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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의 제대로 미안해 하기] 역사가 저지른 죄를 사죄하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

한홍구 교수 인터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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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놈 미워할 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지금 누리고 사는 자들은 그들이 잘해서 그렇게 잘 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역사가 재밌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역사학자가 꿈이었습니다. 저희 친가가 대한민국에서 역사책을 가장 많이 낸 출판사를 했습니다. 일조각이란 출판사였죠. 역사학자로 자라기에 환경이 너무 좋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역사책은 적어도 제목이라도 보고 자랐으니까요.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그 당시엔 한국 현대사 전공자가 많지 않아서 80년대 후반부터 현대사 강의를 다녔습니다. ‘현대사 연구가’ 라는 직함을 달고 다녔지요. 그런데 어디 가서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하든 첫 번째 받는 질문은 ‘김일성 진짜예요?’였습니다. 지금 북에 있는 저것은 마적이고 진짜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은 따로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었죠. 그런 식으로 일대 김일성, 이대 김일성 해서 4대 김일성까지 나왔다는 겁니다. 어쨌든 이북을 어떻게 보느냐가 당시 굉장히 큰 관심사였던 거죠. 그래서 저는 유학을 가서 김일성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논문을 썼습니다. 그 논문을 쓴 덕에 북한이 지금과 같은 가족 국가, 세습제 국가가 되어버린 단초는 알 수 있습니다. 항일 투쟁 시기의 기억이 그것을 설명하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경험을 빼놓고는 북한이란 나라의 정신사 형성을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북한은 민족을 어마어마하게 내세웁니다. 김일성은 중국 감옥에도 갇혔고 소련 감옥에도 갇혀봤습니다. 그래서 중국, 소련, 조선의 이익이 부딪혔을 때 조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굉장히 민감했습니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

김일성은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였죠. 그리고 북한에서 2대 3대 세습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이북 엘리트 형성 과정에 있습니다. 뒷날 북한의 진짜 핵심 엘리트가 된 사람들 중 상당수는 8살, 9살, 10살 애들이었을 때 부모를 잃었습니다. 그 애들을 데려다가 김일성이 팔베개를 해서 재웠습니다. 그야말로 품안에서 재웠습니다. 전투가 있어서 산으로 도망칠 땐 병아리처럼 옆구리에 하나씩 차고 뛰어다녔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가장 모범적인 인간형은 ‘어버이 수령님의 가르침 외에는 그 어떤 잡사상도 알지 못하는...’이란 구절로 시작합니다. 김일성이 전투 중에 쉴 때 나뭇가지 꺾어서 땅에다 글자를 쓰면서 이게 ‘ㄱ’ 여기다 ‘ㅣ’를 그리고 이렇게 ‘ㅁ’을 그리면 이것이 ‘김’자가 되고 이렇게 동그라미를 그리고 ‘ㅣ’를 붙이면 ‘이’자가 된다. 나는 김씨고 너는 이씨다. 네 이름은 이렇게 쓴다고 글자를 가르쳤습니다. 그때 나뭇가지 꺾어서 가르친 사람들이 후에 북의 엘리트가 되었습니다. 이것만 보면 뭉클합니다만 나중에 이 사람들이 만경대 혁명 학원 원장이 된다는 것은 참 답답한 일이죠. 북한이 근대 사회주의 공업국가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이 이야기는 옛날에 그랬었다, 정도로 그치지 못했습니다. 김일성은 그야말로 육친의 뜨거운 정을 보여준 어버이 수령으로 자리 잡는 겁니다. 한국의 민족 해방 운동 세력 중에서 교육이나 근대 문명의 혜택을 가장 적게 받은, (상당수가 김일성에게서 직접 글을 배운) 유격대원들이 나중에 이북의 국가 지도자 엘리트가 되었다는 것은 이후 이북의 정치문화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제가 그렇게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99년이 되니까 김일성은 세상을 떠났고 통일 운동은 80년대와 비교도 되지 않게 늘어났습니다. 그 무렵 한겨레 21에 ‘미안해요 베트남’이란 캠페인이 벌어졌습니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가 알려진 거죠. 제가 다섯 살 무렵 베트남전이 있었는데 저는 당시 맹호 부대, 청룡 부대란 이름을 알고 있었고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골목을 뛰어 다녔습니다. 까만 친구들을 베트콩이라 놀렸고 월남전 무용담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 내가 들었던 무용담이 민간인 학살이었을 수도 있구나! 베트남전 진실 위원회 활동을 시작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본에게 사과하라고 하고 배상하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베트남에 우리는 제대로 사과를 하고 있는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민족주의 논리대로 해도 우리가 일본에게 제대로 사과 받으려면 우리도 사과해야 하는 것이고 보편적 입장에서 봐도 내가 하는 학살이나 남이 하는 학살이나 다 같이 막아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재일 재중 재미 교포들이 전 세계에서 차별 받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사는 화교를 보면 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탄압을 받았습니다.

한홍구 교수


노근리 사건이 밝혀지고…….

베트남전 진실 위원회 하면서 저는 보편적 인권이나 평화란 것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99년 9월부터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이 벌어졌는데 9월 말에 노근리 사건이 밝혀졌습니다. 1950년 7월 26일부터 3박 4일 60여 시간 동안 자행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입니다. 7월 25일 미군이 영동의 한 마을에 들어와 후방으로 피신시켜줄 테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모이라고 했습니다. 옆 마을의 사람들과 피난민들도 모았습니다. 그렇게 모인 몇 백 명의 사람들이 남으로 행군을 하는데 아이도 있고 보리쌀도 짊어졌으니 속도가 나질 않죠. 비탈을 내려가다가 소달구지가 구르고 사람들이 넘어지면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미군은 총격을 가했습니다. 거기서 어린아이 둘을 포함해서 일곱 명이 죽었습니다. 다음날이 되자 미군은 다시 피난민들에게 남하하라고 지시했죠. 그런데 피난민들이 노근리 쌍굴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비행기 두 대가 나타나더니 20여 분간 폭탄을 투하하고 총을 쐈습니다. 거기서 100명 가까이 죽었을 것이란 증언이 있습니다. 난데없는 총격을 받자 사람들은 숲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사람들을 다시 쌍굴 다리로 밀어 넣었습니다. 사 오백 명의 사람들이 쌍굴 다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오후 3시부터 미군이 그 굴속으로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가끔 총격을 멈췄을 때 이번엔 미군이 굴 안을 살펴보며 부상자들을 치료해주기도 했단 것입니다. 그러다가 굴 밖으로 달아나는 사람은 다시 사살하고요. 굴 안의 사람들은 시체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버텼습니다. 클린턴 정부는 노근리 사건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깊은 유감만을 표현했습니다.

이걸 보니 더욱 착잡했습니다. 한 사건은 한국군이 가해자였고 한 사건은 미군이 가해자였습니다. 우리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였습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동맹군이 들어와 주둔국의 민간인을 죽인 것입니다. 죽인 자는 총을 들고 죽은 자들은 무장하지 않았습니다. 노근리 사건이 있고 이십년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베트남 중부에 수많은 노근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학살은 약 80여건입니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으로 우린 너무 많은 댓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5천명의 죽음, 일만 명의 부상, 이만 명의 고엽제 후유증 환자, 민간인 학살의 멍에. 참전 군인들은 ‘보이는 것은 모두 적이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라’라고 들었을 뿐입니다. 그 사이에 정작 참전 군인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든 상관하지 않는 자들이 계속 정권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한국 사람들에게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를 알리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가 도움을 주셨어요. 문명금 할머니는 1935년부터 십년간 일본군 성노예로 살다가 해방 후에는 중국 땅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외롭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54년의 시간이 지난 뒤 그야말로 중국 땅에서 발견되어서 한국으로 왔지요. 할머니에게 정대협(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지원금이랑 정부의 생활 지원금을 드렸더니 이 할머니가 좋은데 쓰라고 받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좋은데 어디 쓰셨으면 좋겠습니까? 했더니 기왕이면 다른 전쟁 피해자들에게 써달라고 하십니다. 그 돈이 4천3백만 원이었습니다. 문명금 할머니는 귀국하고 일 년 만에 돌아가셨지요. 또 한 김옥주 할머니도 같은 뜻으로 기부한 돈을 합했더니 7천만 원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귀한 돈을 어떻게 쓸까 궁리하다가 기념관을 짓기로 했습니다. 우리나라엔 세계에서 제일 큰 전쟁 기념관은 있지만 평화 박물관은 없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베트남전 진실 위원회 일로 베트남에 갔다가 제 인생에서 제일 황당한 미안하단 말을 들어 봤습니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관련해서 생존자들인 할머니들을 만났습니다. 베트남 할머니들이 예쁘게 단장을 하고 나와선 자꾸만 뭐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알고 봤더니 저희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겁니다. 미안해. 미안해. 네가 죽인 것도 아닌데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 그 말을 듣는데 무릎이 팍 고꾸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가해자의 나라에서 온 우리에게 피해자들이 미안하다고 하는 거죠.

평화 운동을 하다보면 참 많은 게 보입니다. 한겨레 21의 ‘미안해요 베트남!’같은 캠페인은 기?를 읽은 독자들이 먼저 반응을 보여서 시작되었습니다. 저금통 돈 꺼내 보낸 사람들이 있었고 자신의 마지막 월급을 보내온 육군병장도 있었습니다. 그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민주화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수업 시간에 6월 항쟁 때 명동 성당의 농성을 다룬 ‘6일간의 기억’이란 다큐멘터리를 학생들과 함께 보았는데 평화 박물관 활동에 참여한 사람이 대여섯이나 그 짧은 다큐멘터리 안에 보이는 것입니다. 명동 성당에 있던 사람들에게 계성 여고생들이 도시락을 걷어서 보내줬는데 그때 학생들과 함께 한 사람이랑....그 대여섯 명은 각기 따로따로 서로 모르는 채 있고 나 역시 그 다큐멘터리엔 나오지 않지만 그 시간 명동 성당 바깥 어딘가에 서 있었겠죠. 그리고 평화운동을 하다보면 참전 군인들과도 부딪힙니다. 군복을 벗었을 때는 좋은 이웃인데 군복만 입으면 사람이 좀 이상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군복의 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27만 명이 군대에 갑니다. 한 해에 27만 명이 군대에 가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 평화 박물관이 나름 평화 관련 최고의 조직인데 일 년 내내 강연하고 교육해봤자 고작 몇 백 명을 만나는 게 다인데 말이죠. 그래서 저는 병역 거부 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2004년부터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 (국가 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위통한 발전위원회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그 3년은 제 인생에서 제일 많이 싸운 시기였습니다. 국정원안에서 자료 접근권 같은 문제로 많이 싸웠습니다. 마지막 해가 되니까 마음이 굉장히 조급했습니다. 노무현 정권 임기는 끝나가고 다음번 선거는 질 거 같고 파헤쳐서 진상을 규명할 문제는 산더미 같았습니다. 제가 처음에 대한민국사 쓸 때 미운 놈 미워할 줄 알아야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아주 얌전한 말인 편입니다. 고문 조작당한 사람의 피해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문당했던 사람은 삶이 정상이 아닙니다.

한국사의 가장 큰 트라우마는 국가 폭력

회복 되지 않은 채 지금도 그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트라우마는 국가 폭력이고 그리고 이젠 자본의 폭력까지 가세했습니다. 내가 이 사회에 살면서 뭔가를 알고 있는데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진실 위원회 일 마친 다음 해 거의 알콜 중독자나 다름없이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듣는 일도 그 만큼은 안 돼도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요. 그 나쁜 짓 한 놈들을 단 한 명도 감옥에 보내지 못한다는 무력감... 매일 술 마셨죠. 미안함은 그래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갖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침묵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겐 견딜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아마 내가 역사학자로서 그래도 끝까지 간직해야 하는 것 하나가 있다면 그건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일 것입니다.

노무현 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풀어 보려고 나름대로는 열심히 노력 했습니다. 위원회 만들었을 때 월급 받은 사람이 천명이었습니다. 결코 적은 인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위원회 활동 끝날 때까지 단 한명도 처벌 받지 않았고, 단 한명도 사죄하지 않았고 단 한명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처벌도 고백도 사죄도 없는 진상 위원회 활동이었던 거죠. 우리는 누구를 처벌하려는 게 아니고 진상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라고 말하곤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속사정은 처벌할 힘이 없으니 진실 규명이 안 된 겁니다.

 

그 무렵 강풀이란 만화가가 5.18 광주민주항쟁 26년 후 그 피해자 가족이 전두환을 암살하는 내용을 다룬 『26년』이란 만화를 인터넷에 연재하기 시작했는데요. 내가 대한민국 과거사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인데도 덜덜 떨려서 끝까지 보질 못했습니다. 분명히 처벌과 보복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두환이 떵떵거리는 사회에서, 사회가 처벌하는데 실패한 사회에서 피해자의 자식들이 개인적으로 보복을 할 생각을 한번이라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대표적인 간첩 조작 사건으로 80년대 최대 간첩 사건인 송씨 일가 사건이란 게 있습니다. 북한 고위 간부인 송창섭이 여덟 번 남파해 28명의 가족? 접선해서 간첩 활동을 해왔다는 건데요. 그 사건으로 송씨 일가는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 사건을 조사하는데 자료는 넘어오지 않고 급한 마음에 피해자들을 먼저 만나기로 했습니다. 주범으로 몰린 분 연락처를 알게 되었는데요. 같이 일하는 분에게 연락되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오늘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아뿔싸 싶었지요. 그래서 상가에 갔습니다. 그 자리에 피해자 중 한명이 와 있다가 자기는 다 용서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형이 우습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문한 사람들 이름을 하나하나 대면서 이 사람은 용서했어? 이 사람은 용서했어? 이 사람은 용서했어? 하고 묻습니다. 그때마다 동생은 다 용서했어라고 다 용서했어라고 계속 대답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마디 했습니다.

“나 딱 한 놈만 용서 못하겠어.”
“누군데?”
“전두환.”
그 분이 나한테 ‘나 오늘 전두환 죽이러 갈 건데 한 교수 운전 좀 해주면 안될까? 망 좀 봐주면 안될까?’하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용서했어?”
“다 용서했어.”


이 말이 계속 생각납니다. 힘이 없어서 용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고백, 사죄, 처벌, 진상 규명 많은 말들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화해와 용서를 말하지만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하면서 느꼈습니다. 적어도 가해자 편에 선 우리가 그 말을 꺼내면 안됩니다. 용서는 우리가 입 밖에 낼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용서를 구해야지 그분들에게 용서를 하라고 하면 안됩니다. 제가 이런 사건들을 조사하면서 알게 된 것은 진짜 화해를 원하는 사람들은 당사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들은 진짜 용서하고 싶어 합니다. 삶이 진짜 힘드니까요. 그런데 와서 사과를 해야 용서를 하지요. 형식적으로라도 제발 와서 용서해달라고 하길 기다리고 기다립니다. 제 아무리 화해를 원해도 화해를 구걸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화해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야기만도 아닙니다. 피해자, 가해자, 제 3자가 있습니다. 제3자엔 구경꾼, 방관자, 몰랐던 사람들이 있겠죠. 아마 제3자의 대부분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던 사람이겠죠. 정부가 말한 것이니 옳겠지, 신문에 난 것이니 맞겠지 하고 대충 생각한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구속기간 중 가족 면회 한번 하지 못하고 1975년 4월 9일 선고 18시간 만에 간첩 혐의로 여덞 명이 사형 당한 인혁당 사건을 조사하면서 국정원 조사관이랑 대구에 간 일이 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인혁당 사건 처형 현장인 서대문 형무소를 지나갔었습니다. 당시 인혁당 사건으로 처형된 사람 중에 하재완씨란 분이 계신데 처형당할 때 하재완씨 막내아들이 네 살이었습니다. 그 때 동네형들이 네 살짜리 아이를 나무 묶어 놓고 빨갱이 새끼라고 사형시키는 놀이를 했습니다. 목에 줄을 묶어 끌고 다녔고요. 그 동네 형들이 사실 뭘 얼마나 알고 그랬겠습니까? 당시 언론은 사형당한 사람들이 끝까지 적화통일을 바랬다는 조작된 정보를 흘렸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들은 자신이 뭘 하는지 몰랐겠지요. 그 때는 몰랐다 치더라도 이제와서 사건이 조작되고 그 분들은 무죄라고 하는데 그 때 그 동네 형들과 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때 그 대구 골목 안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았을 뿐 우리는 모두 그 대구 골목에서 일어난 일의 새끼줄 한 끝을 잡고 있습니다. 당시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은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우표 딱지만한 크기라도 좋으니 기사를 실어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인혁당 피해 가족들의 기사를 실어준 신문은 없었습니다.

평화 운동을 하면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평화를 말하면서 함부로 화해를 말하지 말라!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화해와 평화를 말할 때 우리 맘엔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생각부터 의도된 무관심, 보신, 체념, 냉소, 괜히 끼어들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까지 다 들어있습니다. 평화를 말하면서 평화를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하는 이 문제 앞에서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야하는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조작 간첩 사건이 4백건입니다. 난수표도 권총도 암호문도 없는 간첩 사건이 전체 사건의 70, 80%입니다. 저는 그중 꼭 조사하고 싶은 열여섯 사건의 기록을 복사했는데 결국 우리가 건드려서 해결한건 네 건 뿐이었습니다. 그 네 건은 모두 조작 사실을 밝혔고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나머지 열 두건은 조사위 끝날 때 봉해놓고 나왔습니다. 누가 언제 다시 그 사건들을 조사할 수 있을까요? 그런 부분에 대한 미안함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처음엔 전체 사건의 절반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도 못 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든 대한민국 사회가 책임져야 할 문제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진상 규명은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뾽지 밝히는 것 뿐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대한민국이란 국가 안에서 국가와 개인이 개인과 개인이 사회와 개인이 어떻게 관계 맺고 살았는지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와 국가의 대리인들이 저지른 범죄가 공개되고 피해자들의 고통이 제대로 알려져야 우리는 타인이 겪은 고통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오히려 떵떵거리고 사는 사회에서 우리가 무슨 공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실 규명만 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 되는 것도 아닙니다. 트라우마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이 겪는 트라우마, 전쟁 트라우마, 요새 쌍용 자동차 노조원들이 겪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 이것들을 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흔히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저 사람이 전엔 좋았는데 월남 다녀와서 사람이 영 변해버려서 술주정뱅이 되었다. 그 사람은 전쟁 피해자인 것입니다. 블루 사이공이란 뮤지컬 대사에 이런 게 나옵니다. ‘그 때 김상사가 월남에서 쏜 총알은 그의 일생을 꿰뚫었다.’ 마산서 평화 운동 하는 김영만 선생님이란 분이 계신데 해병대의 전설인 짜빈동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살아난 참전 군인이었습니다. 미국과 달리 한국에는 참전군인 출신 평화운동가가 거의 없지요. 그 분이 부상입고 병원에 육 개월 입원했다가 퇴원했는데 어느 날 저녁에 엄마가 과일 깎아 주면서 그러더랍니다. “영만아, 이제 니가 너 같다.” 그전엔 눈이 번들거려서 엄마조차도 제대로 눈을 못 맞췄다는 거죠. 80년 광주 5.18후 자살자 심리 분석에 대한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앉은 자리에서 소주 여섯 일곱 병 많게는 열병씩 혼자 마십니다. 그리곤 집에 돌아가 매일 매일 애 붙잡고 술주정합니다. 애 입장에서 보면 그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게 지옥이지 지옥이 어디 딴 겁니까? 만약 여러분이 종로에서 군인이 한 여자를 마구 구타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 때리지 말라고 말렸던 사람이 몇 년 후엔 미친놈이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그렇게 미친놈으로 살아가는 것이 5.18에 참여했다 살아남은 사람이 겪는 일입니다. 우리는 바쁘게 살아오느라 한 번도 제대로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과거사 위원회 일을 하고 난 뒤에 제가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진짜 세보이더라.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이런 말을 하죠.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역사 속에서 정말 많이 봤습니다. 저는 역사학자로서 역사 속에서 개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본인이 짊어져야하는 삶의 무게를 볼 때마다 다가가서 해줄 수 있는 게 위로뿐이란 것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이제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몸이라도 던지고 싶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수백만부가 팔리면 무엇 합니까?

 

요새 우리나라에 인문학의 위기란 말을 많이 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백만 부가 팔렸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 그 책을 읽지 못했지만 아마 좋은 책이겠지요. 그렇지만 역사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사죄하지 않는 나라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수백만부가 팔리면 무엇 합니까? 군인들이 여고생 대검으로 찌르는 걸 보고 달려가 말리던 사람들이 민주정권 10년을 보낸 지금도 고통 속에 헤매고 있는 나라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백만 부가 팔리면 뭐합니까? 죽은 자들을 애도할 수도 제대로 추모할 수도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인문학이 가능합니까? 사람이 죽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에서 어떻게 인문학이 가능합니까? 그 때 그 일은 이미 다 돈으로 배상받지 않았느냐?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에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백만 부가 팔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국전도 베트남전도 광주도 이미 역사가 되었습니다. 역사에게 배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사죄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용서해 주십시오, 권할 수 있지만 사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처벌받아야 합니다.

역사에서 배우기도 하지만 또 역사를 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남에게 상처주고 잘못한 게 많을 텐데 잘 몰라서 그런 것도 있을 테고 아무도 고백하지 않으니 자기만 고백하면 바보가 될 것 같아서 말 못하기도 하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죠. 지금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가해자가 우리 팀 우리 편에 속해 있어서 말을 못하기도 하고, 내가 사과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패배감 때문에 말을 안하기도 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미안하다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노무현을 가지고 관장사를 하지 말란 말을 한 뒤였습니다. 내용 여부를 떠나서 그 때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상처받을 줄 몰랐던 것은 저의 잘못입니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미안하다고 해야 할 순간에 정당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은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기념까지 해 온 우리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양심을 찾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식들에게 올바로 살라고 말하려면 우리가 의심해보고 알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미운 놈 미워할 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지금 누리고 사는 자들은 그들이 잘해서 그렇게 잘 사는 게 아닙니다. 시스템의 수혜자들입니다. 우리 사회는 잘못된 특권을 영속화시켜왔습니다. 그러니 사죄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당화시키려하는 세력 앞에선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때 분노의 대상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건강하게 분노 에너지를 분출해야 합니다. 군대 문제만 해도 애꿎게 병역 거부자들, 여성들, 엠씨몽, 유승준에게 화를 냅니다. 반값 등록금 문제는 학생들이 분노의 대상을 잘 찾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충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공동선과 합치되는 선에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분별력과 사회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는 변화합니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7년 만에 4.19가 일어났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고은 시인은 ‘나 같은 게 다 살아서 오일장 장터에서 국밥을 먹는다’고 시에 썼습니다. 한국 전쟁에서 민간인 사망자가 100만이었습니다. 그러니 고은 시인이 그런 시를 읊었겠죠. 100만이 죽었는데도 7년이 지나자 청년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세상을 바꾸려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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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런던을 속삭여줄게』, 『고전읽기-세계가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이후 쭉 고전 읽기에 푹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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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런던을 속삭여줄게』,『고전읽기-세계가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이후 쭉 고전 읽기에 푹 빠져 있다.

오늘의 책

수많은 사랑의 사건들에 관하여

청춘이란 단어와 가장 가까운 시인 이병률의 일곱번째 시집. 이번 신작은 ‘생의 암호’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사랑에 관한 단상이다. 언어화되기 전, 시제조차 결정할 수 없는 사랑의 사건을 감각적으로 풀어냈다. 아름답고 처연한 봄, 시인의 고백에 기대어 소란한 나의 마음을 살펴보시기를.

청춘의 거울, 정영욱의 단단한 위로

70만 독자의 마음을 해석해준 에세이스트 정영욱의 신작. 관계와 자존감에 대한 불안을 짚어내며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결국 현명한 선택임을 일깨운다. 청춘앓이를 겪고 있는 모든 이에게, 결국 해내면 그만이라는 마음을 전하는 작가의 문장들을 마주해보자.

내 마음을 좀먹는 질투를 날려 버려!

어린이가 지닌 마음의 힘을 믿는 유설화 작가의 <장갑 초등학교> 시리즈 신작! 장갑 초등학교에 새로 전학 온 발가락 양말! 야구 장갑은 운동을 좋아하는 발가락 양말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호감은 곧 질투로 바뀌게 된다. 과연 야구 장갑은 질투심을 떨쳐 버리고, 발가락 양말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위기는 최고의 기회다!

『내일의 부』, 『부의 체인저』로 남다른 통찰과 새로운 투자 매뉴얼을 전한 조던 김장섭의 신간이다. 상승과 하락이 반복되며 찾아오는 위기와 기회를 중심으로 저자만의 새로운 투자 해법을 담았다.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 삼아 부의 길로 들어서는 조던식 매뉴얼을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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