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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첫눈에 사로잡은 유럽 최고의 미녀

‘취향의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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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외모로 폭발적 인기를 누렸던 엘리자베스, 당시 유행처럼 번졌던 그녀의 센스있는 스타일 - 물방울이 들어있는 영롱한 눈, 오뚝 날이 선 코, 물결 같은 머리카락에, 길고 우아한 목선. 실제로 엘리자베스는 당대 유럽 최고의 미녀였답니다.

휴가 때 짐을 챙기면서 여느 때처럼 책을 한 권 쑤셔 넣었습니다. 책상에 앉아 줄을 그어가며 읽어야 하는 책이건만, 그것에 대한 서평을 쓰기로 한 날이 임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휴가에 편승시켰지요. 해변에서는 단연 만화책이 최고인데 말예요. 손 선생님은 이번 휴가 때 무슨 책을 가지고 가셨나요?

저는 만화를 좋아했어요. 특히 황미나 선생님의 팬이었지요. 고등학생 시절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엔 스무 권씩 빌려오곤 했어요. 그땐 만화방에서 보면 권당 50원, 빌리면 100원씩이었던 것 같은데요. 만화방 냉장고에서 바나나맛 우유도 잊지 않고 샀지요. 만화책과 바나나맛 우유는 환상의 콤비거든요.

만화는 칸과 칸 사이의 경계가 있어서, 영화처럼 스르르 흘러가지 않고 마치 슬라이드 필름을 찰칵찰칵 넘겨보는 것 같은 매력이 있어요. 글과 그림을 한 쌍으로 동시에 받아들이며 보는 묘미도 있답니다. 지금 이미지 한 컷씩 찾아내어 이야기를 덧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이미 만화에 심취할 때 정해진 운명인 듯해요. 헌데 손 선생님은 어느 길로 오셨기에 저와 비슷한 일을 하고 계실까요? 순정만화 속 주인공은 대부분 미모가 탁월한 비운의 여인입니다. 그런 인물이 서양의 초상화 속에 제법 많답니다. 한 예로 독일 출신의 궁정화가 빈터할터(Franz X. Winterhalter, 1805-73)가 그린 「오스트리아의 왕후, 엘리자베스」를 들 수 있지요.

프란츠 빈터할터, 「오스트리아의 왕후, 엘리자베스」,
캔버스에 유채, 1865, 빈 미술사 박물관

물방울이 들어있는 영롱한 눈, 오뚝 날이 선 코, 물결 같은 머리카락에, 길고 우아한 목선. 실제로 엘리자베스는 당대 유럽 최고의 미녀였답니다. 열여섯의 그녀를 본 순간 오스트리아의 요제프(Franz Joseph) 황제는 첫눈에 사로잡히고 말았지요.

왕가의 정략결혼이 아닌 낭만적인 결혼으로 이미 첫 등장부터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킨 그녀는 타고난 사랑스러운 성격과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인해 폭발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하네요. 황제는 그녀에게 ‘나의 천사, 씨씨(Sisi)’라는 애칭을 썼고, 국민들도 ‘아름다운 씨씨’라고 친근하게 불러주었대요.

그녀의 초상화에서 가장 눈 여겨 볼 것은 머리장식인데, 일명 ‘씨씨의 별’이라는 것이지요. 올림머리로 만드는 대신, 자신의 매력덩어리인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그대로 늘어뜨리면서도 별 모양 핀으로 고정시켜 왕가의 여인다운 화려한 기품을 살렸습니다. 씨씨가 직접 디자인한 이 별 장신구는 당시 여인네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는군요.

씨씨의 감각적이고 발랄한 취향은 어둡던 궁전의 분위기를 환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씨씨는 만화처럼 비운의 존재였나 봐요. 아들은 아버지와 정치 성향이 달라 늘 대립했고, 사랑마저 뜻대로 되지 않자 그만 충동적으로 권총 자살을 해버렸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지 못해 초라한 검은 옷만 고집하던 씨씨는 어이없게도 자객이 휘두르는 칼에 찔려 희생되고 말았지요.

분위기를 비극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제 취미에 대해 말하던 중이었지요? 계속할게요.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해보려고 기업에서 주는 이력서 양식을 받아오니, 취미를 쓰는 칸이 있더군요. ‘만화 그리기’ 라고 할까 하다가, ‘그림 그리기’ 라고 채워 넣었습니다. 어디 저만 그랬을까요. 가요 부르기를 무지 좋아하고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타기도 했던 내 친구는 ‘클래식 음악 감상’이라고 썼다더군요. 취미란 일반적으로 고상하다고 여겨지면 될 뿐 공연히 새로운 걸 알릴 필요는 없다고 믿었나 봐요. 그저 조직이 필요로 하는 무난한 인간상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쉽사리 고유의 취미를 내던져 버렸고 대신 무색, 무향, 무취의 인간형을 택했지요. 그 바람에 아무도 제가 제 2의 황미나를 꿈꾸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제가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으니까요. 그 친구도 그래요. 무대에서 불렀던 그 노래는, 자작곡의 제목 그대로 ‘한여름 밤의 꿈’으로 변하고 말았어요. 친구가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까요.

자주 즐기는 습관을 취미(hobby)라고 한다면, 취향(taste)이라는 단어에는 좀 더 나의 나다움이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 욾카데미 스타일을 대표하던 프랑스의 화가 제롬(Jean-L?n G??e, 1824?1904)의 그림을 보면서 ‘좋은 취향’이 무엇인지 생각해볼까요.

장-레옹 제롬, 「학생에게 벨베데레 토르소를 보여주는 미켈란젤로」,
캔버스에 유채,1849, 51.4x37.5cm, 디이시 미술관

르네상스의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빨간 스타킹에 빨간 후드를 뒤집어 쓴 채 그림 속에 등장하고 있어요. 그는 스승이에요. 줄무늬 옷을 입은 어린 제자 앞에서 조각에 대해, 토르소를 보여주면서 무언가 열심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부분과 부분 사이의 비율, 운동감, 질긴 근육과 부드러운 살갗을 표현할 때의 차이점 등에 대해서 말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거장이라 해도 전수해주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미술가란 자기만의 ‘좋은 취향’으로 작품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지 배울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에요. 스승은 그저 다 된 작품을 보고, ‘이건 너답지 않다’ 라든가 ‘이번엔 너만의 느낌을 찾은 것 같구나’하고 격려해줄 수 있을 뿐이지요.

음악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언젠가 하프시코드 연주자의 댁을 방문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어요. 놀랐던 것은 연주자가 대략의 악보를 보면서 아주 풍부한 연주를 해줄 때였습니다. 분명 오선 위에는 음표의 길이나 박자 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고 콩나물머리만 대충 그려져 있었는데 말이지요. “악보가 왜 이리 허술해요?” 하고 여쭈어보니, “이건 연주자의 좋은 취향(Bon Go?t)에 의존하는 곡이에요. 느낌으로 연주하라고 그렇게만 제시한 거예요”라고 대답해주시더군요.

취향에는 비교급 형용사를 붙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려 주셨지요. 저것은 이것보다 더 좋은 취향이 아니라, 둘은 각기 다른 취향일 뿐이라는군요. 미국인들의 일상을 따스한 시각으로 그렸던 노먼 록웰(Norman Rockwell, 1894-1978)의 작품, 「장난: 상점주인과 소녀」를 보세요.

노먼 록웰, 「장난: 상점주인과 소녀」, 1948, 노먼 록웰 미술관

상점 할아버지가 소녀에게 이것저것 선물을 보여주고 있는데, 소녀는 시큰둥하군요. 왜 그럴까요? 인형의 얼굴이 할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잖아요. 할아버지의 취향대로 골랐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요. 소녀와 취향이 다를 뿐이니까요.

이 그림을 보니까 영화 < 타인의 취향 >(2000)이 생각나요. 취향에 대해 말해주는 듯하지만, 취향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는 영화였어요. 잘나가는 중소기업 사장인 카스텔라는 별 취향 없이 아내에게 무조건 따라주는 전형적인 중년남자이지요. 어느 날 무심코 연극을 보다가 여배우의 목소리와 표정에 감동을 받고 눈물이 핑 돕니다. 순식간에 자신을 덮친 그 감동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 채, 그 여배우 클라라에게 서서히 빠져드는 카스텔라. 하지만 그녀는 지적 농담도 못 알아듣고 오직 속물근성만 있는 단순한 이 남자가 거북할 뿐입니다.

카스텔라는 클라라에게 잘 보일까 해서 오래도록 기르던 콧수염을 말끔히 면도해버리지요. 하지만 관심 없는 그녀는 그가 면도한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합니다. 충격을 받으면서 서서히 남자는 변해갑니다. 얼떨결에 좋아하는 그림을 사보기도 하고, 그 그림이 집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치워버린 아내에게 벌컥 화를 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취향 자체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을 누군가와 나누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었어요. 클라라는 클라라대로 변했어요. 세련되지 못한 얼간이 속물이지만, 자신의 연극에 그토록 몰입하는 이는 카스텔라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공연을 마친 그녀는 관중석 어딘가에 그가 앉아있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를 찾은 순간 기쁨을 숨길 수 없어 활짝 웃지요. 아주 환하게 말입니다.

취향이란 내가 나 자신? 남에게 드러내는 소통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요. 취향의 교감이 최고조일 때 관계의 만족도는 단연 최상이 아닐까 싶은데요. 손 선생님, 제 글쓰기 취향이 마음에 드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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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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