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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지만 내게는 진심일 거야!

노는 세계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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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 보면서 얄팍하게 노는 남녀는 잘 노는 게 아니다! 솔직히 저는 노는 사람들의 세계에 끼어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잘 노는 남자를 사랑한 여자의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솔직히 저는 노는 사람들의 세계에 끼어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잘 노는 남자를 사랑한 여자의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남자 없이 지내던, 어찌된 일인지 남자를 만날 기회조차 좀체 생기지 않던 처자들이 꿈꾸었던 건, 완벽한 조건의 샌님은 분명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검은 망토를 두른 돈 후안이 하얀 담이 눈부신 거리에 삐딱하게 서서 농도 짙은 수작을 걸어주는 상상이었겠지요. “오, 부디 떠나기 전에 이름이라도…” 하고 못내 아쉬워 붙잡으면 돈 후안은 벌써 뒤돌아선 채 이렇게 답하겠지요. “난 이름도 없는 한 남자에 불과하다오.”

그가 바람둥이의 대명사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이며 나한테만큼은 특별히 다르리라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보는 게 외롭고 어리석은 처자들의 심정이랍니다. 영국의 로렌스 알마 타데마 경(Sir Lawrence Alma-Tadema, 1836-1912)이 민트 빛이 감도는 하늘색을 테마로 그린 그림을 보세요.

로렌스 알마 타데마 경,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캔버스에 유채, 1906, 개인소장

영국 미술계에 고전주의풍이 유행했었던 시기의 그림이에요. 이 그림의 제목인 “더 이상 묻지 마세요.” 남자의 대사일까요, 여자의 것일까요? “당신을 사랑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남자가 묻고, 여자가 얼굴을 붉히며 “더 이상 묻지 말아주세요.”라고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자가 “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이토록….”하고 말을 건네자, 남자는 돈 후안처럼 “내가 누구인지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알면 다칩니다.)” 하고 대답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돈 후안이 이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멋있어 보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영원한 이름이 되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오직 순간의 환희만 있을 뿐 하나의 사랑으로 남지 않는 빈칸의 인간이 되고 싶었나 봅니다. 손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실컷 놀다 와도 연지를 묻혀오지 않는 프로정신이라고 할까요? 어쩌면 남의 심장을 뚫어놓고도 손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는 전문 킬러일 수도 있겠군요.

돈 후안을 분석해보면 소위 ‘노는 남자’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됩니다. 돈 후안은 여성유형에 따라 유혹의 방식을 달리 합니다. 아버지에게 순종적인 여성에겐 “당신 아버지가 나를 보내었소.” 라고 신임을 얻지요. 자신의 미모에 우쭐해하며 사랑을 우습게 아는 여성을 만나면 그는 자신이 불을 잉태하고 온 사람이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여인을 처참히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린답니다. “나의 가장 큰 기쁨은 한 여인을 우롱하여 명예를 빼앗고 그녀를 버리는 일이다.” 나쁜 남자, 돈 후안의 독백입니다.

이런 남자와 어떻게 대적할 수 있을까요? 박신양이 대단한 사기꾼으로 나왔었던 영화 < 범죄의 재구성 >의 마지막 명대사가 떠오르네요. “상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상대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그 두 가지만 파악하면 모든 게임은 이미 끝난 것이다.” 돈 후안이 얻고자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은요? 그는 욕망 이외에 어떤 약속도 원하지 않고, 또 그 약속이 깨어질까봐 두려워하는 일도 없습니다. 사기당한 여자의 가족이 그를 향해 “네놈은 죽어서 가혹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고 치를 떨면, 그는 코웃음을 치며, “어우, 참 오래도 두고 보시네” 하고 망토에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지지요.

돈 후안은 영원을 믿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내일도 자신을 뜨겁게 사랑해주기를 기대하는 여자들에게 그는 신의 이름을 걸고 믿지도 않는 영원을 달콤하게 약속해주어요. 신이 창조한 이브들에게 금욕대신 욕망을 일깨워준 후 냉소하는 방식으로 그는 신에게 도전합니다.

돈 후안 같은 남자는 일생에 꼭 한번은 만나게 됩니다. 저도 만났느냐고요? 더 이상 묻지 말아주세요, 손 선생님.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 시절에 돈 후안을 만났다는 건, 그의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이 아니라 일종의 통과의례였다는 거예요. 심장에 시커먼 피멍이 드는 비싼 대가를 치룬 덕분에 얻게 된 깨달음이라고 할까요. 깨달음이라는 건, 그러니까 세상의 진리에 눈을 뜬다는 건 반드시 지식 분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한 번 심하게 앓고 난 여인들은 달라진 모습으로 툭툭 털고 일어날 테지요. 그 때 짓는 여자의 미소란 아무 것도 모르던 기대만발의 풋풋한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일 거예요.

풋풋한 아름다움을 잘 그린 화가는 단연 부게로(Adolphe-William Bouguereau, 1825-1905)입니다. 「에로스를 막는 소녀」를 보세요.

윌리엄 부게로, 「에로스를 막는 소녀」, 캔버스에 유채, 1880, 160.8x114cm, 노스캐롤리나 미술관

화살로 심장을 찌르려는 에로스(큐피드)에게 ‘저리 가, 아직 심장만큼은 안 돼’ 하고 말하는 것 같군요. 에로스님, 이 순진한 소녀가 어디 당신의 화살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심장대신 그냥 예방주사를 놓듯 팔뚝만 살짝 찌르고 가세요. 열병에 대한 면역력을 좀 키우도록 놔두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부게로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대표적인 살롱 화가였지요. 「풀밭위의 점심식사」나 「올랭피아」를 그린 마네(Eduard Manet, 1832-83)가 몇 번이나 낙선했다는 그 살롱 말입니다. 요즘엔 마네가 얼마나 혁신적인지 이야기하기 위해 부게로가 소개되는 식인데요. 당시 살롱에서 알아주는 화가였던 부게로가 이 사실을 안다면 무척이나 불쾌할 겁니다. 그가 그린 맑은 피부에, 청초한 표정에, 군살 없이 매끈한 여인상들은 보고 또 봐도 역시 탐스러워요.

그런데 제가 이미 중년 여자의 눈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이런 청순함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네요. 그저 바라볼 뿐이지요.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면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차라리 당돌하고 뻔뻔하며 비계도 조금씩 군더더기처럼 붙어있는 마네 스타일의 여자가 매력 있어 보입니다. 이 여자 무언가 사연이 있겠구나 싶어 은근히 시선이 오래도록 머문다니까요. 감상자의 연령대에 따라 미술작품의 선호도가 이렇게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마네가 그린 「로라 드 발랑스」를 보세요. 그녀는 스페인 출신의 무용수에요. 오른편으로 청중석이 슬쩍 보입니다. 무대 커튼 뒤쪽에 여자가 서있는 거로군요. 그녀는 야리야리한 소녀도 아니고, 첫눈에 보기에 반할만한 대단한 미녀는 아니지요. 이 그림을 본 보들레르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로라 드 발랑스」, 캔버스에 유채, 1862, 123x92cm, 오르세 미술관

도처에서 만나는 수많은 미인 사이에서
욕망이 흔들리는 벗들이여, 이해한다.
하지만 보게나, 로라 드 발랑스에게서 반짝이는
장밋빛 검은 보석의 뜻밖의 매혹을


여기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뜻밖의 매혹”이에요. 짙고 까만 눈썹 밑으로 입을 다문 채 살짝 반기는 듯 그윽한 그녀의 미소를 보셨나요? 말하지 않으나 많은 것을 말해주는 입이지요. 사랑의 정점에도 있어봤고, 사랑의 나락에도 떨어져 봤음직한, 아파 본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모호하고 비밀스런 표정이랄까요. 마치 ‘난 바닥을 쳐 봤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그처럼 센 말이 또 어디 있던가요.

듬직하고 풍만한 육체는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자신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치마 위에는 활짝 핀 붉은 꽃들이 어지럽도록 강렬하네요. 어떤 슬픔에도 결코 꺼지지 않는 그녀의 열정을 대신 머금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여자라면 천하의 돈 후안도 주춤하며 한 걸음 물러서지 않을까요.

열정 없이 입맛만 발달하여 간보기만 하면서, 정작 자신은 행여 심장을 다칠까 두려워 얄팍하게 노는 남녀는 진짜 잘 노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겁쟁이지요. 이들의 심장은 몸매를 다듬기 위해 러닝머신에서 달릴 때에만 벌컥벌컥 뛰고, 사람 앞에서는 취침 모드로 잠잠하게 숨죽이고 있습니다. 심장 없는 좀비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얼마나 따분한가, 멈춰서는 것, 끝내는 것, 닳지 않고 녹스는 것, 사용하지 않아 빛을 내지 못하는 것은” 불현듯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92)이 쓴 글귀가 생각나네요. 한 마디로 ‘네 심장 그렇게 아껴두었다 뭐에 쓸래? 이 겁쟁이야’ 이지요.

진정한 노는 세계라면 머묾과 떠남에 있어 철학이 있을 것이고, 또 그에 따른 깨달음도 남을 겁니다. 여기서 깨달음이란 곧 허무함이 아닐까 싶은데요. 사랑이 아니면서 사랑의 환상 속에서 놀았기 때문이지요. 환상이란 언젠가는 깨어지게 되고, 그 환상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환멸(幻滅, disillusion)의 감정으로 치닫게 되어 있지요. 유희와 환멸이라는 온탕과 냉탕을 심장이 감당할 수 있어야 노는 세계에서 머물 자격이 있는 겁니다. 손 선생님은 혹시 쇠 심장이신가요? 전 심장이 약해서 노는 건 아예 꿈도 꾸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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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주은

다,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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