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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에 취한 노인 “꽃피는 봄이 와도 청춘은 돌아오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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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한평생을 70쪽의 책으로 비유해 볼까요. 앞 40쪽은 ‘본문’이고, 뒤 30쪽은 ‘주석’이랍니다. 쇼펜하우어가 한 말입니다.

사람의 한평생을 70쪽의 책으로 비유해 볼까요. 앞 40쪽은 ‘본문’이고, 뒤 30쪽은 ‘주석’이랍니다. 쇼펜하우어가 한 말입니다. 실례지만, 이 선생은 원문을 다 쓴 지 얼마 안 됐죠? 각주를 달기 시작한 나이겠네요. 후련한가요, 섭섭한가요. 늘 유쾌한 이 선생이 속상할 까닭이 있을까요. 각주의 중요성은 학자인 이 선생이 잘 알 테고, 또 각주는 원문에 대한 풀이이지 변명이 아니니까요. 저는 어떠하냐면, 제 한 살이가 흘러간 노래만 불러대는 지점에 와있어서 그런지 이 비유가 ‘삶을 쓰는 데 40년, 삶을 추억하는 데 30년’으로 들립니다. 추억을 씹는 맛이 달지는 않아요. 다만 익숙하기에 견딘답니다.

오늘은 나이 얘기를 해보려고요. 늙음은 낡음이 아니지만 낡으면 늙습니다. 닳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고집이 세고 견문이 좁으면 낡습니다. 늙음은 나쁘지 않지요. 한낮의 해가 저물면 오히려 노을이 아름답잖아요. 노을은 뒤를 보여주는 반사경입니다. 대낮의 들뜸을 가라앉히지요. 늙은이와 달리 낡은이는 나이를 벼슬로 여깁니다. 나잇살 먹었다고 아랫사람 을러대는 꼴은 한심합니다. 이건 엇나간 노익장이죠. 분명한 것이, 먼저 나온 사람은 제 때 나온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거죠. 물러서고 비춰보는 지혜가 노년의 참된 힘입니다. 한데, 그게 여간 어려운 경지가 아닌가 봐요.

장승업, 「삼인문년」, 비단에 채색, 19세기
152x69cm, 간송미술관

오원 장승업이 그린 「삼인문년(三人問年)」은 그 잘난 나이싸움이 얼마나 해묵었는지 알려주는 그림입니다. 제목은 ‘세 사람이 나이를 묻는다’는 뜻이죠. 어느 자리에서 이 그림을 보여주며 주제가 뭐냐고 물었더니 한 분이 기막히게 답하더군요. “혹시 ‘민쯩 까봐!’ 아닌가요.”

노인 셋이 손가락질 합니다. 누가 나이 많은지 내기하는데, 가리키는 곳이 힌트입니다. 맨 아래쪽 사람이 위로 손짓 합니다. 기암괴석이 쌓여있고 파도가 넘실거리는 곳이죠. 그가 말합니다. “난 나이 잊은 지 오래돼. 어릴 적 친구만 생각나. 걔 이름이 반고였어.” 반고(盤古)가 누굽니까. 천지를 창조한 신이죠. 위에 보이는 바위와 바다가 태초에 그가 만든 세상 모습입니다.

가운데 사람이 같잖다는 표정이네요. 그는 집을 가리키며 대꾸합니다. “한참 어리구만. 나는 바다가 뽕밭이 될 때마다 나뭇가지 하나씩 방안에 두었는데, 그 가지가 열 칸 집을 채웠네.” 상전벽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죠. 작은 산가지가 빽빽이 들어찬 집이 보입니다. 허풍이 바야흐로 점입가경입니다.

마지막으로 맨 위 사람이 아이 어르듯이 말합니다. 그는 바로 옆 복사나무를 가리키네요. “나는 반도(蟠桃)를 먹고 나서 씨를 곤륜산 아래에 버렸지. 지금 그 씨가 곤륜산 높이와 같아. 자네들이야 하루살이지.” 반도는 신선이 먹는 복숭아죠. 삼천 년에 한번 꽃이 피고 삼천 년 뒤에 열매가 달립니다. 곤륜산 높이는 2천5백리라고 하네요. 참 어지간한 노인네들입니다. 한마디로 ‘철들자 철부지’ 꼴 아닙니까.

장 자크 루소가 일찌감치 말했지요. 열 살은 과자를 좇고, 스무 살은 연인을, 서른 살은 쾌락을, 마흔 살은 야망을 좇는다고요. 그럼 쉰 살은? 욕심 따라 움직인대요. 연로해도 지혜를 좇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참, 한 사람을 빠뜨렸네요. 노인네들의 입씨름을 흘려들으며 따분한 얼굴로 앉아있는 어린아이가 누굴까요. 아마 삼천갑자 동방삭일 겁니다. 오원의 그림은 중국 고사를 묘사했는데, 살아도 헛산 사람이 나이 따진다는 우의가 숨어있지요.

추억이 달다고는 안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쓴 맛이 날 때가 많죠. 추억이 쓰든 달든 늙으면 서럽기는 한가집니다. 슬픔을 이기는 지혜가 없더라고요. 노을이 아름답다 했지만, 그것은 황혼이 가깝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꽃 아래서 취해」를 보세요.

정선, 「꽃 아래서 취해」
비단에 채색, 18세기, 22.5x19.5cm, 고려대박물관

나이 탓인지 저는 이 그림의 회포가 뼛속에 스밉니다. 여러 차례 이 작품에 대해 썼지만, 노경을 떠올리면 다시 할 말이 많아져요. 낮술에 잔뜩 취해 눈이 반쯤 풀린 노인이 한손으로 겨우 몸을 가눕니다. 쓰러져 어지러운 술잔을 앞에 두고 그는 꽃을 바라보다가 또 꺾기도 한 모양입니다. 노인네 심정을 차마 그에게 묻겠습니까. 나이 든 시름을 자주 읊은 조선 중기 시인 이달의 입을 빌려볼까 합니다.

꽃 피자 병이 드니 깊이 문을 닫고
억지로 가지 꺾어 술 마시며 시를 짓네
서글퍼라, 흐르는 세월 꿈속에 지나가니
봄을 맞아도 젊은 마음은 돌이킬 수 없다네
花時入病閉門深
强折花枝對酒吟
??年夢中過
賞春無復少年心

그렇습니다, 저 노인의 휘청거리는 마음은 만화방창한 봄이 와도 청춘의 정념을 되살릴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당나라 유정지도 앞서 뇐 바 있지요.

올해 꽃이 지면 얼굴은 시드는데
다음 해 꽃이 피면 또 누가 남으리

봄 가고 꽃 지면 주름살이 깊어지는데, 그보다 안타깝기는 내년 꽃이 피더라도 살아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거죠. 그림 속 노인의 꽃가지 꺾어둔 속내가 가는 봄 잡아두려는 허망 같아서 더 가련합니다. 젊은 혈기는 꽃보다 먼저 시들어버리지요.
저 유정지의 유명한 시구가 이어집니다.

때때 해해 꽃은 같아도
해해 때때 사람은 같지 않네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이 시 제목이 우울해요. ‘흰머리를 슬퍼하는 늙은이를 대신해(代悲白頭翁)’입니다. 누구나 늙지만 아무도 늙음을 미리 슬퍼하지 않는데, 시인은 다른 이의 노후를 보며 알아차린 거죠.

참 신기합니다. 남의 늙음보다 내 늙음이 잘 안 보이는 버릇 말입니다. 애써 피하고픈 심사 때문인가요. 그런 이도 도리 없을 때가 오죠. 흰머리가 늘어나는 순간입니다. 한 손에 가시 들고 한 손에 몽둥이 들어도 지름길로 오는 게 백발이랬어요.

재미난 얘기가 있습니다. 선조 대에 예조판서를 지낸 이호민은 흰머리가 나는 족족 뽑았다고 해요. 이를 본 한음 이덕형이 혀를 끌끌 차며 퉁을 줍니다. “벼슬이 그만큼 높으면 됐지 뭘 더 바라겠다고 센 머리를 뽑습니까.” 이호민이 정색하며 대답합니다. “사람을 죽인 놈은 반드시 죽이는 것이 국법입니다. 백발은 그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여 온 놈입니다. 저는 법에 따라 처단하는 것입니다.”

따져 보면, 백발이 죄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백발은 법에 가깝습니다. 될 일이 된 결과이니까요. 흰머리는 생애를 응축한 색입니다. 당나라의 서예가 설직이 읊은 시 중에 ‘가을 아침에 거울을 보다(秋朝覽鏡)’를 제가 자주 음송하는데요, 하도 처연해서 가슴이 저릿할 정돕니다.

나그네 마음은 낙엽에도 놀라는데
밤새 앉아 갈바람 소리를 들었지
아침이 되어 얼굴 수염을 봤더니
한 생애가 거울 속에 있었네
客心驚落木
夜坐聽秋風
朝日看容?
生涯在鏡中

자신의 생애가 얼굴에 있고 거울에 생애가 비치는데, 백발만 어디로 보내란 말입니까. 흰 머리와 함께 우리는 늙어갑니다. 마침내 체념이 오고, 달관이 따릅니다. ‘체념(諦念)’이 묘한 말입니다. ‘단념’과 ‘득도’의 뜻을 아우릅니다. 버려서 깨닫는 이치가 노경에야 비로소 찾아오는데, 젊어서 얻지 못할 이 각성이 늙은이의 마지막 특전입니다.
그래서 송순의 시조가락도 저는 하나 버려 하나 얻는 체념으로 읽습니다.

늙었다 물러가자 마음과 의논하니
이 임 바리고 어드러로 가잔 말고
마음아 너란 있거라 몸만 먼저 가리라

저의 사설이 주석 달기에 막 들어간 이 선생에게 좀 억색한 느낌인가요. 이제 차분한 그림 한 장 감상하면서 아퀴를 지어볼게요. 공재 윤두서가 그린 「바위에 기대 달을 보다」입니다.

윤두서, 「바위에 기대 달을 보다」
비단에 수묵, 17세기, 24.x21.5cm, 간송미술관

여백이 만들어낸 공간감이 퍽 서정적이죠. 희미하지만 오른쪽 위에 보름달이 떠있습니다. 이런 그림을 ‘완월도(玩月圖)’라 하지요. 조선 그림에서 달을 즐기는 소재는 그저 헤식은 달맞이와 다릅니다.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선적(禪的)인 깨달음을 상징하고, 깊은 산중에서 달을 바라보는 모습은 은일사상을 대변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하지요.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고 백남준이 말했듯이 달구경은 지금껏 뿌리 깊은 관습입니다. 노인은 옆얼굴만 보입니다. 구도가 유별나서 참신합니다. 뒷머리를 댕기로 묶었는데 백발이 틀림없겠지요. 보름달이 좋기는 하지만 늘 볼 수가 없어요. 그림의 메시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의 송익필이 맞춤한 시를 지었죠.

둥글지 않을 때는 늦게 둥글다고 탓했는데
둥글고 난 뒤는 어찌해 쉬 이지러지는가
삼십 일 중 둥근 밤은 딱 하루뿐이니
우리네 평생의 심사가 모두 이와 같구나
未圓常恨就圓遲
圓後如何易就虧
三十夜中圓一夜
百年心思總如斯


잎이 푸르러도 봄날은 가고 갈 길이 먼데 청춘은 저뭅니다. 나이 들고 늙어가는 일은 그래서 돌연사(事)가 아니라 자연사입니다. 이뤄질 일이 마침내 이뤄진 거지요. 달을 보는 저 노인은 압니다. 이젯 사람은 옛 달을 못 봤지만, 옛 사람은 이젯 달을 봤지요. 꽃이 활짝 필 땐 보름달이 뜨지 않고 보름달이 뜰 땐 꽃이 지고 말아, 꽃이 좋을 때 보름달 함께 보기는 어려운 거라고, 달을 보며 노인은 터득합니다. 초승달, 보름달, 그믐달이 모두 달입니다.

인생을 토막 내서 젊음과 늙음으로 나눌 수 없고, 본문과 주석이 이어지는 70쪽 책을 분권(分卷)하지도 못합니다. 삶에 무슨 꿰맞춘 박음질이 있겠습니까. 젊거나 늙거나 한 몸의 일이라 오늘의 제 나이가 떳떳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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