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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시에 물들고 가을을 낭송하다 - 파주북소리 ‘시에 빠진 날’

파주의 가을, 책 단풍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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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사람, 책 쓰는 사람, 책 만드는 사람이 함께하는 아시아 지식의 축제’라는 기치 아래 260여 개 출판사와 문화예술단체, 1000여 명의 저자와 10만 명의 독자가 함께 한 행사였다.


파주의 가을, 책 단풍이 들었다.

그 파주에, 책이 익어가고, 사람이 자라는 계절을 고스란히 담은 행사가 열렸다. ‘파주북소리 2011(▷ 홈페이지 가기)’. 지난 1일부터 9일까지 파주출판도시, ‘책 읽는 사람, 책 쓰는 사람, 책 만드는 사람이 함께하는 아시아 지식의 축제’라는 기치 아래 260여 개 출판사와 문화예술단체, 1000여 명의 저자와 10만 명의 독자가 함께 한 행사였다.

각 출판사 사옥에서 강연과 창작 워크숍이 진행됐고 고은, 성석제 등 국내 대표 작가들이 독자들과 만나, 자신의 삶과 문학세계를 이야기했다. 그 다채로운 행사 가운데, ‘시에 빠진 날’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지난 8일 예스24 주최로, 이건청, 이근배, 문태준 등 13인의 시인이 직접 시를 낭송한 시 낭송 축제. 파주출판도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호텔지지향 로비에 울려 퍼진 시들이 파주의 가을을 채색했다.

이날 행사는 시와 낭독, 그리고 영상이 어우러지고, 시인과 독자가 만나서 가을을 사색하게 만들었다. 하재봉 시인의 사회로, 강정, 김요일, 김종해, 문태준, 손택수, 신달자, 안현미, 유안진, 이건청, 이근배, 전윤호, 조창환, 하재봉 등 총 13인의 시인이 직접 시를 낭송했다. 시 낭송과 함께 탱고 등 음악과 영상, 일러스트 등이 어우러지면서 관객들의 흥미를 돋았다.


또 이 자리에는 시인들의 작품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대규모 시화전도 동시에 열렸다. 한국시인협회와 시인세계, 현대시, 불편동인 등 한국 대표 시문학 단체와 김남조 시인 등 71인의 아름다운 시와 그림이 독자들을 만났다. 가을은 시가 익어가기에 충분히 바람직한 계절이므로.

시화전 참여 시인은 다음과 같다.

강인한, 강정, 고영, 고영민, 기혁, 김경주, 김근, 김남조, 김민정, 김산, 김선우, 김안, 김왕노, 김요일, 김은정, 김종연, 김종해, 김중식, 김중일, 노지연, 노향림, 문세정, 문인수, 문태준, 박은정, 박주택, 박형준, 박후기, 손택수, 신달자, 신동욱, 안현미, 오세영, 오은, 오탁번, 유미애, 유안진, 윤성택, 이건청, 이근배, 이민하, 이수익, 이애경, 이영주, 이임숙, 이재훈, 이창수, 임현정, 장무령, 장이지, 장인수, 전윤호, 정우영, 정한아, 정호승, 조영순, 조창환, 조현석, 조혜은, 진동영, 최문자, 최준, 최치언, 하린, 하재봉, 하재연, 하정임, 한미영, 한우진, 함기석, 허영자

「지란지교를 꿈꾸며」로 80~90년대의 감성을 흔든 유안진 시인은 「자화상」을 읊었다.

수록된 시집
『세한도 가는 길』
한 오십년 살고보니
나는 나는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눈과 서리가 비와 이슬이 강물과 바닷물이
뉘기 아닌 바로 나였음을 알아라
(…)
나란히 누웠어도 서로 다른 꿈을 꾸며
끊임없이 떠나고 떠도는 것이다
멀리 멀리 떠나갈수록
가슴이 그득히 채워지는 것이다(…)



“흐르는 구름의 딸이요, 떠도는 바람의 연인”이었던 시인 덕분에 가을에 더 깊어진다.

수록된 시집
『키스』
가수 이소라가 눈물을 흘리며 공감했던 시도 울려 퍼졌다. 강정 시인의 「아픔」. 시인의 이름에서부터 제주도 강정마을이 떠올라 그 아픔과 슬픔이 전달되는 듯하다. 강정 시인이 시에 곡을 붙여 직접 노래도 불렀다.친구이자 화가가 기타를 치며 함께 했다. 시인과 화가의 앙상블은 꽤나 훌륭했다. 아픔이 가을을 더욱 자극했던 시간.


(…) 보이는 것들은 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된다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어느덧 새 이름을 얻는다
계절이 빠르게 바뀐다
숨을 쉬니 한 세상이 저만치
다른 상처에 다 닿았다



가을의 감각을 자극하는 시들이 마음의 결을 흔들 때,
김종해 시인은 「바람 부는 날」을 이야기하고 낭송했다.

“바깥을 보면 나뭇잎 그림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연의 바람이다. 「바람 부는 날」의 바람은, 자연의 마음이 아닌 마음에서 일어나는 바람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 영혼 속에 살아 있다. 「바람 부는 날」은 사랑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절박한 갈등이 들어 있다. 이 시는 젊은 남성들이 여성들을 지하철역으로 나오게 해서 이벤트로 「바람 부는 날」을 낭송해주는 것으로도 사용하더라.”

아마도 이런 시구 때문에 그러하리라.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




가을, 바람이 불고 있다.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 그러나 당신은 없다. 바람이 불어서 더욱 아픈 날이다.
하재봉 시인이 덧붙인다. “사랑을 하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짜릿한 날이 아닐까. 모든 예술의 밑바탕에는 시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가 있고, 사랑이 있다. 사랑함으로써 시가 되고, 예술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날 하재봉 시인이 선사한 탱고는 시와 어우러진 멋진 앙상블을 연출했다. 탱고도 그렇게 시가 되나보다.

수록된 시집
『이별의 재구성』
안현미 시인의 「와유(臥遊)」가 흘러나온다.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 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가을이 좋은 건, 어쩌면 시가 살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전윤호 시인의 「손톱」은 목욕탕에서 탄생한 시다. 여자목욕탕은 모르겠으나, 남자목욕탕에선 벌거벗고 손톱이나 발톱을 깎는 일이 흔하다. 전윤호 시인이 어느 날 그랬다. 벌거벗고 손톱을 깎다가, 문득 사람이 생각났다. 그리고 썼다.


수록된 시집
『연애소설』
나 같은 얼간이에게
사랑은 손톱과 같아서
너무 자라면 불편해진다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웃자란 손톱이 불편해 화가 난다
제 못난 탓에 괴로운 밤
죄 없는 사람과 이별을 결심한다
손톱깎이의 단호함처럼
철컥철컥 내 속을 깎는다
아무 데나 버려지는 기억들
나처럼 모자란 놈에게
사랑은 쌀처럼 꼭 필요한 게 아니어서
함부로 잘라버린 후
귀가 먹먹한 슬픔을 느끼고
손바닥 깊숙이 파고드는 아픔을 안다
다시 손톱이 자랄 때가 되면
외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시가 강물처럼 흐른다.
그러자, 하재봉 시인이 ‘시(詩)’를 듣는다는 것에 대해 한 마디 덧붙였다.

“예전에는 시를 읊조렸다. 음유시인(吟遊詩人)이라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읊조리면서 천생 시인이었던 사람들이 있다. 노랫말과 시의 명확한 구분은 없다. 좋은 노랫말이 시이고, 좋은 시는 노랫말로 전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러나 요즘은 시를 듣는 즐거움이 사라진 것 같다. 시는 귀로 듣는 것도 큰 즐거움이 아닐까. 오늘 그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의 육성 시 낭송 뿐 아니라 영상까지 곁들여져 시의 의미가 잘 전달되는 것 같다.”


신달자 시인이 마지막 순간을 장식하기 위해 등장했다.
「헌화가」의 차례다. 낭송에 앞서 말의 힘, 시의 힘에 대해 언급한다.

“나무를 벨 도구가 없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큰 나무 주변을 돌면서 말했다더라. 우리는 너를 싫어해. 내가 없어지면 우리는 그 자리에 집을 지을 텐데. 열흘, 한 달, 석 달 사람들이 그 나무를 돌고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몇 달 가지 않아 나무가 쓰러졌다더라.

그 반대로 미국의 한 식물학자는 가시가 피부를 찌르고 있는 한 생명체에게 사랑고백을 했다고 하더라. 너보다 아름다운 몸매를 본 적이 없는데, 가시가 없다면 좋겠다. 1년, 2년이 지나면서 어느 날 몸에 있던 가시를 내려놓았다더라. 말이 가진 힘이다. 시도 힘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말도 힘을 가진다. 오늘, 시의 축제는 여러분을 사랑해, 라는 축제가 아닐까 싶다. 향가에서 가져온 제목인데, 「헌화가」의 꽃은 여러분에게 바치는 꽃이다.”

수록된 시집
『오래 말하는 사이』
사랑하느냐고
한마디 던져놓고
천길 벼랑을 기어오른다
오르면 오를수록
높아지는
아스라한 절벽 그 끝에
너의 응답이 숨어 핀다는

그 황홀을 찾아
목숨을 주어야
손이 닿는다는
도도한 성역
나 오로지 번뜩이는
소멸의 집중으로
다가가려 하네
육신을 풀어풀어
한 올 회오리로 솟아올라
하늘도 아찔하여 눈감아버리는
깜깜한 순간
나 시퍼렇게 살아나는
눈맞춤으로
그 꽃을 꺾어 드린다



꽃이 흘러내렸고, 13명의 시인의 낭송이 끝났다. 낙엽처럼 떨어지는 시엽(詩葉)이 아쉬워서였을까. 하재봉 시인은 예정에 없던 시민 낭독을 제안했다. 창작집단 ‘툭’이 헌화가를 멋진 퍼포먼스로 선보인 뒤, 인천에서 파주를 처음 찾은 아홉 살의 최지효 어린이가 시민 낭독 자원자로 등장했다. 아이의 마음과 소리로 낭송하는 「헌화가」. 파주의 가을이 그렇게 익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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