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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너는 어디에 있었니?

일본에서 직접 경험한 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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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가 크게 흔들렸던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오후 2시 46분, 도쿄만의 인공섬 오다이바에서 시내로 향하는 모노레일 유리카모메에 타고 있었다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일본인들은 때때로 서로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 분명하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너는 어디에 있었니?”

일본 열도가 크게 흔들렸던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오후 2시 46분, 도쿄만의 인공섬 오다이바에서 시내로 향하는 모노레일 유리카모메에 타고 있었다. 열차는 레인보우브리지를 건너와 유람선 선착장이 있는 히노데(日の出)역으로 막 들어선 참이었다. 삐삐삐삐~하는 비상벨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긴급 정지버튼이 작동됐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더니 열차가 바이킹처럼 좌우로 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현재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승객여러분은 침착하게 차 안에 머물러 주십시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방송멘트. 이러다 열차가 수 미터 아래 아스팔트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가 리얼하게 몰려왔다. 승객들은 바닥에 주저앉거나 엎드려 비명을 질러댔다.

유리카모메는 무인시스템으로 운행하는 탓에, 강한 흔들림이 끝난 후에도 승무원이 문을 열기 위해 도착할 때까지 20여 분간 차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워낙 충격이 컸던 탓인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라며 짜증 내는 사람 하나 없었다. 힘들게 열차에서 탈출해 거리로 나오니 고층빌딩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이 흰색 안전모를 쓰고 열을 맞춰 빌딩 앞에 모여 있었다. 작은 여진이 계속됐지만 크게 혼란스러운 기색은 없었다. 이날 지진이 인류 역사상에 오래 남을만한 어마어마한 재해였다는 건, 얼마 후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해보고서야 알았다.

도쿄 전역의 지하철 운행이 중단된 탓에 하룻밤을 학교 대피소에서 보냈다. 여진과 함께 하는 긴 밤, 다이어리를 펼치니 다음날인 3월 12일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영화 <SP-혁명편> 개봉일. 그랬다. 지진이 아니었다면 토요일에는 영화 <SP-혁명편>을 보러 갈 계획이었다. 11일 아침방송에 홍보를 위해 출연한 이 영화의 주인공 오카다 준이치를 보면서 영화제목을 다이어리에 적어 넣던 일이, 마치 오래전 추억처럼 아득한 느낌이었다.


#올봄 일본영화계의 가장 큰 기대작이었던 영화 <SP-혁명편>은 아마도 이번 지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문화상품으로 기록될 것 같다. 2007년 방영된 드라마 시리즈부터 팬이었고, 지난해 말 개봉한 영화 전편 ‘SP-야망편’을 열광하며 본 후, 최종회인 ‘SP-혁명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참이라 안타까움은 더 크다. 한국의 일드팬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던 드라마 <SP>는 후지TV에서 2007년 말부터 2008년 초까지 방영돼 동시즌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국내외 요인들의 방패로 활약하는 경호요원, SP(security police)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어린 시절 테러로 부모님을 잃은 경험으로 인해 특수한 위험 예지력을 갖게 된 SP 요원 이노우에 카오루(오카다 준이치)가 주인공이다. 그가 속해 있는 경호 4계의 경호원들이 위험과 맞서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다.

경호원이라는 특수한 직업의 세계, 그리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의 존재 등 이 드라마는 형사물, 수사물의 기본적인 요소를 잘 갖추고 있는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코믹한 조연들의 활약도 볼 만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주인공의 영웅담에 집중한 다른 형사물, 수사물과는 또 다른 느낌을 풍기는데, 바로 작품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다소 허무하면서 냉소적인 정서다. 이 같은 독특한 느낌이 어디서 온 것일까 하는 의문은, 드라마가 거의 끝나갈 무렵 자막을 유심히 보다 풀렸다. 각본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소설가 가네시로 가즈키였던 것이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작품은 『GO』를 비롯해 『플라이, 대디, 플라이』등 여러 편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만큼 극적인 요소가 강하다. 하지만 이들 작품과 비교했을 때도 <SP>는 작가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스릴 있다. 이와 동시에 이 드라마는 단순히 VIP 요인들을 지키는 SP의 영웅담을 그리거나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찬양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때로는 옭아매는 거대한 구조에 주목한다. 작품 속의 SP들은 단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우직한 경찰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이런 계획은 드라마 마지막에 등장한 이노우에의 상관 오가타(츠츠미 신이치)의 대사 “대의를 위해서인걸”에서 살짝 드러난 후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일본이라는 국가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혁명’을 꿈꾸는 오가타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노우에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하지만 이노우에는 ‘대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권력 다툼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할수록 이것이 기존의 타락한 시스템과 거대한 부패 권력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사실에 갈등하게 된다. 드라마의 마지막 회, 자신을 살인자로 만든 정치인을 죽이기 위해 총을 든 범인 야마니시의 대사는, SP 이노우에가 겪는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내 한 수 가르쳐주지. 나는 20년 가까이 높은 울타리 너머에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이쪽 세상으로 나왔지. 그런데 정말 놀랍더군. 20년 전과 전혀 변한 게 없는 거야. 아니, 옛날보다 더 한심해졌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나? 20년 동안, 꼭대기에 앉은 놈이 몇 번이나 바뀌었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더라고.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머리통만 바뀔 뿐, 다른 것은 전혀 변하지 않을 거야. 너희는 언제든 바꿔치기가 가능한 놈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겠다는 건가? 목숨까지 버리면서 그런 놈들을 지키겠느냐 말이다. 그런 일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SP> 중에서)

#이 같은 권력에 대한 냉소, 혹은 무정부주의적 경향은 작가의 다른 작품에도 종종 드러난다. 영화로도 히트한 가네시로 가즈키의 대표작 『GO』는 일본인 여학생과 사귀는 재일 한국인 남학생이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 여자 친구와 일본 사회에 분노하지만, 힘을 길러 자신을 억압하는 구조를 바꾸겠다는 야망을 품지 않는다. 그보다, 거대 시스템의 한계를 넘어선 더 큰 자유를 꿈꾼다.

“상관없어, 너희가 나를 재일이라고 부르든 말든, 부르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불러, 너희, 내가 무섭지? 어떻게든 분류를 하고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지? 하지만 나는 인정 못 해. 나는 말이지. 사자하고 비슷해. 사자는 자기를 사자라고 생각하지 않지. 너희가 멋대로 이름을 붙여놓고 사자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다고 흥에 겨워서 이름 불러가며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봐. 너희의 경동맥에 달겨들어 콱 깨물어 죽여 버릴 테니까. 너희가 우리를 재일이라고 부르는 한, 언제든 물려 죽어야 하는 쪽이라고. 내 말해두는데 나는 재일도 한국인도 몽골로이드도 아냐.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좁은 곳에다 처박지 마. 나는 나야. 아니, 난 내가 나라는 것이 싫어. 나는 내가 나라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나는 내가 나라는 것을 잊게 해 주는 것을 찾아서 어디든 갈 거야.” (『GO』 중에서)

어쩌면 이 같은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은 『레벌루션 넘버3』다. 개인적으로 가네시로 가즈키의 작품 중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회의 주변부를 서성이면서도 파괴적 분노보다는 자신들만의 유쾌한 생존법으로 저항하는 ‘더 좀비스’ 들의 이야기.

헤헤헤 알만하군, 순신은, 늘 다수 측이 이기게 돼 있어, 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아까 우리에게 굴복한 놈들은 머지않아 사회의 한가운데서 다른 형태로 우리를 굴복시키고 승리를 거머쥐려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몇 번이나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되리라. 하지만 그게 싫으면 이렇게 계속 달리면 된다. 간단하다. 놈들의 시스템에서 빠져나오면 된다. 초등학교 1학년생들의 달리기 시합처럼 계속 달리면 된다. (『레벌루션 넘버3』 중에서)

#이번 대지진은 일본이라는 나라, 일본이라는 사회가 가진 희망과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지진 초기에는 모두 혼란 속에서도 침착함과 배려를 잃지 않는 일본인들에게 감탄, 또 감탄했다. 하지만 위기가 계속되면서 책임회피에 급급한 허약한 리더십, 적극적 문제 제기를 꺼리는 집단적 패배주의, 원활한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매뉴얼 사회의 허구성 등 일본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문제들이 더 크게 보이기 시작한다.

일본이라는 거대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고, ‘일본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가네시로 가즈키의 <SP-혁명편>은 지금 이 상황에 꽤 어울리는 작품인 듯도 하다. 지난 3월 26일, 대지진 때문에 2주 늦게 열리게 된 개봉기념 무대 인사에서 주연배우 츠츠미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이번 재해로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느낌이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의 ‘혁명’을 위해서, 지금의 이 감각을 잊지 말고 유지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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