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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내가 되어주겠소?” 여자의 대답은…

단 한 번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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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굽는 냄새를 사랑합니다. 전생에 이름이 베이커가 아니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요. 유학을 마치고 떠나는 분에게서 빵 만드는 기계를 얻은 적이 있는데, 별 생각 없이 받아 둔 그 기계가 행복 제조기 역할을 제대로 한 적이 있지요.

빵 굽는 냄새를 사랑합니다. 전생에 이름이 베이커가 아니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요. 유학을 마치고 떠나는 분에게서 빵 만드는 기계를 얻은 적이 있는데, 별 생각 없이 받아 둔 그 기계가 행복 제조기 역할을 제대로 한 적이 있지요. 자기 전에 빵용 밀가루와 물, 호두 등을 넣고 시간을 맞춰놓으면 아침 6시부터 집 안 가득 빵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어요. 그 냄새가 어찌나 구수하던지, 눈은 안 떠지지만 코부터 킁킁대며 잠을 깼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손 선생님의 꽃 그림에 대적할 그림으로 저는 빵 그림을 골랐습니다. 일상생활을 주로 그리던 네덜란드의 화가들 중에 욥 베르크헤이데(Job Berckheyde, 1630-93)가 「빵 굽는 사람」을 그렸어요. 남자가 힘껏 뿔 나팔을 불면서, ‘갓 구워진 빵이 나왔습니다’ 하고 시장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곧 우르르 줄을 서겠지요.

욥 베르크헤이데, 「빵 굽는 사람」, 캔버스에 유채,
1681, 63.5x55cm, 메사추세츠 우스터 미술관

소쿠리에는 아침에 먹는 동그란 빵 종류가 담겨있고, 테이블 위에는 듬직한 호밀 빵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남자의 뒤쪽으로는 반죽하는 통이 놓여있고, 화면의 오른편 구석에는 어스름하게 여분의 빵이 보이는군요. 오븐 때문에 후끈후끈 데워진 열기 속에서 여태 쉼 없이 일했는지 남자의 표정에 힘겨움이 남았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주는 선물, 프레첼(pretzel)이 고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보이네요. 프레첼의 어원은 ‘작은 보상(pretiola)’이라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여기 놓인 이 빵들은 이 남자가 거두어들인 뿌듯한 대가이겠지요.

지금이야 넉넉한 광경, 가령 추수하는 그림이나 정원에 꽃이 가득 핀 그림을 행복의 장면으로 고르지만, 어렸을 때라면 아마 이 그림을 집었을걸요. 바로 영국의 라파엘전파 화가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96)의 그림이에요.

존 에버렛 밀레이, 「예, Yes」, 캔버스에 유채, 1877,
152.4x116.8cm, 로얄 아카데미 컬렉션

“나의 아내가 되어주겠소?” 또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겠소?” 라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눈을 반짝이며 “예”하고 대답한 것 같습니다. 베르크헤이데의 그림에서 노력의 결실이 빵이라면, 밀레이의 그림에서는 사랑의 결실이 곧 결혼일 테지요. 그런데 같은 결실이어도 성격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사랑의 결실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하며 만족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해피엔드 동화에서는 결혼 이후의 남녀 각자의 삶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었어요. 특히 이 그림이 그려진 19세기처럼 직업을 가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의 여자라면 말이지요. 결혼을 통해 확실한 사랑 뿐 아니라 평생의 정체성까지도 확고해질 수 있었거든요. 결혼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결혼은 수많은 애정적 방황에 종언을 고하는 것이고, 동시에 모든 실존적 고민도 사라지게 만드는 결정적인 일대사였지요.

그림을 보니 둘 사이에 긴장된 정적이 흐릅니다.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동그랗게 치켜 뜬 여자의 눈은 참으로 많은 것을 다짐하듯 묻고 있네요. 모든 관계들의 갈등이 해소되고, 미래를 향한 막연한 불안이 소멸하는 전환점을 결혼으로 본다면, 가족의 출발은 곧 행복의 시작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를 기다려주는 가족이 있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일단은 행복하겠지요. 따스한 저녁 식탁이 함께 기다려준다면 더할 나위 없고요. 손 선생님께서 꿈도 야무지다고 놀리실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 분이 계십니다.

“행상을 다녀오는데 어느 날엔 그이가 길 어귀까지 마중을 나왔어요. 다른 남편들은 한 분도 안 나왔는데 말예요. 기분이 언짢지는 않더라고요. 집에 와 세수를 하고 방에 들어오니 내 밥을 아랫목에 파묻어 놓고 화로에는 찌개를 얹어 놓았더이다.”

수줍게 표현했지만, 행복이 듬뿍 묻어있는 이 말의 주인공은 바로 화가 박수근의 아내랍니다.
더 부러운 것은 부인 스스로 행복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에요. 찌든 가난으로 엄마 혼자 고생한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미워했던 큰 아들에게 부인은 “엄마는 부자로 살려고 결혼한 건 아니야. 행복하게 살려고 결혼했지” 하고 말했다지요. 가난과 행복은 무슨 관계인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가난한 사람들』(1846)을 읽어보면 가난한 자의 심리를 세세히 알 수 있는데요. 인생이 줄곧 가엾게 흘러왔던 젊은 여자와 오래도록 가난이 몸에 밴 중년 남자가 동병상련처럼 애틋하게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책을 읽고 문학적인 토론을 나누는가 하면 꼬질꼬질 현실적인 돈 이야기로 편지를 잔뜩 채울 때도 있지요.

어느 날엔가는 여자가 물질적인 욕심에 대해 슬쩍 떠보는데, 남자는 완강한 어조로 그것이 하찮은 것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요. 재물과 안락함이 필요했던지 여자는 어느 지주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눈물에 젖은 마지막 편지를 남자에게 남깁니다. 처음으로 남자의 글에 서툴지만 격렬한 감정이 실립니다.

“그자가 어떻게 해서 갑자기 당신에게 사랑스런 사람이 되었지요? 그가 주름 장식인가를 당신에게 사주었기 때문인가요? 도대체, 어째서요? 주름 장식이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걸레 조각이에요! 중요한 건 인간의 삶입니다. 알았어요. 나도, 월급을 타면 그 즉시 그걸 사주겠어요.”

어이없게도 여자를 단박에 물질적인 사람으로 몰아버렸군요. 남자는 여자가 자신과 함께 살 수 있으리라고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가난한 자로 타고났기에 무얼 가져본 적도 없고, 욕망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결핍 또한 없었지요. 여자에게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은 분명 행복한 사람으로 존재했고, 그 겹겹의 시간들이 그에겐 충만함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 봐요. 『가난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목적을 잃은 듯 안절부절 하는 남자의 안타까운 글로 끝을 맺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편지를 쓰겠습니다. 당신도 써주세요. 지금은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고, 전혀 모르겠고…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이 쓸 수만 있다면, 그저… 아아, 나의 사랑하는 바렌카!”

여자가 떠난다 하더라도 그는 계속해서 편지를 쓸 수는 있겠지만, 그런다한들 편지 쓰는 일이 전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이미 욕망을 품게 된 그는, 그럼으로 인해 결핍이 생긴 그는, 더 이상 자족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도 행복을 위해서 욕망을 아예 품지도 말고 철저히 가난한 사람의 자의식을 갖자고 권하지는 못 하겠어요. 좀 다른 대답이 될까 해서 선별해 본 그림은 거리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집시의 모습이에요.

조반니 볼디니, 「기타 연주자」, 캔버스에 유채, 1872,
메사추세츠 클락 미술관

인상주의자 볼디니(Giovanni Boldini, 1842-1931)가 포착한 파리 거리의 장면 중 하나지요. 이름 앞에 인상주의자라는 말을 강조하듯 붙인 이유는 그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서 단 한 번밖에 없는 순간을 잡으려 애썼던 예술가임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아름다운 집시 여인이 퉁기는 구슬픈 기타 소리에 동료로 보이는 남자는 벽에 기대어 시선을 잃은 채 고요히 몰입하고 있군요. 행복은 오직 그 순간에만 단 한 번 들을 수 있는 연주라고 정의한다면 어떨까요? 반복할 수도 없고, 분석할 필요도 없고, 미래의 약속이라든가 도덕적 가치와 어렵사리 연결시키지 않아도 되는 즉흥연주 말이지요.

 

이 그림을 고르면서 사실은 영화 <원스(Once)>(2007)를 떠올렸는데, 아마도 거리의 연주자가 나오는 설정 때문인가 봅니다. 수리공으로 일하지만 가수의 꿈을 품은 남자 그리고 가정부 일을 해야 하지만 피아노를 연주하고픈 여자, 두 사람은 거리의 연주자와 행인의 관계로 만나지요. 그리고 함께 음악을 만들면서 혼자서는 채울 수 없었던 기쁨에 젖어보게 됩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단 한번 위로가 되어준 뒤 둘은 각자의 길을 떠나지요. 키스를 하고 영원을 생각하며 결혼을 약속해야만 남녀가 행복한 하나가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필연처럼 우연히 만난 사람이라든가 그 여름 흠씬 젖어 본 석양처럼 행복도 그런 식으로 경험하는 것 아닐까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오직 순간만 있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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