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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강요하는 용서의 피해자가 된 여인, 송혜교

오늘, 용서의 의미를 묻다 영화 <오늘>을 중심으로 본 용서에 관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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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집으로> 이후 9년 만에 이정향 감독이 발표한 <오늘>은 용서의 의미를 잔잔하면서도 진지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용서’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며 늘 무한한 용서와 사랑을 설파하는 박애주의는 언제나 불편하다. 세상에 그 어떠한 사죄로도 용서를 끌어낼 수 없는 잔인한 상처와 분노가 존재하기 때문에 믿음과 종교적 구원으로도 풀어낼 수 없는, 용서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2002년 <집으로> 이후 9년 만에 이정향 감독이 발표한 <오늘>은 용서의 의미를 잔잔하면서도 진지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시선은 흘러온 9년의 시간만큼 깊어져 있다. <집으로>의 귀여운 아이였던 유승호가 누나들의 사랑을 받는 꽃청년이 된 그 긴 시간 동안 이정향 감독은 사유와 철학을 되뇌었던 것일까?


<오늘> 용서, 할 수 없이…….


이정향 감독의 전작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은 기대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또한 무거운 영화다. 소년범에게 약혼자를 잃은 여인 다혜(송혜교)와, 아버지로부터 상습적인 폭력에 시달려오며 가족에 대해 이글거리는 분노를 갖게 된 고교생 소녀(남지현)를 통해 이정향 감독은 진정한 용서의 의미와 그 가치를 되묻는다. 앞서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통해서도 우리는 용서라는 사회적, 종교적 윤리가 한 개인의 인생을 짓밟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되는 과정을 보았다.

<오늘>은 <밀양>이 천착했던 한 여인의 비극적 현실에 더해 사형제 폐지 주장이나 가해자의 인권을 배려하는 여러 가지 도덕적 행위가 희생자들에게 가해지는 씁쓸한 오류를 보여준다. 이제까지 우리가 송혜교를 통해 떠올릴 수 있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인의 이미지는 번민하고 회의하는 얼굴로 변한다. 청순한 이미지에 갇힌 심은하가 청승맞은 노처녀가 되어 있는 순간, 받았던 그 낯선 현실감은 사랑스런 이미지에 갇힌 송혜교가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민낯으로 다가오는 순간, 다시 한 번 강한 존재감으로 빛을 발한다. 이정향 감독의 <오늘>은 그렇게 송혜교의 새로운 변신이며, 송혜교는 이정향 감독으로부터, 영화는 송혜교로부터 그 낯선 충돌이 만들어 내는 아우라에 크게 의지한다. 벌써 연기생활 15년차 배우인 송혜교는 숨소리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안으로 삭히는 여인이 되어, 우리가 강요하는 용서의 피해자가 된다.


2005년에 시나리오 집필을 시작해 완성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는 <오늘>은 그 오랜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영화이다. 영화 속에는 아동 학대와 청소년 범죄 등 사회적 문제이지만 쉽게 공론화되지 않았던 많은 이슈들이 담겨있다. 자신의 생일날 약혼자를 뺑소니 사고로 잃은 다큐멘터리 PD 다혜는 용서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 하나로 가해자 소년을 용서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1년 후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기획, 다양한 사건의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약혼자를 죽인 17세 소년의 모습은 계속 잔영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소년의 근황을 알게 된 다혜는 큰 충격에 빠진다.

용서라는 가치를 내세우면서 살인제 폐지, 가해자의 인권을 다룬 수많은 주장 속에 정작 피해자는 ‘용서’라는 어쩌면 위선적일 수 있는 행동 속에서 숨죽여 참아야 하는지 모른다. <오늘>은 용서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던지는 동시에 적절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뭉텅 결론이 떨어져나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 지점에서 영화는 끝나고, 그 모든 의문의 해답 대신 오롯이 질문만을 던져 놓는다. 하지만 출소 후 90%가 넘는 재범률을 보이는 가해자들의 인권이 피해자의 분노에 앞서고, 가석방된 가해자들의 보복에 오히려 두려워해야하? 피해자의 모습은 진정 반성하지 않는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라고만 하는 현대사회의 모순과 강박적 가치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큰 울림으로 남는다.

여기에 서브플롯으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부모 아래서 고통 받는 청소년의 문제를 담아내면서, 아이의 문제의 근원이 ‘부모’에게 있다는 것도 강조한다.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 끊임없이 고통 받고 있는데, 사회는 아이들에게 부모를 존경하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가정폭력은 가정의 문제라고 손 놓고 있는 동안, 부모의 문제는 아이들에게 투영되고 또 다른 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우리 사회는 유교적 사상으로 그저 묵인하고 있다.


또한 세계를 통틀어 ‘합의’라는 제도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는 문제도 제기한다. 영화 <도가니>의 피해자들이 합의라는 기이한 제도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게 되는 과정을 묵도했다면 더욱 공감할 만한 이 문제제기는 되짚어 볼 일이다. 합의를 위해 경찰은 가해자에게 피해자 연락처(주소, 전화번호 등)를 다 알려준다고 한다. 피해자는 합의를 원치 않지만 때론 합의를 위해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 가족도 있다.

<오늘>은 실제로 피해자가 되어 보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피해자의 억울함은 단순히 사건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모든 악순환은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제도 때문이다. 피해자 유가족이나 증인을 보호하는 시스템도 열악하고, 가해자가 출소한 뒤 보복을 위해 피해자나 증인을 찾아가더라도 이를 막을 법적 장치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영화를 본 이후의 이 먹먹한 기분은 <도가니>와는 또 다른 차원으로 다가온다. <오늘>은 실제사건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보편적 현실을 다룬 영화이기에 그 충격과 답답함은 큰 파장으로 다가온다.

<밀양>

2007년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는 아이를 유괴, 살해하고도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범인의 모습이 담긴다. 종교계에서 부르짖는 용서와 구원이 위선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2011년 <도가니>에는 ‘합의’라는 제도에 의해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아이의 절규를 담아낸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를 받아요?’ 이러한 사회적, 종교적 합의 앞에서 정작 피해자들의 인권은 유린되고, 또 다른 고통 속에서 살아야하는 사회적 모순은 그 지평을 넓혀 <오늘> 속에 고스란히 담긴다. 우리가 사회적 미덕이라고 강요하는 그 위선이 진정 ‘사람’을 담고 있는지 영화 <오늘>은 묻고 또 묻는다.


용서에의 강요
<그을린 사랑>, <아들>, <보이 A>


<그을린 사랑>

<그을린 사랑>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큰 고통 속에 산 여인이 세상을 용서하고 고통과 화해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다. 세상을 등질 수 있게 시신을 엎어두라는 여인의 유언. 딸 잔느에게는 아버지를, 아들 시몽에게는 형을 찾아가서 편지를 전해주라고 한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던 형의 존재를 알게 된 두 남매는 혼란에 빠지지만, 어머니의 유언을 따른다. 딸 잔느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찾아와 그녀의 흔적을 더듬어 나간다. 과거를 하나씩 파헤쳐갈수록 잔느는 충격적인 진실 앞에 서게 도니다. 마침내 두 남매는 어머니가 묻고 지내온 그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과거를 알게 된다. 남매뿐만 아니라, 관객들을 전율하게 만든 그 충격적인 과거는 두려움과 연민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녀는 마지막 편지에서 분노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온전한 사랑과 용서에 대해 말한다. 정말 그럴 수 ?므까, 정말 그녀처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묵직하게 남았다. 어두운 진실 혹은 깊은 상처를 마주친 후 달라진 나 자신을 통해 남매는 성장했을까?

<아들>

벨기에의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의 2002년 영화 <아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용서’의 시작과 끝이 어디에 있는지를 사유하는 영화였다. 내 아들을 죽인 아이가 내 눈앞에 있다. 아버지는 죽여 마땅한 이 원수를 용서한다. 영화는 줄곧 용서라는 그 먹먹한 행위를 가슴에 새기는 아버지의 눈물을 담아낸다. 아들의 살인자와 피해자인 아버지를 한 공간에 둔 이 비현실적인 정서는 숨 막히는 스릴과 함께 질끈 숨통을 조여 온다. 아버지는 살인자를 죽일 수 있는 극한의 분노에 사로잡히지만, 관객들은 아버지가 그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영화는 끊임없이 복수가 아닌 용서와 화해를 기저에 깔고 있다. 감독은 살인자이자 원수인 아이를 향해 베풀고 용서하는 것이 죽은 아들을 구원하는 길임을 역설하지만, 반성하지 않는 살인자 소년에 대한 분노는 남아있다. 가치관에 따라서 아버지의 심정을 절대적으로 이해하거나 소년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보이 A>

존 크로울리 감독의 2008년 영화 <보이 A>는 색다른 차원에서 ‘가해자’ 소년의 현재를 보여준다. 미성년자 소년 둘은 학교 친구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각각 ‘보이 A'와 ‘보이 B'로 명명되어 재판을 받는다. 14년 뒤, 보이 A는 잭이라는 새 이름으로 출소되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 한다. 평범한 새 삶을 살아가려는 잭은 자동차 사고로 고립된 소녀를 구출하고 영웅 대접을 받지만 그의 과거 살인죄가 들통 나고 만다. 영화에서 사용되는 ‘보이 A'라는 이름은 범죄자의 신변을 보호하려는 별칭이다. 과거의 살인자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맑고 건강한 청년의 얼굴을 한 잭은 지울 수 없는 과거 때문에 고통 받는다. 잔혹한 범죄자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는 것은 합당한지 영화는 거듭해서 묻지만, 감독은 잭을 조금 더 동정하고 있다. 실제로 현재 건실하게 살고 있다고 나의 직장에, 나의 집에, 나의 생활에 범죄 경력이 있는 사람을 온전하고 공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어려운 행동보다 감독은 ‘말’의 쉬움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용서, 할 수 없는…….

<고백>

일본영화 <고백>은 딸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의 차분하고 설득력 있는 복수극이다. 13세 학생이 저지른 살인은 처벌받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치밀한 계산 아래 복수한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복수극이지만, 그 복수의 헛됨을 보다 강조한다. 하지만, 살인자 못지않은 잔인한 살인자가 되어서라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그 분노는 폭발한다. <오로라 공주>, <친절한 금자씨>, <올드 보이>는 모두 용서가 아닌 복수를 보여준다. 그 먹먹한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이 복수밖에 없었음을 설파한다. 물론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사람들의 죄의식은 물론, 법의 심판까지 더해져 주인공은 복수 뒤에도 잔인한 현실과 맞서야 한다. 대놓고 <용서는 없다>고 제목 지은 영화에서 피해자인 것 같은 주인공이 얼마나 잔인한 가해자였는지가 밝혀지고, 그 보다 더 한 고통 속에 짓이겨지는 것을 보았다.

복수에 관한 영화들은 일종의 판타지에 다름이 아니다. 어느 피해자도 숨죽여 살지, 이렇게 가해자를 찾아가 복수할 방법을 찾을 수는 없다. 결국 영화 <오늘>의 피해자는 슬픔과 분노를 맘에 품고 속삭이고 그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가쁜 숨을 고르는 힘든 ?활을 해야만 한다. 우리의 슬픔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심연에 가라앉아 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어떤 식으로든 한 사람의 인간을 망가뜨린다. 용서는 분노와 상처를 다스리는 방법이라고 강요하지만, 동시에 용서는 아픈 심장의 생살을 후벼 파는 채찍질이기도 하다. 우리는 너무나 손쉽게 위선의 가면을 쓰고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용서라는 단어로 서둘러 봉합해 버린 인간의 상처는 과연 어떻게 감싸 안을 수 있을까?


꽤 오래 전, 아는 사람의 형이 새벽 운전을 하다가 자전거를 타고 가던 소년을 실수로 치어 목숨을 잃게 한 적이 있다. 그 경과야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합의가 잘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잘 됐다, 라는 주위사람들의 인사를 들었겠지만 나는 알지도 못하는 그 소년과 그 가족들의 진심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용서의 다른 말은 아닐 것이다. 이정향 감독의 <오늘>을 보는 내내 관객들은 지끈거리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답답함과 혼란스러움은 굳이 강요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누구나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하는 근원적인 고민인 것은 사실이다.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은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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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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