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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이 만난 사람들]“광화문 현판, 시대정신이 들어 있는 글씨가 아니라 감동 없는 문패” - 유홍준 교수

대한민국의 역사는 누가 증언하지 않으면 오해되는 게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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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자 유홍준(62세, 명지대)교수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주변의 흔한 것, 무미건조한 것이 그의 입과 손을 거치면 소중한 ‘국보’가 되고 반짝이는 ‘문화유산’이 된다. 그는 무엇보다 연구실을 뛰쳐나온 학자다. 삶과 역사의 현장인 전 국토를 발품을 팔며 누볐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그의 모토는 우리 땅과 문화유산을 살아있는 지식창고로 끌어올렸다. 한국미술사의 대중화에 그만큼 큰 기여를 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에 이어 신간 『국보순례』를 낸 유 교수를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유 교수는 미술사 연구와 집필을 ‘인문학의 실천’이라 잘라 말했다.

미술사학자 유홍준(62세, 명지대)교수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주변의 흔한 것, 무미건조한 것이 그의 입과 손을 거치면 소중한 ‘국보’가 되고 반짝이는 ‘문화유산’이 된다. 그는 무엇보다 연구실을 뛰쳐나온 학자다. 삶과 역사의 현장인 전 국토를 발품을 팔며 누볐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그의 모토는 우리 땅과 문화유산을 살아있는 지식창고로 끌어올렸다. 한국미술사의 대중화에 그만큼 큰 기여를 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에 이어 신간 『국보순례』를 낸 유 교수를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유 교수는 미술사 연구와 집필을 ‘인문학의 실천’이라 잘라 말했다.

정재승 : 어떻게 미술사를 공부하게 됐는지요.
유홍준 :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 권유로 미학과에 들어갔으나 기대와 달라 바로 흥미를 잃었어요. 어느 날 미학과 시간강사였던 김윤수 선생님이 학림다방으로 나를 불러 “자네는 왜 미학을 포기했는가”라고 물었어요. “취미에 맞지 않습니다” 했더니 “대학에서 선생님이 가르친다고 공부하고, 안 가르친다고 안 하는 건 잘못된 거지”하고 하셨죠. 그리고 조르지오 바사리(1511~74)의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 다이제스트 판을 추천해주셨어요. 그걸 보고 미술사를 맛보게 됐죠. 군대에서 한국미술사를 공부하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잡지사 기자시절, “글은 쉬워야 한다”

정재승 : 잡지사 기자로서의 경험도 도움이 되었겠죠.
유홍준 : 엄청난 경험이었죠. 정 교수도 대학 때 잡지기자를 하셨다죠.

정재승 : 네.
유홍준 : 잡지 기자는 신문 기자와 다르잖아요. 내가 이해되지 않는 글을 독자에게 알려줄 수가 없죠. 그래서 글 어렵게 쓰는 사람들을 정말 싫어했어요. 글은 쉬워야 한다! 소통이 되어야 한다는 걸 절감했죠. 정말 많은 필자들의 글을 고쳤던 것 같아요. 아도르노(Adorno, 1903~1969)의 말에 따르면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 1892 ~ 1978)가 그렇게 해박한 지식을 갖고도 단 한 번도 자기를 노출을 하지 않은 건 ‘영웅적 참을성’이라도 했잖아요.

정재승 : 노출을 하지 않았다는 건, 글을 안 썼다는 얘기인가요.
유홍준 : 그렇죠.

정재승 :『문학과 예술사회사』를 쓰기 전까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유홍준 : 네. 이후에는 저작이 있었는데 전에는 쓰지 않았어요. 아놀드 하우저의 경우 먹고 살기 위해 영화사에서 홍보 담당 직원으로 일했어요. 이런 작업 역시 그에게 도움이 되었는데요. 당시를 떠올리며 그는 “이 영화를 틀면 성공할 것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작업은 하나의 예술작품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임상 실험하는 것과 같았다!”고 루카치(Lukacs, 1885~1971)와의 대화에서 말하기도 했죠.

저도 잡지 기자로 일 하며 많은 걸 배웠어요. 일단, 어렵게 쓰는 글은 문제가 있다는 거였죠. 당시, 비평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현대적 사조에 처지지 않느냐에 관심이 있었어요. 서양 미술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평론가의 무기였죠. 그런데 난 너무나 회의적이었어요. 예술은 자신의 감정을 발현하는 건데 어찌 서양미술사만 강조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재승 : 대중적 글쓰기를 굉장히 잘하시잖아요. 타고난 재능인가요. 기자로 일하며 배우신 건가요.
유홍준 :『계간미술』 주간이 ‘분수대’를 쓰던 홍사중씨였어요. 국장은 최종률씨였고. 두 분이 월수금, 화목토로 분수대를 썼는데. 79년인가 국방부가 ‘분수대’ 책을 낸다는 거예요. 정훈장교용으로 역사적 흐름에 따른 분수대를 엮는다는 취지였죠. 최종률, 홍사중씨가 반씩 나눠 원고료를 받았는데, 홍사중 주간이 막상 쓰려니 쓰기 싫은 거예요. 역사 기록을 다 찾아 써야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귀염성 있게 대들었죠. “홍 주간님, 세상에는 하청이라는 게 있습니다. 저하고 차장한테 하청을 주세요!”라고 했죠. 그렇게 하청을 받아 냈어요. 10년간 쓰신 분수대를 보니 군사, 핵 관계 내용이 두 달 치는 나오더라고요.

그걸 200자 원고지로 옮겨 쓰면서 얼마나 그 문장들이 아름다운지 알게 되었어요. 필사였죠. 200자 원고지 6매에 기승전결을 넣는 법, 이미지를 축적, 묘사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기자 생활 하면서 글 쓰는 법을 정말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60년대 후반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 창간되며 좋은 글을 많이 읽은 것도 도움이 되었어요. 리영희 선생님, 백낙청씨 등 멋있는 글이 정말 많았어요.




정재승 : 95년 광주비엔날레 이야기로 넘어갈까요. 선생님께는 어떤 의미였나요.
유홍준 : 사실, 김영삼 대통령이 광주에 가려고 만든 잔치였어요. 광주항쟁 이후로 대통령은 광주에 못 갔거든요.

정재승 : 전두환, 노태우씨야 이해가 되지만. 그 다음은 갈 수 있지 않았나요?
유홍준 : 명분이 필요했던 거죠. 그러다 찾은 게 예향 광주에 어울리는 미술비엔날레였어요. 11개월 만에 급조한 전시였죠. 지금은 아주 잘 되고 있죠.

대한민국의 역사는 누가 증언하지 않으면 오해되는 게 많아…

정재승 : 이 엄청난 전시가 그렇게 만들어졌다니 충격적인데요.
유홍준 : 더 충격적인 것도 많아요. 세종문화회관이 만들어진 배경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체육관에서 뽑지 않으려고 지은 집이에요. 전에는 매일 장충체육관에서 했죠. 대한민국의 역사는 누가 증언하지 않으면 오해되는 게 많아요.

어쨌든, 민중 미술도 한 고비 넘어갔고 그토록 원하던 민주화도 됐고, 한 편에선 장르 파괴가 일어났습니다. 조각, 회화, 공예가 평면, 입체, 설치, 비디오 이런 식으로 해체되었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비평은 인상 비평, 두 번째는 재단 비평인데요. 나는 비평적 증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동시대 작가들이 어떤 예술적 창작 동기에서 작품을 만들었는가를 비평가가 증언해주고, 기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미술사적 기록이니까요. 작품이 잘됐다 못됐다보다 훨씬 중요한 거죠.

예컨대,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보고 멋있다 어떻다 쓴 거는 별 도움이 안돼요. 김홍도가 청주에서 누구를 만나 술을 마셨다는 기록은 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거든요. 그게 바로 비평적 증언이죠. 그래서 작가론, 현장 르포를 많이 썼어요. 기자가 르포를 쓰듯, 작가에 대해 쓰고 내 생각을 적었죠.

사실, ‘컴퓨터 아트’처럼 새로운 영역을 보면 발상을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영남대 교수 할 때였는데. 영남대 박물관 민속원 앞에 논이 있었어요. 중간고사를 보지 않는 대신 7명이 한 조가 돼서 그 논에 세울 허수아비를 만들어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결과물이 기가 막힌 겁니다. 막대 위에 컴퓨터 하드를 마름모로 세워놓은 아이, 광주리, 삼태기, 농기구만 갖고 만든 아이, 별의별 작품이 다 나옵디다. 그걸로 평택 농민 축제에 찬조축제를 나가기도 했죠.

그런 수업을 한 이유가 있었어요. 입시 준비를 하면서, 매번 같은 연습만 하니 그림이 다 죽는 거에요. 그런 애들 보고 “너네 마음대로 해봐라!”고 하니 너무 신나하는 거죠. 그러면서도 “내가 이 아이들의 작품을 보고 예술로서 어떤 가치를 갖고 어떻게 발전할 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없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결국, 미술 평론을 포기하고 미술사를 하기로 했죠.




정재승 : 자연스럽게 책 이야기로 넘어가볼까요. 가장 의미 있는 저작을 꼽아 주신다면요.
유홍준 : 『화인열전』과『완당평전』이죠. 공부하는 후배들이 좋아하는 책이기도 해요. 내 석사논문이 ‘능호관 이인상의 생애와 예술’이었습니다. 18세기의 문인화가죠. 그분 그림이 굉장히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멋있어요. 미술사나 미술평론을 공부하면서 처음에 가졌던 콤플렉스는 남의 도움 없이 어떤 작품을 보며 감동했으면 그런 거였어요. 그 첫 작품이 능호관(凌壺觀) 이인상의 설송도(雪松圖)였어요. 눈 덮인 소나무 그림이죠.

서양미술사는 기본적으로 편년사(編年史)로서의 미술사로 출발했어요. 기록을 중심으로 쓰인 거죠. 그러나 실제로 미술사를 독립해서 한 사람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였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쓴 사람이죠. 그가 바젤 대학에서 처음으로 ‘미술사’라는 강좌를 개설했어요. 그는 문화사로서 미술사 내지 양식사로서 미술사를 제시했습니다. 이후 바젤대학에서는 형식사로서의 미술사, 스타일에 관한 연구를 했죠. 이에 반해 비엔나 학파는 정신사로서의 미술사를 합니다. 고딕양식이 갖고 있는 정신사적 의미 같은 거였죠. 그리고 하우저의 사회사로서 미술사, 파노프스키의 도상학(圖像學)으로서 미술사 등으로 발전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지 못했어요. 깊은 미학적, 사색적 고민을 못했죠. 근대적 학문체제로서의 한국 미술사는 서양의 도움을 받은 게 사실입니다마는 이런 방법론은 들어오지 않았어요. 서양에서 동양 미술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 단계로는 갈 수 없었고요. 그래서 양식의 상호관계를 밝히거나 편년사로서 미술사에 머물면서 작품에 대한 인상비평을 가하는 정도에 그치는 거죠.


20명의 한국 화가 전기(傳記) 작업 하는 게 꿈

그런데 파놉스키(Panofsky 1892-1968)가 쓴 미국미술사학회 50주년 기념 강연의 제목이 ‘인문학의 실천으로서의 미술사’였습니다. 그 글을 읽다보니 이런 내용이 있어요. “인간성이라는 것이 옛날에는 신성에 반대였다. 어느 순간엔 야수성에 대한 반대로 인간의 가치를 말한다. 우리 인문학자는 인간적 한계를 인정하면서 인간적 가치를 실현했던 것을 추구하는 거다. 인문학자는 필연적으로 역사학자일 수밖에 없다.” 너무나 인상적이었어요.

김윤수 선생에게 받았던 책도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이라 그랬는지 나는 죽기 전까지 20명의 한국 화가의 전기를 쓰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죠. 그런데 회화사 전공한 사람이 “단원에 대해 있는 대로 이야기 해봐라!” 그러면 5분도 말을 못 할 정도로 준비가 안 되어 있었어요. 그 길로 규장각에 가서 18, 19세기 저서 중 그림에 관한 문헌자료들을 조사하고 복사를 했습니다. 친구 빌딩의 옥탑방에 “겨레미술공부방”이라는 간판을 단 연구실이 있었어요. 제 연구실 책꽂이 위에는 작가별로 자료를 저금하듯 모아둔 라면상자 12개 있었습니다. 10여년 이렇게 모은 것을 기초로 화인열전을 90년 여름호부터 3년간 <역사비평>에 연재하게 되었죠.


조선일보에 “유홍준의 국보순례”라는 꼭지로 120여 회에 걸쳐 연재 중인 글을 모아 새롭게 정리한 책


정재승 : 자료가 없을 줄 알았는데, 꽤 풍성했군요.
유홍준 : 헤매서 찾은 거죠. 결정적으로 이걸 쓸 수 있었던 건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의 할아버지 덕분이었어요. 그 분이 남태응(南泰膺)의 『청죽화사(廳竹畵史)』라는 책을 갖고 있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죠. 여기다 임형택 선생님이『일몽고(一夢稿)』라는 글을 알려주셨죠. 이 두 자료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화인열전』에 부록으로 원문과 함께 번역해서 실어두었어요. 다른 사람도 자료를 공유할 수 있게 하려고요. 일곱 분의 전기를 쓰고 이제 겸재 정선을 쓰면 책으로 내려고 했는데 갑자기 다른 일감이 생겼어요. 월간『사회와 사상』이 폐간되며 진보적인 사람들이 글 쓸 지면이 없어진 때가 있었어요. 그러면서 93년 4월에 월간 『사회평론』이 만들어졌죠. 저도 편집위원을 했어요. 돈 없이 어떻게 책을 만들려고 하느냐는 우려가 많았어요. 원고료도 제대로 줄 수 없었거든요. 그때 편집위원 중 한 분인 제 친구 안병욱 교수(가톨릭대)가 당시 제가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하면서 젊은이들 데리고 답사 다닌 내용을 쓰라고 권한 거죠. 원고료 안 주고 글을 받을 수 있으니까 부려먹은 셈이었죠.

결국 『사회평론』은 1년도 못 가서 폐간되었고『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창비에서 출간되었어요. 먼저 집필한 『화인열전』 보다 먼저 나왔어요. 그 다음에는 답사기 2권, 3권을 계속 낸 거죠. 또 북한답사기도 두 권 내고. 그러는 10년 동안 『화인열전』은 묵은 원고가 되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다행한 일이었어요. 바로 그 10년 사이에 신진학자들의 논문이 많이 쏟아졌어요. 홍익대 대학원과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출신들이 많은 새로운 자료와 그림을 발굴했어요. 만약 이 자료를 보지 않고 10년 전에 출간했다면 개정판 내기 바빴을 거에요. 완전히 새로 집필해서 2000년에 펴낸 것이『화인열전』입니다. 『역사비평』에 다시 화인열전을 기고하기 시작해서 다룬 아홉 번째 작가가 추사 김정희인데요. 워낙 볼륨이 커서 『완당평전』 1, 2, 3권으로 냈습니다. 답사기를 빨리 끝내고 다시 『화인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앞으로 15명은 더 쓰겠죠. 동시대에 살았던 작가들, 민중미술가들의 전기까지 쓰고 싶고요.


정재승 : 누가 그 후보일까요?
유홍준 : 안 들어간 사람들이 서운해 할 텐데요. 정 꼽아야 한다면 신학철하고 임옥상, 오윤은 들어가야 하겠죠.

제 전공은 답사기도 아니고 막연한 미술사도 아닙니다. 진짜 전공은 조선시대 회화사입니다. 아놀드 하우저(Arnoldhauser, 1892~1978)의 경우 한때는 정통 미술사가로서 평가가 부정되기도 했습니다. 통사만 쓰고 전공이 없었다는 거였죠. 결국 뉴욕에 가서 그가 마지막에 쓴 게 『매너리즘 연구』였습니다. 거기서 “변혁의 시절에 예술은 어떻게 자기 변신을 했는가?”라는 질문을 했는데요. 매너리즘은 그림 속의 자의식을 반영했던 첫 번째 장르라는 뜻이었죠. 근대 미술의 시초가 거기 있다는 멋진 해석을 했습니다. 내 전공은 조선시대 회화사입니다. 가장 애정을 쏟은 것 역시 그렇습니다.


전편의 명성에 걸맞은 인간, 역사, 예술이 어우러진 답사기 시즌 2


“인문학의 위기, 전기(傳記)의 전통이 끊어져서가 아닐까?”

정재승 : 인문학의 실천으로서 미술사를 하고 계신데요. 그런 의미에서 화가들의 전기를 쓰시는 거죠?
유홍준 : 그렇습니다. 인문학이 위기라고 하는데. 왜 멀어졌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만큼 투자를 안했고 뛰어난 인물도 적었습니다. 인문학 자체에서 반성도 있어야 하는데요. 무엇보다도 ‘전기(傳記)의 전통’이 끊어진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합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장 잘 반영하는 건 전기에요. 사실 온라인 서점에 있는 ‘인물’이라는 분류법도 ‘전기’로 바꿔야죠. 서양에서는 전기의 전통이 막강하거든요. 자기 증언을 위해서 스스로 자서전도 많이 쓰죠. 후세를 위해서 말이죠. 심지어 르윈스키도 썼잖아요?

정재승 : 그런 사람도 쓰기 때문에 예스24에서 전기가 아닌 인물이라고 분류하나 봐요.
유홍준 : (웃음) 아무튼 우리에겐 전기가 너무 없어요. 세종대왕, 원효대사, 율곡, 다산, 아무도 없어요. 추사 김정희에 대한 전기조차 『완당평전』이전엔 없었잖아요. 차, 실학, 고증학, 경학 모든 분야의 전문가인데 전공자들이 다 부분 부분에만 관심 있을 뿐, 전기는 없어요. 다들 총체적 인물을 연구하지 않고 논문을 쓰기 위한 분석에 그칩니다. 제가 그 연구성과를 종합해서 쓴 것이 『완당평전』입니다. 어차피 추사는 서예가로 이름을 남겼기 때문에 미술사가가 전기를 쓸 수밖에 없어요. 국문학도 소설, 시, 산문 전공으로 나누는데 잘못 된 겁니다. 다산, 연암 전공 아니면 18세기 영정조 시대, 고려시대, 이렇게 시대로 나눠야죠. 국문학자, 또는 역사학자가 다산, 연암 같은 분의 정통적 전기를 써서 대중들에게 그 인간상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신경호 교수의 『김시습 평전』이 아주 좋은 전기죠.

서양미술사는 전공분야를 시대로 나누어 르네상스, 바로크 모더니즘 전공이라고 하고, 한국미술사는 조각, 회화, 도자기 등 장르로 나눠요. 그래서 서양미술사가 재미있는 거예요. 문화와 시대를 다 다루니까요. 우리는 그 시대 문화와의 접점이 없어요. 대신 서양미술사가는 ‘감정(鑑定)’을 못하고 우리 미술사가는 감정을 해요. 어쨌든 서양미술사는 재미있으면서도 폭넓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상과 인간상을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E.H.카의 첫 번째 저작도 『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이었어요. 역사학자가 웬 도스토예프스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서양에선 이런 집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어요. E.H.카의 전공이 러시아사였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를 썼죠. 임어당이 미국 갈 때도 『소동파 평전』을 쓰기 위해 그 자료만 가져갔다는 일화가 있죠.

이렇듯 인문학자가 그 시대를 이롭게 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쓰며 삶의 모델을 전해줬죠. 삶의 방식, 함부로 살면 안 되겠다는 경각심까지도 보여줍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안동편에 ‘퇴계 청문회’라고 쓴 게 있습니다. 동료들에게 물었습니다. “퇴계가 이기일원론을 주장했던지, 율곡이 이기이원론을 했던지 나에게는 그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 어린애처럼 묻는다면, 퇴계가 쎄냐 율곡이 쎄냐 대답해봐라!” 이에 안병욱 교수가 뭐라고 했냐면 “조선왕조는 주자학, 성리학으로 이데올로기의 대전환을 했다. 성리학을 알아서 성리학을 한 게 아니라, 또 그것을 주체로 한 관료 출신들이 있고, 그것이 인간의 문제를 현실에서 푸는 게 좋겠다고 해서 가져와 쓴 것뿐이다. 처음에는 실용으로 갖고 왔지만, 그 속에는 상당한 철학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15세기 사람들은 몰랐다. 성리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정몽주가 추앙 받는 이유다. 유학은 실용학문이 아니라 도학이다. 퇴계는 주자학 토플시험에서 만점실력, 율곡은 주자학 토플시험을 출제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독특한 조선성리학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기이원론, 이기일원론을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다. 왜 그걸 주장했는지 배경을 아는 게 중요하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게 전기라고 봅니다. 전기가 완성되면 자연스럽게 그러한 배경을 알 수 있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아이스쇼라면, 『한국 미술사 강의』는 쇼트, 프리스케이팅

정재승 : 조금 화제를 바꿔볼까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교수님께 준 것, 그리고 잃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유홍준 : 먼저 얻은 것은 스스로에 대한 정리입니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각처에 있는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았겠죠. 무엇보다 크게 얻은 건 미술사로 봤던 유물을 문화유산으로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폭이 굉장히 넓어진 거죠.

예를 들면, 『유홍준의 한국 미술사 강의』는 피겨스케이팅의 세계로 비유해 보면 쇼트, 프리스케이팅처럼 지정종목이에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아이스쇼죠. 내 마음대로 하는 겁니다. 5.2매로 쓰는 연재 ‘국보순례’는 갈라쇼라고 할 수 있겠죠. (일동 웃음)

사실 『한국 미술사 강의』를 먼저 쓰고 아이스쇼를 했으면 좋았을텐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먼저 나와 아이스쇼만 하는 사람처럼 보인 측면도 있어요. 학문적 아이덴티티가 없어졌달까. 그래서 답사기 6권보다 『한국 미술사 강의』를 먼저 썼습니다. 무엇보다 문화유산의 관점으로 시각을 바꾼 게 가장 크게 얻은 거죠.


정재승 : 문화유산으로의 관점이라면 현재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의 시선입니다. 그러다보면 전통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실 텐데요.
유홍준 : 그 문제에 대해 중요하게 쓰려고 합니다. 사실, 전통은 계속 이어간다는 데 특징이 있지만 또 한편에서는 계속 그 형식이 바뀐다는 것도 본질의 하나입니다. 시대에 맞게 형식을 바꿈으로서 전통의 내용이 세월 속에 보존되는 것이죠. 바뀌지 않는 전통은 인습으로 전락하여 힘을 잃고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전통의 본질을 잘 아는 사람만이 그 형식을 바꿀 수 있어요. 자신 있는 사람만이 전통을 개조합니다.

한복의 경우 여성 한복은 전통이 바뀌면서 계속 변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자 한복은 결혼식이나 교도소에서나 입어요. (일동 웃음) 문화재청장 할 때 한복협회 회장이 찾아와 “청장님이라도 한복을 입어주세요!” 해서 맞춘 적이 있어요. 그때 조건을 세웠죠. 첫째, 데님은 안 맨다, 허리띠를 해줘야 한다. 화장실에 갈 수 있게 지퍼를 해 달라. 두루마기에서 옷고름 대신 단추 달아 줘라. 그랬더니 지퍼는 못해준대서 그건 포기했죠. 아무튼 그걸 입고 국회에도 나갔어요. 생활하기 편리했다면 남자한복도 계속 입었을 거예요.

제 책에 보면 종갓집 맏며느리 간담회가 나옵니다. 그들이 제사 지내는 걸 보면 정말 위대한 작업 같잖아요. 그런데 제사 음식은 옛 것이 없어요. 그 중에서 전은 정말 안 부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여자들이 너무 고생을 하잖아요. 먹지도 않고 찌개에 부어버리는데. 그랬더니 한 종갓집 맏며느리가 “우리 집은 전 안 부쳐요. 고생한다고 못하게 해요.” 그래요. 또 다른 며느리는 “우리 집은 손자들이 좋아해서 피자로 대신 올려요”라고 해요. 이렇게 많이 바뀌었죠. 제사의 참 뜻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전통있는 당당한 종가집에선 제사 형식을 바꿀 수 있는 거에요. 우리 집도 그렇게 하자고 하면 난리가 날 껄요.

또 전통에 대해서 말하자면 서양문물이 들어올 때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장했죠. 전통적인 가치관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만 수용하자는 거였죠. 저 같은 경우 좀 달랐어요. 우리 집 지어준 승효상씨한테 “서도동기(西道東器, 서구의 문화적 문법’(西道)을 통해서 ‘동양의 문화적 산물’(東器)을 해독하는 것)로 지어달라”고 했어요. 현대적 삶을 사는데 조금의 불편함이 없도록, 그러면서 전통적인 분위기가 나면 좋겠다는 뜻이었죠.


한국미술사의 대표적 화가 여덟 명의 전기로 단순한 화가의 연대기가 아닌 그 예술적 성취를 인생 역정 속에서 살펴본 책이다


정재승 : 건축가 황두진 선생님과 인터뷰 하면서도 그런 내용이 나왔습니다.
유홍준 : 중요한 부분이에요. 제가 20년 전부터 이야기했던 건데요. 조선적인 것만 최고의 미감이라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서도동기파에요. (웃음)

정재승 : 아직도 많은 부분이 경직되어 있죠.
유홍준 : 콤플렉스 때문이에요. 자기의 문화관, 미학을 갖고 밀어붙이는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죠. 지금이야 고개를 끄덕여주죠. 20년 전에 이야기 했을 땐 모두 이상하게 봤어요.

광화문 현판, 시대정신이 들어 있는 글씨가 아니라 감동 없는 문패

정재승 : 광화문 현판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여러 논란이 있습니다.
유홍준 : 지금 있는 걸로 당분간은 갈 수밖에 없습니다. 현판을 교체하려 했을 땐, 과거 정권에 대한 부정으로 정치적 몰이를 해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 시대의 정신이 들어있는 글씨로 받아야 해요. 최고의 서예가거나 온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인품을 가진 분의 글씨거나 해야겠지요. 조순 선생님, 신영복 선생님 같은 분을 생각할 수도 있고요. 거기에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기 힘들면 퇴계, 추사, 한석봉, 정조대왕 등 선현의 글씨에서 집자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청장 시절, 여초(如初) 김응현의 글씨라면 반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수전증으로 끝내 쓰지 못하고 돌아가셨죠. 정말 안타까웠어요. 현재 광화문 현판은 감동 없는 문패일 뿐입니다. 문화유산의 가치 하나를 잃어버린거죠.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광장은 성공적으로 만들었지만, 그 앞에 섰을 때 아름다운 건물과 뜻있는 현판이 있어야 시너지가 나는데 안타깝죠. 20~30년 후엔 똑똑한 후손들이 잘 하리라 믿어요.


정재승 : 문화재청장 시절에 남대문이 불탔죠. 온 국민이 충격에 휩싸인 사건이었지만, 청장이었던 교수님께는 더욱 그랬을텐데요. 당시를 술회해 보신다면요.
유홍준 : 파리에서 전해들었는데 그 때는 연기만 난다고 했어요. 불탄 건 저녁 10시 넘어서였죠. 소방차 40~50대가 왔는데, 연기만 난다 그랬죠. 루브르 박물관 한국어 서비스 개통식 차 갔다 바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는데. 목조건축에 불이 나면, 제일 먼저 기왓장부터 부수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그 안에 있는 불씨를 잡거든요. 부수려면 문화재청의 허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문화재청에 문의를 했더니 공무원이 공무원스러운 답을 했죠. “그냥 끌 수 있으면 끄고, 못 끄겠으면 부숴라.” 그러니 소방관이 어떻게 부수겠어요.

사실, 똑같은 사건이 1년 전에 수원 서장대에서 있었어요. 그 소방관이 기민하게 기왓장 2층을 부수고 20분 만에 진화를 했는데 과잉진화라고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어려운 일이었죠. 만약 제가 있었다면 책임질 테니 부수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어느 공무원이 연기만 나고 있는데, 부수라라고 할 수 있었겠어요. 대한민국 최고의 소방시설이 와있었기 때문에 못 끄리라고 생각 못한 거죠.

지금도 언론은 남대문이 다 타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왜 전소죠? 언론에서 자극적으로 쓰는 표현일 뿐입니다. 중환자실에서 치료되면 완치될 걸 영안실에 넣은 거나 마찬가지인데요. 어쨌든 그 때문에 문화재청장을 불명예제대 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렇게 나와서 『한국 미술사 강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도 썼지요. 너무 충격적으로 나와서 바로 활동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인문학자로서 문화재청장을 한 게 외도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 역시 인문학의 실천 전문가로 간 거였죠.



* 이 기사는 정재승 교수와 유홍준 교수 대담 기사 중 전반부입니다. 전문은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송호근 교수 대담 기사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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