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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지목한 범인, 사실은 따로 있다? - 『햄릿을 수사한다』 피에르 바야르 교수와의 대담

"적극적인 독서는 그 자체로 창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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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작가도 사실 범인이 누군지 모른다? 햄릿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은 숙부 클로어디스가 아니다?

작가도 자기 소설 속 범인을 모른다?

추리소설 작가도 사실 범인이 누군지 모른다? 햄릿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은 숙부 클로어디스가 아니다? 프랑스 파리 8대학 프랑스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 피에르 바야르의 거침없는 주장은 기존의 문학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의 책 제목만 봐도 그러하다.

새로운 독서법을 제시하는 2007년 작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것은 반어법이 아니다!), 앞 세대의 작가가 아직 써지지 않은 다음 세대의 작품을 미리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예상표절』 등의 저작은 프랑스 문학계에도 뜨거운 반응을 이끌었고, 도발적인 만큼 열광적인 반응과 더불어 비판을 받기도 했다.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셜록 홈즈가 틀렸다』는 정신분석학을 문학 비평에 적용해, 그는 작가도 사실 추리소설 속 범인을 모른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한다. 작가들은 때때로, 인물들이 어느 순간 자신의 손을 떠나 움직인다고 고백한다. 이를 통해, 작가가 주인공의 일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으므로, 소설 속 상황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추리비평’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이러한 독서 법은, 추리 소설 속에 작가가 제시해주지 않는 부분까지 독자가 추리해 내고자 한다. 근작 『햄릿을 수사한다』는 그러한 추리비평을 통해, 고전 『햄릿』을 창조적인 시각으로 파헤쳐내고자 한다.

아버지 유령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클로어디스가 햄릿이 가장한 연극을 보고 자리를 피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클로어디스가 햄릿의 아버지를 죽인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피에르 바야르의 질문은 이제까지 당연하게 읽어 내려가던 『햄릿』의 대사 곳곳을 의심스럽게 보도록 만든다. 이러한 식으로 다양하게 완성되는 (각기 다른) ‘햄릿 텍스트’가 독서를 통한 새로운 창작이라고 그는 말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어느 순간 작가의 통제를 벗어난다

왼쪽부터 번역가 백선희 씨, 문학비평가 방민호 교수, 피에르 바야르 교수,

김연수 소설가, 영화비평가 박유희 교수


지난 4월 27일 서울 중구 프랑스문화원에 피에르 바야르 문학교수와의 특별한 대담이 마련되었다. 주제는 “독서는 창작인가?” 대담 역시 도발적인 이야기가 가득했다. 이 자리에는 피에르 바야르 교수의 책의 번역가 백선희 씨, 문학비평가 방민호 서울대 교수, 소설가 김연수 씨, 영화비평가 박유희 고려대 연구교수가 참여했다.

“동시대 와 결별하고 미래 독자를 상상하며 글 쓰는 작가들은, 미래에 대해 확실하지 않지만 어떤 그림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미래에 내 책을 읽을 독자들을 막연하게 느낄 수 있다는 거다. 프랑스에서는 정말 격리된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 오면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독자가 있겠다는 막연한 예감을 받았다.(웃음)”

김연수 작가의 참석은 이날의 대담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는데, 김연수 작가의 글쓰기가 피에르 바야르가 종종 언급하는 이야기와 맥락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인물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피에르 바야르의 이야기는 한편 김연수 작가의 고백이기도 하고, 그의 작품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떠올리게 한다. 또 『굿빠이 이상』을 쓰고 ‘작가의 말’에서 그는 ‘꿈에서 앞으로 써야 할 소설을 미리 봤다’는 고백을 적어두기도 했다.

“유령 역시 내가 관심 있어하는 테마다. 문학비평에서의 SF의 역할에 대해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는데, 특히 『예상표절』 은 어떻게 우리가 아직 탄생하지 않은 작가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얘기하고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나도 김연수 작가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추리 비평을 쓸 때마다, 인물이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작가가 추리소설 속 범인을 잘못 지목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물들의 어떤 행위를 작가도 모를 수 있다. 그때부터 인물들은 자율성을 갖게 된다. 이때 작가가 알지 못하는 유령의 존재가 함께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작가뿐 아니라 미래의 작가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피에르 바야르의 창조적 독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기존의 작품을 다른 작가가 썼다고 가정해본다. 그럴 때 독자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 『햄릿』을 제임스 조이스가 썼다고 생각해보자. 톨스토이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썼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에 이 작품들은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읽히게 된다.

아마 톨스토이는 스칼렛 오하라가 슬라브 민족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을 히치콕이 찍었다면? 훨씬 서스펜스적인 기운이 느껴질 것이다. 이렇게 작가가 바뀌면 독자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해석하게 된다. 작가와 작품 사이의 관계가 부서진다는 것이다.”


‘귀머거리들의 대화’에 소통의 핵심이 있다


사회자를 맡은 번역가 백선희 씨는 “바야르 선생의 책을 읽고 난 이후에는 『셜록 홈즈』『햄릿』을 예전처럼 읽을 수 없게 된다. 『셜록 홈즈』는 너무나 엉성한 형사가 됐고, 『햄릿』은 살인자 이미지가 너무 강해졌다.”며 웃었다. “우리가 독서를 통해서 각자 자기만의 텍스트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했고, 그때는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한다고 해도 결코 같은 책을 이야기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귀머거리들의 대화’에 소통의 핵심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그런가?”

바야르 교수는 위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귀머거리들의 대화는 비관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한편 풍요로운 이야기다. 이는 다의성, 다양한 상징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수백개의 독서를 창조하는 행위다. 나는 독서가 좀더 도전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방민호 교수는 폴 드만의 독서 이론과 바야르 교수의 독서 이론을 비교하며 설명했다. “마치 바야르 교수의 이론은, 작가의 노예였던 독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허하겠다는 선포처럼 들린다.(웃음) 20여 년 전쯤 폴 드만의 독서이론이 소개된 적 있다. 당시에는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는데 최근에 들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그의 이론은 ‘모든 독서는 결국 오독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방법으로 어떤 작품을 읽는 과정은 결국 한계를 드러내는 과정이고, 또 다른 독서방법을 필요로 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독서는 끝없는 행위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이론이었다. 폴 드만은 우리의 독서 행위를 ‘오독’(miss reading)이라고 말해, 마치 우리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바야르 교수는 ‘오류라는 게 어디 있나. 전부 독자가 하는 일이고, 독자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거다. 맞고 틀린 게 없다.’고 충격적으로 선언한다.(웃음)”


이어 백선희 씨는 “우리 역시 『햄릿을 수사한다』라는 책을 두고 아무리 토론을 해도 결국 귀머거리들의 대화일 수 밖에 없다. 오늘도 우리는 귀머거리들의 대화를 한 거다.”라며 웃었다. 독자들은 이날의 대담을 듣고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좋은 책은 이해되지 않는 텍스트가 아닐까?


독자: 자유롭게 독서를 해도 좋다는 말에 자신감을 얻었다. 바야르 교수님의 창조적 독서와 ‘작품은 독자에게서 완성된다’고 주장하는 수용미학이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바야르: “내 이론과 수용미학은 ‘보완성’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문학작품이 그대로 완전하지 않다는 견해다. 아무리 묘사를 잘하고, 많은 정보를 준다고 해도 독자에게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부족한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을 독자가 보충한다는 얘기다. 수용미학과 차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 대목에서 SF가 개입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완전히 전복시켜 생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작가가 미래의 작가의 작품을 예상표절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독자: 김연수 작가는 본인이 생각하는 것을 전력 추구해 집중적으로 쓰기 때문에, 자신의 소설 세계를 꽉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에는 본질적으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지 않나.

김연수: “아이러니 한 일인데, 예전에 소설을 쓸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쓴 소설을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내가 쓰면 무슨 말인지 모르나 보다. 그때부터는 이해시키는 걸 포기하고 내 마음대로 쓰기 시작했다. 내 소설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쓰니까, 그때부터 내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웃음) 독자들이 내 소설을 완전히 이해하고 좋아하는지 물어볼 수는 없지만, 내 생각엔 아닐 것 같다는 마음이 크다.

사실 나 역시 내 소설 속 인물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처지에서 쓸 때가 있다는 거다. 심지어 내가 죽여놓고도, 혹시 살아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꼭 작품을 다 이해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우리는 아버지의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잖나. 처음 본 사람이 쓴 작품을 이해하는 게 가능한 것인가? 글 쓰는 제 입장에서는 그게 너무 과도한 요구가 아닌가 싶다. 수용 미학적으로 책을 읽을 수 밖에 없는 게 독자의 처지라고 생각한다.”


독자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피에르 바야르 교수

마지막으로 패널들이 오늘 대담한 소감을 나누며 자리를 마무리했다.

방민호: “바야르 교수의 책에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는 아이디어의 소유주가 아니라 세입자다” 아이디어는 텍스트화 되어 굳어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거다. 그것은 누군가 가질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이 취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김연수: “결론적으로 드는 생각은, 결국 내가 스스로 매혹되었던 작품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던 작품들이었다. 매혹된 뒤에도 텍스트를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반복적으로 읽는 텍스트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텍스트다. 이해가 된다면 다시 읽지 않을 것이다. 독자에게 좋은 책은 이해되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바야르 선생님이 기상천외한 말씀을 많이 해줘서 어릴 때 독서 경험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 (웃음) 바야르 선생님이 분명 틀린 부분이 있을 것이다 생각하고 섬세하게 읽었는데 아직 발견 못했다. 발견하게 되면 내가 연락하겠다.(웃음)”

박유희: “요즘 우리가 대중비평시대라고 말하는데 한국 문학비평 내에서 실천이나 이론적 기반이 취약한 면이 많지 않았나 싶다. 우리나라는 특히 인터넷이 발달되어 독자가 참여할 길이 많다. 바야르 식의 예상표절, 상호 텍스트적 관계 등의 이야기가 특히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우리에게 적절한 시기에 도착한 유용한 이론이자 교과서, 비평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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