시대였다. 닉슨은 71년4월 중국 탁구대표팀을 초청하는 이른바 ‘핑퐁외교’를 시작하고, 10월에는 유엔에서 자유중국(대만)을 축출하고 중국을 가입시키는 노릇을 한다. 마침내 1972년2월22일엔 베이징에서 모택동 주석을, 5월22일엔 모스크바에서 브레지네프 서기장을 만나 ‘핵 제한’등의 공동성명에 합의한다.

7월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자주?평화통일 원칙에 합의’한다는 성명은 그러한 국제정세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남북이 왕래하며 적십자회담까지 한다. 하지만….


전국에 비상계엄선포
헌법 일부 정지?국회 해산
유언비어에 징역 3년 선고
1개월 내 국민투표 연내


박정희 대통령은 17일 하오 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한편 대통령특별선언을 선포 ①17일 하오7시를 기해 국회해산 정당의 정치활동정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효력을 정지하고 ②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가 수행, 비상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하며 ③비상국무회의는 72년10월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여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내에 국민투표에 붙여 확정시킨다 ④또한 개헌안이 확정되면 개정헌법절차에 따라 연내에 헌정질서를 정상화시킨다고 밝혔다. (1972년10월18일치 신문)


아버지는 익살을 발휘했다. ‘비상계엄선포3)’ 라는 제목 부분에 만화를 붙였다.



‘3년 징역’의 재갈이 물린 두 사람 옆에 이런 활자가 적혀 있다. “유언비어에 징역3년- 입을 조심하라니까.”

유신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박정희는 10월27일엔 대통령 종신제를 기조로 하는 헌법 개정안4)을 발표했다. 이 헌법개정안은 11월21일 국민투표에서 경이적인 투표율과 찬성률을 기록했다. 왜 그랬을까? 까딱 잘못 반대표를 찍었다간 인생 망칠 분위기로 몰았기 때문이다. 공포가 지배했다. 69년 3선개헌안 국민투표 때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유신헌법안 확정
국민투표 찬성률 91.4%, 투표율은 91.9%


21일 국민투표로 붙여진 유신헌법안은 투표율 91.9%에 찬성률 91.4%라는 우리나라 투표사상 일찌기 보기 드문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22일 상오5시께 확정되었다. 중앙선관위는 투표함 수송지연으로 늦어지고 있는 일부 도서지구의 개표가 완료되는 대로 24일 중으로 전국회의를 열어 유신헌법안의 확정을 공표하고 대통령에게 이를 통고할 예정이며 대통령은 즉각 이를 공포하게 되므로 유신헌법은 24일부터 발효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1972년11월23일치 신문)

“우리나라 투표 사상 일찌기 보기 드문 압도적인 지지”라고 한다. 이제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뽑기로 했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으나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고, 각급 법관에 대한 임명권도 모조리 대통령이 갖게 됐다. 사법부가 행정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12월13일엔 비상계엄이 해제되고 이틀 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열린다. 12월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


박정희 8대 대통령 당선
첫 통일주체 국민회의서


통일주체 국민회의는 23일 상오10시 서울장충체육관에서 개회식을 갖고 정식 발족한 후 제1차 회의에서 현 박정희 대통령을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국민회의 대의원 2천3백59명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된 이날 대통령 선거에서 박 대통령은 대의원 거의 전원인 2천3백57인의 지지를 얻어 유신헌법이 규정한 임기 6년의 새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나머지 2표는 무효표로 밝혀졌다. (1972년12월24일치 신문)

100% 투표율에 99.99% 찬성이다. 궁금하다. 무효표 두 표의 비밀! 두 표는 단순 실수였을까. 아니면 “100% 투표, 100% 찬성”으로 발표하기엔 낯부끄럽고 민망해서였을까.


국정대개혁 단행
박정희 8대 대통령 취임


제8대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이 27일 상오11시 서울장충체육관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다. 이에 앞서 이날 상오8시30분 정부는 유신헌법을 정식공포, 제4공화국이 정식으로 출범했으며 유신과업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날 취임식에는 행정부와 사법부 요인,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전원, 그리고 주한외교사절과 ‘유엔’ 군장성, 전직요인과 각계 대표 및 해외교포 등 3천2백여 명이 참석했다. 취임식은 국민의례에 이어 취임식 준비위원장인 김종필 총리의 식사가 있은 뒤 박 대통령은 헌법 제46조에 따라 “국헌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에 노력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한다”고 취임선서를 했다. (1972년12월28일치 신문)

스크랩 제8권 맨 앞에 있는 ‘서시’의 제목은 ‘부조리’다. 1971년1월에 작성한 글이다. 그 뒷장에 적힌 시의 제목은 ‘위협과 공갈과 협박’이다. 1971년과 72년을 달군 그 많은 부조리들과 위협과 공갈과 협박을 생각한다면 시의적절하다.


부조리

세상은 흐르는 꿈
난장이도 키다리도 함께 누워 꿈을 꾼다
역류의 바다
미친 놈들끼리 침을 뱉으며 인생을 계수(計數)하노라

정치하는 재미-
돈과 선거는 부부 사이
권력은 죄를 가리우는 무기
꽃이 시들면 너도 함께 통곡하리라

생과 사의 부조리
누가 산 자며 누가 죽은 자냐
황금의 칼을 쥔 자여 권력을 활을 멘 자여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로다


위협과 공갈과 협박

나는 하루에도 세 번씩 나 자신을 위협하고 공갈하고 협박한다
다같은 말이고 같은 방법이다.
그러나 어가 다르고 예가 다르듯 어감이 다르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부자유한 방 속에 혼자 앉아
발성하는 법을 배웠다
발악한다는 표현이 더 근사하지 않을까
자작
산이 발갛게 드러나도록 산에 나무를 몽땅 벤다는 말이다.
사람의 모양이 ‘자작’한 것처럼-
그것은 보기 싫은 수치니까 상관이 없다
나무를 심거나 옷을 입으면 된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선도 의(義)도 사랑도 진실도 소망도
믿음까지 다 몽땅 잘라버리고 내쫓아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진짜 위협과 공갈과 협박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버지를 놀리고 싶다. “참 순백의 마음을 가지셔서 좋겠어요~.” 선, 의, 사랑, 진실, 소망, 믿음이라는 단어들은 가슴을 치지 못한다. 도덕과 종교의 냄새만 피운다. 요 부분만 좀 고치시면 안 될까요? ^^

얼마 전 고향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채널예스’에 연재중인 이 칼럼을 열심히 읽으시는 당신은 걱정스런 말투로 당부하셨다. “제발 박정희 좀 욕하지 마.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길이야.” “아버진 박정희를 안 좋아하신 거 같은데요.” “난 박정희 좋거든~. 생각해봐라. 박정희가 없었으면 우리나라가 오늘 이렇게 잘 살 수 있었겠어?” 이런 하나마나한 대화를 주고받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전에 ‘대통령 박정희’를 놓고 언쟁을 했다는 거였다. 아버지는 늘 박정희에 관해 못마땅한 발언을 하셨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했다고 한다. 처음 들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긴 신문기사들을 꼼꼼히 읽고 선별하여 스크랩을 할 정도라면, 박정희를 이해해주기가 쉽지는 않았으리라. 5.16 쿠데타 시절의 박정희 소장 때부터 그에 관한 정보를 꼼꼼히 수집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거짓말을 일삼아 왔는지 다 아는 형편에 말이다.

1972년의 겨울을 떠올려본다. 무지 추웠을 거 같다.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긴 터널이었다. 빠져 나오려면 한참 남았다. 1972년은 그 터널에서 최악의 구간 중 하나였다. 아버지의 우울을 상상해본다. 괜히 나의 마음도 최악이 된다.




1) 육군 부대가 한 지역에 계속 주둔하면서 그 지역의 경비, 군대의 질서 및 군기(軍紀) 감시와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정된 대통령령(大統領令). (네이버 백과사전)

2) 천재지변이나 중요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 또는 전시와 사변 및 이에 준하는 사태가 벌어져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사태.(네이버 백과사전)

3) 계엄의 종류에는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이 있는데, 비상계엄이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적과 교전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되어 행정 및 사법기능의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에 군사상의 필요에 의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선포하는 계엄을 말한다.(헌법 제77조 1항, 계엄법 제2조 2항). 비상계엄의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은 계엄지역 안의 모든 행정사무와 사법사무를 관장하며, 비상계엄지역 안에 있어서 일정한 범죄는 군사법원에서 재판한다(계엄법 10조).

4) 유신헌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통령 직선제의 폐지 및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간접 선거. 2.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 3. 대통령에게 헌법 효력까지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 부여. 4. 국회 해산권 및 법관 임면권을 대통령이 갖도록 하여 대통령이 3권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보장. 5.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 제한을 철폐하여 종신 집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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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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