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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남자에서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다

내가 이 남자들을 좋아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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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학생과 사건취재 기자의 기묘한 우정(?) - 1971년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좌파 운동권 학생들에 의한 자위대원 살해사건을 배경으로, 이 사건의 주모자인 운동권 학생과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의 만남을...


영화 포스터 때문에 걸음을 멈춘 건 꽤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마이 백 페이지(My Back Page)’라는 영화였습니다. 학교 서점 계단 모퉁이에 붙어 있던 포스터 속에서 제가 좋아하는 두 배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눈빛광선’을 쏘아내고 있더군요. 츠마부키 사토시와 마츠야마 켄이치. 이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다는 것 만으로 ‘도대체 어떤 영화일까’ 궁금증이 마구 치솟았죠.


영화는 다소 진지합니다. 1960~70년대 초 치열했던 일본의 학생운동을 소재로 한 일종의 ‘후일담 영화’입니다. 1971년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좌파 운동권 학생들에 의한 자위대원 살해사건을 배경으로, 이 사건의 주모자인 운동권 학생과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의 만남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 속 기자의 실제 모델인 ‘아사히 저널’ 기자 출신 작가 카와모토 사부로가 쓴 논픽션 소설 ‘마이 백 페이지-어느 60년대의 이야기’가 원작이라고 합니다.

대학 때부터 학생운동에 심리적으로 동조했던 젊은 기자 사와다는 “폭력혁명을 준비 중”이라고 말하는 과격파 운동권 학생인 우메야마를 취재하게 됩니다. 그의 치기에 가까운 열정과 자신감에 사와다는 기자로서의 관심과 함께 인간적인 호감을 갖게 되고, 두 사람은 기묘한 우정(?)을 나누게 되죠. 우정이라는 말에 물음표를 붙인 이유는 영화를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내용설명은 생략합니다). 영화는 사와다의 시선을 통해 진행됩니다. 역사의 현장에 서 있지만 주체가 아닌 전달자의 역할 밖에 할 수 없는 기자의 숙명, 거기서 생겨나는 묘한 우월감과 좌절감이 담담하고 쓸쓸하게 그려집니다.

‘마이 백 페이지’라는 제목은 영화에도 등장하는 밥 딜런의 노래 제목에서 따 왔는데요. 제목처럼 영화는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던 한 순간, 젊음을 바쳤던 한 때를 뒤돌아봅니다. 다소 어두운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주변 인물들과 유머러스한 장면들이 영화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데요. ‘린다린다린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등 ‘심심한 듯 재미있는’ 영화들을 주로 만들어왔던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역량일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훌륭한 두 명의 주연 남자 배우 때문입니다. 먼저 사와다를 연기한 츠마부키 사토시의 놀라운 성장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저 ‘귀여운 남자아이’ 같았던 그는 서른 살을 맞는 지난해 출연한 이상일 감독의 영화 ‘악인’과 이번 영화 ‘마이 백 페이지’로 ‘연기파 배우’의 이미지를 확실히 굳혔습니다. ‘마이 백 페이지’의 마지막 장면, 사와다는 젊은 시절 잠입취재에서 만났던 야쿠자 출신 친구를 우연히 식당에서 마주치게 됩니다. 조직에서 나와 가족들과 함께 작은 술집을 경영하는 그의 삶을 보며 사와다는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하는데요. 차곡차곡 쌓여온 주인공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아주 어려운 이 장면을 츠마부키는 훌륭하게 표현해냅니다.


보통 일본남자? 츠마부키 사토시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강력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람들은 츠마부키 사토시를 이야기할 때 ‘보통 일본남자를 대표하는’이라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생각해보면 그가 지금까지 연기해 왔던 배역 중에는 개성이 아주 강하거나, 독특하거나 기괴한 역할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첫 주연작인 영화 ‘워터 보이즈’를 비롯해서 드라마 ‘오렌지 데이즈’ ‘슬로우 댄스’ 등 대부분의 작품에서 용기 없고 소심한, 튀지 않는 보통 남자를 연기했죠. 심지어 야쿠자(‘매직 아워’)나 살인범(‘악인’)으로 출연한 작품에서조차 그는 일본남자들의 ‘초식성(草食性)’을 극대화한, 우유부단하고 겁 많은, 그래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고 마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팬들에게 그를 처음 알린 작품이 2003년 개봉한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었을 겁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이 영화에서 그는 장애가 있는 소녀를 사랑하는 평범한 대학생 츠네오 역할을 맡았죠. 이 영화에서의 츠네오도 많은 것을 쉽게 받아들이고, 또 그만큼 쉽게 포기하는 유약한 남자입니다. 어느 아침 언덕길에서 낡은 유모차에 타고 있던 다리가 불편한 소녀 조제와 마주친 츠네오는 퉁명스런 말투를 가진 조제의 독특한 매력에 빠져듭니다. 영화는 사랑에 빠진 조제와 츠네오가 1년간 사귀다 헤어지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리게 되죠.

사실 이 영화에서는 이케가와 치즈루가 연기한 여주인공 조제의 캐릭터가 매력적이었습니다. 조제는 장애 때문에 폐쇄적인 삶을 살면서도 자학하거나 억지로 밝은 척 하지 않는 ‘쿨한 소녀’로 그려지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당히 밝힐 줄 알고, “내 애인을 빼앗은 너의 장애가 부럽다”는 츠네오의 전 여자친구(심지어 이 역할은 우에노 주리였죠)에게 “그래? 그럼 너도 두 다리를 잘라버려!”라고 쏘아붙일 줄도 압니다.

그에 비하면 츠마부키가 연기한 츠네오는 따뜻하고 착하지만 너무 평범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늘 업고 다니던 조제의 무게를 느끼고 지쳐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츠네오. 결국 그녀를 떠나 예전 여자친구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여느 아침과 똑같은 표정으로 이별인사를 나누고 집 밖으로 나간 츠네오가 길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쿨럭 울음을 쏟아내는 장면은, 어쩌면 너무 평범하고 리얼해서 가슴을 움직입니다. 츠네오의 마지막 나레이션은 이거였습니다. “우리의 이별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 이유는 한가지다. 내가 도망쳤다. 헤어지고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여자도 있지만 조제는 다르다. 내가 조제를 만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쉽게 지치고 싶지 않았지만 지쳐버린 데 대한 실망,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줄 알면서도 도망칠 수 밖에 없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뒤섞인 이 통곡 장면은 ‘평범남’ 츠마부키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강렬한 장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난해 일본 아카데미에서 5개 부분을 수상한 영화 ‘악인’은 그의 또 다른 ‘평범함’이 빛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 속에서 그는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년인데,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여자친구와 함께 도망을 치게 됩니다. 츠마부키 사토시는 이 영화에서 살인범 역할을 위해 체중조절과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원래의 밝은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버렸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연기하는 살인범은 너무 평범하고 유약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꾸만 건드립니다.

특히 늘 감정을 억누르고 참아왔던 주인공이 자신을 무시하는 커플에게 살의를 품는 순간의 그 복잡미묘한 표정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츠마부키 사토시라는 배우가 지닌 소중한 평범성 덕분에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의 경계는 과연 무엇인가’를 묻는 이 작품의 무게 있는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이죠.


일본 영화계의 홍반장? 마츠야마 켄이치


츠마부키와는 정반대로 마츠야마 켄이치(줄여서 ‘마츠켄’으로 불립니다)는 그간 평범하지 않은, 쉽게 소화할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만을 줄기차게 맡아왔습니다. 사실 영화 ‘마이 백 페이지’에서도 운동권 학생을 연기한 마츠야마 켄이치의 역할이 아주 컸습니다. 뭔가 위험한 냄새를 풍기면서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 자만과 자학이 엇갈린 젊음의 무모한 열기를 마츠켄이 너무 훌륭하게 표현해낸 것이죠. 이 어려운 역할을 소화할 배우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마츠켄은 최근 몇 년간 ‘과연 이 역할을 누가 해낼 수 있을까’ 싶은 배역들만 쏙쏙 골라서 맡아온 ‘일본 영화계의 홍반장’이었네요.

그가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린 영화 ‘데쓰노트’의 L 역할만 해도 그렇습니다. 만화니까 표현이 가능했을 법한 기괴한 이미지의 L을 실제 배우가 그렇게 훌륭하게 연기할지 누가 알았을까요. 개인적으로 그에게 빠져든 작품은 역시 만화를 영화로 옮긴 작품 ‘디트로이트 메탈시티’였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네기시는 무대 위에선 악마의 메이크업에 이마에는 ‘살(殺)’자를 새기고, 과격한 노래와 선정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데스메탈(Death metal)’계의 교주 ‘크라우저 2세’입니다. 그러나 화장을 지우고 가발을 벗으면 버섯머리를 한 ‘우엉남(우엉처럼 가느다란 몸매와 소심한 마음을 가진 남자)’으로 돌아오죠.

팬들에게는 연쇄살인범에 마약중독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술담배도 하지 않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도 못 하는 순진남입니다. 그의 꿈은 귀엽고 말랑말랑한 사랑 노래를 부르는 가수지만, 어쩌다 보니 “여자는 나의 노예, 인간은 모두 고깃덩어리” 같은 가사를 내뿜는 데쓰메탈계에 발을 들였고, 거기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 극단적인 역할을 과연 누가 연기할 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거기서 또 마츠켄이 나타나 네기시가 가진 순진함과 광기의 이중성을 깜찍하게 재현해 준 것이죠.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나나’의 노란 머리 베이시스트 신 역할도, ‘마이 백 페이지’를 만든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전작 ‘린다린다린다’에서 배두나에게 서투른 한국말로 사랑을 고백하는 소년도 마츠켄이었습니다. 작품마다 이미지가 너무 달라 같은 배우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거죠. 영화화가 결정된 순간부터 ‘누가 주인공을 맡을 것인가’가 화제였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 와타나베 역할로 발탁된 것도 결국 마츠켄이었습니다.

이 영화 캐스팅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뒷말이 무성했지만, 어설펐던 여배우들의 연기에 비해 그가 연기한 와타나베는 꽤 안정되었다는 것이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어떤 어려운 숙제를 던져도 독창적인 답안지를 써내는 배우. 특정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유연하게 변신하는 배우. 요즘 일본 영화계가 가장 신뢰하는 남자배우가 마츠켄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영화 ‘마이 백 페이지’는 10월에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합니다. 영화제 가시는 분들, 꼭 챙겨보시길 권합니다. 츠마부키 사토시와 마츠야마 켄이치. 이 두 배우가 앞으로 오래오래 일본 영화를 이끌어갈 거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두 사람이 주고 받는 팽팽한 에너지를 한 화면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도 많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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