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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의 섬에서 찾는 문화의 숨결 - 이종묵·안대회 지음, 이한구 사진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조선시대 유배지에서도 남녀간 로맨스는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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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인터뷰는 산악 전문 사진작가인 이한구 작가의 작업실 ‘류가헌’에서 이뤄졌다. 예정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찾은 ‘류가헌’에선 분주한 모습의 이한구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본 인터뷰는 ‘박영석 원정대’의 일원인 이한구 작가가 안나푸르나 원정을 떠나기 직전에 촬영한 것입니다. 애타는 울부짖음을 토해내며 동료를 찾기 위해 설원을 누빈 이한구 작가에게 모든 국민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영결식장에서 넋이 나간 채 슬픔으로 비틀거리는 이한구 작가의 모습에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살아 돌아온 대원들은 고인들의 넋을 차가운 빙하보다 더 꽁꽁 얼어버린 가슴에 담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한구 작가의 환한 미소를 하루빨리 다시 보고 싶습니다. 고인의 삶이 아름다운 향기로 남아 유가족과 남은 대원들의 슬픔이 위로되기를 기원합니다.



◈ 작가소개

이종묵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선비의 운치 있는 삶을 사랑하여 옛글을 읽고 그 자취를 찾아다니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지은 책으로는 『부부』, 『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조선의 문화공간 1~4』, 『우리 한시를 읽다』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누워서 노니는 산수』, 『부휴자담론』, 『사의당지-우리 집을 말하다』, 『글로 세상을 호령하다』등이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정밀한 해석과 깊이 있는 사유를 바탕으로 옛글을 분석함으로써 선인들의 삶을 풀어내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천년 벗과의 대화』, 『벽광나치오』, 『고전 산문 산책』, 『선비답게 산다는 것』, 『정조의 비밀편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북상기』,『추재기이』, 『산수간에 집을 짓고』, 『한서열전』, 『북학의』, 『궁핍한 날의 벗』등이 있다.

이한구
이한구는 ‘종으로 횡으로’라는 표현이 이름을 수식하는 사진가다. 다큐멘터리 사진집단 ‘사실’, 월간 『사람과 산』 사진부의 일원이던 시절부터 전국 천여 곳이 넘는 마을을 누볐으며, 백두대간, 호남정맥, 낙남정맥은 물론이요, 멀리 톈산 산맥의 칸텡그리,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 발길이 닿지 않은 산맥이 없을 정도다. 우리 땅과 그 너머까지를 종으로 오르고 횡으로 걸으면서, 그 노정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사진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3인의 작가’가 류가헌 마루에 걸터앉다

이날의 인터뷰는 산악 전문 사진작가인 이한구 작가의 작업실 ‘류가헌’에서 이뤄졌다. 예정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찾은 ‘류가헌’에선 분주한 모습의 이한구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엊그제 김훈 선생과 함께 산티아고에서 800km 자전거를 타고 왔어요. 그리고 모레는 박영석 대장과 함께 안나푸르나 신(新)루트 개척을 떠나요.”
이한구 작가는 환한 미소로 yes24 취재팀을 반기며, 자신이 분주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한구 작가가 산티아고에서 가져 온 기념타일을 구경하는 사이, 이종묵 작가와 안대회 작가가 도착했다. 고적한 한옥인 류가헌에선 금세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작업실이 아주 인상적인데요. ‘류가헌’에 작업실을 꾸미신 이유가 있나요.
이한구 : 본래 ‘류가헌’은 이 자리가 아니었어요. 처음 ‘류가헌’이라는 이름의 작업실을 꾸민 건 꽉 막힌 콘크리트 건물에서였죠. 그러다 답답한 콘크리트 건물보다는 한옥에 작업실을 꾸미는 게 어떨까 하고 생각했죠. 스텝들도 모두 지금의 한옥을 마음에 들어 해서 폐가였던 옆의 한옥까지 같이 리모델링을 했어요. 그래서 한 채는 작업실로 쓰고, 다른 한 채에는 전시장을 마련했어요. 그래서 형편이 어려운 사진가들이나 예술가들이 전시회를 열 수 있는 사랑방 같은 용도로 사용하고 있죠.

‘류가헌’은 사진위주의 갤러리라고 소개되어 있던데.
이한구 : ‘위주’라고 하니까 다소 이기적인 느낌도 들긴 하지만, 사진을 으뜸으로 삼으면서도 무언가 더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으면 함께 하고 싶다는 뜻으로 소개한 거예요. 그것이 그림이든, 조각이든, 설치미술이든, 퍼포먼스든지 상관없이요. 한지장인 장용훈 선생님이나 펜화가 김영택 화백님의 전시회도 같은 맥락에서 열린 것이지요. 그리고 가급적이면 신인작가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려고 해요.

한옥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이한구 : 모던한 건축물도 매력 있지만, 한옥은 마당 개념이 좋아요. 거창하지 않더라도 여러모로 쓰임새 있는 중정(中庭)은 한옥만의 매력이죠. 그리고 한옥에서 살다 보니 건강해졌어요. 추위에도 강해지고요(웃음).


세 분이 뭉치시게 된 연유라도 있나요.
이종묵 : 처음에 저한테 글에 대한 제의가 들어왔을 때, 친한 안 선생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섬이라는 곳은 지금도 혼자 가기가 어려운 곳이라 동행이 있으면 좋을 거 같고, 글도 나눠서 쓰면 부담이 덜할 거 같았죠. 그리고 거기에 사진의 대가이신 이 선생도 동행해 준다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죠. 게다가 이 선생은 술도 잘하신다고 하니(웃음). 그렇게 여행을 떠나니 즐겁기도 하고 서로 부족한 점도 보완이 많이 되었지요.

안대회 : 아무래도 여행은 사람이 너무 많아도, 또 너무 단출해도 재미가 덜하잖아요. 서너 명 정도가 함께 가는 게 가장 재미있는 거 같아요.

이한구 : 저는 우리나라 역사나 고서에 본래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관련 서적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이런 기회가 저한테 주어져서 꿀맛이었죠. 사진은 ‘보다’와 ‘본다’가 다르거든요. ‘보다’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냥 보는 거고, ‘본다’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인식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다행히도 훌륭하신 선생님들께서 ‘본다’는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선생님들이 실제 문헌과 고전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과 해석을 밝혀내시면 그걸 지형에 적용해 봐요. 그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요. 특히 조희룡 같은 경우는 그가 걷고 생활했던 자취들이 거의 그대로 맞아떨어졌는데, 순간 역사를 거슬러서 그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거 같아 순간 소름이 돋았어요.


유배지로 이름난 14개의 섬을 찾아서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는 유배지와 그곳에서 생활한 유배객에 대해 다룬 책이다. 15~16세기 조선조에는 벼슬아치 4명 가운데 1명꼴로 유배를 당했다. 정쟁이 심해질수록 정적에 대한 미움과 탄압은 더욱 극심해져 위리안치(圍籬安置)라는 추가조치까지 적용됐다. 위리안치는 유배객이 머무는 집의 지붕 높이까지 가시나무를 둘러치고 그 안에 유배객을 유폐시키는 형벌이다. 짧게는 20여 일부터 길게는 27년까지 절해고도에 머문 기간이 달랐듯 유배객들의 삶도 제각각이었다. 유배에서 돌아와 높은 벼슬을 한 이가 있는가 하면 유배지에서 한탄 속에 숨을 거둔 선비도 있었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는 위도, 교동도, 진도, 백령도 등 절해고도로 이름난 14개 섬을 찾아 유배객들의 삶의 궤적을 좇았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제목만 들어서는 어떤 내용인지 가늠하기 어려운데요.
이종묵 : 유배는 본래 죄인을 고향으로 보내는 개념이었다가, 정쟁이 과열되자 정적을 점점 더 환경이 나쁜 곳으로 보내게 되었죠. 그러다 보니까 고립된 섬으로 보내게 되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탱자나무 같은 걸로 집을 완전히 에워싸서 자유로운 생활이 불가능하도록 구금조치를 했어요. 이는 연산군의 발명품이었죠. 당시에는 사형 다음가는 극형으로 인식되었어요.

유배지이야기를 기획하시게 된 계기라도.
이종묵 :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을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유배지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어요. 유배는 당시 사대부에겐 매우 중요한 문제였지만, 그것을 객관적인 문헌을 바탕으로 현장감 있게 써낸 책은 없었죠. 그래서 다소 힘들더라도 오랜 기간 문헌을 연구해서 직접 현장을 찾아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유배의 유례는 어떻게 되나요.
안대회 : 먼 옛날부터 유배(流配)는 사형 다음 가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중죄를 저지른 자를 차마 죽이지 못해서 먼 곳으로 격리시키는 형별이 유배였죠. 유배형은 벌써 은나라 때부터 기록에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사기』에 유배 기록이 보이므로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됐다고 할 수 있죠.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도 유배의 형벌을 받는 이가 많았지만, 조선 시대처럼 많지는 않았어요. 그 시대 이름난 벼슬아치치고 유배를 경험하지 않은 이는 거의 없다고 해야 할 정도였죠.

이종묵 :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사화, 정쟁, 환국과 같은 격변기에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배가 사용되었죠. 중국도 마찬가지였고요. 유배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정치적인 권력투쟁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듯하네요.

귀양과 유배는 다른 것인가요?
이종묵 : 귀양이라는 말은 귀향(歸鄕)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고려시대 때만 해도 정적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서 중앙무대에서 격리시키곤 했어요. 그런데 고향으로 돌려보내진 정적이 그곳에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기 때문에, 아예 고향이 아닌 연고지가 없는 곳으로 보내게 된 것이죠.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는 귀양이 아닌 유배만을 다룬 책인가요?
이종묵 : 귀양과 유배의 어원은 다르게 시작되었을 수 있지만, 실제 조선시대 때는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유배’는 사형(死刑), 도형(徒刑), 장형(杖刑), 태형(笞刑)과 함께 다섯 가지 형벌로 분류되던 법률용어라고 보시면 되고, ‘귀양’은 비공식적으로 쓰인 용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위리안치’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이종묵 : ‘위리안치’는 연산군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고통을 주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중국에는 ‘위리안치’가 없었죠. 그런데 정작 나중에는 연산군 자신이 위리안치가 되었죠. 16C부터는 거의 유배되면 위리안치 개념으로 까지 가는 경우가 훨씬 많았던 거 같아요. 탱자나무를 바깥에 심어서 지붕까지 다 덮어버리니까 하늘이 안 보이는 거지요. 그리고 개구멍을 뚫어서 그곳으로 밥을 넣어줬어요. 그러니까 완전히 감옥살이지요.

안대회 : 책에도 번역해서 실었지만, 과거의 기록을 보면 ‘위리안치’하는 과정도 나와요.

‘위리안치’에서 탈출을 시도한 경우는 없었나요.
이종묵 : 물론 탈출을 시도한 경우도 있었죠. 광해군의 세자인 질과 세자빈 박 씨가 그 대표적인 예에요. 세자와 세자빈은 광해군과는 다른 곳에 ‘위리안치’ 됐는데,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세자부부는 숟가락으로 땅굴을 파서 탈출을 시도했죠. 그래서 위리안치를 벗어나는 것에는 성공하지만 섬이다 보니 어디로도 도망을 못 가죠. 결국, 세자는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세자빈은 자살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죠.

외로이 등불만 반짝이고 잠 못 이루어
굽은 강변 푸른 갈대에 이슬만 가득하네.
마음은 고국에 있어 병이 되고
몸은 타향에 있어 가는 해 슬퍼하네.
半壁孤燈獨不眠 蒼?玉露曲江邊
心懸故國傷多病 跡滯殊鄕感逝年


- 「흑산도의 가을 회포(黑山秋懷)」, 『면암선생문집 속집』 권1





극과 극이었던 유배객의 삶
- 재미있는 유배객들의 일화를 털어놓다


유배된 섬은 절망의 땅이었다. 좁은 감옥 안에 가두어지지는 않았지만, 유배는 대부분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무기 징역형이었기에 다시 돌아간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 절망의 땅에 도착해서는 자연스럽게 유배의 고통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고통의 노래 사이사이에 임금을 그리는 연군(戀君)의 노래가 많이 섞여 있다. (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서문 中)



유배지에서도 임금을 그리는 연군(戀君)의 노래가 많은데요.
안대회 : 그건 그럴 수밖에 없죠. 역사적으로 봐도 유배가 유배객의 끝이 아닌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자신이 반성하고 있다는 것과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줘서 재기에 성공하려고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충절을 노래하는 시가 많았죠.

이종묵 : 그것도 단계가 있는 거 같아요. 처음에 유배지에 갔을 땐 흥분을 해서 분노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적습니다. 그러다 임금이 그립다는 충절의 노래를 하게 되고, 세월이 더 지나면 포기를 해버리죠. 여기서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행 같은 경우는 유배지를 산수자연을 즐기는 기회로 삼기도 했고, 다산 같은 분은 학문의 장으로 활용했죠. 처음, 중간 마음이 다 다른 거죠. 그게 사람 마음이겠죠.

유배라고 하면 소가 끄는 함거를 탄 봉두난발의 죄인과 그 옆을 도열해가는 포졸들의 모습이 떠오르는데요.
이종묵 : 기본적으로 사극에 나오는 그런 장면은 거짓말이에요. 당상관 같은 경우는 의금부도사가 따라가고, 당하관 같은 경우에는 조금 낮은 사람이 따라가는데, 사실 같이 가지도 않아요. 예를 들어서 진도로 유배를 간다고 하면, 유배 가는 양반과 의금부도사가 따로 갑니다. 대략 언제까지 유배지에 도착하라는 식이죠. 단 유배지까지 가는 비용은 유배객이 부담하는 거죠.
그래서 유배지에 도착하면 양반들은 비교적 큰 집을 골라서 들어가 사는데, 생계유지를 위해 흔히 훈장도 많이 하고, 양반이다 보니까 직접 밥과 빨래를 못하니 부엌데기를 구해서 일을 시키다가, 애 낳고 살림을 차리기도 했죠.

안대회 : 사극에서 묘사하는 거는 확실히 극적 효과가 강하고요. 중죄인 중에서도 여건이 좋지 못하고 도주의 우려가 있는 죄인은 의금부 도사가 따라붙는 경우도 있었어요, 옆에서 빨리 가라고 계속 타박을 주죠. 하지만 사실 도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본인이 도주를 해버리면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위험해지니까요. 유배지에서의 삶도 가지각색이었는데요. 정약전 같은 경우는 아예 마음을 접고, 양반행세도 안 하고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았어요. 훈장을 하면서 존경도 받았고요. 그리고 다산 정약용도 소실(小室)과 애 낳고 잘살았지요.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고, 부엌데기로 여자를 고용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요. 정약용 선생도 사람 아닙니까(웃음). 실제 유배지였던 섬에는 유배객들의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어요.


계층과 신분에 따라 유배지 조건이 달랐나요?
안대회 : 다를 수밖에 없죠. 어느 정도였느냐면요. 유배를 많이 가는 제주도나 흑산도는 당파에 따라서 유배를 하는 집이 따로 정해져 있었어요. 특히 흑산도는 죄인 중에서도 거물급들이 주로 오는 곳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남인의 죄수가 머무는 집, 노론의 죄수가 머무는 집이 따로 있었죠. 그에 따라 대접도 달랐어요. 또 지방 담당관이 어느 편이냐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지고, 지역주민끼리도 당파가 나뉘었죠. 그리고 지금은 유배객으로 왔지만, 그 사람이 언제 고관대작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보험을 들어 논다는 생각으로 잘 대해주는 경우도 많았어요.

이종묵 : 그렇게 보험으로 생각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평민과 중인 사이 정도 되는 대전별감을 지낸 안조원 같은 사람은 돈도 배경도 없으니까, 구걸하면서 거지같이 살았죠(웃음).

안대회 : 책에도 썼지만, 조정철 같은 경우는 대단한 명문가였음에도, 정적에 해당하는 사람이 계속 제주 목사(牧使)로 와서 괴롭힘을 많이 당했어요. 그런데 결국은 조정철이 제주 목사로 부임되어서 분풀이를 좀 했더랬죠.

이한구 : 괴롭혔던 사람들이 정말 간담이 서늘했겠네요(웃음).

이종묵 : 어떤 기록을 보면, 유배 가는 게 아니라 유랑 가는 것처럼 가는 마을마다 고을수령이 나와서는 환대를 하고 잔치를 열었던 경우도 있죠.

안대회 : 맞아요. 그럼 사람도 있었죠. 기생들이 몰려와서 풍악을 울렸어요.

가장 힘들게 유배생활을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안대회 : 방금 이야기한 조정철 같은 경우는 정조시대 내내 괴롭힘을 당했지요. 조정철이 정조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있었거든요. 노론 사대신이라는 명문가임에도 불구하고 유배지에 내려오는 지방관들이 대부분 숙적이었던 남인 출신들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조정철은 집중 관리를 받았죠. 요즘으로 치면 점호 같은 게 있었는데, 추운 겨울에도 새벽마다 부르는 겁니다. 그리고는 천민 죄인들하고 똑같이 대우하는 거죠. 그 자체가 조정철에겐 굉장한 심적 고통인 거죠. 그리고 위리안치 시켜서 다른 사람들과의 교재를 아예 통제했죠. 누군가가 조정철에게 잘해주면, 그 잘해준 사람이 곤장을 맞는 겁니다.

이종묵 : 배경 없고 돈 없던 안조원 같은 경우는 주인집에서 밥을 안 줘서 다른 집에 가서 동냥해서 먹고 살아야 했어요. 겨우 얻어온 보리쌀도 들고 오다가 흘려버리고는 거리에서 신세 한탄하며 펑펑 울었죠. 그리고 아내가 그립다는 가사도 짓곤 했어요. 무척 힘들었던 거죠.

반대로 유배지에서 가장 잘 지낸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종묵 : 이규보 같은 사람은 정말 놀러 간 거 같아요(웃음).

이한구 : 며칠 안 있었지요.

안대회 : 이규보는 좋은 대접 받으면서 20여 일 머물렀지만, 노수신은 진도에서 19년 머물면서도 안락한 생활을 했죠. 그런 생활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정사룡(鄭士龍)이 적극적으로 뒤를 봐준 덕도 컸어요. 그리고 조선 후기의 무인이었던 신관호도 무관들의 보살핌으로 녹도에서 편안한 위배생활을 보냈죠. 유명한 신관호가 유배를 왔다고 하니까 주변의 문인과 무인들이 신관호를 보려고 찾아오는 거예요. 덕분에 신관호는 심심치 않은 시간을 보냈죠. 실제로 고관을 지내면서 정치적?학문적 위상이 있던 사람들은 유배지에서 편안한 생활을 많이 했어요.

이종묵 : 외적인 조건도 조건이겠지만, 사람의 기질에 따라서 생활이 많이 바뀌는 거 같아요. 가서 속이 뒤집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사람도 있죠. 결국, 적응이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유배지에서의 러브스토리, 죽음으로 사랑을 택한 홍윤애

유배지에서의 러브스토리가 있던데요.
안대회 : 그 부분은 제가 썼어요. 조정철이 정조 암살사건에 연루되어서 유배를 간 것은 그의 부인이 암살 주모범 집안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조정철 부인은 자신 때문에 남편이 유배를 간다며, 조정철이 유배 가기도 전에 자살해 버리죠.

그리고 조정철은 제주도로 유배 가서 엄청난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런 조정철을 돌봐준 게 홍윤애(洪允愛)라는 여인이었는데, 조정철을 돌봐준다는 소문으로 끌려가서 고문을 받게 되죠. 한마디만 해도 살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조정철에게 피해가 갈까 봐 끝까지 부인하면서 목매달아 자결하죠. 조정철이 후에 제주도 목사로 온 후 문집을 만들었는데, 그 안에 그런 내용이 다 실려 있어요. 조정철은 홍윤애를 위해 비까지 세워주게 되죠. 기록이 안 돼서 그렇지 유배지에서의 로맨스는 굉장히 많을 거예요.


유배지, 문학과 예술을 잉태하다
 

예술은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정치 현실에서 격리된 삶은 예술혼을 일깨운다.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유형을 당하지 않았다면 『죄와 벌』 같은 대작이 나올 수 있었을까? 그래서 옛사람들은 먼 곳의 여행이 사람의 뜻을 호방하게 하고 그래서 대작이 나온다고 보았다. (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서문 中)



유배지가 위대한 문학과 예술탄생의 공간이 되기도 하였지요?
이종묵 : 우선 국문학 쪽으로 이야기하자면, 김만중의 『사씨남정기』가 진도 유배시절에 쓰였고, 그에 앞서 함경도 선천에 유배됐을 때는 『구운몽』을 지었죠. 우리나라 가사 문학을 대표하는 정철(鄭澈)의『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역시 유배지에서 나왔어요. 그리고 당대에는 유배체험을 가사작품으로 적는 전통이 확립되었습니다. 문학작품 외에는 정약전의 『자산어보(滋山漁譜)』가 학문적인 가치가 높고, 조희룡은 임자도에서 나무와 돌, 노을과 구름을 보며 그림의 새로운 경지를 완성했습니다. 또한, 이광사는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새로운 서체를 만들어냈지요. 그런 면들을 살펴볼 때, 문학?예술?학문 전 분야에 큰 성과가 나오게 되는 계기가 유배에 있었다고 할 수가 있지요.

안대회 : 다산 정약용의 경우에도 『여유당전서』에 들어 있는 대부분의 저작을 유배지에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어요. 실제로 유배지에서의 작품이 작품성도 더 뛰어나고 양도 많습니다. 이행 같은 경우도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작품을 만들어냈죠. 유배지는 작가에게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과 소재를 제공해주는 곳이기도 했던 거죠.

이한구 :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가 나오게 된 배경도 제주도에서 유배를 겪으면서였죠.

요즘 문학촌이나 예술인촌이 많은데요, 그런 곳을 ‘위리안치’ 시켜서 유배지 콘셉트로 해보면 어떨까요.
이한구 : 경기도 안산시의 선감도가 그래요. 원주의 박경리 토지문학관 같은 곳은 식당이나 시설이 잘되어 있지요. 그에 반해 선감도에는 인근에 식당이 없어요. 식당에 한번 가려고 해도 4~5km를 나가야 해요. 끼니마다 쉬운 길이 아니지요. 김훈 작가님도 그곳을 자주 이용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외수 작가님도 철문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가두시고.

안대회 : 어찌 보면 지금 작가들은 뭔가를 남기를 위해 스스로를 위리안치하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복잡한 세상과 인간관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창작에만 몰두하는 거죠.

만약 유배를 가야만 한다면, 그나마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이한구 : 생각 안 해본 질문이네요(웃음).

안대회 : 저도요.

이종묵 : 저는 추자도에 가고 싶어요(웃음). 거기가 바깥세상으로부터 오염이 가장 적은 거 같아요.


삼인 삼색 담화

▶ 이종묵, 부부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공경’이다


최근에 『부부』란 책을 출간하셨는데요. 거기서도 유배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이종묵 : 제가 이번에 낸 책은 조선시대의 부부와 관련된 문헌을 조사해서, 부부가 사랑해서 결혼했다가 싸우고 헤어지고, 그러다 또다시 만나서 살다가 죽게 되는 그런 과정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엔 부부가 헤어져 살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유배였지요. 추사 김정희나 이광사도 유배지에서 부인과 사별을 했어요. 그렇게 조선시대엔 부부생활의 고통으로 남는 것 중의 하나가 유배이다 보니, 『부부』『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가 그런 면에서 약간 겹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부부』란 책에서 부부에 대한 정의를 내리신 부분이 있나요.
이종묵 :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부부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공경’이라는 점입니다. 사랑의 연한은 짧고, 공경의 연한은 길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부부가 살을 비비고 살다 보면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하지만, 공경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죠. 아마 결혼해서 사시는 분들은 부부간에 공경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결혼 생활과 관련된 조선시대의 문헌을 쭉 읽으면서, ‘한 세상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는 사랑에 집착하지 말고, 공경하며 살자’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거죠. 그리고 혹 가정불화가 생기면 부인한테 감히 대들지 말고, 뭐든 자신에게 잘못을 돌리자는 겁니다(일동 웃음). 그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퇴계 선생도 이야기했던 것이고, 우리의 선조가 체험적으로 느낀 결론인 거죠.

이한구 : 선배님들의 조언이군요(웃음).

안대회 : 옆에서 토를 좀 달자면, 공경이라는 걸 고답적으로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친근하게 바꿔 말하자면 ‘상대방에 대한 존중’ 같은 거죠?

이종묵 : 네, 그렇죠. 육체적인 사랑에 얽매이기보다는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라고 되어 있거든요. 손님이라고 생각하면 함부로 하지 않죠. ‘부부는 가장 사소한 결함을 가장 깊이 알고 있는 관계다’란 말이 있죠. 그래서 부부싸움을 하면 그러한 사소한 것까지 들춰내기 때문에 싸움이 커진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공경을 하면 그럴 일이 없죠. 그건 금방 안 선생이 이야기한 것처럼, 고답적으로 이야기하면 공경이고 요즘 말로는 존중이죠.

좋은 말씀이네요. 그런데… 이 책을 보신 사모님의 반응은?
일동 : (웃음)

이종묵 : 집 사람이 제가 쓴 책은 잘 안 보는데,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더라고요. 그래서 어떠냐고 물었더니, “실천은 잘 못 하면서”라는 핀잔도 했지만, 생각할 부분은 많은 거 같다고 칭찬을 해주더라고요(웃음).

안대회 : 거, 참! 실천은 못 하면서! (웃음)

이종묵 : 안 선생하고 제가 쓰는 책들은 99% 40~60대 남성이 읽는 책이거든요. 그런데 『부부』는 20대 여성의 독자층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아주 깜짝 놀랐어요.


▶ 안대회, 한시를 통해 시의 아름다움을 되찾다


한문과 한시를 쉽고 재밌게 접근하는 방법이 있나요?
안대회 : 한시는 기본적으로 한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접근 불가능입니다. 번역을 통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영시나 불어시를 번역했을 때보다 한시를 번역했을 때 그 전달 효과가 훨씬 안 좋다고 생각해요. 접근법 이전에, 근본적으로 한문과 한시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교양인이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글 상용화를 거론하면서 한자 교육을 축소하자는 말을 들을 때마다 답답함을 느낍니다. 저는 한자 때문에 우리나라의 문화가 왜곡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한자는 우리 문화의 미의식이 담겨 있는 부분이고, 고전의 일부이기 때문에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계속 교육하고 감상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하겠죠.

이종묵 : 저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한자를 소리 내서 읽고 그냥 외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험 볼 때는 배운 것 중에 개인이 외운 거만큼 써서 내는 거예요. 요즘은 오히려 외우는 훈련을 너무 안 하는 거 같아요. 소리 내서 읽고 외우는 건 언어를 배우는 기본입니다.

올해 ‘궁극의 시학’이라는 강의가 화제가 되었는데요. 24시품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안대회 : 24시품은 시의 품격을 다룬 내용인데, 본문은 단 몇 페이지밖에 안 될 정도로 짧아요. 그런데 그 내용이 중국 문학사와 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의 하나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미학의 정수에 해당하는 부분을 추상적이지만 간명하게 다룬 것이죠. 그리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도 적용이 가능해요. 그림이나 서예는 물론 인간의 삶까지 미학적인 기준으로 조명해 볼 수 있는 것이죠.


▶ 이한구, 소소한 것들이 부르는 깊은 울림을 잡아내다


함민복 시인이 작가님의 사진을 ‘소소한 것들이 부르는, 깊은 울림의 노래가 그곳에 있다’라고 평했었죠. 그리고 ‘소소한 사진전’이라는 전시회도 여시고,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의 사진을 보더라도 전체적인 풍광뿐만 아니라 풀 한 포기나 거미줄을 통해서도 감동을 끌어내셨는데요. ‘소소한 것’들에 주목하시는 이유가 있는지요?
이한구 : 인물과 시대는 예전인데, 내가 있는 곳은 현재니, 헤아릴 길이 막막한 거죠. 최대한 그 시대의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하려다 보니, 내 주변에 있는 소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에서부터 감정이입을 해나가게 되었습니다. 소소한 것들에서 나오는 울림들, 미학들, 그것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평소에도 많이 했었죠.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촬영 때도 그러한 소소한 것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두문진의 갈대밭을 조심히 헤치고 나가는데 인기척에 놀란 가마우지가 놀라서 물을 차고 ‘타다닥’ 날아가는 거예요. 그 순간에 느껴지는 애처로움과 쓸쓸함. 그런 것들을 통해 유배지의 느낌을 잡아내려 한 것이죠.

유배지를 찍은 사진인데,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가고 싶다!’라는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참 모순적인데요.
이한구 : 그럼 성공했네요. 모순적이죠(웃음).

탄성이 절로 나오는 유배지의 사진들을 찍기 위해 어떤 수고와 노력을 하셨나요.
이한구 : 유배객들이 어디를 거닐고,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보았는지 떠올리려고 노력했죠.

안대회 : 제가 좀 거들자면, 섬에 가면 산도 높고 오르기도 힘드니까 우리는 밑에 앉아 있고, 이한구 작가 혼자서 올라갔다가 와요. 그리고 자고 있으면, 또 이한구 작가 혼자서 새벽에 나갔다 오고.

이한구 : 저는 현장에서 끝내야 하는 일이고, 광선이나 날씨도 중요하다 보니까 그 순간을 포착하려고 하는 거죠, 제가 부지런해서 그런 건 아니지요(웃음).

책 표지에 대한 설명을 좀 해주세요. 햇살이 잔잔히 부서지는 수면에 시커먼 뭔가가 있는데.
이한구 : 호수나 바다에 햇빛이 반사되어서 반짝이는 걸 ‘윤슬’이라고 하더라고요. ‘윤슬’ 참 예쁜 말이죠. 저 윤슬은 이광사 선생이 신지도에 유배되어 있던 바닷가에서 찍은 거예요. 바다는 찬란한데, 그곳의 갯바위는 묵직하면서도 외로워 보이더라고요. 이광사 선생이 매일 오가던 길이였기에, 이광사 선생의 시선에서 보려고 했어요. 그 시대나 지금이나 바위는 똑같은 바위니까요.

안대회 : 저는 깊은 바닷속에 존재하는 어두컴컴한 동굴이나 블랙홀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권력을 누리다가 섬이라는 곳에 유폐되어서 ‘위리안치’되었을 때의 그 막막함. 그런 느낌을 받게 되더라고요.


사진 속에 간간이 두 교수님의 모습이 보이던데요. 모델로서 교수님들을 평가하자면?
이한구 : 모델로서 많이 나오려고 하시지도 않으셨고요. 그냥 자연스럽게 잡힌 거죠. 어떤 상황에서는 ‘정말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때 두 분 말고 누가 있어야 말이죠(웃음).

안대회 : 그 말을 들으니까, 우리가 마음에 드는 모델은 아니었다는 거네(웃음).

이한구 : 아니에요. 감사하죠. 석양 무렵에 증도를 내려다보는 교수님의 모습은 그대로 그림이 되는 거예요. 드라이한 사진이 될 수도 있었는데 교수님들 덕분에 좋은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어요.

이종묵 : 우리는 찍는지도 몰랐어요(웃음).

‘종으로 횡으로’가 작가님을 수식하는 어휘라고 나와 있던데, ‘횡’으로는 어디까지 가보셨고, ‘종’으로는 어디까지 오르셨나요?
이한구 : 산을 좋아해서 산을 많이 다녀요. ‘횡’으로는 거리가 중요한 거 같진 않아요. ‘횡’ 같은 경우는 짧은 거리라도 그 길을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서 많이 다르다고 봐요. 스포츠 선수가 거리를 주파하는 개념과는 다른 거죠. 그렇더라도 나이에 비해 되바라질 정도로 많이 다녔기 때문에, 거기서 얻어지는 묘한 뉘앙스 같은 게 있어요. 우리나라의 산은 무명산까지 모두 훑었어요. 그런 경험으로 백두대간 주변의 문화에 대해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워낙 양이 방대해서 아직 작업을 못 끝냈어요. 그리고 굳이 높이로 치자면 에베레스트죠. 다음 주 월요일 날 안나푸르나 코리안 신루트를 개척하러 가요.

우리나라의 풍광이 가지는 매력 같은 게 있나요?
이한구 : 많은 사진가분이 우리나라의 풍광에서 장엄함만을 찾으려 하는 거 같아요. 풍경사진에서 주로 많이 보이는 게, 운해, 일출, 노을 그런 쪽이거든요. 저는 그런 사진을 언젠가부터 안 찍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의 산은 알프스처럼 거대하고 장엄한 산은 아니잖아요. 적당한 높이로 사람을 잘 감싸 안는 산이죠. 그리고 아무리 작고 예쁜 산이더라도, 산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죠. 그래서 산의 아름다움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있어요. 계속 작업을 하면서 전시회도 열어볼 생각입니다.

어떤 사진가로 남고 싶으신가요?
이한구 : 어떤 사진가로 남고 싶다는 것은 저에겐 아직 요원한 말이고요. 저는 아직 어리고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할 나이죠. 다만, 기술과 테크닉만으로 같은 것을 반복하는 쟁이는 되고 싶지 않아요. 좀 더 창조적인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언제나 철?이, 애같이 사진에 몰두할 생각이에요.


“섬의 풍경 속에 담긴 애절한 사연과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유배지 중에 가장 아름다웠던 섬은 어디였나요.
이종묵 : ‘아름답다’는 말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교동도에 갔을 때 이슬비가 내리면서 안개가 자욱한데 분위기가 묘했어요. 그곳에서 의외의 차를 마셨던 거 같은데…

안대회 : 커피를 마시지 않았나요?

이종묵 : 그런데 커피 맛이 특이했었어요.

안대회 : 아! 꿀! 거기 주인분이 커피에 꿀을 타서 주셨어요. 그렇게 마셔야 맛있다고(웃음). 여하튼, 저는 섬을 탐사하는 작업을 하면서 우리나라 섬이 대단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백령도와 흑산도가 가장 인상에 남더라고요. ‘섬이야말로 자연이 주는 큰 자산이구나, 문화적으로 잘 가꾸어나가야겠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은 섬이 관광자원으로 많이 개발되고 있는데, 그와 동시에 문화도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발전시켜 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육지와는 또 다른 우리나라의 중요한 자산이 될 거예요.

이종묵 : 우리가 섬에 놀러 가면 풍경만 보게 되는데, 그 풍경 속에는 가슴 아픈 사연도 있고, 문화의 숨결도 깃들어 있죠.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게 이 책을 집필한 이유이기도 해요. 그래서 풍경과 함께 옛사람의 자취와 문화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풍경의 의미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이한구 작가의 사진도 풍경보다는 그 풍경 안에 담긴 인간의 감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이한구 : 그렇죠. ‘보다’와 ‘본다’의 차이죠.


교동도는 연산군이 유배됐던 섬이라는 모티브로 관광 상품을 개발하기도 했더라고요.
안대회 : 교동도뿐만 아니라 신지도도 이광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각 섬이 유배되었던 사람을 파악하려고 노력을 하더라고요. 하지만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이에요. 유배가 왜 중요하냐면, 정작 섬사람들은 섬에 대해서 분석이나 조사를 해놓은 것이 없어요. 대부분 유배객들이 제삼자의 눈으로 섬에 대해서 연구하고 기록한 것이죠. 그리고 아직도 찾아내서 연구해야 할 문헌들이 많아요. 유배란 섬의 자연뿐만 아니라 수백 년 전에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을 밝혀내는 문화의 보고인 거죠.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는 굉장히 소중한 문헌학적인 가치가 있는 책이군요.
안대회 : 그게 그렇게 되나요?(웃음)

이종묵 : 그건 좀 심한 거 같고요(웃음). 하지만 이렇게 찾아 들어가면 어떤 섬이라도 문화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책이긴 하죠. 우리가 이걸 처음으로 간단하게 시작했다면, 앞으로는 각 현지에 사시는 분들께서 더 많은 것을 연구해야겠죠.

안대회 : 유배에 관련해서 이렇게 폭넓고 구체적으로 다룬 책은 없었던 거 같아요. 기존의 책들은 대부분 상식적인 측면에서 그치고 마는 아쉬움이 많았죠. 왜냐하면, 문헌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우리가 본 문헌들은 대부분 번역된 것이 아닌, 원문 그대로를 가지고 연구했고, 또 실제로 답사를 해서 현장을 확인했죠. 그러한 노력에 사진작가까지 동행하면서 그 깊이를 더했죠. 이를 출발점으로 해서 더 깊이 연구하고 싶다면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가 좋은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세 분이 새롭게 기획하시고 있는 다른 책은 없나요?
안대회 : 했으면 좋겠는데, 누가 도와주지를 않네요(웃음).

이종묵 : 해볼 만한 것이 있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산에 오르면서 쓴 글들이 아주 많거든요. 그 루트를 따라서 옛사람들의 시선과 글을 좇아가면 좋은 작업이 될 거 같아요.

이한구 : 지리산, 한라산, 백두산 산행기라. 그때는 탐험이 되겠네요.

안대회 : 그렇죠. 탐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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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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