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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사실 전 ‘돼지’였어요

사람들은 ‘한 끼’를 때우기 위해 몸부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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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꽃이 아닌 시장기를 채우는 존재로 대접받는 시대.“꽃조차 궁하다”는 뜻의 ‘화궁’(花窮)이란 말이 인상적이다. 농촌의 꽃만 궁하지 않았다. 도시의 꽃이라는 ‘인텔리’들도 시궁창에 처박히는 일이 예사였다. 경제환경 탓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모질고 기구한 스토리가 숨어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어찌 이렇게까지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지

“할머니 제발, 밥 좀….”
할머니가 두 분 계셨다. 한 분은 그냥 ‘할머니’였고, 또 한 분은 그 할머니의 시어머니인 ‘증조할머니’였다. 증조할머니는 내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만난 1800년대 생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인 1984년 돌아가셨는데, 아흔 가까이 건강하게 사셨다.(그 분의 며느리였던 또 한 명의 할머니는 1910년대 생이었고 2000년 세상을 떠나셨다) 두 할머니들로부터 받은 과분한 귀여움은 늘 유년시절 추억창고의 한 귀퉁이를 따뜻하게 물들여준다. 귀여움이 지나쳤던 것일까? 늘 할머니들과 ‘밥’을 놓고 옥신각신했다. 이렇게 말이다. “할머니 제발, 밥 좀 그만 주세요.”

함께 식사할 때마다, 할머니들은 습관적으로 배려하셨다. “에이그 그거 먹고 배가 부르겠니? 밥 더 있다.” 그러곤 밥통을 열거나, 당신의 밥을 덜어주기 예사였다. 두 그릇을 먹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밥공기를 뒤로 숨긴 채 질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배불러요. 그만 먹을래요.” 초등학생 때건, 고등학생 때건 변함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결혼을 한 뒤에도, 할머니는 손자에게 밥을 더 못 먹여 한이 맺힌 듯 행동하셨다. 철없던 나는 짜증을 부리곤 했다. “그만 하세요. 저 돼지 아니거든요?”

아버지의 스크랩북 제3권(1961년 1~5월)에선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배고픔’이 한 가득이다. 빈곤의 시대를 헤쳐온 할머니와 아버지 세대의 정서를 이해할 만한 단서들이 널려있다. 신문 제목으로 조합해보자면 ‘배고파서 못살겠다’(한국일보)는 ‘이 믿어지지 않는 현실’(경향신문) 투성이다.



아하, 할머니가 그토록 밥, 밥, 밥 타령을 했던 역사적 근거가 여기에 있구나.

노을

숨가쁜 철새들이 온다는 소식
얘~ 복순아 불러보면 좋고
우리는 가난해도 빙빙빙
잡힐 듯 말듯 봄 노을에 배가 부르네
오늘도 하늘만 고맙다


비정

병들고 취한 세상
미운 세월에도 봄은 오는가
선거는 해도 해도
배곺은(배고픈) 산골
하늘만 우러러 참고만 사네

준비운동이다. 본격적으로(!) 배고픈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잡힐 듯 말듯 봄 노을에 배가 부르네.” “선거는 해도 해도 배곺은(배고픈) 산골.” 절박하다기 보다 정겹고 애틋하다. 아버지가 끄적거린 시 옆에 놓인 사진 속 꼬마아가씨들처럼 말이다.


봄을 스케치한 기사다. 그중 일부를 적어본다. “아른한 아지랑이가 감도는 들판에서 노란 잔디를 헤치며 이제 파릇파릇 고개를 내미는 냉이 씀바귀 달래 등을 캐어 바구니에 담는 아가씨들의 입에서는 어느덧 봄노래가 흘러나온다.”
“어느덧 봄노래”라…. 스크랩에서 이 장을 넘기면 감미로운 ‘봄노래’는 자취를 감춘다.

○… 두메마다 구비쳐 도는 ‘절량의 바람’은 서천군(서천군 마서면 옥북리) 영리부락을 스쳐 현송준(44세)씨 집 세 식구(현송준, 현씨의 처 송씨, 생후 십팔일 된 젖먹이)의 목숨을 앗아갔다. 마을 사람들의 ‘굶어죽었다’란 진단만으로 매장허가도 없이 흙으로 돌아간 이들 세 식구의 죽음을 당국에서는 병사라고 말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의사의 인술이 미칠 리 없었고 그의 시체엔 사망진단서가 붙을 수 없었다.

○… 품팔이로 근근히 여섯 식구의 생계를 이어오던 현씨는 12월 중순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현씨의 처 송씨는 이때부터 채소를 이고 겨울의 눈보라치는 산길을 걸어 ‘보리죽’ ‘밀가루죽’의 끼니를 마련했다. 이런 생활로 건강이 지탱될 리 없다. 그나마 송씨는 지난 1월3일 아들을 순산하고 누웠다. 이때부턴 맏딸인 ‘빠끔’(12세)양의 구걸로 연명해왔고 구호양곡이라곤 찐보리 닷되를 얻어먹었을 뿐이다.

○… 이렇게 살려고 바둥거리던 송씨는 지난3일에, 다시 8일후엔 18일된 젖먹이가, 그 다음날인 9일에는 현씨마저 줄을 이어 황천길에 올랐다. 이 사진에 보는 두 어린이가 살아남은 ‘빠끔’(12세)양과 ‘정기’(6세)군이다.


<한국일보 ‘뉴우스의 눈’>


병석에 누운 남편을 위해 ‘보리죽’을 마련하려는 눈보라치는 산길의 아낙네. 결국 세 가족의 비명횡사. 최악의 사례인데, 이 정도는 보통이다. 사람들은 ‘한 끼’를 때우기 위해 몸부림쳤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온 “밥은 먹고 다니냐?”는 명대사는 이런 가난했던 역사에 뿌리를 대고 있다. 4컷 만화에서 소꼽놀이를 하는 아이들에서 보듯 사람들은 밥 한 끼에 치사해졌다. ‘보리죽 가족’의 안타까운 기사 바로 옆에는 신문사 특파원이 전국의 ‘절량지대’를 누비며 입수했다는 전북 부안군 당오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 김준수 군의 글 ‘보리야 나오너라’가 놓였다.


보리야 나오너라

작년의 가뭄 작년의 흉년
벌겋게 탄 논 긴 한숨 걱정에 싸여있는 얼굴들. 형님은 울력 이러한 광경은 참으로 볼 수 없을만한 우리 생활
진학문제에 있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흉년이 와서 진학하지 못한다. 생각조차 못해 그만 상급학교는 그만,
우리가 먹고 있는 양식은 형님께서 울력에 나가 옥수수가루를 사다가 나물죽을 먹고 있는 우리 생활
우리가 먹고 있는 옥수수가루, 밥을 먹고 싶다. 어떻게 산담. 아…어서 보리야 나오너라.



초등학생이 “밥을 먹고 싶다”고 말한다. “어떻게 산담”이라며 애어른 같은 탄식을 한다. 문장은 엉망이지만, 읽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한데 왜 ‘보리야 나오너라’라고 했을까. 보리를 기다리는 마음, 이것이 바로 ‘보릿고개’다. 식량이 귀하던 시절, 5~6월이면 수확한 양식은 바닥이 났다.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 먹을 수가 없었다. 쌀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수확기 직전이라 ‘보릿고개’라 했다. 농촌의 기근을 상징하던 말이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일제강점기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고 8.15 광복 후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연례행사처럼 찾아들던…”이라는 설명이 나와 있다. 1950년대까지라고? 보다시피 ‘보릿고개’는 1961년의 스크랩까지 수놓았다.

당시 한국은 최극빈 국가였다. 60년 8월 집권한 장면 정부는 1961년부터 국토건설사업을 의욕적으로 시작한다.(<사상계> 발행인으로 박정희 시대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재야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이 사업의 기획부장이었다)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넘지만, 그때는 100달러도 되지 않았다. 노동가능 인구 9백40만 명 가운데 1백30만 명이 실업자였고, 농촌인구의 65%가 가난과 저생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통계가 있다. 당시 김영선 재무장관은 “남한 경제가 북한보다 3~5년 뒤져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게다가 1959년과 60년 두 해에 걸친 태풍과 가뭄으로 농촌마다 흉작이었다. 날씨가 농업생산을 좌우하던 때였다. 이러다보니 신문들마다 ‘절량’을 극복하기 위한 기사들을 쏟아냈다. 한 신문이 연재한 ‘춘곤천리’(春困千里)라는 시리즈 기사도 그중 하나다. 각양각색 굶주린 이들의 궁색한 사연을 소개한 칼럼이다. 동생을 업고 보리 싹을 뜯다가 밭주인에게 걸려 바구니를 빼앗긴 채 울며 돌아서는 여자아이의 사진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보리 한 됫 값 2백환을 벌기 위해 자식들을 끌고 이십 리를 걸어 조개를 캐는 마산해변까지 왔다는 창원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는 팍팍한 생계를 담담하게 드러낸다. ‘자운영꽃’에 얽힌 사연도 있다.


○…미나리인줄 알고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모자리 걸음으로 가꾸는 자운영이었다. 나물 무쳐먹기 위한 것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죽에 넣어 먹기도 하고 밀가루에 이겨 떡으로 찌어먹기도 한다는 대꾸였다. 자운영을 먹었던 것은 아무 누구할 것 없이 굶주려 허덕이던 일제 말이었다. 그 후부터는 낯선 말이 되어왔던 것이다.

○…자운영 다듬는 이 아이들을 목격한 것은 정읍에서 덕흥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였다. 공비가 최후까지 버티고 있던 골짜기… 집도 모조리 태우고 산도 벗겨먹고 칡뿌리 하나 돋지 않는다는 덕흥골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이 두메에 있어서만은 꽃은 꽃이 아니었다. 꽃보다 곱다고 느끼기 전에 꽃잎 따다 시장기를 메워야 하기 때문이다. “창꽃(진달래) 따다 밀가루떡에 버무려 먹으면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제라우” 미처 피지도 못한 진달래가 이곳 친산에서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화궁(花窮)이련가.

○…방랑시인 김삿갓이 이 진달래꽃떡(花煎)을 먹어보고 “한 해의 춘색(春色)을 뱃속에 전했다”고 읊었다지만 몇 갑삭(甲朔)의 세월이 지난 오늘 어느 한 시인이 이 두메의 진달래꽃떡을 먹어보았더라면“한 해의 굶주림을 뱃속에 전했다”고 읊었을 것이다.


꽃이 꽃이 아닌 시장기를 채우는 존재로 대접받는 시대.“꽃조차 궁하다”는 뜻의 ‘화궁’(花窮)이란 말이 인상적이다. 농촌의 꽃만 궁하지 않았다. 도시의 꽃이라는 ‘인텔리’들도 시궁창에 처박히는 일이 예사였다. 경제환경 탓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모질고 기구한 스토리가 숨어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어찌 이렇게까지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지.


어느 ‘인테리’의 참회

○… “나흘을 굶었다. 정확히 말해서 96시간을 물로만 살았다. 기적이었다. 단식이라는 화려한 목표(?) 때문에 굶은 것이 아니었다. 배를 채워줄 그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나흘을 굶으며 살아온 기적이 결국은 나로 하여금 도적이라는 ‘레텔’을 붙이고 말았다. 나흘 동안 내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던 지성이라는 긍지는 결국 밥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현실에 쓰러진 창백한 ‘인텔리’- 전직 대학 강사 이(이호겸)씨는 이렇게 자신의 수기를 시작하고 있다.
-- 도둑 낙인 찍힌 실직 대학강사의 경우
전에는 오히려 가난을 높이 찬양할 줄 알던 그의 지성은 5년간의 실직 속에서 결국 가난에 져버린 비참한 인생의 ‘피에르’? 만들고 말았다.

○…경북 달성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씨는 일본의 R대학을 졸업한 후 해방과 더불어 군정청 공보과에 근무하였다.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주로 미군 계통을 전전하였으며 그 후에는 시내 H고등학교 주임교사를 거쳐 Y 대학 영문학 강사라는 안정된 지성인이 되었다.원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4남매의 따뜻한 아버지였으며 부러운 것을 모르던 그는 자기의 학구에만 몰두해왔다.

○… 그러나 인생은 너무도 짖궂고 냉혹하였다. 그가 죽을 때까지 배우고 가르치겠다고 스스로 꿈꾸어오던 교단에서 축출당하고 만 것이다. Y대학의 재단 분규가 소란해지면서 그는 학교를 물러나야했다.

○… 아직도 자신을 괴롭히는 조그마한 체면은 그로 하여금 아무도 자기의 신분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노동이라도 해야겠다는 또 다른 비극의 씨를 뿌려주었다. 지성을 버리기로 한 그의 비장한 결심의 첫 번째 선택지는 부산이었다. 낯선 부산 거리를 헤맨 지 사흘- 아내가 마련한 이잣돈 일만오천환이 그만 소매치기당하고 말았다.
웃옷을 벌어 이천환에 팔았다. 하루 숙박 일백환짜리의 노동자 합숙소에서 하룻밤을 지샌 그는 이젠 구직보다 서울로 올라갈 차비가 바빴다. 허약한 몸으로 지게벌이도 할 수 없는 그는 사흘 나흘을 굶기 시작했다. 물 한 모금으로 시장기를 메우고 나흘을 노숙한 그는 길에서 우연히도 옛 제자를 만났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로 제자에게 구걸을 요청하자 그 제자는 다음날 P대학 병원에서 만나자고 말한 후 달아나듯 피해버렸다. 굴욕을 참으며 하루를 지새우고 다음날 병원으로 찾아갔으나 그 제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일루의 희망마저 사라진 그가 맥없이 돌아서는 순간 검은 전화기가 유혹하듯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것만 있으면! 그 다음은 아무런 의식도 없었다. 다만 저것으로 밥을 만들자는 본능의 속삭임만이 그의 온 신경을 마비시킬 뿐이었다.

○… 경찰서 유치장에서 10여일- 도둑이라는 죄명을 받아가며 살아갈 의욕마저 상실한 그에겐 뜨거운 참회의 눈물만이 흐를 뿐이었다.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된 후 검사의 정상참작으로 다시 세상의 햇빛을 보게는 되었으나 ‘도둑선생’의 낙인이 찍힌 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 무섭도록 냉혹한 인정은 그를 더 한층 멀리만 하고 말 것인지?


<대한일보>


“나흘 동안 내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던 지성이라는 긍지는 결국 밥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로 제자에게 구걸을 요청하자….” 이 두 문장을 보다가 2011년1월 생활고로 숨진 고 최고은 감독이 떠올랐다. 이럴 때, 밥은 악귀다.
스크랩북 맨 마지막 장엔 ‘구직’이라는 간판을 몸에 달고 도심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실직자가 등장한다.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구직난을 견디다 못해 거리의 동정을 얻으려’ 한 그는 “간첩공작으로 오인받겠다”는 행인의 충고를 듣고서야 자리를 뜬다.


한나절을 벽처럼
말없이 서 있는 구직자


“한 나절이나 이렇게 서 있었어요.” 허름한 작업복으로 몸을 감싸고 깊숙히 ‘캡’을 눌러쓴 30대의 한 사나이가 9일 하오 번잡한 시내 미도파 어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구직이라고 쓴 커다란 간판을 ‘샌드.위치맨’처럼 걸고 벽처럼 말없이 서 있는 모습이 오가는 행인들의 눈을 끌긴 했지만 “공사현장을 더듬어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일자리가 없더라”고 체념해버린 이 문제의 구직자는 본적이 충남 논산이요 33세의 홀아비라는 것만 밝히려다가 끝내는 윤(윤여백)이라고 실토.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구직난에 견디다 못해 감연히(?) 거리의 동정을 얻으려는 그에게도 희소식(?)이란 전혀 없었다는 것. - 일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일진대 자기?게 주어진 권리마저 행사 못하는 서글픈 현실이 새삼스레 세상의 부조리를 통곡한다. “왜 국토개발사업에 나가지 않았우?” “거기도 틀렸더군요.” “무슨 기술을 갖고 있는지?” “ 아무거나 다 할 줄 압니다.”…과히 굶주린 음성은 아니었으나 그는 일곱식구의 ‘파트론’이라고 강조. - “여기 우체통처럼 서 있다간 간첩 접선공작으로 오인받겠우?” 어떤 ‘잠바’ 청년이 던진 이 말에 깜짝 놀란 듯 청년은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


<경향신문>


당시의 실업률은 25%에 가까웠다. 네 명 중 한 명이 백수였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1년 7월 현재의 실업률은 3%다. 중요한 문제는 ‘구직’ 여부가 아니다. ‘직’의 ‘질’이다. 그래도 1960년대엔 비정규직은 없었다. 지금은 경제활동인구의 1/3이 훨씬 넘는 580만 명이 비정규직 신분이다. 이들의 평균 임금은 정규직 임금의 50~60%에 불과하다. 현실사회에선 “밥을 더 먹으라”고 한없이 퍼주는 푸근한 할머니의 인심을 찾기 어렵다. 짠돌이 마귀할멈이 주걱에 붙은 밥알을 컴퓨터로 세고, 신분에 따라 차별해서 주걱질을 하며, 어떻게 하면 밥알을 하나라도 덜까 궁리한다.

다시 ‘밥상머리’ 이야기로 돌아간다. 아버지도 그랬다. 할머니 수준은 아니었지만, 가끔 식탁에서 수저를 들기 전 ‘밥’에 관한 잔소리를 하셨다. 전쟁 때로 거슬러 이야기판을 키우기도 했다. “너희들은 배고픔이 뭔지 모른다”고 했다. ‘전쟁’과 ‘기아’는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는 에피소드였다. 지겹고 뻔한 말씀이라, 새겨듣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완전히 흘려버리지는 않았나보다. 자식들이 식사 시간에 밍기적거릴 때, 아버지가 된 나는 다른 방식으로 훈계질을 한다. 전쟁과 보릿고개를 논하는 대신, 북한과 아프리카의 불쌍한 어린이들을 소재로 삼는다. “배부르게 먹는 걸 고맙게 생각하라”는 말도 지껄인다. 아버지를 비웃었던 나를 비웃어야 마땅하다.

아버지의 스크랩으로부터 정확히 50년이 흘렀다. 이젠 ‘밥은 먹는데도’ 꼬르륵 소리의 데시벨은 더 커졌다. 아니 더 이상 밥으로 허기를 해결하지 않는다. 나도 그랬다. 어린 시절 밥을 더 주려는 할머니에게 “난 돼지가 아니다”라며 고상한 척 했지만, 사실 돼지였다. 집에서 주는 밥은 적당히 먹었지만, 밖에서 다른 음식에 탐욕을 부리지 않았던가. 어른들이 먹지 말라는 것일수록 게걸스럽게 찾았다. 음식만이 아니었다. 나이키 신발 등 친구들이 가진 건 웬만하면 손에 얻으려 했던 간절하고 집요했던 물욕. 그 모든 걸 ‘밥’이 아닌 ‘사료’(飼料)라고 칭해본다. 나를 동물농장의 돼지로 만든 건 사료를 생산하는 자본주의의 음모라고 변명을 해보지만 말이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용광로’에서 사람들은 배가 고프다. 다른 말로는 ‘상대적 결핍’이다. 남과 비교하면 초라해진다. 초등학생들이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화려한 소비시대의 역설이다. 그 반대편에선 하루에 4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대한민국 자살률, 33개 OECD 국가 중 1위) 다시 아버지의 스크랩북 제3권 맨 앞장을 펼쳐본다. 고양이 그림과 함께 시 한편이 적혀있다. 제목은 ‘괴로운 하품’이다. 읽어보면, 하품 치고는 과격하다. 제목을 ‘돼지들의 하품’이라고 바꿔보면 어떨지 모르겠다.


괴로운 하품

답답하고 지루한 세월이 하품을 한다
미련하고 무지한 방객들이 맞절을 하고
장터엔 빈 술병들만 낮잠을 잔다
가난한 백성-
가난한 인생-
가난한 삿대질만 온 종일 한다

배곺은 치맛자락은 빙긋이 웃고
자유보다는 빵을-
혁명도 개뿔도 아무것도 모른다

차라리 비웃고 죽어라
차라리 침을 뱉고 죽어라
위정자들은 모두가 미친놈이다


라인

참고한 책

『1960년대』(김성환 외 지음, 거름, 1984)
『장면?윤보선?박정희-1960년대 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정윤재 외 지음, 백산서당, 2001)
『제2공화국과 장면』(이용원 지음,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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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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