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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사건을 두고 벌이는 천재 물리학자와 수학자의 두뇌싸움

『용의자 X의 헌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평범한 수학자를 어떻게 살인자로 만들어 버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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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범죄라고 말하는, 그러나 때로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한 행동의 근원을 파고들어간다. 수학과 과학은 하나의 답을 위해 필요 없는 모든 것을 버린다. 냉정해 보이지만, 그 순수한 탐구에는 인간의 열정과 온정이 숨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과학도의 냉엄한 시선으로 세상을 지켜보면서, 그 안에서 흐르는 따뜻한 피의 흔적을 찾아내는 탁월한 작가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영화로 만들어졌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백야행』의 주인공은 20여 년의 세월동안 한 여인을 위해 헌신한다. 낡은 건물에서 전당포 주인 기리하라가 살해된다. 경찰은 기리하라에게 돈을 빌렸던 여인 후미요를 의심하지만, 갑자기 후미요가 자살해버리면서 사건은 종결된다. 이후 20여년에 걸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 마쓰모토 세이쵸의 팬인 사사가키 쥰조 형사는 그 사건들이 뭔가 연결되어 있음을 감지한다. 그 예감이 맞았다. 기리하라 사건이 종결된 그 시점부터, 기리하라의 아들 료지와 후미요의 딸 유키호는 함께 ‘하얀 어둠’ 속을 걸으면서 갖가지 ‘사건’들을 만들어냈다. 『백야행』은 료지와 유키호가 성장해가는 당대 일본의 사회풍경을 세세하게 묘사하면서, 그들의 범죄를 차갑게 그려낸다.


『백야행』은 정교하고 기묘한 트릭을 제시하면서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소설이 아니다. 그렇다고 범인이나 형사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지도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오로지 그들의 주변만을 보여준다. 세밀하게 그들이 걸었던 거리의 풍경과 느낌을 담아내는 데 주력한다. 『불야성』의 작가 하세 세이슈는 “이 소설은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의 ‘내면’을 전혀 묘사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동기도 그리지 않는다.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점을 통해서만 묘사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시점을 통해 묘사되는 것은, 따라서 두 사람의 행동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마음은 결코 알 수 없다. 하지만 추측으로 건져올려지는 그들의 마음이 더욱 애절하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모든 이들을 파멸로 몰아가는 지독한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에 매혹되고, 소름끼쳐 하면서 그들은 하얀 밤을 걸어왔다. 태양 속을 걸어보는 게 유일한 소망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결코 돌아가지 못한다. 이미 어둠을 택한 그들은, 결코 깨어날 수가 없다. 그 참담함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묘사하기만 한다. 그 담담함이, 그들의 슬픔을 더욱 짙게 만든다. 그걸, 단지 바라볼 수밖에 없음이, 『백야행』의 진정한 슬픔이자 독자의 즐거움이다.

『백야행』의 슬픔을 다시 느끼게 한 작품이, 2006년 나오키상을 수상한 『용의자 X의 헌신』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의 주인공은 수학교사인 이시가미다. 이시가미는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도 대학에 남지 못했다. 인간관계에 서툴기 때문이다. 조직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처세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시가미는 수학에 모든 것을 바친, 아니 수학을 위해서 태어난 인간이다. 완벽한 수의 세계는 한없이 아름답다. 수학은 엄정하다. 어느 것도 부족하지 않고, 어느 것도 틀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은 나름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완벽함을 훼손하는 권력이라던가, 파벌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용납할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한다.


‘그 친구는 순수해요. 순수하지요. 이시가미라는 사내 말입니다. 그가 구하는 해답은 늘 단순합니다. 몇 가지를 한꺼번에 구하지 않아요.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 또한 단순해요. 그래서 망설임이 없지요. 사소한 일에 발목이 잡히거나 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런 삶의 방식이 그리 좋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겁니다. 얻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늘 그런 위험과 함께 하지요.’

성공의 길에서 이탈한 이시가미는 평범한 수학교사로서 살아간다. 오로지 수학에 열중하며 살아가던 이시가미는 옆집에 사는 여인 야스코를 짝사랑하는데, 어느 날 문제가 생긴다. 돈을 갈취하던 전 남편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다가, 야스코와 딸 미사토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남편의 폭력에 저항하다가 정당방위로 죽인 것.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모녀에게, 옆집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수학교사 이시가미가 찾아온다. 우연히 모든 상황을 듣게 되었다면서, 자신이 모든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한다. 며칠 후, 남편이 시체로 발견되고 경찰이 모녀를 찾아오지만 알리바이는 확고하다. 뭔가 수상쩍다고는 생각하지만, 경찰은 결코 이시가미가 짜 놓은 알리바이 조작을 깨트리지 못한다.

경찰은 이시가미의 대학 동기인 물리학자 유가와를 끌어들인다. 이전부터 어려운 사건이 있을 때면 유가와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대학 시절 이시가미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차리고 친구가 되었던 유가와는 결국 트릭을 알아낸다. 그런데 유가와의 추리는, 사건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출발한다. 즉 이시가미가 어떤 인간인가라는 것에서부터 그의 트릭을 찾아내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복잡한 은폐공작을 벌이다 보면 그것 때문에 오히려 자기 무덤을 파고 말아. 그러나 천재는 그렇지가 않아. 아주 간단명료해. 그러나 평범한 사람은 절대로 생각해낼 수 없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것에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버려.’ 이시가미는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생각한다. 그가 의미 없이 하는 행동은 없다. 모녀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시가미는 누구도 깰 수 없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용의자 X인 이시가미는 모녀를 위해 그들의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그 이유는, 사랑에 의한 헌신이다. 하지만 시체를 바꾸는 것을 통해 만들어낸 시간의 알리바이는 파고들 여지가 있다. 그래서 이시가미는 두 번째 알리바이를 만든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야스코를 짝사랑하여 전 전 남편을 죽이고 가짜 알리바이까지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을 철저하게 악인으로 만들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한 알리바이. ‘결코 미안한 마음 같은 것은 갖지 마세요. 당신이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나의 노력은 모두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이므로.’

이시가미가 만들어낸 알리바이는 모두,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헌신을 알지 못한다면, 결코 그가 만들어낸 이중의 알리바이를 깰 수 없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용의자 X의 헌신』이 목표하는 것은, 이시가미가 만들어낸 트릭의 기발함이 아니라 이시가미의 헌신이 얼마나 엄정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수학적으로는 완벽했던 그 트릭이 무너지는 이유 역시 사랑 때문이다.

‘그 모녀를 돕는 것은 이시가미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모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다. 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갚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모녀는 생뚱맞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사람은 때로 튼실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스틸컷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떻게’ 보다 ‘왜’에 더욱 집착하는,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작가다. 데뷔작 『방과 후』에서부터 『악의』 『백야행』 등 수많은 작품들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하나의 질문에 천착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돈이나 치정? 그렇게 단순한 동기라면, 굳이 수많은 추리소설을 읽고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애쓸 필요도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자신의 소설을 보는 독자에게서 ‘이런 사소한 이유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니’란 말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무엇이, 당사자에게는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인생의 행로를 바꿀 수도 있는 천재지변이 되기도 하는, 이 세상의 모순된 풍경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걸작인 『백야행』은 범죄를 통해서 시대를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어떻게 범죄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한 사람의 인간성과 마음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말해준다. 반면 『용의자 X의 헌신』은 모든 것을 배제하고, 한 사람의 마음속으로만 들어간다. 우리들이 범죄라고 말하는, 그러나 때로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한 행동의 근원을 파고들어간다. 수학과 과학은 하나의 답을 위해 필요 없는 모든 것을 버린다. 냉정해 보이지만, 그 순수한 탐구에는 인간의 열정과 온정이 숨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과학도의 냉엄한 시선으로 세상을 지켜보면서, 그 안에서 흐르는 따뜻한 피의 흔적을 찾아내는 탁월한 작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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