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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와 박중훈의 엄청나게 큰 얼굴 발견!

아날로그 감성을 간직한 영월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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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스타>를 추억하다 - 읍내에서 영월초등학교를 찾는 일은 쉬웠다. 쬐고만 녀석들이 쉴 새 없이 재잘대며 쟁글쟁글 웃는 모습이 귀여워 잠깐 바라보다 요리 골목을 찾기 위해 뒤로 돌아선 순간,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소도시 여행의 로망
고선영 글/김형호 사진 | 시공사
이 책은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 시간을 내어 자신을 다독이고 위안하는 여행을 떠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잘 꾸며진 관광지가 아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소박하고 정겨운 우리의 ‘소도시’들이다. 그곳에서 푸근한 동네 사람들의 노변정담에 끼어 보고, 맛나는 지역 음식도 맛보고, 역사를 품고 있는 오래된 건축물도 둘러보면서 여행자는 일상에서부터 가져온 묵직한 스트레스를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놓아 버린다. 녹록지 않은 일상에 갑자기 찾아온 휴식같은 시간. 여행자는 길 위에서 새삼 인생의 ‘소소한 행복’을 깨닫는다.

라디오 스타를 추억하다


읍내에서 영월초등학교를 찾는 일은 쉬웠다. 계집아이의 낭창한 웃음소리와 와르르 쏟아지는 머스마들의 공차는 소리를 쫓으면 됐는데, 어찌나 시끌시끌한지 읍내가 떠나갈 지경이었다. 그 때가 점심시간이었는지 어쨌는지, 여하튼 읍내 학교는 마치 수백 개의 놋그릇이 동시에 타드랑대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쬐고만 녀석들이 쉴 새 없이 재잘대며 쟁글쟁글 웃는 모습이 귀여워 잠깐 바라보다 요리 골목을 찾기 위해 뒤로 돌아선 순간, 풋, 하고 웃고 말았다. 그곳에서 안성기와 박중훈의 엄청나게 큰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요리 골목은 영월읍 중앙로에 놓인 길이 200m 남짓의 짧은 길 이름이다. 영월초등학교 정문과 골목 시작 지점이 맞닿아 있다. 1960, 70년대 영월 맛집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먹자거리를 형성하더니 점점 유명해져 요리 골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1990년대 석탄 산업의 침체와 함께 읍내가 쇠락하며 이제는 음식점들이 몇 집 남지 않았지만, 이 골목이 다시 유명해진 것은 얼마 전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는 콘셉트로 변신을 꾀했기 때문이다.

단층짜리 가겟집과 살림집이 뒤섞여 있는 이 길은 다른 벽화 마을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듯 보인다. 일단 재치 만점의 상점 간판이 눈에 띈다. ‘하얀집’이라는 이름의, 염소탕?보신탕 전문점 간판에는 낄낄 웃고 있는 흑염소 한 마리와 개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얼씨구, 흑염소는 한 손에(아니, 정확히는 앞발이다.) 녹색 소주병도 들었다.

한우 전문점 간판에는 누런 황소 한 마리가 떡 하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한식집 강신회관 앞에는 멋들어진 청동 조각상이 놓여 있는데, 설명 문구를 들여다보니 식당 주인아주머니를 모델로 했다고 쓰여 있다. 위대한 인물의 전유물이던 동상에 일상적이고 소소한 동네 사람들 모습을 담았단다.

공부방 간판 위에는 아이들이 뛰어 놀고, 속셈학원 간판 위에는 지우개 달린 연필이 매달렸다. 문방구점에는 클립이, 미장원 간판에는 가위가, 야식집 앞에는 장기판 모양의 의자가 놓였으며, 어느 건물 벽에는 마을 사람들이 손으로 글씨를 써 넣은 접시 수십 개가 걸렸다. 정원 없는 집들에 공동 정원을 마련한다는 마음으로, 화단을 조성하고 접시 그림을 매단 것이다.


‘똘똘이 자원’은 고물상인 듯싶다. 상점 앞에는 온갖 고철로 만든 사람만 한 크기의 로봇이 서 있다. 녹슨 화로를 엎어 모자를 씌웠고, 양은 재떨이 두 개가 눈이 됐으며 숟가락으로는 코를 만들었다. 말똥말똥한 눈과 얼굴 표정이 재미나다.

골목이 시작되는 지점에는 전시된 작품들에 관한 설명과 지도가 자세히 나와 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로 시작하는 안도현 시인의 시 「너에게 묻는다」의 조형물도 있다. 시인의 자필로 쓴 시를 철판에 옮겨 만들었는데, 깜찍하게도 시는 누군가네 집 담벼락에 올라붙었다. 소설가 이태준 선생의 단편소설 「영월영감」의 전문도 맞은편 담에서 읽을 수 있다. 담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는데, 제목이 ‘소설의 벽’이다. 여름날 오후의 나른함 속에서 읽는 선생의 글은 참으로 맛깔스럽다.

다시 골목 입구에 서서 아까 봤던 안성기와 박중훈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들의 얼굴은 영화 ‘라디오 스타’ 속 한물간 록가수 최곤(박중훈)과, 무능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최곤의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의 얼굴로 오버랩 된다.

두 동짜리 상가 아파트인 영월맨션 각 동에 하나씩 둘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영월에서 여전히 그들은 ‘라디오 스타’로서 건재했고, 2006년 영화에 담겼던 영월은 그 때 그 모습 그대로다. 곰세탁소, 사팔철물점, 청록다방, 영빈관, 청룡모텔, 나하나 미용실, 별마로 천문대, 옛 KBS 방송국 등 영화는 부러 뭔가를 만들지 않고 그 때 그곳의 도시를, 그곳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요리 골목 앞쪽 길인 하송안길을 따라가면 그들이 남겨 놓은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은 ‘곰세탁소’와 맞은편 ‘사팔철물점’이다.

영화 속에서 두 가게 주인은 매일 아옹다옹 다투며 청록다방 ‘김 양’에게 외상을 졌었다. 엄기중 할아버지가 곰세탁소의 진짜 주인이다. 영월에서 세탁소를 한 지 50년이 다 됐단다. 제법 규모가 큰 세탁소 천장에는 옷들이 빼곡히 걸려 있다. 웬만한 어른은 허리를 살짝 굽혀야 가게 안을 돌아다닐 수 있지만 엄 할아버지는 원체 체구가 작으셔서 몸을 접을 필요가 없다.

“어휴, 사람들이 찾아와서 영화에 출연해 달라고 하더라고. 못 한다고 손사래를 쳤지. 구경만 했는데도 참 재미있었어. 저~기 ‘영화 촬영 장소’라는 간판도 걸어 주더라고.”

35년 전 서울 중부시장에서 구입했다는 재봉틀이 그의 손 밑에서 씽씽 돌아간다.

“영월은 원래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곳이여. 함백 광산이 문 닫기 전에는, 비둘기호를 타고 영월역에 내려 장보러 오는 광산촌 사람들로 읍내가 바글바글했지. 60, 70년대에는 영월 인구가 10만 명도 넘었을걸?”

1990년대 들어 영월 인근 광산이 문을 닫은 후부터는 저녁 9시만 되면 읍내 거리가 한산해졌다고 한다. 그래도 영화가 잘 되고, 덕분에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세탁소 장사까지 잘 돼 참 고맙다고 하신다.

세탁소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 내려가면 ‘청록다방’이 등장한다. 오후 세 시 무렵, 다방 안에는 계란 띄운 쌍화차를 앞에 둔 아저씨 둘과 다른 테이블에는 계모임을 하는지 동네 아줌마 몇이 앉아 있었다. 반가운 얼굴도 보인다.

- 본문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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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시 여행의 로망

<고선영> 글/<김형호> 사진10,8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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