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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의 팔이 없다고 묻는 사람 있나요? - 『느낀다는 것』 채운: 삶의 진경을 채우는 ‘느낌의 기술’을 알려드립니다!

느낀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 말. 그렇다면, 느낀다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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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작동하는 것이기에 느낀다고 말하는 것일까. ‘느낌’은 온전히 개인의 것이며, 훈련되지 않아도 가능한 것일까. 특별한 수고나 노력 없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느낀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 말. 그렇다면, 느낀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작동하는 것이기에 느낀다고 말하는 것일까. ‘느낌’은 온전히 개인의 것이며, 훈련되지 않아도 가능한 것일까. 특별한 수고나 노력 없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채운 선생은 “아니”라고 말한다. 느낌 역시 능력이라고 말한다. 배우고 익히면서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단다. 그 ‘필’이 오는 순간을 제대로 포착해야 삶을 제대로 살 수 있음을 알려준다. 『느낀다는 것』(채운 지음|너머학교 펴냄)은 그런 책이다. 느낀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되새겨보고, 세상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알려준다. 어쩌면, 이 책은 누군가에겐 생이라는 감각을 깨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너머학교 열린교실 시리즈는 그렇게 생의 감각을 하나씩 깨운다. 『생각한다는 것』(고병권 글)에서 시작된 열린교실 기초 교양편은 『탐구한다는 것』(남창훈 글), 『기록한다는 것』(오항녕 글), 『읽는다는 것』(권용선 글)을 거쳐, 『느낀다는 것』을 통해 예술가들의 삶의 방식을 우리네 일상으로 가져올 것을 제안한다.

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 연구공간 수유 너머(www.transs.pe.kr), 『느낀다는 것』의 저자 강연회.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 느끼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다. 채운 선생은 ‘느낀다는 것’을 말하기 전, ‘느끼는 나’에 대해서 우선 운을 뗐다.


느끼는 나, 흔들리다!


“기쁨, 슬픔 등 뭔가를 느낀다고 할 때, 느끼는 나는 뭘까. 어떤 냄새를 맡으면 안정감이 느껴지고 편안함 같은 게 있다. 그럴 때는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다. 가령, 빵 냄새에 안정을 느낀다면, 나의 어떤 부분이 느끼는 것이다. 배가 부르면 빵 냄새가 편안하지 않겠지. 내 안의 어느 세포가 느끼는 거다. 느끼는 것을 감정으로 표현하는데, 그런 감정은 전형적인 것이다. 내 몸의 어떤 세포, 기억 등이 그 부분을 느끼고 있는 거다.”

채운 선생은 인간을 이루는 것이 ‘원자’인 한편, 인간은 우주에 비하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존재임을 상기시켰다. 나는, 원자와 우주 사이에 걸쳐 있는 존재라는 것. (원자에 비하면) 무척 크기도 하고, (우주에 비해) 매우 작기도 하다. 즉, 인간은 굳어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원자부터 우주까지 아우를 수 있는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느낄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 채운 선생의 지론이다. 작기도 크기도 하다는 것을 알면, 나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렇기에 우리는 매순간 다른 순간을 느낀다. 그걸 의식하지 못할 뿐. 호흡을 매순간 하면서도 다행히 그걸 의식하진 못한다. 곧, 들숨과 날숨은 세포가 하고 있는 것이다.

“10년 전의 나와 10년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세포로 구성된 나다. 실제로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내뱉는다. 뱉어야 새로운 것이 들어온다. 뱉고 들어오고, 그게 인간이다. 호흡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바깥을 느끼고 있는 거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는 것이다. 뭔가를 느끼기 위해서는 뭔가를 들어오게 하려면, 뱉어야 한다. 뱉어야 들어올 수 있다. 이게 느낀다는 것이다. 느끼지 않으면 살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모든 생명체는 느낌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도록 세팅돼 있다.”

‘느낀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점은 내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거미처럼 거미줄을 통해 매순간 느끼면서 일상을 영위할 수는 없다. 특정한 순간에만 느낀다. 많은 사람들은 ‘희로애락애오욕’의 7가지로 감정을 규정한다. 그러나 한 단어로 느낌의 결을 정의할 수 없다. 편안하면서 슬프거나, 불안하면서 기쁠 수도 있다.


“느낌은 7가지로만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감정 자체가 느낌은 아니다. 감정은 습관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경우도 많다. 느낌은 문득 나에게 다가오는 사건이다. 교육받아서 습득된 내용이 아니다. 감정적인 것과 느낌을 혼동하면 안 된다. 감정은 자신이 만든 것일 여지가 크다. 한번 슬프면 밑도 끝도 없이 슬픈 것들이 덧붙여진다.”

드라마를 보고 감정이입하는 경우가 그렇다. 선생에 의하면, 그건 세포가 습득하고 있는 거다. 몸과 마음, 세포 모두 습득한 대로, 습관대로, 편한 길을 따라간다. 나이가 들면 안정을 추구하고 모험을 하기 싫은 이유가 그것이다. 그래서 느낌은 불편한 사건이다. 그 사건을, 모호하게,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낀다.

“니체가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이 사람을 만나기 전에 뭐했나, 이런 생각을 한다. 책을 읽을 때도 그렇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인간도 아니었구나. 그런 책, 스승, 애인을 만났을 때, 그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은 거다. 그런 상태가 있다. 인간에게도, 역사에게도 있다. 역사에겐 그런 게 혁명이지. 느낌은 이런 순간처럼 오는 거다.”

고로, 느끼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흔들리는 존재’라고 선생은 강조한다. 나는 흔들린다, 고로 존재한다. 무언가를 마시고 내뱉는 것 자체가 흔들림이며, 덕분에 매일 다른 태양과 달을 맞이하고, 다른 우주를 만난다. 다만, 우리는 크게 흔들릴 때만 느낀다. 이렇듯 흔들리는 순간, 흔들리지 않았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느낀다는 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예술이 필요한 이유


이어서 예술로 넘어간다. 인간에게, 예술은 왜 필요할까. 이는 철학과 무관하지 않다. 생각할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살아간다? 그건 불행이다. 흔들리기 때문에, 인간은 우주와 혹은 무언가와 소통한다.

“느낌의 순간이 왔을 때 어떤 형상으로 포착하는 존재가 예술가다.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다.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점은, 느낌의 순간들의 모호함을 붙잡으려고 한다. 그것을 색으로, 소리로, 언어로 표현한다. 예술작품을 만나는 건, 그들이 만난 모호함을 우리도 모호한 방식으로 만나는 거다. 예술은 모호한 순간을 자기 식대로 붙드는 거다. 느낌의 순간은 자기도 뭔지 모르는 순간이다. 그런 사건을 붙들어놓은 것이 예술작품이다.”

예술은 결국 다르게 느끼는 것이고, 다르게 느끼는 연습을 통해 예술가는 자신의 독창적 세계를 형성합니다.(p.75)

그런 느낌은 하나의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는 무수한 타자가 살고 있고, 그들이 느낀다. 물리학의 차원에서 인간의 죽음은 부패하는 것이 아니란다. 원자는 늘거나 줄지 않고 흩어질 뿐이다. 그렇게 떠돌던 원자가 다시 결합해서 인간이 만들어진다.

“우리 몸에는 옛날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원자가 결합돼 있다. 어쩌면, 부처나 베토벤의 원자 10개 정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구성하는 게 나 아닌 존재라는 기이한 체험이다. 곧 내가 나라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나를 구성하는 나 아닌 것들이 나를 끊임없이 이 세계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교감하게 만든다.”

사람은 엄청난 수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죽고 나면 그 원자들은 사라지지 않고 모두 재활용된다고 합니다. 때문에 우리 몸속의 원자들 중 상당수는 몇 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원자일 수 있다는 거예요. 어쩌면 붓다와 그리스도, 베토벤과 반 고흐의 원자가 여러분의 몸속에 있을지도 모릅니다.(p.42)


다양한 느낌의 방식

「절규」(뭉크)

뭉크의 「절규」다. 선생은 이 그림에 대해 현대인의 고독, 공포나 불안 등과 같이 말하는 것으론 이 그림과 만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뭉크가 「절규」를 그릴 때, 뒤 배경의 소 도살장에서 소가 꽥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고막을 찢는 것 같은 소리였고, 그 소리가 퍼질 때 세상이 흔들리는 느낌을 표현한 것이 이 그림이란다.

“잘 느끼기 위해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매번 느끼는 방식을 닫아야 한다. 좋아하는 게 있다고 좋아하는 것만 보면 안 된다. 그러면 다른 것이 오면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의식이나 지식 없이 보는 것이 전해주는 미묘한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이 뭐라고 표현하는 건 나중 문제지만, 그 울림이 느낌의 순간이다.”

이어 성경에서 가장 용감한 여자 중의 한 명인 유디트에 대한 세 가지 그림을 비교한다.

(시계방향으로)지오르지오네, 카라바지오, 젠틸레스키의 유디트(Judith)그림

“16세기보다 17세기 그림이 사실적이다.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인데, 서로 핵심이라고 생각한 것이 달랐다. 16세기 그림은 사실적으로 표현 않고 상황의 결과만 표현했는데, 17세기에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시대마다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같은 17세기라도 하나는 미모의 여자가 눈에 띠고, 다른 하나는 씨름선수 출신 같다. (웃음) 두 그림의 차이는, 남자 화가의 작품은, 남자가 왜 매혹 당했을까, 에 꽂혀서 여자에 집중했고, 여자 화가의 작품은 죽이는 사람의 긴장감이 다 들어가 있다. 성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도 느낀다. 신체가 다르면 세상을 느끼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시대별로 드러난 신의 모습도 달랐다. (아기)예수와 성모자상을 드러내는 방식이, 신을 상상하는 시대정신에 의해, 사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차이를 드러낸다.

「성모자」(블라디미르), 「롤랭대법관과 성모자」(얀 반 아익)

“12세기 성모자상은 목각 같은 느낌인데, 이 시대 사람들은 신성한 게 있다면 인간을 닮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중세 사람들은 신을 인간과 닮게 그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르네상스, 인간중심시대가 되면 아기 예수가 아기다워 지는데, 표정은 아니다. (웃음) 시대마다 신을 상상하는 방식이 다르다. 어머니 세대와 아이 세대가 완벽하게 통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야 한다. 내가 느낀다지만 그건 세상 속에서 느끼는 거다. 같은 시대라도 기후가 다르면 또 다르다. 시대에 따른 감각도 있지만, 어디 사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느낀다. 느낀다는 건, 나와 세상의 문제를 동시에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채운 선생은 우리가 오관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굉장히 잘 속는다는 이유였다. 인간의 눈은 둥글고, 누구나 세상을 왜곡해서 보고, 여러 가지로 왜곡해서 본다. 즉, 어떤 방식으로 다양하게 느끼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 보고 듣고 냄새나는 것이 정확한 느낌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 나의 감각이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세상엔 인간이 아는 게 별로 없다. 이런 걸 만나는 순간이 왔을 때 우리가 알고 있던 게 다 흔들린다. 그래서 느낌의 순간이 문득,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에 지금까지 생각하고 믿던 것을 다시 한 번 질문하게 된다. 느낀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의 출발이다.”

선생은 피카소의 작품에서 다르게 느낀다는 것을 꺼냈다. 피카소는 버려진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를 통해 「황소머리」를 만들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사물로 꿰어 맞춘 것이다. 낯설게 보기를 통해 쓸모없음에서 쓸모를 이끌어냈다.

「황소머리」(피카소)

느끼는 것도 기술이고, 모든 기술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느끼는 여습, 낯선 것을 피하지 않는 연습,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연습, 싫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바라보는 연습을 자꾸 해야 합니다. 그러면 느낌의 폭이 훨씬 넓고 깊어질 거예요.(p.138)

소설가 프루스트는, 천직이 뭔지 알려면 어떤 기호에 예민한지 보면 된다고 했다. 누구나 민감하게 느끼는 특정한 기호가 있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호에 대한 직업을 가지면 행복할 거라고 덧붙였다. 1920년대에 찍은 이 사진을 보자.

“예술가는 자기에게 다가온 느낌의 순간을 포착한다. 1920년대 소련의 한 사진작가가 찍었는데, 수동카메라를 들고 신기했던 거다. 카메라는 인간의 눈을 뛰어넘게 해주고, 카메라로 인간의 시각을 넘겠다며, 높은 곳에서 새의 관점에서 찍었다. 새는 우리를 무엇으로 평가할까. 정수리다. 새의 시점으로 보니, 지금까지 인간의 관점을 뛰어넘을 수 있다.”

「거리」(로드첸코)

그래서 선생은 셀프카메라(셀카)에 몰두하는 시대를 비판한다. “왜 자신과 먹는 것만 찍을까. 이건 자폐증이다.” 외롭고 고독한가보다. 기술 발달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기는커녕 뷰파인더에 가뒀는지도 모른다. 첨단 디카의 시대, 선생은 이런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어떻게 나 자신을 넘어볼까. 내 안에 있는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만나볼까.”


공감한다는 것

「생라자르역 뒤에서」(브레송)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보도사진 작가그룹 ‘매그넘 포토스’의 멤버였다. 그가 찍은, 한 사람이 비가 온 웅덩이를 폴짝 건너뛰는 사진(「생라자르역 뒤에서」)이 무척 유명하다. 수동 카메라로 찍은 사진인데, 그는 이것을 ‘결정적 순간’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이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사진은 그 기다림을 인고한 자에게 주어진 순간이었다. 선생은 그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가만있다가 로또 맞듯이 맞는 건 없다.”

나와 세상이 만나는 그 ‘결정적 순간’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필름을 감아 넣고 ‘바로 그 순간’을 기다렸을 브레송처럼, 세상을 향해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의 세포들을 다 열어 놓고 열심히 기다리는 자에게만 무언가가 와서 꽂히는 거죠.(p.116)

여기 이 사진들을 보자.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비너스 사진과, 실존 인물인 영국의 앨리슨 래퍼라는 화가의 사진이다. 앨리슨 래퍼는 두 팔 없이, 다리는 무릎 아래가 없고 넓적다리뼈에 발이 달려 있는 병(해표지증)에 걸려서 태어났다.


「비너스」(밀로), 앨리슨 래퍼의 사진 作

그녀는 집에서 그림만 그렸단다. 하루는 스승이 물었다. “정말 그림이 좋아서 그리느냐, 세상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서 그림만 그리느냐?” 또 어느 날이었다. 미술관에서 비너스를 만났다. 눈물이 났다. 자신의 육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직시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비너스에게 왜 두 팔이 없냐고 묻지 않듯이, 비너스를 장애인이라고 말하지 않듯이, 비너스상을 미의 여신으로 받아들이듯이.

“앨리슨은 자신을 숨기지 않겠다며 사진 작업을 했다. 우리가 예술작품을 만날 땐, 아름답지 않아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만난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편견을 갖고 만난다. 한 철학자는 ‘세상에 완전하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간의 눈은 왜곡이다. 완전하지 않다. 뭔가 어딘가를 불완전하게 태어난다. 그래서 인간을 완전하다고 얘기할 수 없다. 앨리슨과 같은 사람을 보고 아무렇지 않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느낌이다.”

선생은, 다른 것과 공감하기 위해선 자신과 공감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자신과 공감하기 위해선? 자신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오래 품는 사람이 있다. 그건 새로운 태양을 맞이한 자신과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제와 다르다는 것. 어제의 상처를 오늘로 가져오지 않는 것. 느낌은 매순간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어제와 다르게 사는 것이 공감이다.”

「자화상」(렘브란트)

선생은 렘브란트가 자신을 그린 자화상을 보여주면서, 렘브란트야말로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과 공감한 대가라고 설명했다. 죽을 때가 다다른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에도 후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 살고 있는 나 아닌 것들도 나다. 그런 나와 공감할 때 바깥에서 오는 숨을 들이킬 수 있다. 그러면 우린 매번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게 느끼는 것의 출발점이다. 자신을 느끼지 못하면 남도 느끼지 못한다. 공감은 나도 모르게,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내 가슴에 치고 들어오는 것이다.”

선생은 습관화돼 있는 것을 버려보는 것에서 느낌의 출발점을 삼으라고 권한다. 먹는 것만 먹고,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것이 바로 습관화다. 다른 길을 만들려는 훈련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뭔가를 다르게 느끼고 싶다면, 아무 것도 안 하고 다르게 느낄 수 없다. 안 하던 것을 해봐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내 안에 살고 있는 다른 세포도 살게끔 해야 한다. 안 먹던 것도 먹어보고, 안 하던 짓도 해보는 것, 즉 자신을 실험해보는 것이 느낌의 첫 출발이다.

“우리는 지식을 넣고 살아온 경험에 의해 다른 일이 일어나는 걸 못 느끼고 산다. 그런데 옳다고 믿고 살아온 것을 의심해볼 수 있다면, 나 안의 나 아닌 존재들이 작동한다. 그 순간이 새롭게 느끼는 순간이다. 느낀다는 건, 자신이 살고 세계를 의심해 보는 것이다. 의심하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우리는 느껴야 생각하고, 생각해야 느낌을 동반해야 한다. 살아가면서 한 번쯤 안 하던 모험을 해보면 그냥 흘러 보낸 무수한 순간들이 나를 흔들리게 하는 사건의 순간들로 다가?지 않을까.”


Q & A


국제개발분야에서 일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문화를 만들게 하는 과정이 힘들다.

타인과 공감하고, 나 자신과 공감하는 것, 한 번에 안 된다. 나도 나를 버리고 타인도 타인을 버려야 한다. 소통은 뚫고 가는 거다. 일종의 선전포고다. 공감도 마찬가지다. 교집합이 아니다. 나는 네가 되겠다, 너는 내가 되어라. 그게 공감이다. 우리는 공감에 대해, 내가 느끼는 것을 너도 느끼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공감과 소통은 나 자신의 변화다. 매순간 뇌세포가 변하는 것처럼 매순간 변화해야 한다.

완벽하게 우리는 일치할 수 없다. 왜 못 받아들일까, 생각하는 건 오만이다. 노숙자들이 길거리에서 어떻게 잘 수 있을까 생각하는데, 그들에겐 그게 편한 거다. 그들은 그들의 세계가 있다. 선의라고 해도 내가 생각하는 걸 받아들여라 하는 건 공감하는 태도가 아니다.

각오를 해야 한다. 진짜 공감하려면 어떤 판단도 없이 거기 가서 사는 거다. 뭘 줘야지, 이런 건 위험하다.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뭔가 확 아픈 경험이 필요하다. 아프고 나면 회복하려고 할 때가 가장 민감한 순간이고,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진다. 아파야 느낀다. 아프지 않고 날로 되는 건 없다.


날 기쁘게 하는 것뿐 아니라 아프게 하는 것들도, 편하게 하는 것뿐 아니라 불편하게 하는 것들도, 익숙한 것만이 아니라 낯선 것들도 모두 우리에게 약이 될 수 있습니다.… 전과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움직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면, 이전과 다른 식으로 세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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