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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자 포함 29명 소양강에서 익사, 원인은 암소 세 마리의‘소똥’

.돌쇠는 어떻게 피투성이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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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타이타닉’, 승객 335명 중 323명 숨져… 생존자는 12명뿐. 오늘의 주인공은 돌쇠다. 돌쇠는 딱 한번 등장하지만, 이 글을 쓰는 내내 머릿속에선 돌쇠가 떠다녔다. 돌쇠는 시외버스도 타고 고속버스도 탄다

어느날 돌쇠가 모처럼 기차를 탔다.
돈도 없어 무임승차했노라고 숨어서 발차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운명이 숨어서 낚시밥을 드리우고 있었다.
함정이 파 있는 곳에서 즐겁게 앉아 있었다.
온통이 눈보라치고 온누리는 흰눈으로 덮여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이상하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죽잖을까.
돌쇠를 다리를 낑기우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것은 별안간 꽝하고 소리 지른 함성이 있은 뒤였다.
인생이란 잠깐 동안에 성공하기도 하고 잠깐 동안에 실패하기도 한다



오늘의 주인공은 돌쇠다. 돌쇠는 딱 한번 등장하지만, 이 글을 쓰는 내내 머릿속에선 돌쇠가 떠다녔다. 돌쇠는 시외버스도 타고 고속버스도 탄다. 특급 청룡열차도 타고 완행열차도 탄다. 나룻배도 타고, 여객선도 탄다. 종합상가에 들러 쇼핑을 하기도 하고, 호텔에 투숙을 하기도 한다. 판잣집에서 자기도 하고 신식 아파트에 묵기도 한다. 마치 <윌리를 찾아라>의 윌리처럼 돌쇠는 사고현장마다 숨어있는 그림이라고나 할까. 자기운명을 모르고 죽음의 낚시밥에 다가서는 수많은 돌쇠들. 두더지게임기의 두더지처럼 사신은 불쑥불쑥 머리를 내민다. 그리하여 당신도 돌쇠처럼 피투성이가 된 적이 있는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아직은 무사하다.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녔다. 성공했다. 살아남은 당신은 축하받아 마땅하다.

아버지의 스크랩 제7권(1969년1월~1970년12월)과 8권(1971년1월~1972년12월)을 편다.


1969~1972년은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위한 3선개헌안 날치기 통과와 유신헌법 공포에 성공했던 기간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치적 대형사고’를 크게 쳤던 때다. 이 역사적 재난을 기억하는 일은 잠시 미루기로 한다. 먼저 오픈게임이다. ‘비정치적 대형사고’ 특집! 그러나 정치와 비정치의 경계를 나누기는 쉽지 않다. 따지고 보면 상당수의 사고들은 박정희의 정치적 과욕과 무관하지 않다. 부실시공과 규정위반에 따른 사고들은 결국 목표달성만을 추구한 고도성장과 산업화의 그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냥 ‘재난특집’이라고 해두자. 크게는 세 종류다. 육해상 교통사고, 화재, 그리고 붕괴. 이것만 해도 한 가득이다.

7,8권에 스크랩된 대형사고 기사들을 모두 세어보았다. 해외사례 1건을 포함해 총 20건이다. 인터넷으로 위키백과사전에 있는 ‘대한민국의 대형사고 목록’을 검색해보았다. 같은 기간 10건 뿐이다. 두 배나 많은 셈이다. 물론 위키백과의 사고목록은 100% 아버지의 스크랩에도 존재한다. 아버지를 칭찬해드리고 싶다. “어찌 이리 꼼꼼히 하나도 안 빼먹으셨나요?” 생활이 안정적이던 때였다. 죽을 고생을 하던 타향 경북의 소읍을 떠나 또 다른 타향인 전북의 시골구석에 안착하여 비교적 순탄하던 시절이었다.

스크랩 7권 표지를 넘기면 좌우로 자잘한 사고들이 모자이크 처리돼 있다. “새벽길에 택시 피하려다 급커브…아현고가도로 난간에 걸려” “저절로 굴러 차 곤두서” “아파트에 트럭 육교?” “지상 87미터의 화재” “버스 박살…3명 사망” “한길의 택시곡예” 등등 국내외 사고들이다.

맨 앞의 ‘돌쇠’가 등장하는 시는 7권 첫 장에 붙어있다. 관련기사는 1969년1월31일의 천안 열차추돌사고다. 2010년7월23일 중국 저장성 윈저우에서 발생한 고속철도 사건처럼, 가만히 서 있는 열차를 뒤에서 달려오던 열차가 받았다.


천안서 열차추돌 대참사 41명 사망?백8명 중경상 특급 ‘청룡’ 서 있는 완행 받아 해방후 일곱 번 째 큰 사고

【천안=임시취재반】31일 낮11시57분 천안역 남쪽 8백 미터 지점(서울기점98.2킬로)에서 부산발 서울행 특급열차 청룡호(기관차 이규태,44,대전 기관차 사무소소속)가 청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던 남원발 서울행 102완행열차(기관사 최영훈,49)를 뒤에서 들이받아 승객 41명이 죽고 50명이 중상, 58명이 경상을 입었다.
조사결과 청룡호 기관사 이씨는 천안쪽 1.6킬로 지점에서 자동폐색 신호기에 붉은 정지신호가 켜있는 것을 보고도 시원(時遠) 84킬로로 돌진, 폐색신호기 전방 8백60미터에 서 있던 102열차의 뒤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102열차 맨 끝에 달렸던 ‘보일러’차는 충격으로 퉁겨지고 바로 앞에 달린 2등간이 3등7호차위로 튀어올라 3등간의 철판지붕이 무너지면서 박살이 나 2등간이 3등간을 절반가량 덮쳤다. 사상자들은 거의 모두 3등7호차 승객들이었는데…(하략) (1969년2월1일치 신문)

41명이 죽었다. 10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기사 옆에는 부상환자에 대한 이런 끔찍한 사진설명도 있다. “열차가 충돌하자 손과 다리가 눌려 빠져나올 수 없어 자기 손을 칼로 잘라 목숨을 건진 전상진(田商鎭)씨가 천안도립병원에 입원가료중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설을 앞두고 고향으로 가던 승객들이었다. 아버지의 시 한편이 또 있다.

운명

소꼽장난으로 아이들이 다툰다
바지를 벗어제치고
치마저고리를 벗어버리고
서로 엉키고 뒹굴고 자빠지면서
코피를 삼키면서
눈을 흘킨다.

빌어먹을 차표
꼭 오늘은 몰랐는데
눈보라가 사신을 꾀였구나
피빛이 흰눈자국마다
비명을 세우는데 찬성을 했구나
아, 운명은 심술쟁이
인생은 속절없이 속는구나

손님도 오고 부모님도 오셨는데
이웃형제들도 다 모였는데
장례식을 웃으며 하자꾸나
춤추며 소리지르며 기겁을 떨며 열심으로 웃어보자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열차를 타 본적이 없다. 84년까지 단 한 번의 승차기록도 갖고 있지 못하니, 69년의 돌쇠보다 훨씬 지독한 촌놈이었다. 고속버스를 타볼 기회는 있었다. 시골에서 살던 유년시절, 2~3년에 한 두 번꼴로 고향에 가기 위해 ‘동부고속’ ‘중앙고속’이라는 이름이 붙은 버스에 올라탔다. 그때마다 극도의 흥분상태가 되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동네 형들은 “고속버스에선 물컵을 놓아도 흔들리지 않는다더라”며 환상을 부추겼다. 그 고속버스는 열차와 함께 비극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고속버스 첫 대참사
25명 죽고 22명 부상
처절한 비명…곤두박질 세 번
휴게소 앞두고 뒷바퀴가 계곡에


【추풍령사고현장=임시취재반】“차가 떨어진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쾌적한 ‘고속여행’은 끝이 났다. 47명의 목숨을 태운 버스는 ‘공중잡이’를 하듯 세 바퀴 굴러 41.7미터 아래 개울가에 처박혔다. 21일 밤 8시 15분께. 이날 밤 따라 안개마저 낀 추풍령 고개마루에서 눈 깜짝할 사이 일어난 참사였다. <사고순간> 사고버스는 시속 70킬로로 추풍령휴게소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차안의 ‘카?스테레오’는 가요 ‘추풍령’을 틀고 있다. 휴게소가 보이는 마루턱에 들어서자 “곧 추풍령휴게소에 도착합니다”고 차장 이상옥양(19)이 ‘아나운스’했다.
이때 갑자기 운전사가 ‘룸?라이트’를 켰다.
손님들의 시야에 앞에 황토와 자갈이 쌓인 공터가 드러났다. 차는 공터에 바짝 붙어갔다.
“한 두어바퀴 굴렀을까요.”차장에겐 이 순간 차가 덜컹소리를 내며 어디론지 내려가는 기억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 순간을 김천경찰서 추풍령지소 고 순경이 목격했다. 갑자기 ‘라이트’가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고 순경은 꽝 소리를 듣고야 사고를 직감했다. 버스는 42미터높이를 세 번 굴렀다. 병원에서 맨 처음 의식을 찾은 김인영(金仁永)군(23)은 왼쪽 가운데 좌석에 있었다. 시야가 빙그르 돌며 몸이 뒤틀렸다. “꽝하는 바위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두 번 굴렀다고 생각합니다”는 김 군의 말이다.
그러나 뒷좌석 중간에 앉았던 장종원(張鍾遠)소령(39,2군관리참모처)은 “그때 졸고 있었다”며 자신이 ‘시트’ 밑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과 ‘시트’밑에 왼쪽으로 누워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버스는 “세 번 굴렀다”고 말하고 있다.
장 소령의 기억엔 버스가 뒷부분부터 추락, ‘콘크리트’바닥에 떨어지면서 한 바퀴를 돌고 계곡으로 떨어질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닥에 닿을 때 또 한 번 오른쪽으로 돈 것 같았다.(1970년8월23일치 신문)

내 기억에도 90년대 초반까지 고속버스엔 말끔한 유니폼을 입은 여차장이 있었다. 수시로 버스 안을 오가며 스튜어디스처럼 서비스를 했다. 멀미가 있는 이들을 위해 비닐봉지도 나눠주었다.
문제의 추풍령 구간이 완공된 것은 1970년7월7일이다. 경부고속도로 최종준공 기간과 일치한다. 이 사건은 1970년8월21일 벌어졌으니, 완공 45일만의 대참사였고 고속버스의 첫 사고로 기록됐다. 사진설명을 보면 고속버스가 얼마나 당시 고급 교통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2백20만 달러의 호화판 고속버스는 완전히 제 모습을 잃어버렸다. 찌그러진 창살엔 살점이 다닥다닥 끼었고 ‘시트’엔 붉은 선혈이 낭자했다.”

사고순간 버스 안에서는 가요 ‘추풍령’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아마도 60년대 후반에 활약한 가수 남상규의 <추풍령>이리라.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한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되돌아보는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노래가사처럼 사망자들은 ‘추풍령 구비’에 ‘한많은 사연’을 토했다. 유족들은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버렸다. 다음 사건도 사고순간 노래가 흘러나왔다는 점에서 같다. 흥겨운 합창이었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연이은 수학여행 참사를 보자.


소풍버스?열차와 충돌 무인건널목 스승없이 엉겨붙은 시신 분간못해 경서중생 참변 상보

【온양=임시취재반】즐거운 수학여행이 눈깜짝할 사이에 ‘죽음의 길’로 변했다. 흥겨운 귀로의 합창은 순식간에 불더미에 싸여 아비규환이 됐다. 경서중 3년생 45명을 희생시킨 ‘이내’건널목참사는 지켜주는 간수도 없이 보살펴주는 스승도 곁에 하나 없이 내팽개쳐진 채 꽃다운 나이들을 떼죽음 시키고 말았다.
14일 하오 4시 20분께 현장에서 10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이 참사를 목격한 귀화중학교장 전현준(全鉉俊)씨는 “온양쪽에서 시속 60킬로의 속도로 달려오던 버스는 학생들의 노래소리와 함께 건널목에 들어선 순간 ‘꽝’하고 기차와 충돌, 버스 앞 부분에서부터 검은 연기와 함께 불길이 오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전씨가 현장에 달려갔을 때 화염에 싸인 버스 창문으로 5,6명의 학생들이 퉁기다시피 빠져나왔다.
버스는 성냥갑처럼 부서진 채 ‘레일’ 한가운데를 가로 막아섰고 ‘레일’은 80미터 가량이 엿가락처럼 휘어져있었다.
사고 후 3분 만에 현장에 달려간 이석주(李錫柱)해병하사(28)는 “학생들의 시체는 버스 복판에 겹겹이 쌓여있었고 불에 탄 채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다”고 전했다.(1970년10월15일치 신문)

열차충돌…또 수학여행참사 원주터널서-仁昌高生등14명 사망 부상57, 3개 고교생 탄 경주행

【원주사고현장=본사임시취재반】수학여행길의 학생들이 경서중생들의 사고가 난지 3일 만에 이번엔 열차충돌 사고로 또다시 참사를 당했다.(호외3회발행)
17일 상오 11시15분께 원주시 행구동 화실부락 원주170 ‘터널’입구에서 청량리발 경주행77여객열차 (기관사 이주아,39)와 제천발 서울행1508화물열차(기관사 박무현)가 정면충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인창고교 교감 정경근(鄭景根)씨(50), 인솔교사 정헌일(鄭憲一)씨및 안성규(安晟奎)군 등 인창고 2년1반 학생 10명, 모두 14명이 목숨을 잃고 57명이 중경상(중상=41 경상16)을 입었다. 이날 아침 7시 30분께 청량리역을 출발한 77열차는 원주를 지나 11시 15분께 ‘터널’에 들어섰는데 ‘터널’을 빠져나가기 직전 마주 달려온 1508호 화물열차와 부딪친 것이다.
충돌 순간 정상속도에서 17개 화차를 달고 달려오던 화물열차는 굴을 지날 때 속력을 줄인 여객열차를 밀어냈다.
달려가던 여객열차가 갑자기 뒤로 밀리자 객차와 열차 사이의 1호객차가 반동으로 퉁겨오르며 열차와 굴 사이로 4분의 3정도가 찌부러져 버렸다. 이 바람에 1호 객차에 타고 있던 학생1백2명중 앞자리에 앉았던 정 교감등 14명(즉사8명)은 압사했고 중간에 탄 50여명은 중경상을 입었으며 뒷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기적적으로 사고를 면했다.(1970년10월15일치 신문)

46명이 처참한 죽음을 맞은 지 3일 만에 또 14명이 죽었다. 원주열차 참사를 전하는 기사 옆엔 <조선일보> 4컷만화 ‘두꺼비’가 붙어있다.

말풍선은 하나도 없다. 첫 칸에서, 두꺼비는 신문을 보다 운다. 꽃다발을 들고 어디론가 가며 계속 운다. 마지막 칸에서는 철길 건널목 위에 꽃을 던지고 또 한없이 운다. 꽃다운 젊은 아이들의 명복을 빌며 나도 울고 싶다. 육상 시리즈에 이어 다음엔 수상 시리즈다.


소울음소리가 부른 떼죽음의 나루터

사고원인
【춘천에서 임시취재반】사고는 또 규칙을 어겨 일어났다. 도선에 소를 세 마리 실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도선업단속법에는 승객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위해를 끼칠 위험이 있는 것은 승선시키지 못하도록 되어있으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안전한 격리시설을 하도록 되어있는데 경찰은 이번 경우의 소를 이 조항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살아난 원도식(元道植,44,근화동1구)씨는 기관실 옆에 서있었는데 배가 기우뚱하면서 소가 우는 소리와 함께 승객들이 한쪽으로 몰리며 뒤집혀졌다고 말했다. 또 정양순(58,서면 당독1리)씨도 배가 떠나는 듯하더니 소의 울음소리와 “배가 기운다”하는 아우성이 한꺼번에 들리면서 사고가 났다고 말했다.(중략)
사고순간 사망자 29명중 여자가 24명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춘천시내의 영세부녀자들로, 무우밭이 많은 중도에 가서 일을 해주고 무우잎, 배추잎 등을 얻어가지고 돌아오던 길이었는데 인양된 배 밑창에는 이런 것들이 수북히 쌓여있었다.
사고순간 부녀자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몸을 끌어안아 뒤집어진 뱃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그래서 살아난 사람은 거의 남자들이었으며 그나마 구조대의 배까지 헤엄치거나 뒤집어진 배 밑창을 구조대가 깨었을 때 손을 허우적거린 사람뿐이었다. 구조된 소장수 김광식(49,춘천시 효자동2구)씨는 6일이 장날이어서 춘성군에 가 송아지 한 마리와 황소 두 마리를 사서 춘천장에 팔러가려다 사고를 냈는데 소는 모두 죽고 말았다. (1970년11월6일치 조선일보)

사고원인에 중점을 둔 위 해설기사만으로는 정확한 사고경위를 알 수 없어 다른 옛날신문을 뒤적거렸다. 문제는 ‘소똥’이었다. 3마리의 암소가 배설을 시작한 뒤 승객들이 한쪽으로 몰리면서 배가 기우뚱하더니 뒤집어졌다. 1970년11월5일, 춘천의 중도에서 농삿일을 해주고 다시 뭍으로 오기 위해 배를 탄 부녀자들. 이들을 포함한 29명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40일 뒤인 1970년12월15일엔 부산-제주간 정기여객선 남영호가 거문도 부근 남해상에서 침몰했다. 아버지의 스크랩엔 사고를 알리는 제목활자만 한 페이지다.


승객이 335명이었는데 323명이 죽었다. 최종 생존자는 12명뿐이었다. 이들 중 8명은 침몰 7시간 만에 사고해역에 접근한 일본 어선에 의해 구조되었다고 한다. ‘타이타닉’이 따로 없다. 구사일생의 ‘특혜’를 입은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뒤집힌 배에 백50여명 매달렸지만…

승객들의 증언
▲구조된 승객 양순철(梁順哲)씨(26,북제주군 구좌면 연평리947)=성산포에서 해삼3백통을 싣고 배를 탔는데 선실이 만원이어서 오른쪽 갑판 가운데쯤에 타고 있었다.
밀감상자는 대부분 뱃머리 부분 갑판에 실려 있었다. 배가 갑자기 왼쪽으로 기우뚱하면서 뒤집혔다. 처음 뒤집힌 배위에 1백50여명이 배를 붙들고 있었는데 배는 시시각각 가라앉았고 파도가 한 번씩 칠 때마다 수영 못하는 사람은 10여 명씩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생존자들은 거의가 다 밀감상자를 붙들고 살아났다.
나도 얼떨결에 붙잡힌 판자쪽을 붙들고 8시간을 표류하다 일본어선에 구조되었다.
이중욱(李重旭)군(15,서울성동구 사구동3통8반,성수중 1년)=몸이 아파 휴학 중이었는데 제주의 친척집에 갔다 오던 길이었다.
조타실 옆에서 졸고 있다 옆자리의 30대 청년이 배가 침몰한다면서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 조타실 지붕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는 청년의 뒤를 따라 나가 바다로 뛰어들었다.
밀감상자 2개를 잡고 청년과 통신사 김박지씨 등 3명이 나란히 헤엄쳐 나왔다. 약 2시간이 지났을 무렵 기진맥진하여 졸음이 왔다.
이때 아저씨 나이 뻘의 청년이 “졸면 죽는다”고 외쳤으나 졸고 말았다. 깨어보니 일본 순시선이었다.
박순자(朴順子)씨(33,경북영일군 구룡포읍 부두2구)=1등 선실에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관소리가 그치더니 배가 왼쪽으로 넘어졌다.
밀감상자 하나를 껴안고 바다를 떠다니다 일본어선을 만났다. 2~3시간 바다를 떠다니니까 추위에 지쳐 거의 무의식적으로 밀감상자만 붙들고 있었다.
배가 전복하면서 전깃불까지 꺼져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둠속에서 서로 나오려고 밀리고 밟히는 등 수라장이었다.
김중현 일병(24,육군1888부대3중대2소대)=휴가로 서구포읍 하효리 집에 갔다 귀대하던 길이었다. 3등실서 자고 있었는데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잠을 깨보니 배가 기울어 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귀다툼 속을 헤쳐나와 바다로 ‘다이빙’했다. 헤엄쳐 나가다 고개를 돌려보니 배 밑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다시 배 쪽으로 돌아와 뒤집힌 배 밑바닥 위에 올라탔다.(1970년12월16일치 신문)

5개월 뒤인 1971년5월10일엔 가평 청평호에서 버스가 ‘전락’(轉落)했다.


신문제목 활자는 ‘추락’이라 하지 않고 ‘전락’이라고 전한다. 왜 그럴까. 아버지의 옛 서재에 있는 1961년판 까뮈의 책 이름도 <전락>(불어명 La Chute)이다. 그때는 ‘추락’대신 ‘전락’이라는 말을 널리 썼던 모양이다. 버스 안의 창살이 사고를 키웠다. 안전을 위해 설치한 창살이 승객들을 오히려 밖으로 탈출하? 못하게 막아버렸다. 그해 8월엔 폭우로 인해 부여에서 14명이 익사했고, 10월13일엔 남원역 열차충돌로 19명이 치어죽었으며, 11월28일 북한산 인수봉에선 7명이 얼어 죽었다.


그리고 12월25일 성탄절 아침….


아라비안 나이트의 옛 전설처럼
요를 타고 하늘을 날으는 기적의 요술
사지를 향하여 낙엽의 행렬이 꿈을 이룬다
아- 이럴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밤사이 포근했던 침실이 통곡을 한다



대연각이 불타올랐다. 아버지는 투숙객이 침실의 매트리스를 잡고 날아가는 사진에 위에 같은 시를 적어놓았다. 정말로 아라비안나이트의 요술 같다. 구름을 타고 나는 손오공처럼 신비하다. 그러나 과연 계속 날기만 했을까? 살기는 했을까?


성탄절 아침인 25일 상오 10시5분께 서울 중구 충무로1가 25의5 대연각‘호텔’(지상21층 지하2층) 2층 ‘코피?숍’에서 불이나 연건평1만1백80평을 모두 태우고 하오5시30분께 꺼졌다. 불이 나자 투숙객과 종업원들은 창에서 뛰어내려 20여명이 죽었다. 경찰은 하오5시 현재 사망자63명과 중상자54명을 확인했으나 ‘호텔’안에서 질식 또는 소사한 사람가지 합치면 인명피해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1971년12월26일치 신문)



‘대연각호텔 전소 대참화’라는 주먹활자 밑에 시커먼 화염에 휩싸인 호텔 전경 사진이 놓였다. 호텔 꼭대기 근처에선 헬기가 날고 있다. 아버지는 마치 사진에세이처럼 여러 장의 사진을 장마다 붙여놓고 그 안에다 시를 적어놓았다.


대연각의 그림자가 서서히 사라져간다 호화판 지상낙원의 꽃방석들이 시커멓게 타없어진다 인간의 문명이 소멸하는 대낮이다.



다음 사진에선 한 남자가 점프를 하고 있다. 신문 편집자가 단 사진설명은 다음과 같다. “당황한 일부 투숙객들은 무모하게 그냥 뛰어내려 생명을 잃었고 재빠른 일부 투숙객들은 침대 ‘쉬트’를 찢어 ‘로프’를 만든 후 암벽을 타듯 기어 내려와 무사했다. ‘쉬트 로프’사이에 그냥 뛰어내리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삶의 질긴 선 우에 생사의 가위바위보 시작이 없는 연주 예고 없는 자살



당시 화재현장에 달려온 시민들은 한국은행 앞 로터리를 가득 메우고 대연각 불기둥을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발 디딜 틈 없는 인산인해였다.


“모두가 빤히 지켜보는 속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고, 질식해 죽고, 타죽어 갔다. 62미터의 건물은 유유히 화염을 내뿜으며 한껏 타들어갔다. 목숨을 걸고 소화작업을 하고 있는 소방관들의 뒤에는 발을 구르며 안타까와하는 수만의 시민들-”이라고 적은 신문기사처럼. 다음 사진은 ‘고가사다리 전쟁’이다.


살의 전장-
여기 인간의 슬픈 곡예가 한창이다
소돔과 고모라
종말의 참상이 한 세월의 무대 위에서 자살을 한다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우리만 왜 이렇게 선발되었는가
돈이 유죄인가
초로와 같은 인생의 생명이 하늘거린다
찰나의 순간들이 낙엽처럼 흘러간다
백주의 혈규
밤처럼 괴로운 인류여
고통 소리가
대서울의 한복판에서 대낮에
메아리친다



이외에 이런 사진에세이도 있다. “옛날에는 모두가/ 무신론자였다/ 그런데 오늘/ 별안간 나는/ 신을 믿게 되었다(중략) 밧줄에 목숨을 걸고/ 인생관이 바뀌어졌다/(중략) 천지의 조화는 말이 없어도/ 모든 독백은 생성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았다.” 그러나 살기 위해선, 신만 되뇌어선 안된다. 유신론자로의 전향이 목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머리를 써야 한다. 머리를 쓴 사람들은 살았다. 최종 사망자명단 164명에 끼지 않을 수 있었던 그들의 ‘머리’는 어떻게 돌아갔는가.


불덩이 뚫은 기적?기지
13층서 뛰어 무사, ‘시트’ 연결해 타고내려
불길에 휩싸인 대연각 ‘호텔’의 투숙객과 종업원들은 살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12층에서 이웃 3층 건물 지붕위로 뛰어내려 기적적으로 산 소년사환도 있었고 9층 객실에서 기지를 발휘 ‘쉬트’를 연결해서 한 층 한 층 차례차례 내려온 일본인 의사도 있었고 ‘헬리콥터’의 밧줄에 매달려 KAL 꺡빌딩’까지 날아간 투숙객도 있었다.
시트쓰고 뛰어내려
25일 새벽 6시반께 친구 김영희(金明姬)양(23)과 함께 6층에 투숙한 최영희양(23)은 목욕을 하다가 연기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불길이 밑에서 자꾸 올라와 죽기는 마찬가지라고 ‘시트’를 뒤집어쓴 채 뛰어내렸다.
김양은 발만 약간 다쳤을 뿐이었다.
‘로프’매달려 곡예
15층에 투숙했던 박성호(朴成湖)씨(44,회사원)는 10시 40분께 복도에 나갔다가 자욱한 연기 때문에 불이 난 것을 알고 침대 ‘시트’ 2장을 묶어 창틀에 매고 14층으로 타고 내려와 창문을 구둣발로 차 깨고 들어갔다. 박씨는 여기서 다시 ‘시트’를 묶어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것을 되풀이, 7층까지 내려온 뒤 옆 건물 3층 옥상에서 경찰이 던진 ‘로프’를 타고 지상에 무사히 내려왔다.
찢은 담요밧줄타고
9층7호실에 투숙 중이던 일본인 ‘오지마’(大島和男,29,일본 CDC회사원)씨는 ‘쉬트’와 담요를 찢어 연결, 밧줄대신 늘어뜨리고 천천히 내려와 극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이불 깔린 지붕위에
12층에 사무실이 있는 신정운수회사 사환 유병철군(18)은 11시 42분께 친구 한영준군(18,오성제복사종업원)과 옆 사무실의 대한유조선사원(40)과 셋이서 옷을 벗어 흔들며 ‘헬리콥터’에 구조를 요청했으나 ‘헬기’에서 내려주는 밧줄이 손에서 불과 40~50센티 정도 떨어진 곳까지 내려왔으나 바람 때문에 잡지 못했다.
다섯 번이나 밧줄을 잡으려다 놓친 유군은 무조건 아래로 뛰어내렸는데 3층 높이의 건물 ‘슬레이트’지붕에 떨어졌다. 지붕은 약간 꺼졌으나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이불이 깔려있어 유군은 오른팔에 부상했을 뿐이었다. 6층서 기적의 점프
8층 종업원 최태옥양(22)은 8층에서 6층 ‘베란다’로 뛰어내려와 여기서 아래 있던 사람에게 받아달라고 한 후 뛰어내렸다. 밑에 있던 구조대원 10여명이 최양을 받았는데 기적적으로 다친데가 없었다.(1971년12월26일치 신문)

1971년 성탄절 아침의 대연각 호텔 화재는 한국전쟁 뒤 한국에서 일어난 재난 중 최악이었다. 또한 가장 문제적이었다. 희생자의 숫자 탓이 아니다. 투숙객들의 생과 사를 가르는 순간이 백주 대낮에 서울의 중심부에서 생중계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구름처럼 몰린 시민들이 두 눈 똑바로 뜨고 현장을 목도했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텔레비전으로 시청했다. 집단 트라우마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수천만 명을 한꺼번에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환자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 ‘스펙터클한’ 비극은 스티브 맥퀸과 폴 뉴먼이 출연한 1974년 개봉영화 <타워링>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사고는 끝이 없다. 아버지는 외신 기사까지 붙여놓았다. 1972년5월15일 오사카 천일(千日)백화점에 불이 나 117명이 죽었다. 이듬해인 1972년 8월1일엔 의암호에 버스가 ‘전락’해 24명이 익사했으며 8월5일엔 서울 청량리 종합상가인 대왕코너에 불이 나 6명이 타죽었다. (대왕코너에선 74년1월3월과 75년10월2일에도 불이 났다. 74년과 75년엔 각각 88명과 3명이 죽었다.) 마지막으로 1972년12월2일엔 서울시민회관에서 화재사고로 52명이 사망했다.


참, 하나 빠뜨렸다. 1970년4월8일의 와우시민아파트 붕괴다. 유명한 사건이라 생략했다. 33명이 희생됐는데, 4년치 대형사고들을 훑고 나서 다시 보면 싱겁게 느껴질 정도다. 시민아파트 부실건축의 장본인으로 이 사고 직후 해임된 김현옥 서울시장의 인터뷰기사도 나온다. 기사 중 다음 대목은 유족들의 분노를 살 만하다. “그는 와우 ‘아파트’ 사건으로 받은 충격과 피로로 지난 11일부터 몸살이 나 한때는 40도의 고열이 오르내렸다는 것.” 당신이 지금 40도 고열 갖고 엄살 부릴 때요?


위의 기사들은 신문을 가리지 않고 거의 발신자가 같다. ‘임시취재반’이다. 이 20개의 대형사고로 인해 죽은 사람을 합산해 보니 1,229명이다. 일본 백화점 화재를 제외하면 한국에서만 1,112명이다. 한국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며 선진국에 들어섰다는 90년대 이후라고 다를 게 없다. 사망자 숫자로 치면 더 살벌하다. 1993년 서해 훼리호 침몰로 292명이 죽었다. 1995년4월28일엔 대구 가스폭발사고로 101명이 죽었다. 1995년6월29일 삼풍백화점 붕괴로 501명(한국전쟁 뒤 단일사건 최고숫자!)이 죽었다. 1997년8월6일 괌으로 가던 대한항공 801편이 추락해 228명이 죽었다.
1999년6월30일 화성군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로 23명이 죽었다. 1999년10월30일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로 52명이 죽었다.

2003년2월18일엔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로 192명이 죽었다. 그리고 또
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죽었다….

오늘도 언제 어디서 부딪치고, 무너지고, 침몰하고, 떨어질지 모른다. 승용차에서, 전철에서, 시내버스에서, KTX에서, 여객선에서, 항공기에서…. 또는 회사에서, 가족과 마주앉은 안락한 집에서조차 안심할 수 없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주선 쓰레기에 맞아, 뒤틀린 해양 지각판이 몰고올 지진과 쓰나미에 휩쓸려 한 순간 훅 갈 수도 있다. 심술쟁이 운명은 휴일 없이 우리의 급소를 노린다. 생과 사는 아무데서나 가위바위보 게임을 한다. 아버지는 ‘내일 일은 난 몰라요’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돌쇠야, 피투성이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니.
그저…
오늘도 무사히!!!


<아버지의 스크랩>에 수록된 1969년~1972년 대형사고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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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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