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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왔다! 만국의 ‘바지사장’이여 사표를 써라

해병대와 헌병대 사이 치열한 총격전 생생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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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9월8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열린 추석맞이 특별 방송대담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안철수 현상’에 관한 사회자의 질문에 답변을 하며 이렇게 서두를 꺼낸 것이다.

안철수와 박정희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9월8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열린 추석맞이 특별 방송대담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안철수 현상’에 관한 사회자의 질문에 답변을 하며 이렇게 서두를 꺼낸 것이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다.” 당연하다는 말인가? 자기만 쏙 빼놓고 정치권이 후져서 그렇다는 뜻인가? 50년 전 윤보선 대통령의 발언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그는 1961년5월16일 낮 청와대로 찾아온 박정희 소장과 현석호 국방장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만난 자리에서 첫마디를 이렇게 꺼냈다. “올 것이 왔다.” 그날 새벽에 일어난 군부 쿠데타를 오매불망 기다려왔다는 말인가? 자기만 쏙 빼놓고 정치권이 무능하고 부패해서 그렇다는 이야긴가? 50년 간격으로 두 대통령이 입 밖에 낸 “올 것이 왔다”는 말은 수많은 논란을 불렀다. 안철수와 박정희는 대한민국 정치권을 강타한 두 ‘올 것’의 주인공이 되었다.
박정희는 아버지의 스크랩 제4권(1961. 5. 16~1962. 1. 13)에서 처음 ‘데뷔’한다.


이제 틈만 나면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 아버지는 군부정치의 시대를 암시하듯 첫 페이지에 박격포와 철모, 군인 사진을 붙여놓았다. (사진2) 옆엔 ‘빈 항아리에서 잠자던 개미가 일터로 나간 뒤’라는 시를 적었다. 뺏고 뺏기는 권력투쟁의 순환을 말하고 싶었을까. 맨 마지막 부분만 인용해 본다.

………………
높은 자리에 앉은 개미가 소낙비를 만나고
얕은 처마 밑에서 살던 개미가 왕개미가 되었구나
역사는 회전의자
한마디로 정치는 도박
정권은 현실이 아닌가


맞다. 정치는 도박이고, 정권은 현실이다. 다음 장부터 ‘5월16일 새벽의 도박’이 등장한다. 당일 쿠데타를 알리는 두 석간신문의 기사를 읽어본다.


금효군부(今曉軍部)서 ‘쿠데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
수도 ‘서울’을 완전점령
행정?입법?사법부 장악
장도영 중장?박정희 소장?김윤근 준장 지휘


해병제1여단과 2개 공정대대(공수부대를 말함-필자 주)를 선봉세력으로 삼은 혁명부대는 16일 새벽을 기해 수도서울 일원을 완전히 점령하여 모든 지배권을 장악했다. 집권 9개월째 되는 장면정부를 불신임하는 이 군부쿠데타 때문에 삼부의 기능은 일체 마비되어버렸으며 군사혁명위의 포고에 따라 금융기관도 일체 동결, 문을 닫은 채 삼엄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먼저 <서울신문>의 5월16일자 1면 제목과 첫 단락이다.


큰 제목이 주먹만 하다. 언론계 용어로 말하자면 ‘통단’으로 편집을 했다. 다음 <경향신문>엔 쿠데타군의 생생한 총격전 현장과 그 뒷이야기를 전하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퇴근길 새벽에 한강을 건너려다 실패한 기자의 체험을 담았다.



쿠데타 겪은 전국치안은 평온
‘서울까지 불과 35분!’
기자가 본 혁명군입성
북한강파출소 남방서 첫 총격


다음 수기는 본사 기자가 군부혁명이 성공한 십육일새벽 김포방면으로부터 서울로 진격해오는 해병대군인들과 이를 저지하려던 해병대간에 있은 야간의 총격전 및 혁명궐기군이 서울에 입성할 때 본 모습 등이다. 그리고 서울에 입성한 해병대장교와의 대담 등인데 이것은 본사기자가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것이다(서병현 기(記))

16일 새벽 2시 50분.
야근을 마치고 집(흑석동소재)으로 돌아가기 위해 회사 ‘찝’차를 몰았다. 한강 인도교에 다다르자 북한강파출소남방5미터 지점에 무슨 공사를 하는지 땅이 패여 있고 군인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페루 대통령의 내한에 대비해서 길을 닦는 것일까?” “그러나 갑작스레 밤중에 길을 닦다니 좀 이상한데”하는 생각을 하며 이곳을 스쳤다.
다음순간 갑작스럽게 뚱뚱한 헌병대위를 필두로 십여 명의 헌병이 뛰어나와 통행을 막으며 “사고가 났으니 되돌아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리고 북한강파출소에 들어가려고 차를 내리려는 순간 ‘팡! 팡!… 팡!’ 인도교남쪽에서 수십 발인지 수백발의 총탄이 날아왔다. 헌병들은 이내 몸을 피했다. 차는 다시속력을 내어 삼각지에까지 다다랐다. 총성은 뒤에서 계속 들렸다.
삼각지파출소에 들어가 무슨 일인지 물었으나 입초 순경은 그도 모른다고 했다.
경비전화로 용산서와 시경 및 북한강파출소에 물었으나 그들도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약10분후 2백여 명의 해병대원이 헌병들과 충돌한 것이라는 ‘뉴스’를 경비전화로 입수했다.
잇달아 서울역 쪽에서 완전무장한 군인(나중에 해병대로 밝혀짐)들이 10여대의 ‘추럭’에 분승하여 육군본부쪽으로 들어갔다. 총성은 남쪽에서 계속 울리고-“군인끼리 싸움에 이렇게 심한총질을 할 수 있을까?” 군부 ‘쿠데타’란 염두에도 못 둔 기자는 그때까지도 단지 군인들끼리의 싸움을 헌병이 막으려고 시도하는 줄 알았다. 심상치 않은 동태에 놀란 기자는 신문사에 조간개판(改版)준비를 부탁하는 한편 ‘데스크’에 연락한 후 곧 용산서로 차를 몰았다.
용산서에서도 숙직계장이하 10여명의 경관들이 무슨 영문인줄 몰라 서성거리고 있었다.
새벽 4시 5분경 시경에서 관하경관 비상소집령이 내렸으며 30분경이 되자 총성이 또 울리고 수대의 ‘추럭’이 경찰서쪽으로 진격해오는 것 같았으나 경찰서를 점령할 줄은 몰랐다.


구국일념으로 궐기했소 부상한 해병 선봉중대장과 문답

급작스런 고함소리와 함께 1개중대의 해병대원들이 용산서를 포위 문을 차고 들어왔다. 경찰관들은 이층, 삼층으로 몸을 피했다. 군인들이 총을 겨누며 몰려왔고 나는 중대장(대위)에게로 인도되었다. “뭐냐?” “민간인이요.” “우리는 경찰도 해치진 않소.”
그는 나의 윗 ‘포케트’에서 신분증을 꺼내보고 내가 신문기자임을 알자 “안심하시오. 이젠 다 끝났소. 백만 명이 동원되었소. 우리의 행동을 잘 보도해주시오.” 라고 당부했다.
이때야 직감적으로 ‘쿠데타’임을 안 기자는 사람을 다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쾌히 승낙했다. 곧 이층, 삼층에 숨었던 경찰관들이 나오고 무장을 해제당했다.
이제 30을 갓 넘었을 전기중대장은 경찰서 내에 있던 모든 인원을 정문 앞에 앉히고 부하들에게 폭행을 하지 말도록 명령했으며 지나가던 차량을 징발하여 경찰서 앞에 ‘바리케이트’ 를 쌓았다.
중대장은 그들이 취한 행동을 “어떤 정당이나 단체의 조종에 의한 것이 아니고 불안정한 이 나라 정세를 바로잡자는 구국의 일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 후 “우리가 일선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35분 걸렸다. 괴뢰가 휴전선을 넘어 서울까지 오는데 30분이면 충분하다. 그런데도 저 썩어빠진 정치인들은 정쟁에만 여념이 없으니 이 나라를 그냥 둘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이 일에 가담, 아니 상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지만 군부가 정권을 잡아 이 나라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제삼 강조했다. 그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문 : 이 일은 해병대 단독인가. 딴 군에서도 가담했는가.
▲답 : 딴 데서도 가담하고 있다. 조금 후에 항공기가 서울 상공을 날을 것이며 오늘 낮에는 인천 앞바다에 함정이 도착할 것이다.
이는 3군이 합동한 것을 뜻한다.
▲ 문 : 3군의 고급장성도 이 일을 아는가?
▲ 답 : 알고 있다.
▲ 문 : 한강에서 사상자가 났는가?
▲ 답 : 헌병들이 저항해 와서 내 부하가 한 명 사망하고 나는 발 뒤꿈치에 총탄을 맞았다.
그는 ‘포케트’에서 돈을 꺼내 경찰서 앞 약방에서 ‘마이신’을 사먹고 병원에 가자는 부하들의 권고를 그럴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물리쳤다.
새벽 5시가 되자 비상소집에 응해 달려온 경관들이 무장해제를 당한 채 계속 붙들려왔고 민간인들은 도로 보내주었다.
아침 6시가 되어 서울 전역을 군부가 장악했다는 방송이 있자 우리 신문사원들은 이름을 적어놓고 풀려나왔다.
헤어질 때 그 중대장은 부상으로 쩔뚝거리는 다리를 끌며 굳게 악수한 후 “우리의 의도를 국민에게 잘 알려 달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실감난다. 위기일발이었으나, 그 덕분에 특종의 행운도 누렸다. 5월16일 새벽3시경 쿠데타 선두부대인 해병대가 한강 인도교 남쪽 입구에 도착한 뒤 이를 저지하는 헌병들과 총격전을 벌인 현장이었다. 직업정신을 발휘한 기자는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가까운 용산경찰서를 찾고, 이곳을 점령한 해병대 중대장과 마주친다. 몇 마디 나눈 대화가 인터뷰 꼴을 갖추고 말았다.

한데 중대장은 뻥이 심하다. 백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실제론 해병1여단, 육군 제30사단, 제1공수단 등의 장교 250명과 사병 3천500여명이었다. “조금 후에 항공기가 서울 상공을 날을 것이며 오늘 낮에는 인천 앞바다에 함정이 도착할 것”이라는 말도 사실무근이다. 쿠데타 성공 축하 에어쇼가 예정돼 있었나? 미군이 추억의 인천상륙작전이라도 재현하면서 후방을 봐주기로 했었나? “헌병들이 저항해 와서 내 부하가 한 명 사망”이라고도 했는데, 거꾸로 반대편의 헌병2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부상당했다.

기사 말미의 “부상으로 쩔뚝거리는 다리를 끌며 굳게 악수한 후”라는 대목에선 ‘구국 일념’의 비장미까지 풍긴다. 해병 중대장의 뻥과는 달리, 쿠데타 계획엔 구멍이 많았다. 반란음모는 전혀 비밀스럽지 않았다. 정보는 일찌감치 누설되었다. 장면 총리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한다는 게 사실이냐”고 아랫사람에게 여러 차례 확인할 정도였다. 시간적으로도 진압할 여건은 충분했다. 문제는 이를 막아야 할 정치권과 군 수뇌부의 구멍이 더 컸다는 점이다.

윤보선 대통령은 미8군 사령관인 매그루더가 무력진압을 제안해도 “피를 흘려선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내각책임제의 실권자였던 장면 총리는 55시간이나 혜화동 칼멜수도원에 숨었다. 군 핵심 책임자였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반란을 막는 시늉만 하다가 5월16일 오후 쿠데타군의 우두머리로 깜짝 변신했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과 계엄사령관으로 추대돼 혁명공약을 발표하고 이틀 후엔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행군에 나와 훈시를 하기도 했다.(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장관에도 함께 오른다) 덕분에 쿠데타군의 권위는 빵빵해졌다. 정권 인수도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리곤 살벌한 칼바람이 분다.

그 매서운 칼바람이 묻어나는 기사들을 읽는다. 장면 총리와 내각의 장?차관들은 가장 먼저 칼을 맞았다. 국회는 즉각 해산되고 총리를 포함한 일부는 용공음모 사건에 엮였다. 이한림 1군사령관 등 쿠데타에 반대한 장성들은 부하들에게 치욕을 당하며 체포됐다. 쿠데타군 내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1공수단을 끌고 함께 한강을 넘었던 박치옥 대령 등은 반혁명음모 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박정희가 떠받드는 척 했던 장도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도 밀려났다. 반혁명 음모사건에 연루됐다며 처음에는 가택연금만 시키더니 나중에는 철창에 집어넣었다. 그는 끝내 외국 망명길에 올랐다.


더 불쌍한 자들은 민초였다. 그중 스크랩에서 눈길을 끄는 건 춤꾼이었다. 단지 댄스홀에서 춤을 췄다는 이유로 쇠고랑을 찼다. ‘퇴폐스러운 탕아, 탕녀’라는 손가락질을 당했다. 쿠데타 직후 깡패, 사이비언론인, 부정축재자들과 함께 검거된 2만7000여 명 중의 일부였다. 4컷만화 ‘박달영감’과 ‘두꺼비’는 에둘러 군사정권의 ‘뻘짓’을 조롱한다.



‘춤바람’에 군법의 심판
수의에 창피한 듯
얼굴 수그리며 눈물까지 흘려


우리나라 고유의 순풍양속을 주름잡던 ‘춤바람’에 대한 첫 군재가 개정되었다. 서울?경기지구계엄고등군법회의 첫재판은 23일 상오10시 경기도청 의사당자리에서 열려 남녀 ‘땐스’광 47명에 대한 포고령1호(옥내집회금지) 및 계엄법 13, 15조 위반피고사건을 심리했다. 이날 첫 군재의 재판관석에는 재판장 안익섭 중령을 중심으로 심판관 이우현 중령 법무사 박윤상중령이 좌우로 자리잡고 검찰관 김양균 대위 관선변호인 양권 중위가 관여했다.
푸른수의에 수갑을 차고 법정에 끌려나온 남자24명 여자23명의 피고인들은 얼굴을 무릎사이에 묻어 두 손으로 덮고 있었으며 특히 여자들은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까지 했다.
지난20일하오 2시30분경 서울시내 종로2가 17 최산부인과건물3층에 있는 무허가 ‘땐스?홀’에서 춤에 미쳐 돌아가다가 검거된 이들은 인정심문에서도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는데 변호인의 무죄항변으로 그중 ‘조재연’(30)등 5명(남2여3)이 자신에 대한 증인으로 채택- “춤추러간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다가 “왜 그런데 접근을 했는가”고 법무사로부터 훈시조의 추궁을 당하기도 했다.
이날 공개리에 진행된 재판을 방청하기 위하여 9시경부터 경기도청에는 천여명의 시민이 몰려들어 뒤뜰에서 ‘마이크’를 통해 공판 진행상황을 듣고 있었다.
좁은 법정 안에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선 백여 방청객들도 ‘지각없는 탕아?탕녀들의 심판’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기자석에는 외인기자들까지 긴장된 표정으로 이 공판을 방청하고 있었다. 군재는 상오 11시50분 일단 휴정-하오 1시30분 속개될 예정이다. (<동아일보>5월24일치)

이 기사를 읽으며 중학교1학년 때가 생각났다. 박정희 정권의 끝물이었던 1979년. 중학교 입학은 신병교육대 입소와 비슷했다. 일단 머리를 박박 깎았다. 금빛 단추가 달린 검은 제복에 챙이 둥글고 뻣뻣한 사관생도생 모자 같은 걸 썼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돼 학생과장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주의사항 안내’를 했다. 두 가지 지침을 잊을 수 없다. “극장에 가지 마라, 정학이다. 이성교제 하지마라, 정학이다.” 선생님은, 여자 친구와 거리를 다니다 걸려도 이성교제에 해당한다고 경고했다. 설명이 끝나고 질문을 받자, 뒷자리의 친구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친척 누나랑 함께 다녀도 정학인가요?”(답이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중학교 시절 “이성교제하면 무조건 정학”이라던 학생과장 선생님의 그 ‘겁박’은, 댄스홀의 남녀들을 싹쓸이해 잡아가던 61년 군사법정과 쌍둥이다.
그 댄스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스크랩을 더 뒤적이니 관련뉴스가 나온다.


<조선일보> 6월15일치다. ‘최고1년6개월 형을 언도-군재(軍裁) 춤바람 등 38명에, 1명 무죄’라는 제목. 사진 속의 여인은 언뜻 댄스족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무죄를 받은 바로 그 1명이다. 거리에서 무허가로 약장사를 하다 아이와 함께 붙들렸다. 척 포즈만 봐도 ‘비련의 여인’. 아버지는 감상을 끄적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죄없는 여자

재판받는 저 여자 얼굴 좀 들어보소
거리에다 풍악 틀고 노래가락 부를적에
이남자 저남자가 웃고 지나가더라

목구멍이 포도청 숟가락이 남이 되여
산목숨 죽게 되자 거리를 헤맬 적에
약을 팔고 소리 팔고 웃고 울고 하였다네

자식은 들처없고 아버님 모신 그몸
세월을 원망하랴 여자된 것 슬퍼하랴
남편없는 그 몸이 그지없이 설어라

허가없이 웃었다고 허가없이 울었다고
파리같은 몸이 거미줄에 걸렸다네
세상도 무정할사 한번만 봐주구료

아기는 보채면서 엄마엄마 우는데
어미의 슬픈 사연 아마도 모를세라
크거든 네어미 사진 보고 공부 많이 하여라

그 어미 사모친(사무친) 정 꿈에라도 잊지말고
네가 섰든 그 자리를 뼈마디에 아로새겨
부디부디 크거들랑 재판관이 되여라


고개를 숙인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아이는 처연하게 카메라를 쳐다본다. 갓 돌이 넘었을까. 그렇다면 아마도 1960년생. 살아있다면 올해 쉰 하나.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버지의 시 마지막 문장처럼 재판관이 되었을까?

스크랩의 마지막 장에선 극단의 두 풍경이 대조적이다. 맨 위와 아래에 전혀 상반된 기사가 하나씩 있고, 가운데 빨간 글씨의 시가 흐른다. (사진15) 절정을 구가하는 박정희가 상단에서 군림하고, 나락에 빠진 장도영이 하단에서 풀이 죽은 모양새다. 둘 다 같은 날이다. 1961년11월2일. 극과 극의 내용, 그리고 아버지의 시….


2일 하오2시 청와대에서 거행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육군대장 진급식에서 윤 대통령(좌)과 송 수반(우, 송요찬을 가리킴-필자 주)이 박 의장(중)에게 대장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이 자리에는 이주일 최고회의 부의장, 분과위원장 전원, 김 내각 사무처장, 삼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그리고 멜로이 유엔군 사령관등이 배석하였다.

2일 하오 법정에서 구속되어 형무소에서 첫밤을 보낸 ‘장도영’ 피고는 푸른 수의에 고무신을 신고 개정하기 10분 전 형무관들에게 묶여 들어왔다. 가슴에 ‘1265’라는 번호에 ‘도’라는 기호가 적힌 ‘명찰’이 붙여있었다. 이제는 푸른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지난날의 3성장군은 자리에 앉자 검은테 안경 밑으로 지그시 눈을 감고 팔짱을 낀채 몸을 까딱도 하지 않았다. (<한국일보>11월3일치)

어제와 오늘

역사는 몹시 고단하고 피곤하다
혁명과 반혁명이 생리
의원 간판에다 오줌을 깔긴다

어제의 용자가 오늘엔 역적
사랑방 엽관이 사표를 내고
그래도 역사가들은 몹시 귀찮아졌다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는 날
예언자들이 운명과 씨름을 하고
노인네들이 백지장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한다

의장과 피고 간에는 영원한 원한도 없고
영원한 우정도 없으되
오즉 영원한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당시 장도영은 38세, 박정희는 44세였다.(흑흑, 지금의 내 나이다. 참고로 아버지는 당시 26세였다) 박정희가 여섯 살 많았지만, 경력에선 장도영이 위였다. 일본장교 출신으로서 동질감을 느꼈을 두 사람은, 1949년 육군 정보국에 근무할 때부터 서로를 잘 알게 됐다. 당시 장도영은 정보국장이었고, 박정희는 일개 문관이었다.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조직원 명단을 흘리고 전향한 뒤 간신히 사면을 받아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장도영은 고비마다 박정희를 살려주고 키워주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소령으로 복직시켰고, 정군운동의 배후로 찍혀 예편당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사령관인 2군의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니 장도영으로선, 믿는 도끼에 뒤통수를 찍힌 셈이다. 그는 혹시 박정희에게 선의를 베풀던 과거를 떠올리며 판단착오를 하지는 않았을까. 쿠데타 당일 중책을 맡아달라는 거듭된 요청이 ‘결초보은’의 신호탄이라도 되는 줄 말이다.


머리가 띵하다. 한 편의 쿠데타는 복잡한 드라마였다.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뒤죽박죽 부딪치며 배신과 음모가 꼬리를 물었다. 역사의 물길이 바뀌었다. 남은 것은 하나. 절대권력 박정희!

스크랩 4권을 덮으며 하나의 열쇳말을 교훈으로 챙겼다. ‘바지사장’이다. ‘총알받이’의 ‘받이’에서 비롯한 말이다. 실권은 없고, 명의만 빌려주는 경영자를 일컫는 속어다. 법망의 추적을 피하려는 불법 유흥업소나 오락실 업주들이 자주 쓰는 수법 중 하나다. 그 특기는 ‘감옥 대신 가주기’. 당신도 ‘바지사장’이 되고 싶은가? 사장이 안 되면 안 됐지 ‘바지사장’은 되지 말자는 다짐을 해본다. 눈치보지 않고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삶을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바지계’를 개척한(?) 윤보선 사장, 장면 사장, 장도영 사장은 반면교사처럼 보인다.

윤보선은 왜 쿠데타 직후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했을까. 새로운 체제 아래서 라이벌이었던 장면을 제거한 뒤 군부의 보호를 받는 ‘바지사장’이 될 야욕을 품지는 않았나 의심스럽다. 장면은 실권을 지닌 총리임에도 쿠데타 직후 잠적해버림으로써 세상에 대고 “나는 바지사장이다”라고 외친 꼴이 됐다. 정치권과 쿠데타군 쪽 모두에 양다리를 걸치며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한 장도영은 ‘바지사장’에 불과한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했다. ‘실세 사장’으로 도약할지 모른다는 거짓 예감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박정희는 ‘무서운 실세 사장’의 시대를 열었다. “한번 사는 인생, 바지사장으로 살아선 안 되겠다”는 경각심을 되새긴다면, 박정희를 멘토로 섬겨야 할까? 그런데, 그런데 ‘최악의 바지사장’ 장도영의 회고록 『망향』을 읽다가 눈길이 멎었다. 어디선가 많이 보던 말이 그의 이름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맨 앞에서 밝힌 대로, 이명박과 윤보선이 했다는 그 유명한 멘트.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1979년12월26일, 미국에서 박정희의 피살 소식을 접한 직후였다.

바지사장의 최후는 불쌍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욕심으로 철권을 휘두른 실세사장의 최후는 끔찍했다.

라인
※ 참고한 책

『망향-장도영 회고록』(장도영 지음, 숲속의 꿈, 2001)
『1면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3』(김흥식 기획, 황병주 해설, 서해문집, 2011)
『한국근현대사 산책-1960년대편1』(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04)
『한국근현대사 산책-1960년대편2』(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04)
『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서-인물로 읽는 한국사10』(이이화 지음, 김영사, 2009)
『장면?윤보선?박정희-1960년대 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정윤재 외 지음, 백산서당, 2001)
『제2공화?과 장면』(이용원 지음, 범우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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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서

<이이화> 저11,700원(10% + 5%)

"역사 앞에서 민족은 무엇인가!" 이승만, 박정희, 김일성 등 광복과 분단, 독재의 명암이 교차하는 한국현대사 인물열전! 「인물로 읽는 한국사」 시리즈 열 번째 권으로, 저자는 근대와 현대에 활동한 열 명의 정치가들을 탐구한다. 이들은 모두 한국 근대와 현대의 주역이거나 그에 맞선 인물들로, 총 네 부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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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

이토록 매혹적인 외국어 공부

인간은 언어를 구사하는 존재다. 우리가 언어를 배우는 이유는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다. 외국어 공부는 보다 넓은 세계도 보여준다. 『숲속의 자본주의자』 박혜윤, 응용언어학자 김미소 두 저자가 쓴 글을 읽으면 미치도록 외국어 공부가 하고 싶어진다. 영어, 일어 모두.

배우 문가영이 아닌, 사람 문가영의 은밀한 기록

배우 문가영의 첫 산문집. 문가영은 이번 에세이를 통해 ‘파타’라는 새로운 얼굴을 통해 자신의 내밀한 언어들을 선보인다. 자신을 경계인으로 규정하며, 솔직한 생각과 경험을 형태와 시공간을 뛰어넘어 실험적으로 다뤄냈다. 앞으로의 그녀가 더 기대되는 순간들로 가득 차 있는 에세이.

자유롭고 행복한 삶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유로운 삶에 도달한 68만 유튜브 크리에이터 드로우앤드류의 신간이다. 남에게 보이는 삶을 벗어나 온전한 나의 삶을 위해 해온 노력과 경험을 들려준다. 막막하고 불안한 20-30대에게 자신만의 삶을 방식을 찾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사교육의 나라에서 흔들리지 않고 중심잡기

단돈 8만 원으로 자녀를 과학고에 보낸 엄마가 알려주는 사교육을 줄이고 최상위권 성적으로 도약하는 법! 고액의 사교육비와 학원에 의존하는 대신, 아이의 자기주도적인 학습을 위해 부모가 가정에서 어떻게 올바른 학습 환경을 마련하고 노력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문화지원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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